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친구 공개 글’입니다. 몇 시간 지난 후에 ‘전체 공개’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북플이 처음 나왔을 때 제 서재의 ‘팔로워’ 수가 많았습니다. ‘팔로워’ 회원 닉네임 옆에 ‘친구 추가’를 누르면 그 회원은 ‘친구’가 됩니다. 그러면 저와 ‘친구’가 된 회원은 서로가 남긴 ‘공개’ 서재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팔로워’ 회원은 ‘친구 공개 글’을 보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친구 수’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현재 ‘친구 목록’을 ‘비공개’로 설정한 상태입니다. 웬만하면 ‘친구 수’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에 ‘즐겨 찾는 서재 수’가 많아지면 소소한 이벤트를 여는 회원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즐겨 찾는 서재’ 또는 ‘친구’가 1,000명에 도달하면 친한 회원에게 선물을 주는 겁니다. 저는 이런 이벤트를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즐겨 찾는 서재’ 또는 ‘친구’가 많은 것은 회원 개인에게는 정말로 마음이 뿌듯한 상황이고, 축하받을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분들과 다릅니다. 그분들처럼 똑같이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요즘 제 서재를 ‘팔로워’하는 회원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 서재를 ‘즐겨 찾기’해서 보고 싶은 회원이 줄었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저와 상대방이 동의 없이 자연스럽게 ‘친구’로 맺어지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글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상대방이 서로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준다고 해서 그 글을 제대로 읽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지 않아도 ‘좋아요’를 눌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좋아요’를 눌러주는 일은 좋으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친구’라는 이름에 너무 집착해서 반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즉, 상대방이 아주 친한 ‘친구’ 회원이고, ‘즐겨 찾는 서재’이니까 무조건 ‘좋아요’를 눌러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생각이 자칫 정당한 비판마저 위축시키지 않는지 고민해야봐야 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이름만 ‘친구’인 회원이 있습니다. 본인의 글은 열심히 올리고, 정작 상대방의 글은 잘 안 읽습니다. 이런 분들을 최소 3개월 이상 지내보면 활동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됩니다. 열심히 글을 쓰는 건 좋은 일입니다. 친교 활동이 부담스러워서 글 작성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누구나 남들에게 자신을 노출(또는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상대방의 자아 노출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심리 반응이 ‘셀카 패러독스(The Selfie Paradox)’입니다. 자신의 셀카를 많이 찍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셀카에 관심 없는 심리 상태를 의미합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글을 열심히 쓰는 분들은 많아도 상대방의 글을 열심히 읽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친구’ 수가 많을수록 ‘친구’의 서재 글을 다 볼 수 없습니다. 북플 뉴스피드에 뜨는 ‘친구’ 회원들의 ‘읽었습니다.’, ‘읽고 싶어 합니다.’ 정보가 점점 많아지니까 서재 글이 묻힙니다. 북플 등장 이후로 서재 글을 읽기가 더욱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는 ‘친구 추가’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친구 신청'도 하지 않습니다. 계속 ‘친구’ 수가 늘어나면 수없이 올라오는 글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하루에 열 편 이상 뉴스피드에 공개된 ‘친구’ 회원의 글을 정독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읽어보려고 합니다. 작성자의 정성이 느껴지는 글은 그냥 안 보고 지나갈 수 없어요. 제 취향에 맞지 않는 주제의 글은 그냥 넘깁니다. 애초에 읽지 않은 글에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 서재를 ‘팔로워’한 회원 중에는 ‘이달의 당선작 독자 선정 위원회’ 소속 회원이 있을 겁니다. 다음 달부터 제15기 독자 선정 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오늘 20명의 15기 독자 선정 위원회 명단이 공개됩니다. 아마도 이분들이 제 서재를 즐겨 찾거나 ‘팔로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 목록에 독자 선정 위원회가 포함되어 있다면, 서재 글이 ‘이달의 당선작’에 뽑힐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하지 않은 혜택을 받지 않기 위해서 ‘팔로워’ 회원들을 ‘친구’로 추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서재 활동과 관련된 제 성향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건방진 소리 듣더라도 호불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제 취향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글을 보고 나서 ‘친구’ 관계를 해제한다고 해서 전혀 불쾌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의 지루하고도 건방진 글을 참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글에 자주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분들에게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분들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읽으려고 하고, ‘좋아요’를 눌러줍니다. 또한, 그분들에게 특별한 선물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긍정적인 관심을 많이 받은 만큼 주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제 의견을 달리하는 분들도 환영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과 감정적인 대응을 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악감정없이 원만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칭찬과 비판이 주고받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소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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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0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30 11:49   좋아요 0 | URL
제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북프리쿠키 2017-03-3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실천이 어렵다고 틀린 얘기가 되는 건 아닐테니깐요.
북플말고 sns를 끊었는데요.
싸이러스님의 말씀중에는 sns의 폐해가 많이 담겨있기에 저부터라도
조금씩 바뀌어 나가야겠어요~
책을 읽고 쓰고 같이 공감하는 원래의 취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cyrus 2017-03-30 11:55   좋아요 2 | URL
페이스북이 싫어서 떠난 뒤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이 알라딘 서재입니다. 그런데 페이스북 비슷한 북플이 나오면서부터 제가 부담스러워했던 상황을 다시 겪게 되더군요... ㅎㅎㅎ

