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의 시차 때문에 모스크바에 와서 가장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은 밤 9-10시 사이다. 한국시간으론 오전 2-3시로 넘어가는 시간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오늘(어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작은 인문서점에서 구한 책 얘기를 조금 부려놓는다. 아래는 아르바트거리의 모습. 지금은 눈이 조금 더 쌓였다. 

작은 서점이긴 해도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쪽 책들과 오래된 문학전집류를 파는 서점이어서 나름대로 챙길 만한 책들이 있었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 관련서를 제외하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에코의 <미네르바의 성냥갑> 등이 더 얹은 책이고, 일차로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다 직원에게 문의해서 구한 책이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책 한권씩이다. 그래서 무슨 시리즈는 아니지만 '모스크바의 랑시에르와 아감벤'이란 제목을 붙였다.   

랑시에르와 아감벤은 국내에 나란히 소개됐기 때문에 나로선 같이 떠올리게 되는 면이 있는데(두 사람의 저작을 묶어서 서평을 쓴 적도 있다) 러시아어본도 나란히 구하게 됐다. 그래봐야 러시아어로는 몇 권 번역돼 있지 않다. 랑시에르의 책으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감성의 분할>이 번역돼 있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달라고 했는데(<미학의 무의식>은 2004년에 구입했었다), <감성의 분할>만 꺼내다 주었다. 그것도 어디냐고 냉큼 들고 와서 이제서야 펴보니 <감성의 분할> 외에도 <미학 안의 불편함>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이미지의 운명>까지 합본된 책이다(264쪽밖에 안됨에도!). 무슨 '횡재'한 기분이다. 아래 왼쪽이 러시아어판 <감성의 분할>이고 오른쪽은 <이미지의 운명>의 영어판 <이미지의 미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한번 더 찾아보고 못 구하면 인터넷서점으로 주문할 참이다. 러시아어 아감벤은 랑시에르에 비하면 아직 빈곤한 편이다. 잡지들에는 그의 글이 다수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도래할 공동체>(2008) 달랑 한 권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게 좀 의아한 수준. 아래가 <도래할 공동체>의 러시아어본과 영어본의 표지다.  

Грядущее сообщество 

랑시에르나 아감벤의 책 모두 1000부를 찍었으니 전혀 대중적이라고 볼 수 없다. 어지간한 서점에선 구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 랑시에르나 아감벤 '붐'은 비록 한정된 독자층 사이에서 많이 입에 올려지는 정도라고 해도 상당히 예외적이란 느낌이다. 지난 2004년의 기억이지만, 인문학 전공의 이탈리아 유학생에게 아감벤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해서 내심 신기해 했던 일이 모두 그런 '착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움베르토 에코는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책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외국인'이 러시아 서점 직원에게도 특이하게 보일 법하다. 나는 아주 조용히 서점에서 빠져나왔다... 

11.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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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14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잠 못 들고 가끔 페이퍼를 끼적여 올리곤 하는 시간에 로쟈님의 글이 올라오니 외려 제가 이곳에서 시차를 느끼는 것만 같네요 ㅋㅋ
어제 올려주신 '모스크바' 서점도 그렇지만 건물들이 새로 지어진 것처럼 깔끔하군요. 돌아오실 때 책만 한 보따리 되는 것 아닌가요?ㅎㅎ^^

로쟈 2011-02-14 15:33   좋아요 0 | URL
눈덮힌 거리는 훨씬 더 깔끔합니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쉽싸리 2011-02-14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같은 책을 영어,러시아어,한국어로 읽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저로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고 앞으로도 그럴까 같아 궁금하네요.^^

로쟈 2011-02-14 15:34   좋아요 0 | URL
음, 그게 같은 곡에 대한 각기 다른 연주를 듣는 느낌이에요. 한국어 번역본들간의 차이보다 조금 더 큰 차이로, 아,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한다고 하면 비슷할 거 같네요...

philocinema 2011-02-1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건강 잘 챙기셔요!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니까요!

로쟈 2011-02-14 15:35   좋아요 0 | URL
네,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거리만 없다면 좋을 텐데요.^^;

펠릭스 2011-02-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셨군요. 엉뚱하지만,,, 어젠 영화 한 편을 봤는데요.
'The Concert',,,요.

로쟈 2011-02-15 00:59   좋아요 0 | URL
오긴 했지만 벌써 갈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반딧불이 2011-02-1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 계시는군요. 늘 고골의 네프스키 거리만을 상상하다가 아르바트 거리를 보니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네요.

로쟈 2011-02-16 01:02   좋아요 0 | URL
네프스키는 '대로'라서 비교가 안되죠.^^ 아르바트는 그에 비하면 아담하고 편안한 거리입니다. 1킬로쯤 되려나요. 전철역 한 구간 거리인데, 어슬렁거리기도 좋습니다(기념품가게가 많구요). 겨울엔 물론 사정이 좀 다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