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사는 이번에 1주기를 맞는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기사이다. 작년 5월 그의 죽음을 계기로 '권정생의 삶과 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119478)이란 페이퍼를 올려두기도 했는데, 어느새 1년이다. 비록 고인은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다행스럽다. 이달의 첫주문은 그의 책들로 할 작정이다. 

한겨레(08. 05. 03) 민들레 꽃씨로 돌아온 노란 그리움

이름 그대로 ‘정생’(正生)이었다. ‘바른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름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바른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높이에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라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인간은 생전에 아무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호한 겸손 때문에 그는 ‘사랑이라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간 정신’이었다. 오는 17일은 바로 그 정신이 하늘로 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타계 1주기에 즈음해 그를 기리는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아동문학 평론가 원종찬 인하대 교수가 엮은 <권정생의 삶과 문학>은 ‘기림’의 뜻에 가장 충실한 책이다. 고인을 추억하는 시들을 앞세운 이 책은 권정생 연구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평론과 회고글들을 가려 뽑았다. 그런가 하면 <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쓴 전기다. 가난과 고난의 참담한 생애를 보낸 뒤 아름다운 작품만 남기고 병고의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70년 삶이 단출하게 담겼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에 나왔던 고인의 첫 산문집에 그 뒤 쓴 두 편의 글을 보태 펴낸 개정증보판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제 우리는 더는 저 조탑리의 작고 어두운 골방으로부터 나오는 유례없이 부드럽고 간곡한,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목소리를 듣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이 증보판을 낸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랑랑별 때때롱>은 타계하기 넉 달 전에 연재를 마친 고인의 유작이다. <강아지 똥>에서부터 <몽실 언니>를 거쳐 40년 동안 이어진 권정생의 문학적 삶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작품인 셈이다. 과학문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생명에 대한 사랑임을 거듭 일깨우는 동화다.

권정생의 일생은 20세기의 모든 고통이 한데 집결한 것과도 같은 일생이었다. 부모는 먹고살려고 식민지를 떠나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가 어린 권정생에게 할당된 첫 번째 삶이었다. 1946년 귀국선을 타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이 안겨준 건 헐벗음과 굶주림뿐이었다.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던 가족은 말 그대로 먹을 것을 찾아 안개처럼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한국전쟁 중에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권정생은 중학교에 갈 학비를 마련하려고 피란지 부산에서 점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5년의 극빈 생활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늑막염에 폐결핵뿐이었다. 스무 살 청년의 생기를 파먹고 들어앉은 결핵은 평생토록 숙주의 몸을 떠나지 않고 창궐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집은 결핵 환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남은 기운마저 빼앗았다. 슬픔과 눈물이 꼬막만한 오두막을 넘쳐 흘렀다. 결핵균이 폐를 뚫고 신장과 방광까지 덮쳤다. 병에 곯은 청년에게 유일한 위안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 살아 있는 주검 같은 몸을 지탱해준 것이 교회였다. 64년, 겪은 것이라곤 오직 굶주림과 막노동뿐이었던 어머니가 68년의 삶을 등졌다. 동생이라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병든 형이 지키고 있으면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아버지의 한숨에 권정생은 이듬해 집을 떠났다. 석 달 동안 풍찬노숙보다도 못한 유랑걸식을 했다. 밥을 빌어먹고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 병자-거지에게 그 석 달은 “가장 혹독한 밑바닥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기서 더 푸르게 살아났으니, 그는 뒷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이었다고 썼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준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아픈 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해 겨울 아버지마저 영영 어머니 곁으로 떠났다. 결핵균이 홀로 남은 그 몸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다. 신장 하나를 잘라내고 방광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남은 목숨이 2년이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2년이 지나고도 살아남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잊으려고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그 무렵 그는 이웃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들어갔다. 새벽마다 종을 치고, 힘이 남으면 글을 썼다. 1969년 그의 첫 작품 <강아지 똥>이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공모에 뽑혔다. 모두들 더럽다고 피하는 강아지 똥이 스스로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내용은 권정생 자신의 삶의 투영이었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놓았다.”(이현주, ‘동화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82년 권정생은 16년 동안 살았던 교회 문간방을 떠나 작은 흙집으로 이사했다. 아픈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창작열도 함께 흙집으로 이사했다. 84년 불후의 명작 <몽실 언니>가 태어났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권정생, <몽실 언니>) 다리를 절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동생을 돌보는 몽실 언니는 둘로 나뉘어 불구가 된, 그러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한반도의 은유였다.