제가 밝힌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맞는 것도 아니고요. 각자가 편하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서재 활동을 하면 됩니다. 그냥 저처럼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


transient-guest 2017-03-3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이 편하지만 예전의 시스템이 그립기도 합니다 저도 고민 중이에요

cyrus 2017-03-30 20:5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를 떠나고 싶어도 여기서 쌓인 정을 생각하면 쉽게 떠날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

오후즈음 2017-03-3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해요. 전 이곳보다 네이버 블로그를 훨씬 먼저 했는데요. 예전 이웃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걸 보면서 오래전의 정답던 그 작은 방문들이 그리울때가 있더군요

cyrus 2017-03-30 20:56   좋아요 0 | URL
제가 알라딘 서재에 활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난 분들이 그립습니다. 서재 활동이 뜸해지면 예전에 만났던 분들도 서재 활동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서재 활동을 재개했을 때 서재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잠자냥 2017-03-30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늦기 전에 cyrus 님과 친구가 되어서 다행이군요. 하하하. ^^;;

닷슈 2017-03-30 14: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생각해요

cyrus 2017-03-30 21:00   좋아요 1 | URL
To. 잠자냥님, 닷슈님 / 예전에는 친하게 지낸 분에게 오래오래 잘 지내자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몇 년 지내보니까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소한 다툼 때문에 사이가 한순간에 틀어질 수 있고, 예고없이 서재 활동을 멈추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상황을 한번쯤은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레삭매냐 2017-03-3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친구 신청 먼저 해주시고 아무런 팔로우업이
없는 분들은 정리를 해야 할까 싶더라구요.

그리고 저랑 독서취향이 현저하게 다르신 분들도...

SNS 가 소통의 수단이라기 보니 어느 순간 피로도로
느끼게 되면 정말 피곤해 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cyrus 2017-03-30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새로운 취향을 접하는 것도 좋긴 한데, 거기에 너무 열중하면 제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못할 때가 있어요. 책은 제가 읽고 싶은 걸 읽어야 해요. 다른 분들이 소개하고, 추천하는 책들을 다 읽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책 추천하는 글은 안 써요. 안 읽은 책을 추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요.

yureka01 2017-03-31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준이 북플이든 서재이든 글이 있냐 없냐로 판단합니다.
글 없는 서재 혹은 북플은 제외.
단, 외부의 사진블로그 분들 몇 분 계시는데 알라딘하곤 상관없으니 예외입니다.

서재나 북플에서 친구 200명 넘어가면 올라오는 블로그 글 다 못보거든요....

소통이 될려면 100명이하 일 수밖에 없죠...
100명 넘으면 하루 종일 서재블로그글만 봐도 시간 부족이고 다 못보거든요.ㅋ
솔까 친구 숫자 200넘어가면 블로그는 혼자 독고다이 하겠다는 의미와도 다를바 없을 거 같아서요..

cyrus 2017-03-30 21:07   좋아요 2 | URL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원 수를 ‘던바의 수‘라고 합니다. 가장 적합한 던바의 수가 150입니다. 그런데 이 수는 최대한 많이 잡은 겁니다. 실질적으로는 20명이 적당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제 글을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다는 분들의 수가 열 명 조금 넘습니다. 정확히 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충 어림 잡으면 그 정도 나옵니다.

