이번달 뉴스레터 '독서인'의 '독서카페'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 2014)를 거리로 삼아 쓴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전에 겨우 써보낸 원고다.


독서인(14년 7월) 지그문트 바우만에게서 배우는 희망
현재 영국 리즈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리즈의 현인’이다. 결코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내에 소개된 책만도 20여 권에 이르고 주요 저작은 대부분 망라돼 있다. 독서 여건으로 보아도 우리시대 대표적 사회학자로 꼽을 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한 사정이 인디고연구소에서 기획한 인터뷰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궁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과의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뒤이어 나온 ‘공동선 총서’의 둘째 권이다.
지젝의 인터뷰도 그렇지만 바우만의 인터뷰도 인디고연구소의 청년 일꾼들이 직접 질문지를 만들고 현지에 찾아가서 얻어낸 대답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바우만의 핵심 사상과 현재적 고민을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접하도록 해준다. 적절한 눈높이의 질문과 깊이 있는 답변이 어우러져 ‘바우만에게로 가는 길’에 가장 유력한 가이드 역할도 겸하고 있다.
사실 바우만에게로 가는 길이란 다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사색과 성찰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 시대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진단과 해명 말이다. 그 자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듯이 무려 65년 동안 현역 사회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우만은 사회학자의 소명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또 사회는 그 배후의 메커니즘과 어떤 연결 속에서 형성되었고 또 순환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전체적인 그림을 제공하는 일인데, 이것은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에도 바쁜 보통 사람들로선 인식하거나 간파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을 갖기에는 다들 너무나 제한적인 시야와 사고 범위 안에 갇혀 있고 일상에 매몰돼 있는 게 현실이다. 학자로서의 특권은 그러한 일상에서 한 발작 물러나 생각하고, 읽고, 관찰하고, 추론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점이다. ‘더 넓은 지평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바우만의 미덕은 그러한 여유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여유는 학자의 소명을 위한 여유이다.
사회학자의 소명이 제공해주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바우만은 “아마도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적 인식 자체에서 쓸모를 찾지 않고, 더 나은 삶,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바우만을 실천적 사회학자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실천은 ‘아마도’라는 단서와 함께한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실천의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각자’란 우리들 각자를 말하는 것이니 바우만을 경유해서 다시 우리에게로 되돌아온 셈이다. 우리에겐 어떤 선택이 있는가.
바우만은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대로 ‘좋은 삶이란 좋은 사회에서 사는 삶’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이에 따르면 좋은 삶은 나쁜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공자의 생각이기도 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유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논어>의 구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나라’를 ‘사회’로 바꿔놓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같은 취지를 갖는 걸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삶은 좋은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각자가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복과 공동선을 도모해야 한다. 곧 나라에 도가 있도록 애써야 한다.
그럼 또 다른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행복이나 공동선이 나의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다. 즉 “내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사회는 제쳐두고, 절대적인 개인의 영역만 더 좋게 만들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사회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만 편하고 안락한 삶이 가능하도록 애쓰는 게 전부라고 믿는다. 더 극단적으로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처럼 “사회 같은 건 없다”고 선언할 수도 있겠다. 개인들의 총합이 있을 뿐 사회라는 별개의 실체는 없다는 주장이니, 그 경우에는 따로 사회를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물론 사회학자로서 바우만은 동의하지 않지만, 사회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학이나 사회학자도 존재 근거가 없어질 것이다. 혹은 형이상학의 일종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의 존재 유무에 관해 대처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래서 사회라는 게 존재하며 각자의 좋은 삶은 좋은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선택의 여지도 없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말해보자. 그런 좋은 사회를 상상하는 건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바우만은 그런 상상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은 누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다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말한다. 그의 예리한 통찰에 따르면,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이고, 정치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흔히 이 둘은 결합돼 있었지만 세계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따로 분리되었다. 권력은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공간으로 확산된 반면에 정치는 지역적 경계 안에 머물게 되면서부터다.



이것은 국민국가에 한정된 정치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국민이 ‘주권자’이고 국민국가의 기관들이 그 대행자이긴 하지만, 시장 자본주의의 힘은 이미 주권적 역량과 범위 너머에 군림하고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러한 힘에 맞서야 하지만 현재로선 미약하다. 굳이 바우만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고통은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견딜 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도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해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삶에 대한 열망이 우리에게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희망이라고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이 바우만의 비유대로 병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라 하더라도 우리가 수신한 그의 메시지를 다시 더 많은 병속에 넣어 띄워보낸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가 어느 순간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바우만을 읽으며 다시 정비하게 된 희망이다.
14. 07. 10.

P.S. 참고로 인터뷰의 이탈리아어본이 작년에 먼저 나왔다. 영어본도 근간인 걸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