어린 것들, 아픈 것들을 언제나 애틋한 마음으로 감싸안았던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무소유라는 말이 외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완전한 가난 속에 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그는 생전에 인세로 들어온 돈을 꼬박꼬박 모아 모두 뒷세대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평생 모은 5000만원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고명섭기자)

권정생은 타계하기 2년 전, 그를 따르던 지인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피고름 오줌을 쏟고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그는 자기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고 겸허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언장 전문을 싣는다.(고명섭기자)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1일 쓴 사람 권정생

여기까지가 기사다(세상엔 아직 얼간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권졍생의 '환생'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자료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후에 남긴 편지도 눈에 띈다. 아마도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 드립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 군에게 맡겨 주십시오. 화장해서 해찬이와 함께 뒷 산에 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날에도 가끔 피고물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날 몇 자 적어 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08. 05. 04.

P.S. 어제는 아이의 체육대회가 있어서('운동회'란 말이 없어졌다!) 반나절 동안 운동장에 나가 있었다. 당초 김유정과 요네하라의 '유언'들까지 묶어서 세 사람의 유머에 대해 다루려고 했으나 여기저기 쑤시는 곳이 많아서 기사만을 옮겨놓는다. 이달 안으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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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0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ㅜㅜ

로쟈 2008-05-04 18:48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5-0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하다는 선생님을 닮은 유언장이네요.
이오덕 선생님과 주고받은 짧은 편지글들이 있던데 어떤 심오한 이론이나 아름다운 문장들보다 가슴에 깊이 닿았습니다.
건강한 남자로의 환생을 잠깐 언급하는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환생할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8-05-04 18:05   좋아요 0 | URL
그런 태도를 초등학교 때부터 '주입'시켜야겠어요! 그럼 좀 나이지려나 싶기도 하고...

파란여우 2008-05-0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권샘님 댁을 갔었습니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
일직교회가 저만치 보이는 얕으막한 동산 아래 아주아주 작은 집에요.
열평도 될까말까한 그 집 마당에 걸린 솥과 포도나무를 보고 한참 울먹였습니다.
모두 그 현장에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그 이유는 가 보심 알게 되지요.
저는 권샘님 댁 갔다와서 한동안 글을 못썼습니다.

참고로 30여분 걸리는 의성의 사찰 '고운사'도 가 보세요.
권샘께서 즐겨 찾아가시던 곳입니다.
솔향이 그윽하니 좋습니다.

로쟈 2008-05-04 18:47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만 본 곳이군요. 유택의 보존 여부를 놓고 말들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됐나 모르겠습니다. 권정생 문학관이라도 꾸며지면 좋을 듯한데, 고인이 싫어하실 것 같기도 하네요...

Mephistopheles 2008-05-0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참 빨라요...
벌써 1주년이라니, 1년동안 기가막힌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로쟈 2008-05-04 20:40   좋아요 0 | URL
갈수록 가관인 것 같습니다.--;

마늘빵 2008-05-0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운동회 가서 열심히 뛰셨군요!

로쟈 2008-05-04 21:32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요! 사실 운동회랑은 별 관계가 없고, 아침에 어정쩡한 자세로 다림질을 한 시간 하는 바람에 그만... 워낙에 근육들을 잘 안 쓰는지라.--;

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홍성원,정공채 씨도 저 세상으로...

로쟈 2008-05-05 16:57   좋아요 0 | URL
아, 그렇지요...

프레이야 2008-05-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경 신부에게 쓴, 권선생님의 마지막 글 앞에 먹먹해집니다.
여우님이 자세히 써 둔 주소대로 선생님의 집에 꼭 가봐야겠단 생각만
다시 합니다.... 한 시간동안 다림질을 하셨군요. ^^

로쟈 2008-05-05 16:58   좋아요 0 | URL
제가 잘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순오기 2008-05-0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 17일 제가 '몽실언니' 리뷰를 올리고 난 두 시간 후에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한동안 마음 붙이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권정생님 같은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광주의 5.18뿐 아니라, 4년전 5월 18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제사도 있고 5월은 제게 여러가지로 근신하게 하는 달이랍니다.

로쟈 2008-05-05 16:56   좋아요 0 | URL
그런 인연이 있으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