앤의다락방 2017-03-3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통. 공감합니다.

cyrus 2017-03-30 21:08   좋아요 0 | URL
제일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 ‘소통‘인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30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카 페러독스... 재미있네요. 친구 신청 기능은 알라딘 최악의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페이스북도 아니고.... 뭔가 십습니다..

cyrus 2017-03-30 21:09   좋아요 0 | URL
아예 ‘친구 서재‘라는 명칭이 생겼어요. 북플의 ‘친구‘와 알라딘 ‘서재‘를 억지로 합친 느낌이 들어요.

stella.K 2017-03-30 14: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옳은 말이야.
그런데 이 좋아요가 생각해 보면 꼭 완전히 다 읽고 동의의 의미만을 구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꼭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좀 벗어날
필요도 있거든.. 책을 완독해야만 옳은 독서는 아닌 것처럼.
좋아요가 딱 하나여서 문제가 발생하는 거지.
좋아요 말고도 여러 다양한 문항이 만들어 져야하는데...
지금으로선 읽는 사람이 해석하는 수 밖엔 없어.
예를 들면 누구의 죽음의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잖아.
그게 정말 그 사람이 죽어 좋은 게 아니라 조의의 의미라는 걸
우린 암묵적으로 해석하잖아.

너도 그렇겠지만, 내가 쓰는 글에 꼭 와서 좋아요를 누르고 가는
이웃이 있거든. 난 솔직히 그 분들 서재에 관심이 없어.
그런데도 와서 누르고 가면 그게 그렇게 고맙더군.
내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그분들이 내 글에 무조건 다 동의해서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인정한다는 뜻도 있겠지.
아무튼 이 춘곤증의 계절에 주저리 주저리 떠들 수는 없고
그냥 좀 유연한 사고를 가져 보자고.

근데 난 네가 제기한 이달의 당선작의 부분은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선작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열심히 쓰는데 되는 사람만 되고.
너무 불공평해. 성실파들은 어쩌라고...ㅠ

cyrus 2017-03-30 21:18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누님이 정말 좋은 말씀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깐 제 생각에 모순이 있었어요.

‘좋아요‘ 누른 분들이 고맙다고 하면서도 글 안 읽고 ‘좋아요‘ 누른 분들을 비판했으니까요. 제가 좀 꽉막힌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친구 추가‘를 하지 않고, 서재 활동을 해볼 생각이예요. 예전에 비해 ‘좋아요‘ 받은 수가 적어질 거예요. 일종의 패널티라고 생각해야죠.

감은빛 2017-03-30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과 서재 친구여서 시루스님의 독창적이고, 명쾌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제가 서재에 자주 들어오지 않아, 자주 읽지는 못 했습니다.

북플은 마지막으로 들어간 게 언제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네요.
요즘은 가끔 신간 정보 검색하러 피씨로만 알라딘에 들어옵니다.
서재는 진짜 오랜만에 접속해보네요.

가끔 들어와서 읽는 서재 친구들 글이 참 좋다고 느껴요.

cyrus 2017-03-30 21:26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 시절에는 정독까진 아니어도 글을 천천히 읽을 수 있었어요. ‘읽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주제의 글 한 편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플은 짧은 글, 사진 위주의 게시물을 보기 편안한 공간입니다. 게다가 북플로 먼댓글마저 달 수 없어요. 이러면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분위기가 형성될 수 없어요. 알라딘이 북플을 참 잘 만들었어요. 회원 간의 친목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줬으니까요.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싸우는 일이 보기 힘들어졌어요.

