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데미안'과 전쟁의 의미

'출판저널' 10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의 한 장면'을 다소 뒤늦게 옮겨놓는다. 새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제일 처음 다룬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쓰다 보니 분량제한에 걸려 애초에 구상했던 것만큼의 이야기는 늘어놓지 못했다(그래서 일부 내용은 이달 11월호에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로 번졌다). '출판저널'은 대개의 잡지들처럼 어렵게 꾸려지고 있지만 읽을 만한 기사들이 많아서 독서가들에겐 아주 유익할 듯싶다(알라딘에서는 판매가 되지 않는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홈피(http://www.publishingjournal.co.kr/?p=2542)를 통해서 내용을 일별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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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09년 10월호)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이란 질문에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아마도 중2 때 읽었던 듯하고 그때 요절했다면 ‘이 한권의 책’이 될 뻔했다”고 덧붙였다. 그때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은 지금은 물론 ‘내 인생의 책’도 달라졌다. 하지만 충격의 ‘원체험’을 찾자면 아무래도 ‘수레바퀴 밑’으로 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읽은 세계문학전집판은 다시 구할 수 없기에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새로 번역된 책을 책상머리에 두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래서’보다는 ‘밑에서’가 더 강한 정서적 울림을 갖는다. 그 ‘밑’은 ‘밑바닥’의 ‘밑’이기도 하니까.  

더듬어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은 내 독서체험의 밑바닥이다. 성냥팔이 소녀도 죽고, 인어공주도 죽었지만, 그리고 <삼국지>에선 허다한 영웅호걸들이 비장하게도 죽고, 어처구니없게도 죽어나갔지만,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죽었을 때만큼은 슬프지 않았던 듯싶다. 헤세의 분신이었던 한스는 곧 나의 분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눈물까지 흘렸던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의적으로 공부를 소홀히 했다. 그것이 죽은 한스에 대한 연대감의 표시이면서 ‘가정과 학교’에 대한 나대로의 반항이었다. 반항치고는 건전했다. 방과 후에 급우들과 탁구를 치러 다닌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한스만큼 허약하긴 했어도, 덕분에 한스처럼 신경쇠약에 걸리지는 않았다. 연이어 다른 책들을 읽은 것도 한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헤세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국내에서는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 <데미안>에 대해서 나는 데면데면했다. 중학교 때 읽었는지 대학교에 들어와서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다. 하긴 이 책을 얼마 전에야 완독했으니 이전에는 읽은 게 아니라 읽다가 덮은 거였다. 두껍지도 않은 책을 그것도 몇 번씩이나 읽다가 그만둘 정도였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기억에 나는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등장하여 구해주는 대목까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건 똑같이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곤 하지만,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와 ‘한스 기벤라트의 이야기’는 뭔가 달랐다는 뜻이다.  

둘 다 성장기 소년의 이야기인데, 무엇이 다르다고 여겼던 것일까? 집안이 좀 달랐을까? 다시 책을 뒤적여보니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 기벤라트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인물로 결코 가난한 축에 들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뱅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졸부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하니까, 말 그대로 중산층이다. 싱클레어도 당시의 기준으론 중산층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으론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무엇보다도 프란츠 크로머와 비교해보면 그렇다. 크로머는 술꾼인 재단사가 아버지였고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고 소개된다. 반면에 싱클레어의 집은 너무 밝다 못해 광채가 나는 세계였다.  

물론 <데미안>에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세계인가! 바야흐로 이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고, 어떻게 교차하며 그래서 어떤 사건들을 빚어낼는지 기대되지 않는가?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주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사실 내가 <데미안>에서 읽고 싶은 건 그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이야기보다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와 이웃 아낙네들의 싸움판 이야기가 더 ‘소설적’이며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두 세계 사이에 낀 주인공을 다루는 거라면 싱클레어 대신에 하녀 리나를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았겠다. 하지만 헤세는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나중에 크로머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지만,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데미안에게 바로 제압당한다.   

소위 ‘교양소설’에서 주인공은 진정한 자기되기의 과정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이 아닌 것을 경험해야 한다. 노발리스의 말을 빌면, 거기서 근본적인 타자성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면 경험이란 단지 허울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싱클레어는 과연 그러한 ‘타자성’을 경험한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싱클레어가 꾸는 꿈은 시사적이다.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할 무렵 싱클레어의 꿈에는 크로머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환상은 크로머가 현실에서 저지르지 않은 것조차 꿈속에서 자행하게 했다. 그의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자주 꾼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싱클레어에게서 타자 경험의 극대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꿈) 속에서 이루어진다. <데미안> 전체의 이야기에 환상성이 짙게 드리워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데미안> 번역자의 한 사람이었던 전혜린은 “데미안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 하나의 이데아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의 인간보다도 더 살아 있고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무엇이다.”라고 1960년대에 적었다. 이 평가는 곧 신화가 됐다. 그리하여 짐작에 전 세계에서 <데미안>을 가장 많이 읽는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이다. 하지만 나는 “독일의 전몰학도들의 배낭에서 꼭 발견되었다는 책, 누구나 한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의 마력이 여전히 미심쩍다. <수레바퀴 밑에서>와는 달리 <데미안>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09. 11. 07. 

