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할일이 많았는데, '중복리뷰'와 관련한 페이퍼들을 읽다가 상당 시간을 허비하게 돼 유감스럽다(문제제기 자체야 5분이면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논쟁이 너무 소모적이었다). 무슨 일을 하면서 '나의 서재'를 같이 띄워놓는 일은 앞으로 삼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창피하게도 어제오늘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이다. 이런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 밤낮 페이퍼질이나 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도 변명할 구실이 없겠다. 거의 페이퍼꾼 아닌가? 이러니 돈내고 페인트칠하는 주제에 알라딘에서 '알바'하느냐는 소리까지 듣는 것 아닌가? 남세스러워서라도 한동안 잠적하든지 해야겠다. 혹 그런 결단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들고가고픈 책은 아마도 오늘 도착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비, 2000)과 조만간 주문할 T. 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뿔, 2006)이 될 것이다.
나온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최근에 영화화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오래된 정원>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인바 지난 80년대와 90년대를 가름하는 지표이면서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가 박종철 학형의 사망 20주기였지만 지난 80년대, 별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래된 정원>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박종철'이란 이름을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20년전 이맘때 인천의 한 가건물 식당에서였다('오래전 식당'이로군!). 논술시험을 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서 친구분 댁에 이틀인가 유숙해야 했었는데, 그 댁이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그 식당에서 읽은 아침신문에 '턱' 치니까 '억' 하더란 기사가 났던 것이다.
예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생활이란 게 얼마나 '비낭만적'일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좀더 우려했어야 했다. 얼마후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두달쯤 다니다가 학생생활연구소에 우울증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6월이 시작되자마자 기말시험도 거부한 채(한두 과목은 보았지만)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6.10항쟁이 일어났을 때 아마도 나는 바닷가에 있었거나 배 쭉 갈고 엎드려 소설책들이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1학기 같은 분위기였다면 나는 대학을 오래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6월 이후에 맞은 2학기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졌다('개량국면'이라고 한다). 그해 겨울 알다시피 대선이 있었고, 나는 대선 참관인단이 되어 다시 지방에 내려왔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 때문에 또한번의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오래된 정원>은 불가피하게 그런 시간의 족적들을 들추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읽기 괴롭다. 문제는 내가 그런 괴로움도 이젠 얼마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란 어느 시구절이 나의 무기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대개 호평이 많은 듯하다. 임상수의 현대사 3부작 가운데, 그래도 내게는 가장 '현실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그의 냉소는 한국영화에 드문 자질이지만, 나는 냉소를 즐기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 기사들이 많지만 얼른 눈에 띄는 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12211738051&code=960401 이다.
그럼, 또 왜 <지혜의 일곱 기둥>인가? 최근에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와 관련된 이들, 곧 제작자와 원작자에 대한 기사들을 페이퍼로 만들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던 차에 <닥터 지바고>의 바로 전작이자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주인공 'T. E. 로렌스'의 '원작'이 출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책은 지난 11월말쯤에 나왔는데, 북리뷰 기사들을 거의 빼놓지 않는 내가 어떻게 무심코 지나갔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짐작엔 다른 신문들에서 비교적 작은 기사로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참고할 만한 언론리뷰는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f=total&&n=200611250128).
사실 이 로렌스는 또다른 로렌스인 소설가 'D. H. 로렌스'보다도 내게 먼저 각인돼 있는데,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에 그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TV에서 방영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나는 진득하게 본 기억이 없고 따라서 유별난 감동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다. 영화를 공부하던 한 선배가 최고의 추천작 중 하나로 꼽아서 그런가 보다 했을 뿐(피터 오툴이란 이름은 덕분에 기억하게 됐다). 그런 '아라비아의 전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더구나 원작이 나온 지 70여년만에 완역된 책이라면.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T.E. 로렌스의 자전적 기록. 아랍 반전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국내 최초로 완역되어 선보인다. 정신의 힘과 의지에 대한 찬양,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몸부림쳤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함께 녹아 있는 저작이다. 영어권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필적하는 대작으로 손꼽히며, 20세기 최고의 전쟁 문학이자 자서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후 맥락을 앞에서 언급한 리뷰에서 발췌하면 "영국 옥스퍼드대를 수석졸업한 엘리트 고고학자였던 T. E. 로렌스는 1916년 28세의 육군 정보장교(대위) 신분으로 오스만제국의 해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것은 오스만제국 안에서 터키인과 하나가 됐던 아랍인에게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오늘날 시리아, 리비아,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지역의 통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랍독립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달려 있던 그것은 거대한 기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한편이었던 오스만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대영제국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로렌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를 지배하던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된 통일아랍왕국의 수장 자리를 제의했다. 대신 영국과 한편이 돼 오스만제국에 대한 전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맥마흔 선언과 더불어 영국은 프랑스와 이 지역의 분할통치를 밀약한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했다. 로렌스는 이런 음흉한 계약 위반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아랍인과 우정을 나누며 2년여간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이 책은 1916∼1918년 이집트에서 사우디의 메카로, 다시 홍해 유역의 아카바를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전투’를 치르며 겪은 모험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함께 녹여낸 그의 회고록이다."
물론 책에 대한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랍계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 책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대리인’의 관점에서 쓰인 오만과 편견의 덩어리라고 비판했"고, "실제 이 책에는 터키인을 대신해 중동지방을 다스릴 새로운 민족(아랍민족)을 세우겠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틈틈이 포착된다." 그러니/그래서 문제적이다.
사실 잠적을 꿈꾸는 이들이 갈 만한 곳이라곤 '감방'이거나 '사막' 말고 더 있겠는가. 그러니 들고갈 책도 자명할 밖에. 해서 당신에게도 권한다. '잠적할 때 들고가고픈 책' 두 권을. 물론 <오래된 정원>이나 <지혜의 일곱 기둥>을 들고 가는 게 아니라 감방/사막에서 갖고 나오는 '강적들'은 예외다. 상종을 못할 자들이다...
07. 0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