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차 노원평생학습관에 다녀왔다. 가고오는 데 꼬박 두 시간씩 걸리는 거리다. 체코 감독 피터 젤린카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008)을 관람하신 분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강의했다. 영화는 미리 보고 갔는데, 실제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8년째 공연중인 체코 극단원들이 폴란드의 한 제철소에서 열리는 대안공연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주로 필름에 담았다. 그렇다고 다큐는 아니고 극중극 구조다...   

이렇게 계속 쓰면 오늘의 일기가 될 터인데,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간단한 소회만 적는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를 오늘 배송받았다. 책은 어제 나왔지만 공식 발행일은 '2010년 9월 11일', 즉 오늘이다. 우연찮게도 9.11에 나온 책이 돼 버렸다(<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작년 5.18에 나왔다). 이 책의 에피그라프(제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스러운 여러분, 소중한 여러분,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습니까?" 

이 대목을 제사로 쓴 이유는 책의 서문('책머리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공식적으론 두 차례 서문을 쓴 셈이지만, 나대로는 예전에 자비로 여러 권의 책을 만들면서 그에 맞게 여러 번 서문을 쓴 적이 있다. 1996년 9월에 쓴 서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란 합본서의 서문이다(참고로, 이 책은 <책을 읽을 자유>의 맨마지막 쪽 책 사진에 들어가 있다).   

1. 나는 묽어진 존재, 아니면 욕조에 빠진 먼지...  

2. 이 책은 지난 2년간 만든 세 권의 시집, <중력과 은총>(96.8), <새둘이 날아간다>(96.1), <생의 바깥에서>(95.4)를 한 데 묶은 것이다. 그렇다고 더 나이지는 것이 있을까? 몇 군데 빠진 글자와 틀린 글자를 바로 잡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내가 만든 책의 부피(volume)를 느끼고 싶었을 따름이다. 영혼은 어떤 부피 안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3. <존재와 시간>의 저자는 디히텐(Dichten, 시를 쓰다)과 덴켄(Denken, 생각하다)을 모두 단켄(Danken, 감사하다)에 고정시킨다. 그에 의하면, 사유하는 것, 시를 쓰는 것은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에게 열려 있는 존재(Sein)로 귀향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4. 이 책을 집어든 당신에게 감사한다.

96년이면 아직 20대였던 시절이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건 책이 내게 갖는 의미다. '부피'와 '감사'. 나는 여전히 책의 부피를 사랑하며, '사랑스러운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그러한 의미가 보존되는 한, 앞으로도 책은 더 내게 될 것이다. 여러 기획이 예정돼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러시아문학 강의'다. 러시아문학에 진 빚을 좀 덜 기회가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 

10.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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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ifeisart 2010-09-1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가까운 동네에서 로쟈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었지만.. 강연을 들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반드시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가졌지용^^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강연해주셔서 넘 감사해용^^ 우리의 삶과 유리된 예술가 및 철학가는, 세상을 떠나 청정하게 수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종교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심게 되었다능~! 암튼 이런 멋진 인문강연 자주 해주삼~!!!

lifeisart 2010-09-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깜짝 놀랐어용^^ 40, 50대 층이 많은 강연장의 분위기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라는...

로쟈 2010-09-12 22:47   좋아요 0 | URL
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시더군요. 특히 장년층이 많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oren 2010-09-1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라는 멋진 소설에 관한 얘기를 볼 때마다, 80년대초 대학입학을 앞두고 한겨울 시골 고향의 따스한 온돌방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이 소설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항상 그립습니다.

표도르, 미짜, 알료샤, 스메르자코프, 조시마 장로, 까쨔, 그루셴까... 그 소설을 다 읽고나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흑백버전'의 영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우연히 TV로 봤었는데,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닯아서 깜짝 놀랬던 기억도 있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러시아문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책과 글들을 '아무 때나 마음껏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인터넷 서재가 참 좋습니다. 로쟈님의 두 번째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9-12 22:49   좋아요 0 | URL
율브리너 주연의 영화를 보셨던가요? 드미트리 역엔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oren 2010-09-13 17:01   좋아요 0 | URL
흑백영화를 봤던 게 80년 초반의 일이라 율브리너가 주연이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흑백영화에 어울리듯...계단 아래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마치〈반지의 제왕〉에 나오던 골룸(스미골?)과 같은 분위기의 스메르자코프와.. 그런 기억들만 어렴풋하게 나네요.
언제 한 번 DVD라도 구해서 그 영화를 다시 봤으면 싶네요..

재준 2010-09-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강차 노원평생학습관에 다녀왔습니다. 가고오는데 합이 2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강의는 어제였습니다. 어떻게든 저한테 계속 정을 붙혀보고 싶습니다.
지난 7월 한겨례에서 뵈었고, 노원에서 또 뵙겠다고 해놓고...

익숙해짐과 무감각해짐에 무력한 범인으로서, 주변 비범인들의 에너지를 받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새책 축하드리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빌리지 않고..^^

로쟈 2010-09-12 22:50   좋아요 0 | URL
한겨례에서도 뵀으면 자주 뵙네요.^^

헌내 2010-09-1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노원평생학습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가보지도 못했네요.. ㅠㅠ
오늘 북페스티벌도 못 가보고.

꼭 뵙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로쟈 2010-09-13 01:34   좋아요 0 | URL
노원구에 사는군요.^^

헌내 2010-09-13 16:32   좋아요 0 | URL
네 ^^

비로그인 2010-09-1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극이 재미있네요, 좀 슬프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이 어느 정도나 심했던 건가요?
초등학교 때 간질을 앓는 친구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어서
몇 번 쓰러지는 걸 보기도 했거든요.
아주 심했다면 치명적이었을 텐데요...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끼친 영향으로 볼 때
도박과 간질이 비슷한 무게였을까요?...

로쟈 2010-09-13 01:36   좋아요 0 | URL
간질과 도박, 사형수 경험 등이 모두 결정적이었는데, 도박중독은 두번째 아내의 도움으로 치유됩니다. 간질은 평생 갔다고 하고요. 유전이어서 아들 알료샤도 간질로 이른 나이에 죽었죠...

푸른바다 2010-09-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새 책 내신 거 축하드립니다.^^ <러시아 문학강의>도 기대되네요. 지젝에 대한 책도 계획하고 계신거죠?^^

2010-09-13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