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우울증'이란 게 있다면 나도 그런 우울증 환자인 듯하다. 휴일이면 피로와 무기력의 공세에 매번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책도 읽고 번역도 하고 원고도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울적하다. 머리만 무겁다. '편두통'이라도 있으면 핑계라도 삼으련만. 그런 울적함에 젖어 있다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에 이어서 쓴 시도 뭔가 '대변'해주는 듯싶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맛을 내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이미 오랫동안 가슴속에
파이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소중한 파이맛.
사과파이는 당신의 입술에 가 닿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가슴속 파이맛을 모두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
당신의 맛있는 사과파이가 되고 싶었다, 당신만의.

사과파이는 너무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다. 거품이 되어버린 파이맛이
사과파이를 끓어오르게 한다, 사과파이 편두통을 앓는다.
사과파이는 텅 빈 당신의 입술을 닮아간다.
사과파이는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
사과파이는 시큼한 파이맛을 모두 먹어치운다.

아작아작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사과파이 텅 빈 입술만이 게걸스럽게 남았다. 탐스런
사과파이,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 

 

09. 06. 07. 

P.S. 이미지를 찾다 보니, 내가 먹던 사과파이와는 수준이 다른 파이들이 눈에 띈다. 울적함 이전에 군침이 먼저 돌게 만드는! 시작 메모를 보니 1995년 6월 10일에 쓴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취하면서 취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은 대개 빵으로 때우던 때이다. 이날 아침에 편의점에 갔더니, 사과파이가 모두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그걸 시로 쓴 것이다. 또 '파이'란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있다고 한 건 '파이다'란 말이 '나쁘다'란 뜻의 방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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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6-0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 ㅎㅎ 시작메모를 보지 않았으면 그냥 저 사과파이 사진에만 현혹될뻔 했어요 ㅜㅠ 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로 편의점 자주 애용하는데 흑 ㅠ

로쟈 2009-06-08 00:49   좋아요 0 | URL
가끔은 비싼 걸로 먹어주셔야 합니다.^^

L.SHIN 2009-06-0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하핫, 빵 시리즈인겁니까? ^^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빵집에라도 데려가 드리고 싶군요.(웃음)

로쟈 2009-06-08 00:51   좋아요 0 | URL
빵집은 요즘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사진의 사과파이는 못 봤지만요...

다락방 2009-06-0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2
자작시 종종 올려주세요.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저 밑의 글을 읽긴 했으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사진속의 사과파이는 먹음직스러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ㅎㅎ 너무 달아 보이기도 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히고 싶고 먹고 싶은 사과파이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ㅎㅎ

전 주말이면 평소 출퇴근시에 들고다니기 어려운 무거운 책들을 읽어줘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데 요즘엔 야구가 자꾸 방해를 --;; 역시 사랑은 나뉠 수없는 걸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양다리 걸치시는군요.^^

Joule 2009-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가 정말 맘에 들어요. 과연 저 정도는 돼야 사과파이에 대해 뭔가 쓸 수 있겠군 하는 기분이 든달까.

로쟈 2009-06-08 23:56   좋아요 0 | URL
먹다 보면 정이 들지요.^^

드팀전 2009-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었습니다. 둘째 아이 태어나는 시점에 본 책이지요. 즐거운 시간이있었어요.^^ 제가 로쟈님을 알게된게 2006년쯤이었으니..그 전 글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최근 페이퍼에 비해 모스크바에서 훨씬 유머가 많으셨더군요.^^
물론 이 글을 통해서 드러난 정치적 로쟈와의 입장에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제게는 니체의 <짜라> 구절 중 '몰락'에 대한 공통된 정서의 공유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전 무슨 책 읽기의 경험때문은 아닌데 어디서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되었는지..

마지막 장에 있는 릴케의 시가 좋더군요. 첫 줄 해석에서 반종교적이며 도킨스를 좋아하시는 로쟈님의 관심까지 읽힙니다.반종교적이시잖아요.ㅋㅋ 나머지 줄은 지젝의 '실재'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인 듯 합니다. 로쟈님이 '대문자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처럼. 사실 언젠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누군가에게 했는데...다른 차원으로 해석된 탓이겠지만..'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주의적'이라는 댓글을 받았습니다.'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전 도달할 수 있다가 오히려 근본주의적 유토피아같은데...그 때 했던 이야기 중에 시오랑- 시오랑은 문학에 과문한 저로서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 에필로그를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이 했다는 '무언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이다'라는 비슷한 뉘앙스의 말도 제가 첨부했었는데...너무 확신에 차있는 토론자이다 보니..결국 '그래 다음으로 넘아가자구'가 되어버렸습니다.ㅋㅋ 제 르상티망인가 봅니다.ㅋㅋ

하여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뷰도 써야할 터인데. 홍보성리뷰로다가 ㅋㅋ
한 인터뷰 기사에서 인문학에 무심한 MB라고 말하셨는데..만약 MB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통치성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제2명박산성은 하지 않았겠지요.그런면에서 윤리적이지도 못하며 무식하기까지 한 거지요.
역설적이게도 그게 큰 위안이고 역동성의 틈새가 되는 듯 합니다.

로쟈 2009-06-09 07:26   좋아요 0 | URL
득남(?)을 축하합니다.^^ 기대되는 리뷰인데요.^^

드팀전 2009-06-09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득남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새로운 형태의 리뷰 형식을 생각했었는데...아직 한 번도 알라딘에서 본 적 없는...ㅋㅋ 그냥 아이디어여서 실행 과정의 복잡성과 기대효과를 생각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일단 유보했습니다. 집에 어른들도 와계시고 이제 첫째는 제가 전적으로 전담마크해야 되다 보니...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