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출판문화(591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수년전에 연재한 적이 있는 칼럼인데, 올해도 격월로 실을 예정이다. 오랜만에 쓴 칼럼이라 책의 기원적 의미에 대해서 적었다. 참고한 책은 앤드루 파이퍼의 <그곳에 책이 있었다>(책읽는수요일, 2014)와 로더릭 케이브 등의 <이것이 책이다>(예경, 2015), 마틴 라이언스의 <책, 그  살아있는 역사>(21세기북스, 2011) 등이다.

 

 

출판문화(15년 2월호) 그곳에 책이 있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진흙 평판에다 쐐기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는 진흙이 풍부했고, 이 지역에는 인류 최초의 문자 형태인 쐐기문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쐐기문자가 적힌 진흙 평판을 불에 구우면 사실상 파괴가 불가능하여 나중에 발명된 파피루스보다도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었다. 신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재위 기원전 669-631)의 장서들이 발굴될 수 있었던 이유다. 니네베 궁전의 그의 서재에는 수천 개의 진흙 평판이 보존돼 있었고 이 가운데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를 담은 평판도 포함돼 있었다. 진흙 평판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이라고 하면, 우리의 상상을 좀 벗어나긴 하지만 책의 역사에서 보자면 분명 ‘최초의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종이의 기원이 되는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다. 나일강 삼각주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은 원래 배나 가구, 가방 밧줄 등을 만드는 재료였는데, 기록면을 만드는 데 쓰이면서 차츰 널리 전파되었다. 파피루스는 접을 수가 없어서 두루마리(볼루멘) 형태로 둘둘 말아서 사용했는데, 보통 높이가 30센티미터이고 길이는 6미터를 넘지 않았으나 30미터 이상이 되는 것도 있었다. 고대 세계의 가장 유명한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거의 50만 개에 이르는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파괴되었지만 이 도서관은 세계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겠다는 열정의 산물이었다. 그렇지만 진흙 평판과 마찬가지로 두루마리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책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친숙한 책의 형태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후 초창기이다. 이른바 ‘접는 책’으로서 코덱스(codex)의 등장이다. 책의 형태로 된 고문서를 뜻하기도 하지만 방점은 ‘고문서’가 아니라 낱장들을 묶어서 꿰맨 ‘책의 형태’에 찍힌다. 코덱스는 양손에 들고 읽을 수 있으며 휴대가 간편하고 양면 기록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어서 2-4세기에 두루마리와 공존하다가 차츰 책의 형태를 대표하게 된다. 책의 역사상 최초의 발명품으로도 일컬어지는 코덱스는 혁명적 사건의 하나이다. 두루마리를 대체한 이후 코덱스는 오늘날 전자책이 등장하기까지 책의 물리적 형태는 바로 코덱스가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전자책과 대비하여 종이책이라고 말할 때 그 종이책이 뜻하는 바의 핵심이 코덱스이다.

 

인쇄술의 발명이 책의 역사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혁명의 의의를 주로 책문화의 확산과 대중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코덱스가 가져온 혁명은 책의 의미에 있어서의 혁명이다. 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 물건인지 처음 얘기한 이는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곳에 책이 있었다>의 저자 앤드루 파이퍼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의 큰 나무 아래 앉아 고뇌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후렴구를 반복하는 노랫소리였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옆에 놓인 성경을 집어 들어 아무 구절이나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문장 끝부분을 읽을 때쯤 믿음의 빛이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쫓겨나는 것 같았다.”고 그는 적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서, 아니 읽자마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속에 ‘믿음의 빛’이 밀려들어왔다는 것, 즉 개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안에서 개인적 개종 행위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핵심은 그러한 개종 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물질적 조건, 곧 코덱스의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쓴 건 4세기 말이고 당시에는 코덱스가 두루마리를 거의 대체하던 시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집어 들고서 읽고 싶은 부분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읽은 것이 두루마리가 아닌 코덱스이다. 그는 두루마리를 읽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코덱스는 한 손에 쥘 수 있었기에 다른 손은 읽으려는 문장을 따라갈 수 있었고, 표시도 할 수 있었다. 즉 두루마리를 읽으려면 양손을 모두 사용해야 했지만 코덱스는 한 손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게다가 코덱스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한데 모아놓기도 했었기에 그 자체로 하나의 도서관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책읽기의 실천과 개인적 개종이 갖는 밀접한 관련성이다. 책을 손에 움켜잡을 수 있다는 특성이 책이 우리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집어서 읽어라”는 후렴구대로 하려면 집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형태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개종의 조건이자 바탕이다. 앤드루 파이퍼는 “움켜잡음, 이는 단지 영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 의미에서도 우리의 삶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그런 어마어마한 특성이었다”고 강조한다. 즉 책은 읽기의 대상이기 이전에 먼저 손에 쥐어지는 대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독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독서와 손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한다는 뜻이라는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책을 움켜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책을 읽는 것은 인사 동작과 기도 동작을 모방하는데, 서양 중세에 독서와 기도의 결합은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였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예술에서 펼쳐진 손은 신을 부름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책을 읽기 위해 펼쳐진 손은, 따라서 신을 불러내는 손이면서 동시에 신의 부름을 받는 손이다. 책을 잡음으로써 우리는 맞잡힌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가 책을 잡는 동안 책은 우리를 잡는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도 이러한 이중성을 반영한다. 책을 펼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닫는다. 하지만 이 닫음은 새로이 세계를 향해서 스스로를 개방하기 위한 닫음이다. 책의 역사에서 이러한 닫고 엶을 가능하게 만든 물질적 형태의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이로써 어림해볼 수 있다. 비유컨대 그것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직립보행이 갖는 의의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세계의 지평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더불어 직립보행은 두 손을 자유롭게 만듦으로써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호모 파베르를 가능하게 한다). 


앤드루 파이퍼가 보기에, 종이책에서 전차책으로 변화, 활자 텍스트에서 디지털 텍스트로의 변화는 ‘손안의 있음’이라는 책의 정체성에 관련된다. 그의 비유는 이렇다. “책이 본질적으로 척추를 가지고 있어서, 직립보행이라는 인간의 고유함에 기여한다면, 디지털 텍스트는 수평적인 유전자 이식 및 비국부적 법칙에 종속되는 무척추 동물과 더 비슷하다.” 코덱스를 모델로 하는 책의 경우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읽는 대상, 곧 책에 붙잡혀 있는 반면에 디지털 텍스트는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촉감에 있어서의 차이가 결정적인데, 촉감에 대한 연구자들은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자기 반영적인 감각이 촉감이라고도 주장한다. 촉감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촉감의 변화는 자기 정체성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물론 이 변화가 갖는 의미는 아직 불분명하다. 우리는 어쩌면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책을 덮는 것, 책을 전체로서 움켜쥘 수 있다는 것은 독서 경험에 핵심이자 그의 개종의 조건이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이 패러다임은 그 후 1700년 가까이 지속돼 왔다. 만약 디지털 텍스트가 독서 경험과 세계 경험에서 또 다른 패러다임이 된다면, 마치 코덱스가 두루마리를 대체했던 것처럼 활자 텍스트를 대체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백’이 다시 필요하지 않을까. 디지털 텍스트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유사-종이책으로서 손에 쥘 수 있는 특성 내지 촉감을 최대한 그 안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적인 독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책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텍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책은 사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물건인 반면, 전자책은 사물들을 계속 바깥에 머무르게 한다”고 앤드루 파이퍼는 말한다. 나는 우리 또한 아직은 그 전자책 바깥에 있는 듯싶다.   

 

15.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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