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바깥에서 먹고 들어왔다가) 책 몇권을 챙겨서 카페로 왔다. 커피가 괜찮으면서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가 독서카페로는 최적인데 최상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다닐 만한 카페가 동네에 있다(최소한 아메리카노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보다는 내 입에 맞다. 게다가 동네 스타벅스는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래서 커피 한 잔과 함께 펼쳐든 책이 조지프 히스의 <계몽주의 2.0>(이마)이다. 서두이지만 기대만큼 만족스러운데 번역도 일품이다. 책갈피에서 역자의 이력을 다시 확인할 만큼. 주로 존 그레이 책 번역자로 만난 김승진 씨인데 저자가 아니라 역자를 보고 책을 골라도 되는 역자에 속한다(최근작은 <건강 격차>다).

원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본 부제는 ‘감정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다. ‘계몽주의 2.0‘이라는 제목의 취지를 살리자면 ‘몽매주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고 고쳐 말해도 좋겠다. 혹은 ‘이성의 정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아니,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프랭크퍼트의 말과 진단을 갖다쓰자면 ‘개소리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미국에서는 유명한 정치풍자 프로그램의 진행자 존 스튜어트의 주도로 ‘제정신 회복을 위한 집회‘까지 열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온갖 가짜뉴스와 차별적 선동이 판치고 있어서(트럼프 시대를 탄생시켰다) ˝졸지에 미국인들은 정치가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제정신인 정치와 정신 나간 정치로 분열되는 상황에 처했다.˝

어찌 미국만의 상황일 것인가. ‘정신 나간 정치‘, ‘개소리의 정치‘가 보수를 참칭하고 있는 건 실시간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 나간 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국과 달리 ‘제정신인 정치‘가 그래도 집권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그렇더라도 안도할 일은 결코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공유하는 독자라면 <계몽주의 2.0>의 독자로서 최적이다. 제정신의 정치를 수호하기 위한 전선에서 전우들과 함께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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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노벨경제학상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 교수에게 돌아갔다. 들어본 이름이다 싶어서 찾으니 그간에 ‘리처드 탈러‘라는 저자명으로 소개되었다. 바로 베스트셀러 <넛지>의 공저자다.

기사들에서도 두 가지 이름이 병용되고 있는데 어느 쪽으로든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국내 소개된 책은 지난해에 나온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리더스북)을 비롯해 캐스 선스타인과의 공저 <넛지>(리더스북)와 <승자의 저주>(이음)까지 세 권이다. <승자의 저주>는 2007년에 나왔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2009년 출간된 <넛지>는 ‘올해의 책‘에도 선정된 베스트셀러. 그러고는 좀 간격을 두고 출간된 게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인데, 이제 보니 나도 놓친 책이다.

허술함을 만회하고자 주문을 넣는다. 그런데 제목은 뭔가 찔리는 데가 있군. 하지만 순전히 번역본 제목상으로만 그렇다. 저자가 창시자로 꼽히는 행동경제학의 탄생과정과 배경을 소개하는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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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준비차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의 밤>(을유문화사)를 읽다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란 표기가 나와서 잠시 검색을 해보았다. 우리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부르는 15세기 탐험가의 이탈리아어 이름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다. 아직 뉴스기사나 인터넷 사전에서 콜럼버스가 콜롬보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너무 친숙해진 이름이어서 변경에 대한 거리낌도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한 것은 고유명사의 번역 문제인데 예전에 ‘어륀지‘(오렌지) 파문이 한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싶다. 의견 차이가 커서 정리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겠고. 오렌지는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말 표기에서 원음주의(원음 충실주의)를 어느 수준까지 적용할 것이냐의 문제다. 원칙적으로는 원음주의가 절대적으로 옳은/우선적인 기준이냐라는 문제도 걸려 있다.

