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다솜이친구(170호)에 실린 '감각의 도서관' 꼭지를 옮겨놓는다. 최근 아들러의 심리학을 맛깔나게 소개함으로써 잔잔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와 함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열린책들, 2004)를 다루었다. 두 권은 편집부에서 고른 것이다.

 

 

 

다솜이친구(15년 2월호) 심리학의 거장들을 만나다

 

세계는 단순하고 오늘부터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누군가 설파한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철학관에서나 들어볼 만한 이런 메시지의 제출자가 인본주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이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지만, 프로이트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이트와 달리 학파를 조직하는 데 힘쓰지 않았고, 그나마 그를 따르던 제자들 다수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 때 학살당한 것도 이유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전집과 두툼한 평전까지 소개돼 있는 프로이트와 융에 비해 아들러는 상대적으로 홀대받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 출간됐다.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프리랜서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합작한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두 저자는 아들러의 새로운 심리학이 어떤 독창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조언은 무엇인지 철학자와 학생의 대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진지하면서도 친절하게 소개한다. 아들러의 저작들을 직접 읽으려는 독자라도 유익한 가이드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아들러도 애초에는 프로이트가 창설한 정신분석협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의 이견으로 탈퇴해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심리학을 제창한다. 어떤 의견 차이인가. 아들러 심리학의 획기적인 점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현재의 나를 지배한다고 보는 원인론의 입장이라면, 아들러는 정반대로 개인은 각자가 설정한 목적에 따른다는 목적론을 주창한다.

 

 

아들러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원인에 의해서 고착되지 않았으며, 목적의 재설정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사는 방식으로서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좌우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들러가 자기계발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납득할 수 있다

     

아들러는 또한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타인과의 인정투쟁에서 탈피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과제 분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어디까지가 나의 과제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의 과제인지를 분명하게 분리하라는 것이다. 그런 분리를 통해서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대인관계에 대한 아들러의 처방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울뿐더러 불가능한 일이다. 거꾸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한편으로 그가 대척점에 놓고 있는 프로이트 심리학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심리학자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정반대의 견해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 덕분에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 촉발됐다면 프로이트에 저작에 도전하는 용기도 내볼 만하다.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꿈의 해석>이지만 이론적인 저작으론 <정신분석 강의>(열린책들)가 기본서에 해당한다.

 

'정신분석입문'으로도 많이 번역된 바 있는 <정신분석 강의>는 원제가 정신분석 입문을 위한 강의들이다. 1차세계대전까지 정신분석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있기에 몇몇 이론적 주장은 1920년대 이후 수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골격으로 계속 유지되므로 프로이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저작이다.

 

프로이트는 주로 실수, , 신경증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매우 꼼꼼하면서도 철저하게 이들을 설명한다. 이후의 그의 생각들은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에서 읽어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냐 아들러냐라는 선택지를 놓고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아들러의 <인간이해>(일빛)와 대비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15. 01.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시사IN(38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도널드 바렛과 제임스 스틸의 <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어마마마, 2014)를 읽고 적었는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탐사보도팀이라는 두 사람은 40년 넘게 공동작업을 해왔고 <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 사는가>는 그들의 여덟번째 책이다. <미국: 무엇이 문제인가>도 베스트셀러였다.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저널리스트들이라는 생각이다. 결코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기에...

 

 

 

시사IN(15. 01.24) 배신당한 중산층의 꿈

 

미국의 두 저널리스트가 쓴 <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의 원제는 ‘아메리칸 드림의 배신’이다. 무엇이 아메리칸 드림인가. 한 엔지니어는 이렇게 답했다. “열심히 일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죠. 집을 가질 수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있으며, 의료 혜택을 받고, 공과금이나 여타 지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미국은 기회의 나라니까요.” 그런 건 말 그대로 꿈이라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기회의 나라’라는 건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지나친 냉소이자 정확하지 못한 인식이다. 분명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중산층의 파괴와 함께 지나가버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부흥기였다. '전쟁 특수'란 말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시기에 미국인들의 개인 소득은 극빈자를 제외하면 부자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비슷한 비율로 증가했다. 일단 중산층에 진입하게 되면 좋은 일자리와 훌륭한 복지, 그리고 내 집을 소유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중산층의 존재였다.


