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21일)'이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다루고 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911년 오늘이어서이다. 한데, 두 종의 국역본 가운데, 커뮤니케이션북스판의 이미지를 올려놓고 있어서 예전 교수신문의 고전번역비평을 떠올리게 됐다. 내 기억에는 민음사판이 더 추천할 만한 번역이라고 제시됐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보니 그렇다. 참고삼아 챙겨놓는다(<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2>(생각의나무, 2007)에 수록돼 있다).

한국일보(08. 07. 21) 미디어의 이해

1911년 7월 21일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이 태어났다. 1980년 69세로 몰. 맥루한은 마니토바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다가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캠브리지대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영문학 교수로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서 20여년간 대중문화를 강의했다. 지금은 일상 용어가 된 ‘지구촌’이나 ‘정보시대’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미디어의 이해>는 맥루한의 이런 공부의 배경-테크놀로지와 문학과 문화비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책이다.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된 것은 1964년이다. 반향은 대단했고 맥루한은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듬해 뉴욕헤럴드트리뷴은 맥루한을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았다. 1967년 뉴스위크는 학자로는 드물게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는 이 책의 서론 제1장이다. 그는 이어 나르시스 신화를 빌어 미디어 시대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나르시스는 혼수상태나 감각 마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narcos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신화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한 것(나르시스에게는 거울 같은 물)에 갑자기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바로 ‘인간의 확장’이다. 맥루한은 음성언어부터 돈, 시계, 사진, 신문, 자동차, 광고, 게임, 텔레비전, 무기 등 26가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물로 보고 독특한 예언적 표현과 비유, 고전 문학과 현대 대중문화를 종횡하는 현란한 인용과 분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미디어로 본 문명사이기도 하다. 이 책이 미디어 전공학과의 필독서를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다. 영화 ‘매트릭스’의 광고카피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였던가.맥루한은 40년 전에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하종오기자)

교수신문(06. 11. 24) 고전번역비평(53)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박정규 역(커뮤니케이션북스. 1997)과 김성기·이한우 공역(민음사, 2002)이 그것이다. 그 외 완역이 아닌 초역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판돼 찾을 수 없다. 이글을 위해 사용한 영어 원본은 『Understanding Media』(MIT Press, 1994. 초판 1964년)이다. 박정규 역과 김성기·이한우 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보다 발전된 번역본일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논리적인 추론일 뿐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먼저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 특별한 성격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것은 ‘미디어의 이해’의 원저자의 글이 난삽하고 의미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글을 번역하는 경우 원천적으로 옮긴 글 또한 난삽하고 그 의미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맥루한의 글은 구술적이다. 즉 명석하고 분명함과는 거리가 먼 反개념적, 反분석적, 反기계론적인 것이 그의 글이다.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번역을 기계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번역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은 그의 원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는 참고서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번역본만으로는 원본의 의미전달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맥루한의 저서의 경우는 역자의 적절한 해석과 의역이 불가피한 부분이 꽤나 많다. ‘미디어의 이해’는 꽤 두꺼운 책이다. 이를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다. 몇 가지 주된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 평가하고자 한다.



꽤나 난삽하고 애매한 책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는 맥루한의 가장 유명한 메타포 중의 하나다. 이 말은 책 ‘미디어의 이해’ 첫 장에 등장한다. 그 첫 구절을 박정규는 이렇게 옮겼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사물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분할하고 구분하는데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제 실제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 다소 충격이 될 것이다.”(23쪽) 김성기 등의 번역은 이렇다. “모든 사물들을 통제의 수단으로 분리해서 보는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35쪽) 

이 문장의 원문은 “In a culture like ours, long accustomed to splitting and dividing all things as a means of control, it is sometimes a bit of a shock to be reminded that in operational and practical fact, the medium is the message.”(7쪽)이다. 이 문장(원문)의 전언(傳言)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시대의 사물이해 방식은 이분법 혹은 분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을 지배 통제하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이분 혹은 분절이 아니라 통합적인 인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주장이다”하는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박정규와 김성기·이한우 번역에 빠진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보다 쉽게 전달하는 데는 후자가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두 번역문 모두 원문 없이 번역문만을 읽을 때 원문의 전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개념 번역, 암묵적 의미 살려야
다른 예를 보자. 여기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된다. 다시 말해 번역문만을 갖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That technologies are ways of translating one kind of knowledge into another mode has been expressed by Lyman Bryson in the phrase ‘technology is explicitness.’ Translation is thus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 What we call ‘mechanization’ is a translation of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 into amplified and specialized forms.”(56쪽)

박정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한 종류의 지식을 또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법이라고 라이먼 브라이슨(Lyman Bryson)은 말하면서 ‘테크놀로지는 명료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번역(translation)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것이다. 한편 우리가 ‘기계화’라는 부르는 것은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 증폭되고 전문 분화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93쪽)

한편 김성기·이한우 역은 이렇다. “기술이 한 종류의 지식을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라이먼 브라이슨 Lyman Bryson은 ‘기술은 명료화이다’라고 표현한바 있다. 따라서 번역이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우리인간들의 본성을 증폭되고 특수화된 형태들로 번역하는 것이다.”(102쪽)

이들 사이에 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규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옮긴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을 김성기 본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으로 옮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specialized form’을 ‘전문 분화’와 ‘특수화’로 옮긴 부분이다. 이들 두 가지 번역의 경우는 박정규 역이 김성기 역보다는 쉽게 그리고 보다 원문의 뜻을 충실히 옮기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서 흠이 발견된다. 위 문장의 경우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의 경우 이를 단순히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으로 옮기는 경우 원문과 대조 없이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보다는 ‘사물의 원래 자연적인 상태의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래적인 속성들’ 정도의 의역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번역은 오역이나 불충분한 번역이 될 위험이 있다.

