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공지다. 먼저 서평쓰기 강의는 내가 진행하는 것으로 3월 11일부터 4월 29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9시에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에서 열린다(알라딘 공지는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50213_medichi 참고).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2강에서는 서평쓰기 일반에 대해 개관할 예정이며, 3-8강에서는 세 분야의 책 세 권을 읽고 실제 서평쓰기 연습과 첨삭을 진행하려고 한다.

 

 

서평대상으로 고른 책 세 권은 <스토너>(문학)와 <모멸감>(인문사회서), 그리고 <욕망하는 여자>(교양과학서)이다(<욕망하는 여자>는 수강자에게 메디치미디어에서 제공한다).

 

요즘은 글쓰기 강좌도 여러 곳에 개설되어 있는데,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도 3월 12일부터 4월 9일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에 글쓰기 강좌를 연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222).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글쓰기의 실제에 대해 다룰 예정이므로, 이 또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1. 3월 12일(목) 정수복 (사회학자, 작가) - 독서와 사회학 글쓰기  
   ·관련 도서: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2014)   

 

           

 

2. 3월 19일(목) 이문재 (시인, 경희대 교수) - 성찰과 표현의 글쓰기  
   ·관련 도서: <지금 여기가 맨 앞>(2014)      

                    

 

3. 3월 26일(목) 한기호 (출판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 함께 읽기와 쓰기의 변천사  
   ·관련 도서: <글쓰기의 힘>(2014)      

 

 

4. 4월 02일(목) 서영채(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 개념과 인문학 글쓰기   

   ·관련 도서: [인문학 개념 정원](2013)      

 

 

5. 4월 09일(목) 류대성(흥덕고 국어 교사) - 고전과 블로그 글쓰기 
   ·관련 도서: [고전은 나의 힘](2014)                               

 

 

 

15.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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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출판문화(591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수년전에 연재한 적이 있는 칼럼인데, 올해도 격월로 실을 예정이다. 오랜만에 쓴 칼럼이라 책의 기원적 의미에 대해서 적었다. 참고한 책은 앤드루 파이퍼의 <그곳에 책이 있었다>(책읽는수요일, 2014)와 로더릭 케이브 등의 <이것이 책이다>(예경, 2015), 마틴 라이언스의 <책, 그  살아있는 역사>(21세기북스, 2011) 등이다.

 

 

출판문화(15년 2월호) 그곳에 책이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진흙 평판에다 쐐기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는 진흙이 풍부했고, 이 지역에는 인류 최초의 문자 형태인 쐐기문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쐐기문자가 적힌 진흙 평판을 불에 구우면 사실상 파괴가 불가능하여 나중에 발명된 파피루스보다도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신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재위 기원전 669-631)의 장서들이 발굴될 수 있었던 이유다. 니네베 궁전의 그의 서재에는 수천 개의 진흙 평판이 보존돼 있었고 이 가운데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를 담은 평판도 포함돼 있었다. 진흙 평판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이라고 하면, 우리의 상상을 좀 벗어나긴 하지만 책의 역사에서 보자면 분명 ‘최초의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종이의 기원이 되는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다. 나일강 삼각주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은 원래 배나 가구, 가방 밧줄 등을 만드는 재료였는데, 기록면을 만드는 데 쓰이면서 차츰 널리 전파되었다. 파피루스는 접을 수가 없어서 두루마리(볼루멘) 형태로 둘둘 말아서 사용했는데, 보통 높이가 30센티미터이고 길이는 6미터를 넘지 않았으나 30미터 이상이 되는 것도 있었다. 고대 세계의 가장 유명한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거의 50만 개에 이르는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파괴되었지만 이 도서관은 세계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겠다는 열정의 산물이었다. 그렇지만 진흙 평판과 마찬가지로 두루마리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책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친숙한 책의 형태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후 초창기이다. 이른바 ‘접는 책’으로서 코덱스(codex)의 등장이다. 책의 형태로 된 고문서를 뜻하기도 하지만 방점은 ‘고문서’가 아니라 낱장들을 묶어서 꿰맨 ‘책의 형태’에 찍힌다. 코덱스는 양손에 들고 읽을 수 있으며 휴대가 간편하고 양면 기록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어서 2-4세기에 두루마리와 공존하다가 차츰 책의 형태를 대표하게 된다. 책의 역사상 최초의 발명품으로도 일컬어지는 코덱스는 혁명적 사건의 하나이다. 두루마리를 대체한 이후 코덱스는 오늘날 전자책이 등장하기까지 책의 물리적 형태는 바로 코덱스가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전자책과 대비하여 종이책이라고 말할 때 그 종이책이 뜻하는 바의 핵심이 코덱스이다.

