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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슬로 리딩의 힘과 즐거움에 대해서 적었다. 인용된 만델슈탐의 시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숲, 2012)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2. 09. 07) 독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초등학교 때의 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속독법 특강이 있었다. 속독의 필요성과 요령에 대한 내용이었다. 비슷한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TV프로그램에서도 속독술을 ‘묘기’로 보여주기도 했다. 몇십 초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고 질문을 알아맞혔다. 속독술은 진기한 기술이면서 부러운 능력이었다.

한창 책을 많이 읽고 독서에 대한 욕심도 컸기에 <기적의 속독법> 같은 책을 구해서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안구운동법과 함께 지금도 생각나는 요령은 독서의 단위를 단어에서 문장, 문단으로 점차 확장해나가는 것, 대각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 등이다.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연습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시집을 읽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툼한 소설책이라면 속독이 요긴하겠지만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얇은 시집을 속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속독이 만능은 아니란 생각에 속독에 대한 열의도 좀 시들해졌다. 빨리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읽는 것일 테니까.

무엇이 잘 읽는 것인가. 최근에 읽은 한 사례가 인상적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책은 하시모토 다케시라는 한 국어교사 이야기다. 원제는 <기적의 교실>이다. 올해 7월에 100살이 된 하시모토는 인생의 절반 동안 고베 시의 사립 나다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는 굴지의 입시명문고로 유명한데, 1968년엔 도쿄대학 최다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하시모토의 교수법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이다. 나카 간스케란 일본 작가의 자전적 소설 <은수저>를 3년 동안 읽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따로 없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직접 만든 학습교재를 통해서 작품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고 조별로 토론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썼다. 국어가 모든 공부의 기본이고 국어 실력이 살아가는 힘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하는 방식이 하시모토에게는 ‘슬로 리딩’이었다. “모르는 것 전혀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책 한 권을 철저하게 음미하는” 지독(遲讀)과 미독(味讀)이 바로 슬로 리딩이다.

빨리 읽는 속독이 아니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 미독이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독서법이었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독서법>의 저자이기도 한 사이토 다카시는 이 슬로 리딩에 대해서 ‘걸어서 가는 소풍 같은 것’이라고 평한다.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가버리는 게 아니라 길가에 꽃들에도 눈길을 주어가며 한 발짝 두 발짝 걸음을 옮기는 산책 같은 소풍이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넘어진다”는 셰익스피어의 경구는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고, 그 책들을 모두 슬로 리딩으로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통한 배움의 경험이 없다면, 독서는 후딱 지나가버린 인생만큼이나 빈곤할 듯싶다. 독서의 목적이 ‘읽어치우는 것’은 아니잖은가.

대학원 시절에 내가 들은 놀라운 수업 중의 하나는 만델슈탐이라는 러시아 시인의 4행짜리 시 읽기였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의/ 조심스럽고 둔탁한 소리/ 숲 속 깊은 정적의/ 연이어 들려오는 선율 사이로…”가 시의 전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 반영된 시인의 시학을 포함하여 시의 이모저모를 철저하게 읽어나가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옆길로 새는 것도 권장한 하시모토식 수업과는 달리 오직 이 한 편의 시에만 집중한 슬로 리딩 강의였다.

진정한 배움은 그런 수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슬로 리딩,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더 많이 가르치면 좋겠다.