하지만 1970년대 초부터 뭔가 변하기 시작했다. 중산층의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상류층의 소득만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저자들도 인용하고 있는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07년 사이에 상위 1%의 소득은 62% 증가했지만 하위 90%의 소득은 4% 증가하는 데 그쳤다. 부의 편중이 갈수록 극심해졌고, 빈부격차는 유례없이 커졌다. 조금 더 실감나게 말하면, 1980년 CEO의 평균급여가 공장노동자의 42배였지만 오늘날에는 325배다. 오늘날 계속 추락중인 미국의 중산층은 더 이상 미래를 낙관하지 못한다. 공과금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변화가 경제법칙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라 정부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미국 의회나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은 경제적으로 평등한 경쟁의 장을 제공하는 법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특정 이익집단의 이해관계를 정책화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수가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늘리기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계획을 꾸미는 금권정치 체제가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들리는 ‘규제완화’만 하더라도 원조는 미국이다. 중산층의 급여와 복지가 처음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1970년대 이래로 미국의 부자들은 갖가지 싱크탱크를 만들었고 언론은 그들의 규제반대론을 마치 여론인 양 포장했다. 일례로 1978년에 제정된 항공규제완화법을 보자. 애초엔 경쟁을 자극하여 요금을 낮추고 서비스 수준을 올라가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신규 항공사들이 시장에 진입하긴 했지만 규제가 사라진 시장은 정글과 다를 바 없었다. 대형 항공사들이 소형 항공사들을 집어삼켰고, 2012년에 와서 항공산업은 규제 완화 이전보다도 경쟁이 줄었다. 당연한 결과로 규제완화 초기에 일시적으로 내려갔던 요금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러한 역효과는 자유무역 옹호론에도 해당한다. 명분은 미국의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득을 보는 건 미국의 다국적 기업뿐이다. 노동력이 싼 곳으로 공장을 옮겨 간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관세도 없이 다시 미국시장에 들여와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이다.


기업이 맹목적인 이윤추구는 말릴 수 없을지 몰라도 정부는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 전체 국민의 이익 사이에 균형을 잡는 정책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 체제를 국민 다수가 아닌 극소수를 위한 체제로 바꾸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15. 01. 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보생명에서 발행하는 월간 '다솜이 친구' 1월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감각의 도서관'이란 꼭지를 연재하게 첫번째 주제는 '경제'였고('새해에 읽는 희망의 경제'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부키, 2014)와 <사기>의 <화식열전>(민음사판으론 <사기 열전2>에 수록돼 있다)을 다룬 신동준의 <사마천의 부자경제학>(위즈덤하우스, 2012)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이 되었다.

 

 

다솜이 친구(15년 1월호)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살림살이 걱정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이들도 많을 듯하다. 경제가 무엇이길래? 새해의 첫 독서거리로 경제서를 고르는 독자가 던져볼 만한 질문이지 싶다. 경제란 무엇이고, 그것은 왜 중요하며, 과연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이달에는 그런 원론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해주는 신간과 고전을 함께 읽어보려고 한다.

 

우리가 경제학을 배워야 할 이유

경제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자연스레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경제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우리에게 친숙한 경제학자 장하준의 강의라면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더구나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교과서’를 표방하는 책이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다. 부제만 보면 두 가지가 포인트이다. ‘지금 우리를 위한’ 강의라는 것과 ‘새로운 경제학교과서’라는 것.


저자가 염두에 둔 ‘우리’는 일반 시민으로서 독자를 말한다. 흔히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진 경제학은 전공자나 전문가의 영역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몇 차례 경제위기를 통해 경험한 것은 누가 진짜 전문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경제학이 과학인 양 행세하지만 결코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의미의 과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딱 떨어지는 한 가지 답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의 경제이론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항상 복수의 답안이 선택지로 주어진다. 따라서 어떤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특정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강도 높은 정치적 행위다.