한 가지 더 작지만 큰 문제이기도 한 것이 있다. 그것은 “technology is explicitness.” 문장의 ‘explicitness’ 이다. 이를 두 번역본은 모두 ‘명료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explict’는 ‘tacit’의 반대되는 그래서 ‘암묵적’과 대칭적인 ‘명시적’-보이게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의-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맥루한이 부단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근대적 시각 문화라고 이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암묵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좀 더 세심해야할 이런 종류의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Synesthesia or unified sense.’(315쪽)를 두 번역은 모두 ‘통일된 감각’(451쪽, 437쪽)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통 감각 또는 통합감각’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의미전달이 왜곡되거나 전달이 잘 안되는 용어들은 많이 발견된다.

원서 대신하기 위한 노력
두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얻게 된 결론은 원문의 번역내용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큰 차이가 없게 된 이유는 아마도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 앞서 나온 박정규의 번역을 참조했고 그 보다는 두 번역 모두가 일본어 번역본-박정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김성기·이한우는 참조했음을 언급하고 있다-에 의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두 번역에는 모두 직·간접으로 일본어 번역이 많이 참조됐기 때문에 유사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된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번역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다. 그 이유는 번역 책으로서의 격식을 보다 충실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박정규 역에는 없는 원본의 이름이나 참조서적, 번역과정 등에 관한 내용을 김성기·이한우의 역은 밝히고 있고 또 욕심에 차진 않지만 역자 주 그리고 L. H. Lapham의 해제용 서론 등이 첨가돼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천을 하면서도 맥루한 사상을 이해하는데 번역본이 원서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번역자가 전공이 다르기 때문인지 주석이 필요한 사항의 선택이나 용어 해석 등에 있어서 단절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훗날 보완되기를 기대해 본다.(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언론사상) 

08. 07. 21.

P.S. 요는 두 종의 번역본 모두 원서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못된다는 것이겠다(유감스럽지만, 현재로선 다수 고전 번역서들의 현실이 그러하다). 내가 알기에 맥루한의 책은 <미디어의 이해> 외에 <미디어는 맛사지다>(열화당, 1988;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등이 더 소개돼 있다. 그리고 해설서로는 조너선 밀러의 <맥루안>(시공사, 2001), 필립 마샨드의 <마셜 맥루언>(소피아, 2006), 그리고 데이비드 스테인즈 등이 엮은 <매클루언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눈에 띈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지만 맥루한의 책을 연달아 낸 출판사에서 그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은 '매클루언의 이해'라고 내는 건 매우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7-22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22 10:32   좋아요 0 | URL
사실 대단히 미디어 친화적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론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보화사회론 같은 것도 그렇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어렵네요...

로쟈 2008-07-24 22:06   좋아요 0 | URL
사실 어렵기로는 우리말이 더 어렵습니다.^^;
 

인터넷 서비스사를 바꾸는 바람에 오전에 잠시 새 연결망 설치작업이 있었고 또 그 바람에 약간의 책정리를 하다가 리처드 레인의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 2008)의 원서를 발견했다. 잠시 읽어보게 됐는데, 독일 극작가 페터 바이스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어 몇 자 적어놓는다. 보드리야르는 바이스의 주요 작품들을 불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책의 '왜 보드리야르인가?'란 서론은 "장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제로 글을 쓴 작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다."(15쪽)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실천한'은 'embody'를 옮긴 것인데, 말 그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현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인 이론가가 보드리야르라는 것.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같은 시리즈로 나온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과 함께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도래와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삼총사'이기 때문이다(제임슨의 명성은 물론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반대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주저 중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런 보드리야르(1929-2007)의 경력은 장 폴 사르트르가 주관한 잡지 <현대>에 주로 글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 "사르트르는 대체로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 때문에 모든 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그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독일의 사회학과 문학에 흥미를 느꼈다."(19쪽) 여기서 '모든 세대'는 'a whole generation'을 옮긴 것이다. 그냥 '한 세대 전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짐작에 <변증법적 이성비판> 같은 책을 염두에 둔 멘트로 보인다. 국내엔 이 책의 서론만이 <방법의 탐구>(현대미학사, 1995)로 번역돼 있다. 보드리야르는 그러한 독일 철학에 보태서 독일 사회학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는 것.

"그는 더 전문적인 분야를 일컫는 '문학'이나 '철학' 같은 용어보다 '문화'라는 말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에 서 있는 이론가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주요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처럼) 전통적이고 체계적이며 철학적인 훈련을 받기보다는 좀더 우회적인 길을 걸었다.(19-20쪽)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은 'margins of mainstream French intellectual thought'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다 똑같이 유명한 프랑스 이론가/사상가로 알고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서 푸코처럼 주류(메인스트림) 정통파도 있고 보드리야르 같은 비주류 주변부파도 있는 것이다.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 보드리야르의 <푸코 잊기>(1977; 영역본은1987)이다. 푸코의 생전에 나온 책이다! 책이라곤 하지만 분량은 팜플릿 수준인데, '푸코를 잊어버리기'란 제목으로 <세계의 문학>(1989년 가을호)에 번역됐었다(무슨 소리를 적어놓았는지 다 잊어먹었지만).

여하튼 "제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위치는 주류적 사고의 경계 지점에서 유희하는 그의 후기 출판물들과 유사한 맥락에 서 있다." 그런 비주류성 혹은 가장자리성과 잘 호응하는 것이 독일 극작가들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페터 바이스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1960년대에 보드리야르는 특히 극작가 피테르 바이스(1916-1982)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보드리야르는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 바이스의 주요작품 네 편을 번역햇다. <소실점>(1964), <마라/사드>(1965), <토론>(1966),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1968). 불안정한 시점의 형식을 취하여 날카로운 정치적 진술들을 담고 있는 이 텍스트들은 보드리야르가 글쓰기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20쪽)

Photo: Peter Weiss, 1960er Jahre

'페테르 바이스'는 '페터 바이스(Peter Weiss)'라고 읽어주는 게 낫겠다(물론 '피터 웨이스'라고 영어식으로 읽은 책들도 있긴 하다).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읽고 또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됐다.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바이스가 보드리야르에게 끼친 영향을 말한다(The influence of Weiss is usually played down). 그것이 보통 간과됐다는 것. 하지만 주요작을 네 편이나 번역한 이상 모종의 영향관계나 친연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마라/사드>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다른 세 작품은 좀 생소한데, 찾아보니 <토론>이라고 옮겨진 작품은 <수사(Die Ermittlung)>, 영어본으로는 <조사(The Investigation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한국문화사, 2003)로 번역돼 있다. 제목대로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다룬 '기록극'이라 한다. 11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1 승강장의 노래
2 수용소의 노래
3 그네의 노래
4 생존가능성의 노래
5 릴리 토플러의 종말에 관한 노래
6 하급친위대원 슈타르크의 노래
7 검은 벽의 노래
8 페놀의 노래
9 방공호 구역의 노래
10 치클론 B가스의 노래
11 화장로의 노래