P.S.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전혜린판 <데미안>도 찾아서 읽고 싶다(루이저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함께. 전혜린이란 이름이 떠올려주는 두 작품이다). 기억엔 삼중당문고의 <데미안>이 그녀의 번역이었던 듯싶다. 독어판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표지를 찾아보니 영어판보다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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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소설" 아닌 '성장소설, "순진함" 아닌 '순진함'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11-09 13:24 
    로쟈 님의 페이퍼를 보고 예전에 인도철학사를 수강하면서 제출했던 <데미안>서평이 생각나 찾아 업데이트해본다. 수업 레폿이라는 글의 형식은 근본적인 한계들을 가지는데 그 중 하나가 해당 수업의 내용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함께 듣지 않은 이들에게 보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색을 맞춘답시고 어거지고 개념들을 구겨넣어야 했지만 기초적인 이해가 없어도 큰 무리는 없이 남에게 보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부차적인 것이
  2. 헤세의 차라투스트라 VS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11 19:32 
    이번달 '출판저널'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루고 있으며, 지난달에 읽은 <데미안>의 한 장면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면에는 첫문단과 끝에서 두번째 문단이 누락됐는데, 여기서는 되살려놓도록 한다.   출판저널(09년 11월호)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니체의 가장 난해한 책  헤세가 13살 때 아버지에게 보낸
 
 
perky 2009-11-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레바퀴 밑에서를 고등학생때 읽었었는데요. 저도 로쟈님처럼 이 책 읽고나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었어요. 공부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크게 밀려와서 괜시리 반항도 해보고..이 책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책은 적어도 수험생에게만은 피해야 할 책인 듯 싶어요;;
그래도 제게 최고의 헤르만헤세 책은 역시 '데미안'이었어요. 대학생때 처음 읽었는데, 세상이 새롭게 보이더군요..문장 하나하나에 전율해가며 미친듯이 줄 그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었던..제 대학생때의 정신적 바이블..
'황야의 이리'도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헤르만헤세 책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 좋군요. ㅋㅋ)

로쟈 2009-11-07 17:01   좋아요 0 | URL
헤세 마니아이시군요.^^ 저는 <수레바퀴 밑에서> 이후 몇권을 탐독하고 시도 좋아했지만, 헤세의 정신주의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갖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정신주의에 대해서도 그래서 별로 감동이 없었던 듯해요. <황야의 이리>는 나중에 <마의 산>과 같이 읽어보려고 벼르고는 있습니다.^^

펠릭스 2009-11-0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스'의 어린시절은 '닥터지바고'의 '피사'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합니다.
또한 '한스'에 대한 궁금증은 '오스카 쉰들러'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궁금증과 비슷합니다. '한스'는 우리의 분신같아요.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미성공에 대한 자기연민을 갖게 합니다.

로쟈 2009-11-07 17:03   좋아요 0 | URL
'파샤' 말씀이신가요? 아직 다시 읽어보지 못했지만 '미성공' 이상의 문제를 건드리는 듯싶어요. 기타노 다케시의 책을 읽다가 떠올린 생각은 '정해진 인생'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anathema 2009-11-0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경량의 [헤세와 신비주의] (한국문화사, 1997)를 읽어보면 헤세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헤세 같은 사람들을 Divine Light Group이라고 하지요. 사이비 신비주의자.

로쟈 2009-11-08 10:54   좋아요 0 | URL
데미안과 관련해선 읽어본 책입니다. 사이비 신비주의가 따로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비로그인 2009-11-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혜린하면 '생의 한가운데'가 생각나더군요. :)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었음에도 그가 데미안을 번역했다는 건 까맣게 몰랐네요.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수레바퀴 밑에서'는 아무런 임팩트가 없었어요. 대신 데미안에 대해서는 열렬했지요. 수레바퀴 밑에서는 20대가 훌쩍 넘어서야 읽은 탓일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재밌네요, 주위를 가만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은 못 본거 같아요. '수레바퀴 밑에서'에 빠져드는 사람과 '데미안'에 빠져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로쟈 2009-11-09 19:06   좋아요 0 | URL
에세이집에 보면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에 관한 글이 연이어 실려 있습니다. 글쎄요, <데미안>에 대한 열광은 저로선 미스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