 

12.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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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도올의 <사랑하지 말자>(통나무, 2012)를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미 많은 리뷰와 인터뷰가 나온 터라 뒷북성이 됐다(책의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에 실린 저자 인터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826153431 를 더 참고하시길 '나꼼수'의 최근 호외도 도올과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그래도 물론 현 시점에서 매우 요긴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간경향(12. 09. 11) 청춘을 향한 도올의 부르짖음

 

고전 번역가이자 학술운동가인 도올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에는 ‘도올 고함(苦喊)’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까. ‘서막’에서 그가 내비친 고통의 바탕은 4대강을 파(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갯벌을 파하고, 모든 산을 파하고, 모든 논밭을 파하고, 모든 촌락을 파하고, 모든 인민의 삶의 터전을 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서씨동물농장’에 대한 절망과 탄식이다. 젊은 학동과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그럼에도 자포자기 대신에 희망을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이 세계를 변혁시킬 힘을 아직 ‘우리’가 갖고 있다는 긍정적 믿음이다. 반항과 거역과 항거의 주체로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 ‘청춘’이다. 편집자들이 뒤바꾼 순서라고는 하지만 책이 ‘청춘’이란 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온당하다.

 

<중용>의 말을 빌려서 도올은 청춘을 “중(中)에서 화(和)로 가는 끊임없는 발(發)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조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조화로 대체되는데, 그러한 ‘조화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끊임없는 불화(不和)이다. 이 불화를 가리키는 말이 곧 청춘이다. 청춘의 불화가 없으면 모든 문명은 활력을 상실하며 청춘의 모험이 없는 문명(文明)은 문명이 아니라 문암(文暗)이다. 문명의 부패다. 현 정권 하의 한국이 바로 그런 경우이며, 청춘의 실종이 낳은 결과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지난 20세기 한국사는 청춘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3·1운동에서 광주학생운동을 거쳐 4·19혁명과 군사독재정권 타도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학생문화의 정의로운 투쟁’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 ‘정의감의 찬란한 역사’가 이명박 정권 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춘의 모험’을 억압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한국의 청춘들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위를 벌인 학생들에 대해 학교측이 징계를 내린 사건을 “대한민국 청춘이 금권에 순응하는 항복을 선언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본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청춘은 무조건 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올은 청춘들이 그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되찾고 다시금 사회적 불의에 대한 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한다. “조선의 역사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주체세력”이 바로 우리의 청춘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그 청춘들이 억눌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체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현재로선 그 체제 상부 권좌의 성격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은 ‘역사’와 ‘조국’에 이어 ‘대선’이란 장을 배치했다. 도올이 보기에 2012년 대선의 승자는 이미 박근혜로 결정돼 있다. 그가 ‘오늘의 승자’다. 문제는 그 승리가 이미 도를 지나쳤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권의 승리가 오히려 박근혜의 대선행보에 독이 될 것이라는 게 도올의 판단이다. 결과적으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 대선으로 미뤄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야권에 승산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민족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할 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안철수나 야당 후보나 ‘무아(無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게 도올의 주문이다. 대의를 위해서 뭉칠 때만이 승리의 가능성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집필했다는 저자는 ‘청춘’에서 ‘대선’까지의 네 장은 필독해주기를 당부한다. 거기에 보태자면 뒷부분의 ‘종교’와 ‘사랑’ ‘음식’에 관한 장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인의 심령을 갉아먹기 시작한” ‘사랑’이란 말에 대한 비판은 대선주자들에 대한 평이나 대선 전망보다도 더 흥미롭고 유익하다.

 

12.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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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온 택배 중의 하나는 좀 무거운 남성잡지다. <지큐(GQ)>(139호). 표지를 보니 GQ는 'Gentlemen's Quarterly'의 약자다. 내겐 낯선 잡지인데(남성지고 여성지고 구입해본 적이 없으므로) 지난달에 '입문서'에 대해 청탁받고 쓴 짧은 글이 이번 9월호에 실린 것. 입문서라는 ‘구태의연한 소재’에 대한 ‘날카로운 답’을 주문받았었다. 여러 권을 거명해도 됐지만 짧은 분량이라 그냥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몇 마디 소개하는 데 그쳤다. 잡지의 270쪽에 실려 있다. 글의 속도감을 살린 편집자의 손길이 인상적이다.