페터 바이스는 유대계였던 탓에 나치 독일을 떠나 오랜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전기적 내력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대표작 <마라/사드>는 어떤 내용인가? "<마라/사드>는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장 폴 마라(1743-1793)의 암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그러나 바이스는 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비튼다. 그의 희곡은 한때 샤랑통 시설(Asylum of Charenton)'에 수용된 마르키 드 사드(1740-1814)가 그곳에서 상연한, 마라의 암살 사건을 다룬 연극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20-21쪽)

'샤랑통 시설'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사드가 감금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마라/사드>는 <사드 후작의 연출로 샤랑통 정신병원의 재소자들이 공연한 장 폴 마라에 대한 박해와 암살사건(The Persecution and Assassination of Marat as Performed by the Inmates of the Asylum of Charenton Under the Direction of the Marquis de Sade)>이라는 긴 원제를 가진 작품으로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사드가 연출가로 분하여 환자들과 함께 마라의 암살 사건을 극중극으로 재현한다" 때문에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Marat/Sade becomes a play located in the historical real, but also one that dislocates history.).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와 상통한다는 것.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연극 작품이 생산되고 상연된 시대를 바이스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닫는 동시에,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방식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를 사고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 역시 흔히 수행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과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을 보여주는 희곡을 번역한 보드리야르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21쪽)

이 대목은 원문과의 대조를 필요로 한다. "With Weiss' Marat/Sade, we have a new and interesting form for the explorarion of political ideas, one which strays far from the typical Marxism that informed Weiss' thinking at the time of the play's development and production. Similarly, Baudrillard was exploring different ways of performing Marxist anaylses, and we can tie in his work translating this play of 'grotesque violence and sexual excess' with his interest in the French thinker Georges Bataille(1897-1962)."(4쪽)

내가 읽은 바를 나대로 옮기면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 사상을 탐구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과 접하게 된다. 이 형식은 이 희곡이 씌어지고 공연되던 시기 바이스의 사고를 틀 지웠던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한참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수행/상연하는 다른 방식들을 탐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의 희곡을 번역한 그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관지어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보드리야르는 바타이유(바타유)와 접속된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사이에 조르주 바타유는 스스로 '이종적 문제(heterogenous matter)'라고 부른 '과잉', 요컨대 쓰레기, 배설물, 폭음과 폭식 등 불법적이고 불합리한 것에 기반한 글쓰기 이론을 구축했다. 그는 철학의 거장들이 흔히 자신들의 철학은 그러한 세속적 문제를 초월하려는 시도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시하는 영역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21쪽)

바타이유의 이러한 '이질적인' 철학은 당대의 주류 사상가들로부터 거부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 '재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바타유와 그의 저서에 담긴 새로운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라는 제약에 맞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바타유를 참조함으로써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사상가들 전체를 반反 헤겔 혹은 반反 마르크스라는 서사 내에 한 묶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22쪽)

참고로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To understand Bataille, and the new interest in his work, is to understand the way in which modern French thinkers reacted to the constraints of Hegel and Marx; in other words, we can situate a whole host of thinkers that include Baudrillard in one stretch of narrative."(4쪽)   

역시나 나대로 다시 옮기면, "바타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구속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가들을 하나의 내러티브 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

지난번에도 언급한 것이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965343) 리처드 레인은 줄리언 페파니스의 책 <이질성과 포스트모던(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을 높이 평가하는데(<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 인용한 대목은 이 점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아니, 서론에 나오는 것이니까 미리 암시해준다고 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읽게 되는 보드리야르는 페터 바이스와 바타이유 사이의 보드리야르이다...

08. 03. 29.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30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3-30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이유 이야기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군요.^^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언제나처럼.

로쟈 2008-03-30 10:13   좋아요 0 | URL
람혼님에게는 기별도 안 갈 내용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바이스의 희곡 중 베트남 토론회라는 작품이 있는데 보들리야르가 번역했다는 토론이 혹시 이 작품은 아닌지요...심문이라는 희곡은 따로 있는데요...(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
13번 페터 바이스 관련 흑백화보 설명에서)

로쟈 2008-04-07 00:30   좋아요 0 | URL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라고 따로 거명돼 있어서요. 한데 번역된 건가요? 저는 중앙일보 책이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중앙일보 것은 부모와의 이별 번역본이고요.화보에는 바이스의 희곡이 연극무대에 올려진 것을 소개하고 있어요.한번 확인해보세요.박스에 너무 깊이 넣으셨나요...

로쟈 2008-04-07 01:15   좋아요 0 | URL
게다가 창고에 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태산이네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처음 세 장을 읽었다. 절반은 지난달에 읽은 것인데, 이 노학자의 경륜 있는 강의에서 몇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중 하나는 단테의 <신곡>과 같은 '클래식'(고전)을 읽는 의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마미치는 그 '클래식'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부터 검토하는데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듯해서 정리해놓는다.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첫째로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 ‘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물론 단테 ‘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테 ‘에게’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테를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고전 ‘에서’ 배우는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이라는 어휘는 본래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고전’은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인데, 그 밖의 유럽 언어도 대부분 맨 첫 글자나 맨 마지막 글자만 다를 뿐 발음은 모두 ‘클래식’이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14쪽)

그러니까 어원에서부터 따져보자면 '클라시스(명사) -> 클라시쿠스(형용사) -> 클래식(명사)'의 순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원적 의미는 '함대'라는 것. 로마 해군의 함대를 가리키던 말이 '클라시스'였고 거기에 대응하는 영어라면 'fleet' 정도겠다. 군함 한 척이 아니라 최소한 두세 척은 거느리고 있는 '선단' 말이다. 그럼 이 '클라시스'에서 파생된 '클라시쿠스'는 무슨 뜻인가?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로마에는 징세 제도가 있었지만, 군함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를 모아 만들었다).