‘새로운 경제학교과서’의 목표는 ‘책임있는 시민’이 갖춰야 할 경제 이해를 제공하는 것이다. 경제학자이지만 장하준은 전문 경제학자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전문가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란 해리 트루먼의 말을 인용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문가란 아주 좁은 영역을 잘 아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에 대개 편협한 시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학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문 경제학자들의 말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세가 바로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경제를 알고 이해하는 ‘경제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지식으로 구성돼 있다. ‘교과서’인 만큼 기본적인 지식과 시각을 다루지만 ‘자본주의의 간단한 역사’를 다룬 장만 읽어보아도 경제를 보는 시야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또 경제학의 다양한 접근법을 비교하는 장은 경제학파에 대한 일목요연하면서도 충실한 소개로 저자의 명성에 값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인간의 본성

근대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탄생한 만큼 경제학도 서양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을 재고하게끔 해주는 책이 있다. 너무도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의 <화식열전>편이다. 다양한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총 52명의 행보를 소개한 열전으로 신동준의 <사마천의 부자경제학>은 이를 일컬어 “동서양을 통틀어 사상 최초의 경제·경영 이론서”라고 부른다.

 

<화식열전>의 핵심은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못 박은 것이다. 즉 부(富)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견줄 만하다는 평가다. 화식(貨食)이란 무엇인가. ‘식화’라고도 쓰이는 이 말은 <서경>에서 따온 것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여덟 가지 원칙 가운데 먹는 것(食)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재화(貨)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역사서의 <식화지>는 한 시대의 사회경제사를 기술한 것이다.

 


<화식열전>에서 사마천이 따르는 입장은 ‘관자’를 대표격으로 하는 상가(商家)다. 제자백가 가운데 상가는 부민부국, 곧 백성과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상도’를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여겼다. <관자>에 나오는 주장으로 “백성을 얻는 방안으로 백성에게 이익을 주는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다.”는 것이다. 공자와 순자의 유가에서는 극기복례의 예치를 강조했지만 관중과 사마천은 필선부민(必先富民)이 통치의 요체라고 보았다. 치국평천하의 길은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민의 방도로 <화식열전>은 중농이 아닌 중상을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 중농을 근간으로 했다.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중상주의로의 전환은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으로 처음 이루어진다. <화식열전>의 지혜가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기>의 <화식열전> 편이 2천여 년 전의 저술이지만 21세기에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4. 12. 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자 중앙일보 '책 속으로'에는 '2014년 나를 뒤흔든 책' 꼭지가 실렸는데, 내가 고른 건 승계호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반니, 2014)다. 간략한 연유를 옮겨놓는다. 승계호 교수의 전반적인 학문세계에 대해서는 <서양철학과 주제학>(아카넷, 2008)을 참고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나를 가장 경탄하게 만든 한국 학자를 한 명만 꼽자면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에 재직 중인 승계호 교수다. 재미 학자로 줄곧 영어로 쓴 저작을 발표해왔으니 ‘한국 학자’라기보다는 ‘한국인 학자’ 내지 ‘한국계 학자’라고 해야겠다. 1930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3년간 복무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세대로서는 드문 이력이겠지만 그 자체가 경탄을 낳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공부한 것이 자연과학이 아니고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이 좀더 ‘실용적인’ 학문도 아닌 인문학이라는 점이 일단은 이채롭다. 그것도 단테의 『신곡』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으로 서양 인문학의 대표급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면 다시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학위논문을 끝으로 학자로서의 이력을 마감하는 허다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인문학 전반을 종횡하며 주목할 만한 문제작들을 연거푸 발표한 세계적 석학으로 우뚝 섰다. 언젠가 『단테 읽기』란 영문 입문서를 펼쳐보았다가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가 승계호(영어명은 T K Seung이다)인 걸 알고 괜히 부듯했던 기억도 새롭다.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는 ‘승계호 인문학’의 힘, 혹은 그의 고유한 방법론인 ‘주제학’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다. 독일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인 괴테의 『파우스트』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저자는 절대주권을 주장하며 신처럼 되기를 갈망하는 파우스트적 주인공이 스피노자적 자연주의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연속적인 작품으로 이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패러디이고 니체는 ‘니벨룽의 반지’가 『파우스트』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해했다는 대범한 견해도 제시한다. 매우 논쟁적인 해석이지만 동시에 아주 강력하며 대단히 매력적이다. 작품을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 새로운 해석의 힘이자 비평의 의무라면 승계호는 내가 아는 최강의 비평가다.