생각나는 사례가 도시명의 표기인데 작고한 안동림 선생은 ‘시카고‘란 도시이름은 반드시 ‘쉬카고‘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게 원음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출판사 창비는 자체적인 외국어 표기법을 갖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 수도 ‘도쿄‘는 ‘토오꾜오‘라고 적어야 한다(창비 출간서에서는 그렇게 표기한다). 그것도 원음이 그에 가깝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이 두 표기는 아직 우리사회의 통용 표기는 아니다. 원음(현지음)도 고려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가장우선적인 고려사항은 아니기에 그렇다.

가령 <러시아의 밤>의 저자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를 현행 외국어표기법에 맞게 고치면 ‘블라디미르 오도옙스키‘가 된다. ‘블리디미르‘와 ‘블라지미르‘의 차이는 구개음화된 ‘di‘의 음가를 어떻게 읽어줄 것이냐의 차이다. 구개음화를 반영하면 ‘지‘에 가깝고 철자만 그대로 옮기면 ‘디‘가 된다. 그런데 ‘오도예프스키‘와 ‘오도옙스키‘의 차이는 정반대다. ‘오도옙스키‘에서 ‘옙‘이 실발음의 근사치를 표기하기 위한 조처라면 ‘오도예프스키‘의 ‘예프‘는 철자를 분리시켜서 표기했던 예전 표기법의 관행을 따른 것이다(‘도스토옙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도 마찬가지다). 두가지 조합 모두 어떤 일관된 원칙이 적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블라지미르 오도옙스키‘와 ‘블라디미르 오도예프스키‘로 표기한다면 나름 일관적일 테지만).

외국어 표기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행과 합의다. 관행을 존중하되 타당한 근거(원음주의는 그 근거 가운데 하나다)에 따라 합의로 변경가능하다는 것. 남아공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현재는 남아공을 떠났지만) 존 맥스웰 쿳시(Coetzee)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코에체‘라고 표기됐었고, 지금도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쿠체‘라고 읽는다. 대체 철자만 갖고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기 어렵다(철자중심주의의 한계다). 당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쿳시‘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후에는 ‘쿳시‘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관행으로 굳어지기 전에 표기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코에체‘로 굳어졌더라도 나는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한국어사용자)끼리의 합의의 문제라서다.

각 언어는 발음과 표기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맞추려고 할 때 어륀지 사태 같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헤겔‘ 같은 독일철학자를 프랑스에서는 ‘에글‘이라고 읽고 러시아에서는 ‘게겔‘로 읽는다. 그런 경우 ‘에글‘과 ‘게겔‘은 이미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 체계에 들어가 있기에 맞다, 틀리다의 문제를 넘어선다. 러시아에 있을 때 서점에 가서 ‘조지 오웰‘의 책을 찾다가 낭패를 겪은 일이 있는데 오웰은 러시아어로는 ‘오루엘‘이라고 읽는다. 곧 영어(오웰)와 러시아어(오루엘)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빚어졌던 해프닝.

공연히 긴 얘기가 되어 버렸는데, 다시 콜럼버스 문제로 돌아오면 문제는 이것이 한국어인가 아닌가, 곧 외래어가 된 고유명사인가 여전히 외국어인가, 이다. 한국어 체계라는 문턱을 넘어온 것인가 아니면 아직 그 바깥에 있는 것인가. 한국어 체계 안에 들어와 있다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를 이르는 한국어다. 이 경우 ‘콜롬보‘는 음역이지 번역이 아니다. ‘쉬카고‘나 ‘토오꾜오‘나 ‘어륀지‘가 번역이 아니라 음역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번역은 한 자연어를 다른 자연어로, 우리의 경우엔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더 복잡할 테지만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략 이러하다. ‘콜롬보의 달걀‘은 한국어가 아니라는 얘기를 길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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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없는 연휴의 이점은 평소 벼르던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강의와 관련한 책들도 많이 밀려 있지만, 연휴를 핑계로 강의와 무관한 책들에 대해서도 한껏 욕심을 내게 된다(읽다 보면 유관해지기도 한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서는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교유서가, 2017)와 자크 파월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오월의봄, 2017) 등이 거기에 속하는데, 둘다 미국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연결되기도 한다. 