그러니까 클라시쿠스란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고대 로마시대만큼 전쟁을 자주 벌이지는 않으니 '클라시쿠스'에 상응하는 사회적 계층이 무엇인지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수십에서 수백 억원 정도를 사회나 국가에 기부할 수 있는 형편의 '부호'를 가리킬 수는 있겠다(하기야 요즘 시세로 '함대'를 기부하려면 수조 원이 들 터이지만). 그 정도면 재벌 내지 준재벌이겠고(물론 탈세하는 게 아니라 세금 왕창 내는 걸 기준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대 로마 시민은 6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 최상급을 클라시쿠스(Classicus)라고 하였다. 여기서 뜻이 변하여 예술상의 최고 걸작도 '고전'이라 부르게 되었다."란 설명도 나온다. '클라시스'와의 연관성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사회적 최상층을 가리킨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말해준다.  

그렇다면 다시, 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마미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그렇다면 국가적 위기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심리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든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작품을 가리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중세의 비교적 이른 시대, 즉 교부시대부터 그러한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15쪽)

이에 따르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유비적 관계다. <국가적 위기 : 클라시쿠스 = 인생의 위기 : 클래식>. 다시 말해 '클래식'이란 인생의 위기에 '함대'만큼의 든든한 힘을 주는 작품을 말한다. 비유컨대, 위대한 고전은 거대한 '항모 선단'쯤 되는 것이다(때문에 조각배 몇 척 가지고 '고전'을 참칭하면 곤란하겠다). 더불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면 '고전'은 '쇳덩이'에다 '종잇더미'에 불과한 것이겠고. 정리하면 이렇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은 '클라시스'는 원래 ‘함대’라는 의미였으며 '클라시쿠스'는 국가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애국자이기도 하고 재산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변화하여 인간의 심리적 위기에 진정한 정신적 힘을 부여해주는 책을 일컬어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비단 책뿐만 아니라, 회화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정신에 위대한 힘을 주는 예술을 일반적으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15쪽)

 

 

 

 

 

 

 

 

 

  

그럼, 이 '클래식'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나? "일본에서는 '클라시스'에서 유래한 '클래식'을 ‘고전’이라 번역한다. 이는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典], 요컨대 고전이 그러한 교화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클래식의 번역어로 선택된 것이다. ‘典’은 상형문자로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는 것은 의미한다. 책상 위에 올려둔다는 것은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다."(15-16쪽)

 

이 '고전 읽기'가 주로 인문학의 소관이며 인문학 공부이다. 그리고 <신곡> 읽기가 바로 그러한 공부이다. 때문에 이마미치 교수는 '고전'으로서의 <신곡>을 읽기 전에 이러한 '서설'을 붙여둔 것이고. 이러한 설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된 생각은 '고전학'로서의 인문학이 기원적으로는 클라시쿠스의 역할을 하는, 클라시쿠스의 학문이면서 클라시쿠스를 위한 학문이 아닌가라는 점. 애국자이면서 재산가인 이들을 위한 인문학.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석학들의 인문학, CEO를 위한 인문학이 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학 옆에 '인생의 위기' 혹은 '나락'에 떨어진 이들을 위한 '노숙자 인문학'이 있겠다. 노숙자? 이마미치 교수가 '클라시쿠스'와 대비시켜서 설명해주고 있는 '프롤레타리우스'가 로마시대의 '노숙자' 아닐까? 

 

"덧붙여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 ― 자식은 프롤레스(proles)라고 한다 ― 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 국가에 헌상할 것이라곤 프롤레스뿐인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따라서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바로 이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에서 빈곤한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독일어가 생겼고, 그 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 '클라시쿠스'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이 두 단어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 로마문화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어였으며, 생각해보면 프롤레타리우스라는 형용사는 서글픔이 깃든 말이기도 하다."(14-15쪽)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계급'이다. 그리고 요즘에도 인문학은 이 두 계급에 '봉사'한다. 오른손으로는 CEO를 위한 인문학최고위과정을 만들고 왼손으로는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든다. 모순적인가? 단테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첫번째 조건으로 이마미치 교수가 꼽고 있는 인간론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 다시 말하면 휴머니티의 빛과 그림자, 인생의 행복과 적막 양면을 두루 살피고 인간에 관한 사상을 형성하는 시각이 위대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다"(68쪽)고 믿는다.  

 

그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인문학은 배분되어야 한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고전의 나눔'이라고 해야 할까? 감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문적인 것에 있어서도 '나눔'은 필요하다. 그래야 '공통적인 것'들을 창출할 수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휴머니즘)보다 먼저 오지 않는다... 

 

08. 03. 16.

 

 

P.S. 이 글은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도 게재되었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9210).


댓글(6) 먼댓글(1)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 류차달 할아버지
    from 일체유심조 2008-03-19 14:18 
    우연히 들른 블로그에서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의 어원에 대한 재미있는 해설을 봤다. 요컨대 클래식이란두 세 척 이상의 함대를 일컫는 말로 해양 패권을 다투던 고대 유럽에서 이런 함대를 로마라는 국가에 제...
 
 
2008-03-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6 21:4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서양학의 경우에 일본과 막바로 비교할 순 없겠죠.--;

virtuepeak 2008-03-17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신곡을 암송했다고 하던데, 클래식에 진정으로 충실한 사례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8-03-17 13:01   좋아요 0 | URL
좁혀 말하면, 죽음의 면전에 들고 갈 수 있는 책이 '고전'이겠죠...

섬나무 2008-03-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께 드리는 내 메모들

표현주의는 간단히 초월될 수 없지만 표현성은 늘 초월되어 왔다. '순진한 단어' 들이 거주하는 텍스트적 변형<텍스트들 간의 오고감>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가정하는 의미의 내재성은 이미 자신의 외재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미(의 내재성)>은 항상 이미 <먼저>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간다<운반한다> 그것은 어떠한 표현행위 이전에 (자신으로부터) 이미 벗어나있는 <달라져있는> 것이다.