곰토낑 2017-03-31 0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 이십니다. 저도 저 싫은건 안하고 안읽으려고 하는데 읽으셨든 안읽으셨든 좋아요 눌러주시는분들 참 고마워서 제가 좋아하는것도 아니지만 일종의 의리(?)로 저도 눌러주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받은게 있으니 돌려주는게 나쁜건 아니잖아요? ^^ 비록 성의는 없을지라도.. 제가 느꼈던 소소한 기쁨을 그분도 맛보게 된다면 좋은거지요 ㅎㅎ

친구관계는 아니지만 종종 들러주셔서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소한것에 너무 신경쓰지마시고 하고싶은 얘기 맘껏써주세요 ㅎㅎ(그렇게 생각하시는걸 사소하다고 폄하하고 싶은건 아니나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네요 ㅠㅠ)

cyrus 2017-03-31 09:33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을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슈플레님. 저와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솔직하게 터놓고 말씀해주시니까 속 시원합니다. 어제 제가 밝힌 입장은 상당히 민감한 주제입니다. 제가 잘못 전달하면, 상대방의 기분이 언짢게 생각할 수 있어요. 몇몇 분들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가볍게 볼 수 있는 걸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요. ^^;;

AgalmA 2017-03-31 05: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웃 뉴스피드 너무 많아서 안그래도 넘 스트레스ㅎ;;
cyrus님 글에 빌붙어 저도 입장 좀 얘기할께요ㅎ;
정보 습득 차원에서 즐겨찾기용으로 친추하시는 분들 꽤 되죠. 이건 시스템상 말릴 수도 없고 나랑 소통할 수 있겠다 싶음 저도 맞팔합니다. 그런데 제 일방적 소통만 있다 싶음 친구 해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좋은 글 쓰는 분일 땐 소통 포기하고 그냥 글 보게 되면 좋아요만 눌러드리죠... 강제 정보 습득자가 된 기분ㅎㅎ;
정보 습득 차원이 아니라 소통을 원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보다가 자신과 안 맞다 싶음 친구해제 하시죠. 그거 땜에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참 복잡하더군요. 소통 많이 하던 이웃이 뜸하면 섭섭해하고 그럴까봐 굳이 찾아가 좋아요 누르고 하는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말로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저는 친구이든 아니든 좋은 글이다 싶음 좋아요 누릅니다. 물론 봐야 가능한 거지만ㅎ;; 요즘은 이웃 글도 다 챙겨 보기 힘든 처지라;;
제게도 의무감으로 좋아요 안 눌러 주셔도 됩니다. 저도 그래야 부담없이 글 쓰고 할 거 같아서ㅎㅎ서로 시원하게 친구해제해도 되고ㅎㅎ

cyrus 2017-03-31 09:42   좋아요 0 | URL
‘강제 정보 습득자’라는 표현에 공감합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부담스럽게 느꼈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해주셨어요. 제가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친구 해제’를 하고 있었어요. 그분들을 싫어해서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니까 별 문제가 없다고 봐요. 어차피 ‘친구 해제’를 해도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팔로워’에 계속 있는 것 보면요. ‘친구’ 관계는 아니더라도 댓글로 소통하면서 알고 지내는 관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2017-03-31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31 09:44   좋아요 1 | URL
한쪽 귀로 듣고, 나머지 귀로 흘러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직접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님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Agalma님처럼 서재 활동을 하신다면, 서재 활동에 대한 정신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

2017-04-04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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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는 스스로 시장경제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1]

 

 

 

인간을 분류하는 기본적인 범주는 성별에 따른 구분이다. 인간은 태어날 적부터 해부학적 차이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여자가 해야 하는 일과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정해진다. 아내는 주로 자녀양육과 집안일의 책임을 지게 되고, 남편은 전적으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다. 요즈음에 와서 젊은 아빠들이 자녀 양육과 가사 일에도 참여하는 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집안일은 여전히 아내 몫이다.

 

일찍이 서구에서 시작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남녀는 본성적으로 다르며 그에 맞는 성 역할이 있다고 차이의 논리를 펼친다. 이는 여성을 사적 영역과 모성(母性)을 상징하는 존재로 국한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기제로 이용된다. 여성을 종속적으로 보는 생물학 결정론자들은 남존여비를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자연의 질서로 보고, 성별분업도 생리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라고 본다.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O. Wilson)이 정립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은 생물학적 결정론자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인간의 사회성에도 적용하려는 했다.