 

14. 12.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탄절 이브라고 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므로(혹은 그럴 나이는 지났으므로) 이번주 시사IN(38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번주에는 '2014 행복한 책꽂이'도 별책부록으로 포함돼 있으므로 정기구독자가 아닌 분들은 가판에서라도 손에 들어보시길 권한다(올해의 책으로 추천된 책들 가운데 나도 몇 권 챙겼다). 리뷰 거리로 고른건 토머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것인가?>(문학동네, 2014)라는 가벼운 책이다. 하지만 제목대로 무거운 문제를 다룬다. 무거운 문제를 가볍게, 읽을 만하게 다루고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워밍업으로도 좋겠다 싶다.

 

 

 

시사IN(14. 12. 27) '기관사 판결' 어떻게 났을까

 

인문서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폭주하는 전차’라고 말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바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으로 다루면서 샌델이 가장 먼저 제시하는 사례가 폭주하는 전차였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가 폭주하고 있는데, 선로 앞에 다섯 명이 서 있다. 그대로 질주하면 다섯 명이 죽게 되고, 선로의 방향을 튼다면 다른 선로에 있던 한 사람이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샌델은 물음을 던진다. 다섯 명이 죽는 것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 대신에 한명이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고약한’ 질문이지만 윤리적 딜레마를 토론거리로 삼는 데는 꽤 효과적인 물음이다.

 


샌델의 책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이 사고실험적 질문의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데,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이다. 토마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문학동네)는 필리파 풋이 1967년에 처음 고안한 ‘전차 문제’를 다룬 책이다(원제가 <전차 문제>다). 그게 책 한 권 분량의 얘깃거리까지 낳은 것은 처음 학술지에 발표된 이후 철학자를 포함하여 온갖 분야의 전문학자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가세해 이 문제를 다양하고 변주하고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아예 ‘전차학’이라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유행했다.

 

필리파 풋은 문제를 이렇게도 변형시켰다. 만약 의사가 한 사람을 죽여서 혈청을 뽑아내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해보자. 이것은 최초의 전차 문제와 같은 문제인가, 다른 문제인가? 미국 철학자 주디스 톰슨의 변형 문제는 샌델도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만약 전차 선로 위 육교에 서 있고 옆에 뚱보가 한 명 있는 상황에서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옆에 있는 뚱보를 밀어서 철로로 떨어뜨리는 것은 옳은 일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전혀 흥미롭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상의 상황을 가정한 사고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접하는 문제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기에 사고실험은 두뇌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현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데는 무용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반론을 고려하여 <누구를 구할 것인가?>의 저자는 실제로 사고실험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를 책에 담고자 했다. 2012년 10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쳇 팔리가 전차에 치여 사망하고 기관사 대프니 존스가 전차의 방향을 틀어 쳇을 죽게 한 혐의로 기소되어 구형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출발점이다.


검찰 측에서는 이 사건을 한 대학병원의 외과의사였던 로드니 메이프스 박사가 교통사고의 부상자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상을 입은 한 남자의 장기를 모두 적출해 중상을 입은 환자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린 사건과 같은 사건으로 간주한다. 메이프스 박사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 결정할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기관사 존스도 고의로 방향을 바꾸어 신처럼 행동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은 존스가 처했던 상황을, 2003년에 전차의 기관사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역시나 전차가 계속 달리게 놔두어 다섯 명을 치게 하거나 선로를 틀어서 한 명을 죽게 해야 했던 클래라 머피의 경우와 비교한다. 당시 배심원단은 다수가 머피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과 공방에 이어서 교수와 심리학자의 견해, 주교의 의견서, 그리고 재판장의 설명과 배심원단의 결정까지 책은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면서 정확하게 재판 절차를 따라간다. 이러한 설정과 구성이 흥미로운 것은 철학적 사고실험이 고유명사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재구성되면서 문학적인 스토리로 탈바꿈했다는 점이다. ‘전차 문제’가 ‘존스 사건’으로 불릴 때 어떤 문제가 벌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최종 평결은 무엇인가? 그걸 확인하는 건 실제로 책을 읽을 독자의 권리로 남겨놓는다.

 

14. 12.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