랑가주(언어활동)를 적극적으로 체득화한것이 언어로서의 시적언어이다. 시적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계에 위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았거라 ,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난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 집> 기형도


기형도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전정'과 '모종'이다 - 정과리 <무덤 속의 마젤란>-



북아메리카 중서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 ‘불스’와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애정생활에 관한 한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보인다.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한 파트너하고만 짝짓기를 하며, 나중에 직접 만든 둥지에서 새끼를 함께 돌본다. 반면 산에 사는 그들의 동족은 정반대의 애정생활을 보인다. 수컷은 새끼를 낳아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곧장 다른 암컷의 치마 속을 호시탐탐 노린다.

유전자 측면에서만 보면, 두 들쥐는 거의 동일하다. 지난 15년간 들쥐들을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학 래리 영 박사팀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성실한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암컷에게는 옥시토신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자식과 배우자에 대한 애착을 유발하는 호르몬이다. 이들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순식간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고, 암컷 또한 파트너에 대한 흥미를 곧바로 잃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음 연구 결과였다. 이번에는 산에 서식하는 들쥐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와 옥시토신 수용체의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들쥐들이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예전의 불성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초원에 서식하는 들쥐처럼 그들도 이제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전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들쥐를 통한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도 뇌 속에 어떤 호르몬이 좀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랑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남성의 갱년기- 남성은 30세부터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매년 1%씩 감소한다.

증세- 권태, 허무감, 우울증, 의욕상실, 무기력, 만성피로, 업무저하, 체력저하,

두통, 눈의 피로감, 어지러움, 수면부족, 불면증, 근육통, 관절염.


그는 자신이 갱년기의 허무감과 우울증에 의해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의 바소프레신도 테스토스테론처럼 꾸준히 감소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의 메모는 어디로 벗어난 걸까.

로쟈 2008-03-19 22:59   좋아요 0 | URL
요즘 같아서는 저도 호르몬 주사를 좀 맞아야겠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자주 출간되고 있는 교양과학서는 뇌과학에 관한 것이다. 교수신문에서 푸짐하게도 네 권의 뇌과학 관련 신간들을 다루고 있는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16). 책들을 다 읽어볼 여유는 없지만 무슨 내용들이 쓰여 있는지는 일람해두는 게 유익하겠다.  

교수신문(08. 01. 29) 의식과 영혼의 네트워크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기는 더욱 쉽지 않다. 최근에 소개된 네 권의 번역서로 마음을 현대적 의미로 비교 분석해보는 작업은 마음의 행로를 살피기에 흥미로운 일이다. 인지신경과학과 철학이 만난 『스피노자의 뇌』, 숨겨졌던 의사의 일대기와 뇌과학이 만난 『영혼의 해부』, 신경회로망과 진화론이 만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철학과 뇌과학이 만난 『마인드』가 대상이 됐다. 네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아쉬운 점은, 동양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보았나 하는 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음을 말할 때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마음을 말하는 한자어인 心과 情에는 모두 심장을 뜻하는 心자가 들어간다. 동양의 마음에 대한 견해는 성리학자의 四端七情論에서 엿볼 수 있다. 이황은, 사단은 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론은 氣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라는 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애간장이 탄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재미난 표현이 있다.



뇌는 여러 절차를 거쳐 필요한 몸의 부분을 움직이도록 명령한다. 뇌의 변연계에 자리 잡고 있는 편도체는 두려움과 관계가 있으며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쥐에게 편도체가 없어지면 고양이를 봐도 놀라지 않는다. 두려움이 사라져 잡혀 먹히는 난처한 일이 일어난다. 에크만(Ekman)은 화, 공포, 혐오, 행복, 슬픔, 놀람을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본적 정서라고 보았다. 정서는 대뇌 좌우반구에서 비대칭적으로 처리된다. 만약 좌반구가 손상되면 두려움, 우울증이 나타나며 우반구가 손상되면 무관심해진다. 우반구는 정서를 만들어 내고 좌반구는 정서를 언어를 사용해 해석한 후, 정서의 개념적, 인지적 수준을 형성한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이집트 사람은 선악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기록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미라를 보존하기 위해 뇌를 제거한 반면, 심장은 그 사람의 존재와 지성을 상징한다고 여겨서 잘 보존했다. 심지어 사람이 죽으면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깃털의 무게와 비교했다. 악한 사람은 심장이 무겁고, 선한 사람은 심장이 깃털처럼 가볍다고 여겼다. BC 5세기 알크마이온이나 아나사고라스에 이르러서야 뇌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던 알크마이온은 최초로 사람을 해부했으며, 시신경과 귀의 ‘유스타키오관(Eustachian tube)’을 발견했고, 뇌가 지적활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화’를 다루는 신체의 부분은 ‘간’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옛 말 “애간장이 탄다”와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플라톤은 지능을 ‘뇌’에서 다스리고 공포, 화, 용기는 ‘간’에서 다스리며 욕망, 고민, 탐욕, 무절제는 ‘장’에서 다스린다고 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간’과 ‘장’에서 다스리는 부분은 사라지지만, ‘뇌’에서 다스리는 지능과 이성은 불멸하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뇌를 심장의 열기를 식히는 냉각장치로 여겼고, 고대와 중세까지 해부학 최고의 권위자였던 갈레노스도 뇌를 우주적 정기가 잠시 머무는 텅 빈 공간으로 보았다. 뇌가 불멸을 상징하는 영혼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에 가까운 생각이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뇌가 영혼의 서식처라고 여긴 플라톤보다는 심장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우세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저서 『On the Sacred Disease』에서 “사람은 뇌에서 기쁘고, 슬프고, 즐거운 것을 느낀다. 우리는 뇌를 통해 지혜와 지식을 얻고, 보고 들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정당한지를 알아낸다. 또한 뇌를 통해 공포도 느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뇌는 사람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의 뇌』를 쓴 다마지오는 아이오와 주립대 의과대학 신경학부 교수다. 그는 『데카르트의 오류』를 저술했으며, 체감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탐색했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정서에 관한 저서에서 영감을 받아 스피노자의 발자취를 좇았다. 17세기 유대인 철학자 다마지오는 사고에는 위계가 있다고 보며, 그의 이론은 루스 바클리, 가자니아와 비슷하다. 스피노자는 우리 주변, 우리 자신의 안과 밖 어디에든 신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다마지오는 인지신경과학과 스피노자 철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지혜롭게 설명하고 있다.