 

인쇄술의 발명이 책의 역사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혁명의 의의를 주로 책문화의 확산과 대중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코덱스가 가져온 혁명은 책의 의미에 있어서의 혁명이다.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 물건인지 처음 얘기한 이는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곳에 책이 있었다>의 저자 앤드루 파이퍼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의 큰 나무 아래 앉아 고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후렴구를 반복하는 노랫소리였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옆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들어 아무 구절이나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문장 끝부분을 읽을 때쯤 믿음의 빛이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쫓겨나는 것 같았다.”고 그는 적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서, 아니 읽자마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속에 ‘믿음의 빛’이 밀려들어왔다는 것, 즉 개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안에서 개인적 개종 행위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핵심은 그러한 개종 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물질적 조건, 곧 코덱스의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쓴 건 4세기 말이고 당시에는 코덱스가 두루마리를 거의 대체하던 시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집어 들고서 읽고 싶은 부분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읽은 것이 두루마리가 아닌 코덱스이다. 그는 두루마리를 읽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코덱스는 한 손에 쥘 수 있었기에 다른 손은 읽으려는 문장을 따라갈 수 있었고, 표시도 할 수 있었다. 즉 두루마리를 읽으려면 양손을 모두 사용해야 했지만 코덱스는 한 손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게다가 코덱스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한데 모아놓기도 했었기에 그 자체로 하나의 도서관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책읽기의 실천과 개인적 개종이 갖는 밀접한 관련성이다. 책을 손에 움켜잡을 수 있다는 특성이 책이 우리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집어서 읽어라”는 후렴구대로 하려면 집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형태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개종의 조건이자 바탕이다. 앤드루 파이퍼는 “움켜잡음, 이는 단지 영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 의미에서도 우리의 삶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그런 어마어마한 특성이었다”고 강조한다. 즉 책은 읽기의 대상이기 이전에 먼저 손에 쥐어지는 대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독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독서와 손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한다는 뜻이라는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책을 움켜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책을 읽는 것은 인사 동작과 기도 동작을 모방하는데, 서양 중세에 독서와 기도의 결합은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였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예술에서 펼쳐진 손은 신을 부름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책을 읽기 위해 펼쳐진 손은, 따라서 신을 불러내는 손이면서 동시에 신의 부름을 받는 손이다. 책을 잡음으로써 우리는 맞잡힌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가 책을 잡는 동안 책은 우리를 잡는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도 이러한 이중성을 반영한다. 책을 펼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닫는다. 하지만 이 닫음은 새로이 세계를 향해서 스스로를 개방하기 위한 닫음이다. 책의 역사에서 이러한 닫고 엶을 가능하게 만든 물질적 형태의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이로써 어림해볼 수 있다. 비유컨대 그것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직립보행이 갖는 의의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세계의 지평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더불어 직립보행은 두 손을 자유롭게 만듦으로써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호모 파베르를 가능하게 한다). 


앤드루 파이퍼가 보기에, 종이책에서 전차책으로 변화, 활자 텍스트에서 디지털 텍스트로의 변화는 ‘손안의 있음’이라는 책의 정체성에 관련된다. 그의 비유는 이렇다. “책이 본질적으로 척추를 가지고 있어서, 직립보행이라는 인간의 고유함에 기여한다면, 디지털 텍스트는 수평적인 유전자 이식 및 비국부적 법칙에 종속되는 무척추 동물과 더 비슷하다.” 코덱스를 모델로 하는 책의 경우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읽는 대상, 곧 책에 붙잡혀 있는 반면에 디지털 텍스트는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촉감에 있어서의 차이가 결정적인데, 촉감에 대한 연구자들은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자기 반영적인 감각이 촉감이라고도 주장한다. 촉감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촉감의 변화는 자기 정체성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물론 이 변화가 갖는 의미는 아직 불분명하다. 우리는 어쩌면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책을 덮는 것, 책을 전체로서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은 독서 경험에 핵심이자 그의 개종의 조건이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이 패러다임은 그 후 1700년 가까이 지속돼 왔다. 만약 디지털 텍스트가 독서 경험과 세계 경험에서 또 다른 패러다임이 된다면, 마치 코덱스가 두루마리를 대체했던 것처럼 활자 텍스트를 대체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백’이 다시 필요하지 않을까. 디지털 텍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유사-종이책으로서 손에 쥘 수 있는 특성 내지 촉감을 최대한 그 안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적인 독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책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텍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책은 사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물건인 반면, 전자책은 사물들을 계속 바깥에 머무르게 한다”고 앤드루 파이퍼는 말한다. 나는 우리 또한 아직은 그 전자책 바깥에 있는 듯싶다.   