 

 

 

GQ(12년 9월호) 입문서

 

제목에 ‘입문’이란 단어가 붙어 있는 책들이 있다. 입문서다. 혹은 ‘개설’이나 ‘개론’이란 말이 붙을 수도 있다. 그것도 입문서다. 입문서는 그 자체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기에 군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닥치고 입문’이라고 웅변하고 있기에. 군림하고 있기에.

 

 

 

그런 당당한 입문서들 옆으로 ‘-하는 법’이란 제목이 붙은 책들도 있다. 이 또한 입문서일 확률이 높다. 최소한 입문서 흉내를 내거나 입문서 행세를 하는 책들이다. 그런 부류 가운데 ‘서평가’라는 자리에서 고른다면, 단연 눈에 띄는 책이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이다.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12)도 펴낸 저자이니 이 방면으론 뭔가 아는 저자다.

 

그는 단순히 ‘읽은 척 매뉴얼’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자못 진지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두 가지다. 첫째는 독서와 비독서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 책을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으로 구분하는 건 단순한 이분법이다. 물론 불가능한 구분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읽은 책이더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이미 읽은 부분을 잊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억은 언제나 선별적이고 독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읽은 책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얼마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셈이 된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둘째로 책이 너무 많다는 점. 한권의 책을 읽느라 다른 열권의 책을 읽지 못하는 게 오늘의 독서 현실이다. 이 경우에도 독서의 이면은 비독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기로 선택하는 건 동시에 어떤 책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비독서가, 역설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인 독서 전략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무독서와 다르게 비독서는 모든 책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 독서를 자제한다. 가령 350만권의 장서를 알기 위해서 제목과 목차만을 읽는 한 소설 속 도서관 사서는 비독서의 실천가라고 할 수 있다.

 

독서와 비독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독서 입문서로도 활용 가능하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책들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독서의 조건은 비독서다. 그런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주는 책이니 독서 입문서로도 단연 권할 만하다.

 

12.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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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대구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9월과 10월 매주 목요일 저녁(19:30-21:10)에 '세계문학 다시 읽기'와 '마이클 샌델 읽기' 두 종의 강의를 번갈아 진행한다(문의는 053-245-4560).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일정은 아래와 같다.

 

 

 

세계문학 다시 읽기

 

1. 9월 6일_ 괴테의 <파우스트>

 

 

2. 9월 20일_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 10월 4일_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4. 10월 18일_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마이클 샌델 읽기

 

1. 9월 13일_ 정의란 무엇인가

 

 

2. 9월 27일_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3. 10월 11일_ 민주주의의 불만

 

 

 

4. 10월 25일_ 공공철학과 공화주의

 

12.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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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곧바로 개강을 앞두게 됐다(실상은 오늘 저녁부터 강의가 있지만). 내달에 예정돼 있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강의일정을 소개한다. 9월 18일부터 화요일 저녁에 4회에 걸쳐서 세계문학 고전을 다시 읽을 예정이다. 주제는 '근대 개인주의 신화'로 잡았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searchword=&subj=F91243&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1. 9월 18일(화)_ 셰익스피어의 <햄릿>

 

 

2. 9월 25일(화)_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3. 10월 9일(화)_  괴테의 <파우스트>

 

 

4. 10월 16일(화)_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후안> 외

 

 

12. 08. 24.

 

 

P.S. 강의의 주제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만 와트가 다룬 <로빈슨 크루소> 대신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넣었다. 파우스트 신화와 관련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박사>(문학과지성사, 2002)와 투르게네프의 중편 <파우스트>(작가정신, 2012)를 곁들일 수 있다. 그리고 돈후안 신화와 관련해서는 몰리에르의 <동쥐앙>과 푸슈킨의 <석상손님>(<푸슈킨 선집>에 수록), 그리고 페터 한트케의 <돈후안>(베가북스, 2005)와 존 버거의 <지(G)>(열화당, 2008)까지도 더 다룰 수 있다. 여전히 다시 쓰이고 있는 신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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