『마인드』를 저술한 마음의 철학 분야 권위자 존 R. 설(John R. Searle)은 버클리대 철학과 교수로 『마음의 재발견』, 『의식의 신비』, 『마음, 언어, 사회』, 『현실 세계에서의 철학』, 『의식과 언어』 등을 저술했다. 저자는 생물학적 자연주의(biological naturalism)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라 생각한다. 인간은 의식을 가졌으며, 이 의식은 두뇌에서 일어나지만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질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을 주장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면서, 믿음이나 욕구와 같은 ‘지향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입장을 철학적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그는 많은 철학적 이론 중에서 특히 이원론과 유물론은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철학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마인드』는 독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다. 인간의 사유 활동은 삶 그 자체이며, 언어는 궁극적으로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으로 근본적인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물리적 입자로 구성된 세계 속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며, 물리적 실재를 인간적 실재로 변형시키고, 그 실재를 주체적 의지로 가공해 나간다. 마음의 철학에서 탐구하는 심신문제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누구이며, 외부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적 실재를 어떻게 구축하는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의 마음의 철학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론이 오류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짧지만 명쾌한 필치로 ‘철학과 과학적 세계관’을 다뤘다.

유물론자에게 의식은 두뇌 과정일 뿐으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존 설은 “의식은 두뇌 과정일 뿐이지만, 질적, 주관적, 일인칭적, 구체적 형상이 없는, 촉각으로 느끼는 현상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의식이 두뇌 안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이원론자는 의식이란 삼인칭적 신경생물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의 부분이 아니며, 그 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별개의 어떤 것이라 말한다. 존 설은 이에 대해, 의식이란 인과적으로 환원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의식은 일상적인 물리적 세계의 부분이지 그 세계와 다른 별개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 설은 “과학적 세계관”이란 말은 잘못된 의미라고 밝히면서, 똑같은 실재라도 마음에서는 경제적 관점, 미학적 관점, 정치적 관점, 과학적 탐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방법”이란 일단 발견되고 나면 과학의 소유물이 아니고 완전히 공공의 재산이기 때문에, ‘과학적 실재’ 혹은 ‘과학적 실재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여러 개의 사실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과학적 세계는 없으며, 그저 세계가 있을 뿐이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기본원칙은 원자물리학과 진화생물학”이라는 매우 독자적이고 강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영혼의 해부』를 쓴 칼 지머는 <뉴욕 타임스 북 리뷰>로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과학 평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미국 과학 잡지 <디스커버> 수석편집장을 역임한 과학저널리스트다. 『영혼의 해부』는 국왕으로서 참수형을 당한 찰스 1세 시절 의사였던 토머스 윌리스(1621~1675)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직자를 꿈꾸던 윌리스는 옥스퍼드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의사가 됐다. 그는 혈액 순환의 원리를 밝혀낸 윌리엄 하비(1578~1657)로부터 의학을 배웠다. 그는 해부 실험을 통해 영혼이 심장이 아니라 뇌에서 작동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고, 이를 토대로 『뇌와 신경의 해부학』을 저술했다.

윌리스는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다. 윌리스는 뇌의 혈액 흐름을 밝혀내기 위해, 뇌 질환으로 사망한 환자의 뇌를 꺼내 물감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뇌신경이 화학물질을 통해 전기충격(정기)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기억을 형성하고, 상상을 이뤄내며, 꿈을 꾸게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뇌가 인체의 중심이며 뇌에서 기억과 상상과 꿈이 형성되고, 감정과 욕망, 식욕도 뇌에서 이루어진다고 밝혔다. 신경학이란 용어도 윌리스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영혼의 해부』표지에 실린 정물화는 네덜란드 화가 에두바어르트 콜리에르(Edwaert Collier)가 그린 바니타스 정물이다. 바니타스(vanitas)란 라틴어로 ‘덧없음’을 의미하며, 죽음에 대한 경고, 인생무상과 같은 메시지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난 철학을 담은 그림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자유주의 철학자가 된 로크의 유명세 그늘에 가려져, 정작 로크의 스승이었던 윌리스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이러니를 상징하기 위해 선택됐을 수도 있다. 저자 칼 지머는 새로운 의학에 대한 윌리스의 두려움은 뇌와 자아에 대한 서구의 견해를 지배해온 이분법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21세기인 현재 프로작(Prozac), 팍실(Paxill) 등 항우울제의 미국 내 판매는 연간 120억 달러에 달한다. 재미난 것은 프로작을 복용한 사람이 우울증이 호전됐을 때 뇌영상 사진을 찍어보니, 그들의 뇌가 건강한 사람의 뇌와 비슷하게 변했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 환자 중 유명한 항우울제를 6~8주간 복용한 후, 기분이 좋아진 사람의 경우는 35~4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약간만 기분이 좋아지거나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대다수 환자들에게는 약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의 효력보다 약효에 대한 믿음, 즉 위약효과(placebo effect)가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만약 서양의 이분법이 사실이라면, 때로는 설탕으로 만든 가짜약이 프로작과 똑같은 효과를 정신에 미친다는 위약효과를 설명할 수 없다. 우울증을 완화시켜줄 때 심리치료와 항우울제가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뇌의 활동을 변화시킬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의 영혼은 물질적인 동시에 비물질적이며, 화학작용의 산물인 동시에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정보의 네트워크라고 주장한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맥길대학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1년간 MIT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저서는 마음의 존재, 출처, 역할을 본문만 865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과학적인 마음의 연구는 MRI를 이용해 뇌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연인들의 호르몬 작동을 탐색하고, 티베트 고승들이 명상에 들었을 때 뇌파를 측정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핑커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종합해 통일성 있는 이론의 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과정에서 계산주의 마음 이론과 현대적인 진화이론인 자연선택 이론이라 두 개의 큰 이론을 이용했다.