 

15.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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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로쟈와 함께 읽는 카프카'에 이어서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는 3-4월에 '로쟈와 함께 읽는 카뮈'(혹은 '로쟈와 함께 카뮈 다시 읽기') 강의를 진행한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218).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 희곡과 에세이를 포함하여 대표적인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텍스트는 책세상판 카뮈 전집을 사용하되 <이방인>과 <페스트> 두 작품은 가장 최근에 나온 번역본을 골랐다('다시 읽는 김에 다른 번역본으로'라는 취지다).

 

 

로쟈와 함께 읽는 카뮈

 

1. 3월 09일 카뮈와 그의 작품세계 <행복한 죽음> (책세상)

 

 

 

2. 3월 16일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 (책세상)

 

 

3. 3월 23일 카뮈의 소설 <이방인> (홍익출판사)

 

 

4. 3월 30일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 (책세상)

 

 

5. 4월 06일 카뮈의 소설 <페스트> (열린책들)

 

 

6. 4월 13일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 (책세상)

 

 

7. 4월 20일 카뮈의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책세상)

 

 

8. 4월 27일 카뮈의 소설 <전락> (책세상)

 

 

15.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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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아무래도 봄이 오면 강의가 많아질 예정인데, 첫 스타트는 마포구립 서강도서관에서의 강의가 될 듯싶다. 2월 26일부터 3월 19일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9시에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해서다. 강의 주제는 도서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에서 다룬 작품들 가운데 네 편을 골라 다시 읽을 예정이다(지난해에는 러시아문학 위주의 강의를 한 터라 꽤 오랜만에 강의하는 작품들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sglib.mapo.go.kr/culture/event_view.asp?table_name=event_board&val_01=404).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1주. 2월 26일_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2주. 3월 05일_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주. 3월 12일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4주. 3월 19일_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15.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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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다솜이친구(170호)에 실린 '감각의 도서관' 꼭지를 옮겨놓는다. 최근 아들러의 심리학을 맛깔나게 소개함으로써 잔잔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와 함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열린책들, 2004)를 다루었다. 두 권은 편집부에서 고른 것이다.

 

 

 

다솜이친구(15년 2월호) 심리학의 거장들을 만나다

 

세계는 단순하고 오늘부터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누군가 설파한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철학관에서나 들어볼 만한 이런 메시지의 제출자가 인본주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이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지만, 프로이트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이트와 달리 학파를 조직하는 데 힘쓰지 않았고, 그나마 그를 따르던 제자들 다수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 때 학살당한 것도 이유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전집과 두툼한 평전까지 소개돼 있는 프로이트와 융에 비해 아들러는 상대적으로 홀대받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 출간됐다.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프리랜서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합작한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두 저자는 아들러의 새로운 심리학이 어떤 독창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조언은 무엇인지 철학자와 학생의 대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진지하면서도 친절하게 소개한다. 아들러의 저작들을 직접 읽으려는 독자라도 유익한 가이드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아들러도 애초에는 프로이트가 창설한 정신분석협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의 이견으로 탈퇴해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심리학을 제창한다. 어떤 의견 차이인가. 아들러 심리학의 획기적인 점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현재의 나를 지배한다고 보는 원인론의 입장이라면, 아들러는 정반대로 개인은 각자가 설정한 목적에 따른다는 목적론을 주창한다.

 

 

아들러에 따르면,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원인에 의해서 고착되지 않았으며, 목적의 재설정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사는 방식으로서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좌우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들러가 자기계발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납득할 수 있다

     

아들러는 또한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타인과의 인정투쟁에서 탈피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과제 분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어디까지가 나의 과제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의 과제인지를 분명하게 분리하라는 것이다. 그런 분리를 통해서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대인관계에 대한 아들러의 처방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울뿐더러 불가능한 일이다. 거꾸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기도 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한편으로 그가 대척점에 놓고 있는 프로이트 심리학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두 심리학자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정반대의 견해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 덕분에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 촉발됐다면 프로이트에 저작에 도전하는 용기도 내볼 만하다.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꿈의 해석>이지만 이론적인 저작으론 <정신분석 강의>(열린책들)가 기본서에 해당한다.

 

'정신분석입문'으로도 많이 번역된 바 있는 <정신분석 강의>는 원제가 정신분석 입문을 위한 강의들이다. 1차세계대전까지 정신분석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고 있기에 몇몇 이론적 주장은 1920년대 이후 수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골격으로 계속 유지되므로 프로이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저작이다.

 

프로이트는 주로 실수, , 신경증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매우 꼼꼼하면서도 철저하게 이들을 설명한다. 이후의 그의 생각들은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에서 읽어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냐 아들러냐라는 선택지를 놓고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아들러의 <인간이해>(일빛)와 대비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15.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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