거기에 덧붙여 욕심을 내보는 것이 남회근의 맹자 강의다. 얼마전에 <맹자>의 '진심' 장을 풀이한 <맹자와 진심>(부키, 2017)이 출간되었는데, 맹자 강의로는 <맹자와 공손추>(부키, 2015), <맹자와 양혜왕>(부키, 2016)에 이어서 세번째로 나온 것이다. 



맹자에 대한 강의로는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통나무, 2012)과 푸페이롱의 <맹자 교양강의>(돌베개, 2010) 등을 갖고 있지만 진득하게 읽어볼 짬이 없었다. 한데 남회근의 강의가 좋은 자극과 길잡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단 <맹자와 진심>은 손 가까이에 놓았다(도올의 맹자 강의는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와 함께 <도올의 로마서 강해>(통나무, 2017)도 침대맡에 놓았다. <기독교성서의 이해>(통나무, 2007)와 <요한복음 강해>(통나무, 2007)도 예전에 손에 들었지만 다른 책들에 떠밀려 미처 다 읽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그렇게 떠밀리기만 하다가는 결국 죽도 밥도 아니게 된다. <도올의 로마서 강해>를 그래서 마지노선으로 삼기로 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한들출판사, 1997)까지도 욕심을 내볼까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품절된 상태다. 나로선 <도올의 로마서 강해> 정도에서 입막음할까 한다. 


연휴도 어느덧 반넘게 흘려보냈는데, 강의책을 포함하여 이것저것 손에 든 10여 권의 책을 무난하게 마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인으로서는 오랜만에 호사를 부리고 있어서 흡족하다. 독서를 위해서라면 매년 한달 정도는 안식월이 주어져야 한다고 한밤중에 혼자서 우겨본다... 


17.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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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후설 현상학에 관심을 갖고 몇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후에는 관심을 놓았었다. 최근에 새 입문서들이 출간되면서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된다. 아직 발동이 걸린 상태는 아니지만 주시 단계라고 할까. 단 자하비의 <후설의 현상학>(한길사, 2017)에 이어서 후설 번역에 공을 들여온 이종훈 교수도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한길사, 2017)란 입문서를 내놓았다(그러고 보니 후설의 핵심 저작인 <논리연구>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오늘날 후설현상학은 철학, 인문학,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예술, 체육, 간호, 상담심리, 심지어 연구방법 분야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잘못된 해석과 오해도 빈번하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저자 이종훈은 ‘다시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이에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가기>는 후설이 남긴 메모와 원고, 저술에만 의지해 후설현상학의 전개과정을 찬찬히 뒤따르며 모든 학문적 오해와 왜곡을 불식시킨다."

 

입문서를 읽고 나면 예전에 읽다가 만 <데카르트적 성찰>이나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시간의식> 등에 재도전해볼 수도 있겠다(사실 후설은 데리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손에 들었었다).


 

그러고 보니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한길사, 2009)도 이종훈 교수의 번역으로 진작 완간되었다. 통상 <이념들>로 약칭되고,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문학과지성사, 1997)로 그 일부가 번역되었던 책이다. 돌이켜보니 문학과지성사판 <이념들>과 스피겔버그의 <현상학적 운동1,2>(이론과실천, 1991/1992)도 구해서 읽던 때가 있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어지간한 책을 다시 읽는 일이 모두 시간여행의 의미를 갖게 되는군.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 문학과지성사, 1982)와 박이문 선생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지와사랑, 2007; 일조각, 1990), 한전숙 교수의 <현상학>(민음사, 1996) 등이 내가 읽은 책들이다(이 가운데 <현상학>은 수준급의 입문서인데, 유감스럽게도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 철학 전공이 아니면서 이 정도 읽은 거면 나쁘지 않은 스코어 아닐까. 다만 교양 수준을 넘어서려면 업그레이드도 필요해 보인다. 아, 이럴 때면 한 10년은 나이를 거꾸로 먹었으면 싶다. 공자님 말씀에도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고 했지만, 인생은 행복을 위해선 너무 길고 인식을 위해선 너무 짧다...

 

17.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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