계산주의 마음 이론은 과학적인 방법, 추론, 실험을 통해 마음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수학자 앨런 튜링, 컴퓨터과학자 앨런 뉴웰, 마빈 민스키, 철학자 제리 포더 등은 최초로 계산주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정립했다. 인간의 마음은 진화의 산물로, 설계된 수많은 연산기관으로 구성된 체계로서,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해 지정되어 특정한 상호작용을 전담한다. 인간의 마음은 입력장치, 기억장치, 중앙처리장치, 출력장치로 구성된 컴퓨터와 같은 네트워크를 가졌으며, 믿음과 욕구와 같은 ‘정보’가 기호의 배열로 표시된다고 설명한다.

핑커는 계산주의 마음 이론이 없으면 마음의 진화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아무리 섬세하고 융통성이 크다 해도 대단히 복잡한 프로그램의 산물일 수 있으며, 또한 그 프로그램은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생물학의 전형적인 명령은 “…할지니라(Thou shalt)”라는 십계명의 첫머리가 아니고, “만약…라면…이고, 그렇지 않으면…(If…then…, else…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문장 형태)”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로봇공학의 관점에서 다룬다. 사람이 걸어가면서, 주변의 경치를 보고, 해야 할 일을 계획해 실행에 옮길 때, 어떻게 마음에서 논리, 추론, 판단 및 의사결정 과정이 일어나는가를 밝히는 것은, 달 표면에 착륙하거나 사람의 유전자 지도를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마음의 기본 능력들이 로봇으로 구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적하면서, 인간이 가진 특별한 기능을 추론한다. 연결주의학파는 간단한 신경망으로 인간 지능을 설명한다. 마음은 수많은 신경망의 연결이며, 지능은 환경이 연결가중치를 조정해서 생긴다. 사람은 기본적이고 간단한 지식을 합성해 수, 언어, 법과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특수한 경험 영역에 대한 모듈을 형성한다. 저자는 어려운 신경회로망의 원리와 알고리즘의 기본 가정을 쉬운 예를 들어 풀어 써, 마음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방식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이 생각하고, 말할 때에는 뇌에서 문법과 문장 체계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연결해서 산출하는 것이다.

또 저자는 사람의 시각이 움직임을 분석해서 외부 물체를 정확하게 감지하는 놀라운 처리 능력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망막에 맺힌 물체의 형태가 보는 각도에 따라 각기 다름에도, 그 물체가 같다는 대상영속성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 공학자 데이비드 마르가 내린 시각에 대해 정의를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마르는 시각처리 과정이란 자신이 본 외부 세계의 상을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정보로 재생산 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한 예로 책을 보면 망막에는 사다리꼴 형태가 투사되지만, 우리는 책이 직사각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들 때도 손가락을 직사각형으로 만들고, 책장도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시각이 일단 망막 위에 상으로 맺힌 물체의 형태를 추론하면, 마음의 모든 부분이 그 발견을 활용한다.

핑커가 설명하는 신경회로망의 예에서 들고 있는 여러 문장의 생성과 이해과정을 읽다보면 노암 촘스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다. 촘스키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언어학적 소양을 물려받고, 정치와 이데올로기 문제에 민감했던 어머니로부터는 정치적 성향을 물려받은 언어학자다. 촘스키는 전 세계에는 약 6 천여 개의 언어가 있지만, 언어가 공유하는 ‘보편 언어’가 사람의 유전자 속에 있기 때문에 어린이도 짧은 시간 내에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고 했다.

재미난 것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마인드』를 저술한 존 R. 설(Searle)의 ‘중국어 방’을 예로 든 논쟁이 잘 언급된 점이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안에 있으며, 그 사람은 중국어와 다른 기호가 섞인 복잡하고 긴 지시 사항 목록을 가졌다. 그 남자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단지 기호를 조작하여 답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을까. 물론 문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방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알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해는 기호 조작이나 연산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설은 이 사고실험을 통해, ‘중국어 방’에 있는 남자에게 없는 것이, 기호와 기호가 의미하는 것의 관계인 지향성이라고 지적한다. 지향성, 의식, 그리고 그 밖의 마음 현상들은 정보처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인간 뇌의 실제적인 물리-화학적 특성들’에 의해 야기된다는 게 존 설의 결론이었다. 이 사고실험에 대해 100편 이상의 논문이 출판되었고, 인터넷에서도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핑커’는 사람의 언어 규칙은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사용돼야 하며, 언어의 내용이 사용자의 믿음과 연결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단어의 현실적인 예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대상의 작동 원리가 무엇인가를 묻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지각, 생각, 감정, 사회성, 미술, 음악, 문학, 유머, 종교, 철학 등에 나타난 마음의 기능을 해부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총 8장으로 이루어진 저서 중 7장 ‘가족의 소중함’, 8장 ‘인생의 의미’는 재미는 있으나 지나치게 주관적인 예화가 많아 인류학, 사회학 자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 예를 들면 그는 “왜 인간이 예술을 추구 하는가”라는 이유로 예술은 미적 심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지위 심리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의 가치는 대체로 미학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대형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한 번에 보기에는 너무 볼 것이 많고 다리가 아파서, 그만 중간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아 쉬고 만다.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상 연결에도 무리가 있어, 두 권으로 분권을 해서 제목을 달리 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맺으며 저자는 우리가 잠시 자신의 마음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계의 훌륭한 고안품이라는 점을 발견하기 희망한다.

『율리시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블룸에게 일어난 약 19시간의 일을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묘사한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19시간(68,400초)동안 사람의 두뇌를 뇌영상으로 찍으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까. 뇌영상 연구를 하는 경우 보통은 3초마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5mm 간격으로 20장을, 수십 분 동안 찍는다. 만약 19시간 동안 사람의 두뇌에서 일어난 생각과 느낌을 뇌영상으로 찍는다면, 해석해야 할 뇌영상의 분량은 매우 많다. 뇌영상 사진을 분석하는 경우, 찍는 동안 머리를 2mm만 움직여도 그 자료는 오차가 너무 커서 분석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러한 여러 연구 제약 때문에 뇌영상 연구에서 발표되는 논문의 피험자의 수는 실제로는 십여 명 내외다. 그렇다면 수억의 인구가 느끼고 생각하는 ‘마음’을 과연 수십 명을 대상으로 한 뇌과학 연구 논문 수십 편에서 정리했다고, 일반화시킬 수 있을까. 물론 의공학이 나날이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단편적인 뇌과학 연구 결과를 지나치게 맹신하면 안 된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두뇌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복잡하고 놀라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네 권의 뇌과학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봐야할 첫 번째는 진정한 의미의 “너 자신을 알라!”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지나는 사람에게 다음의 질문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대의 현인도 이 질문을 받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함을 자각하라는 의미로, 그리스 델파이(Delphi)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쳤다. “너 자신을 알라!”의 현대적 뇌과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두 번째는 “덕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까”이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스피노자를 찾은 이유를 그의 저서 『에티카』에 나온 “덕의 일차적 기반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행복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란 구절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이 종소리처럼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는 느낌을 표현했다. 다마지오는 열정과 지혜를 추구하는 영적 삶을 통한 과학 지식과 심미적 경험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한 가지 길이라고 제안했다. 뇌와 나는 포함 관계도 아니고, 교집합도 아니고, 등호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며 유동적이다. 이제는 여러분이 이 네 권의 뇌과학 도서로 각자의 행복을 찾을 차례다.(한종혜/ 고려대·인지신경과학연구실)

08. 02. 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2-0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쌩뚱맞은 말이겠지만 전통적인 사형방법이였던 단두(斷頭)는 그 시대때 결코 과학적인 근거나 이유가 없었겠구나란 생각을 해버렸답니다.

로쟈 2008-02-10 13:26   좋아요 0 | URL
자유연상도 뇌의 신비죠.^^
 

'라스콜리니코프 '두 모녀'를 살해하다'의 자투리 글로 쓰다가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자리를 만든다. 외국어 표기에 관한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러시아어 '라스콜리니코프(Раскольников)'를 영어로 음역한 표기는 'Raskolnikov'이다. 여기서 [l(ль)]'이 연음이기 때문에(구개음화된 [l]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l']이라고 표기하지만 보통은 경음 과 구별없이 [l(л)]로 표기한다.

해서 우리말로 적을 때도 '라스콜코프'라고 적어야겠지만(나도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이 경우 우리말에서는 자음동화가 일어나서 '라스콜코프'로 발음하게 된다. 짐작에는 그렇게 되면 어차피 원음과는 차이기 있기 때문에 연음 [l]을 'ㄹ'이 아니라 '리'로 옮기던 관행이 이 경우에는 계속 남아서 '라스콜리니코프'로 굳어졌다(나도 동의하는 표기이다). 역시나 같은 연음 [l]이 쓰인 '고골리(Gogol)'의 경우 '고골'로 표기가 바뀐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고리키(Gorky)'의 경우는 계속 '고리키'라고 표기한다(언젠가 국문과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고리키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다고 문의를 해온 적이 있는데, 짐작에 그는 'Gorky'가 아니라 'Goriky'를 검색했다).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 전공자들은 '라스꼴리니꼬프'라고 적는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외국어 표기 원칙이란 어느 정도 관행을 존중하고 임시변통을 허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융통성있게 적용해야 된다는 말이다.  

개정된 표기안에 따라 '도스토예프스키' 혹은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돼 오던 'Достоевский(Dostoevsky)'는 '도스토옙스키'라고 표기되고 있다(알라딘에서도 표제어를 그렇게 잡고 있다). 이 경우 '도스또옙스끼'라는 이형까지 가능해지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네 가지 표기가 혼용되는 수밖에 없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아직 러시아어 표기에까지는 주의를 두지 않아서 그냥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한 경우이다(언론이나 출판물에서 아직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옙스키'가 혼용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의 6장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다루고 있는데, 'Rushdie'는 예전에 '루시디'로 통용됐던 이름이다. 즉 국내에 번역돼 있는 <악마의 시>는 '루슈디'가 아니라 '루시디'의 작품이다('루슈디'란 표기는 내가 알기에 <분노>에서부터 등장했다). 'sh'를 [시]가 아니라 [슈]로 표기하는 걸 새로운 원칙으로 정한 탓이겠다(그리고 이를 관행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 가령 '푸슈킨'으로 표기돼오던 'Пушкин(Pushkin)'의 경우 개정 표기법에 따르면 '푸시킨'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물론 'Pushkin'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표기돼 왔었다). 'sh'를 [슈]가 아니라 [시]로 읽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해서 똑같은 'sh'가 나오더라도 이게 영어인지 러시아어인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읽어주어야 한다(원래 발음은 별 차이가 없다).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에이젠시테인'으로, 문학이론가 '슈클로프스키'가 '시클롭스키'로 표기되는 건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바뀐 이름들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기에 '에이젠슈테인'과 슈클로프스키'를 고수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부 언론의 공식 표기는 '발터 베냐민'이다. 심지어는 '월터 베냐민'이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쓴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429974 참조). '베냐민'으로 검색되는 책은 역시나 한권도 없다. 이 정도면 좀 우스운 원칙 아닌가? 한글로 외국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원칙은 가능하지 않다. 그저 근접하게 표기해주면서 우리말에서의 혼동/혼선을 피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프랑스 작가 'Balzac'을 왜 '발작'이 아니라 '발자크'라고 표기하겠는가?). '원칙'을 자주 바꿔가면서(외국어 표기안은 여러 차례 개정돼 왔다)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  

08. 01. 0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깐따삐야 2008-01-0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월터 베냐민이 누군가요? ㅋㅋㅋㅋ

로쟈 2008-01-07 19:33   좋아요 0 | URL
실수라고 보야겠죠. 한데 '베냐민'이라고 교정돼 있어서 좀 코믹한 효과를 유발하지만...

와넬 2008-01-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르스타인 베블렌이냐 소스타인 베블렌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군요.

로쟈 2008-01-07 23:22   좋아요 0 | URL
그 경우는 모로 가든 '베블렌'이니까요. 고유명사 표기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이면서 해법이 잘 보이지도 않는 난제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