 

 

수렵 채취 사회에서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습관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대다수의 농업 사회 및 산업 사회에도 끈덕지게 남아 있으며 그런 사실에만 근거한다고 해도 유전적인 기원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유전적인 편향은 대단히 강력해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주의적인 미래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분업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여자는 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해 지금까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이 돼왔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이데올로기다.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 요인이 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국부론》을 통해 밝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는 개인이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해 이익을 창출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경제학자이기 전에 윤리학자였던 스미스는 정의와 이성에 따라 노동, 생산, 교환, 분배가 이루어지는 시장구조를 만들려면 도덕적 엘리트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스미스의 도덕적 엘리트주의는 남성 중심의 엘리트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남편의 경제활동은 유급노동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부여되지만, 대다수 주부의 가사노동은 당연한 몫으로 인식되면서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여성의 사회적 · 경제적 지위는 남편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가사노동은 가족에 대한 자발적 헌신, 봉사와 사랑의 행위임에도 경제적인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임금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지난달 중순에 조너선 B. 화이트(Jonathan B. Wight)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가 재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스미스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이 스미스가 현대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이다. 경제학의 대부는 자동차정비공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보다 먼저 일찍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2월 초순에 나온 카트리네 마르살(Katrine Marcal)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약칭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스미스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책이다. 마르살은 시장경제에서 오랫동안 배제된 ‘보이지 않는 여성’의 경제적 권리와 노동을 조명한다. 그녀는 남자들이 이기심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던 것도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한 그들의 아내 혹은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각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바닥에 깐 자율경쟁을 존중하는 시장자유주의자라면 ‘여자=전업주부=무보수 노동=비경제 활동’으로 이어지는 낡은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결혼 · 임신 · 출산 · 가사 등으로 사회경력이 단절돼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에게도 일할 충분한 기회를 주고 나서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라고 해도 그런 등식이 성립할까. 만약 스미스가 자동차정비공이 아닌 주부로 태어난다면,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버린 시장경제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주류경제학은 양육이나 가사 일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진 여성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간주해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주류경제학으로 인정받고 싶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불평등은 불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이 주류경제학으로 자리 잡을수록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서 차별받으면서 남성들에게 무임노동을 제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들은 스미스가 말하는 ‘개인’이 되지 못한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맹신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여성’을 만들고 있는지를 환기시킨다.

 

1970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사회생물학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나는 성차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경제학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낡은 경제학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주류경제학이 가정하는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경제학이 변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현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고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성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면 경제가 발전한다는 구닥다리 환상에 벗어나야 한다. 지금은 ‘보이는 기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성’을 위한 경제 정책 마련이 더 시급하다.

 

 

 

 

[1] 원문 : 가부장제는 스스로 자연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케이트 밀렛,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43~344쪽)

 

[2]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의 글 일부 인용,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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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9 07:40   좋아요 0 | URL
***님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야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

transient-guest 2017-03-29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같이 일해보면, 여자들이 일을 더 잘하는 것처럼 느낀 적도 많이 있어요. ㅎㅎ

cyrus 2017-03-29 08:05   좋아요 1 | URL
‘여자는 남자보다 일을 못해‘라고 믿는 남자들의 논리는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transient-guest 2017-03-29 08:07   좋아요 1 | URL
분명히 남녀가 각각 장단점을 보이는 일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상의 업무나 일의 영역은 아니지요.ㅎ 진짜로, 제가 같이 일해본 직원들만 놓고 봐도, 여자들이 훨씬 나았더랬습니다.ㅎㅎㅎ
 

 

 

 

 

 

인류는 ‘이성’을 내세워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 발전된 문명이 초래한 야만성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인간도 동물이다’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지만 동물도 인간이라는 이런 관점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전히 인간을 동물보다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라 발언을 할 수 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 (민음사, 2016)

 

 

고대 인도의 승려 카필라는 ‘동물만도 못한 인간’의 원조다. 그는 부처의 제자 중에 가장 총명했으나 자신보다 영리하지 못한 동료들을 만나면 ‘원숭이 대가리’, ‘닭대가리’라고 놀려댔다. 카필라는 일찍 죽고 말았는데, 업보로 100개의 동물 대가리가 달린 물고기로 환생하게 됐다. 이 괴물에 달린 100개의 머리는 생전에 카필라가 동료들에게 놀렸을 때 언급했던 모든 동물 대가리였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제국주의의 광풍이 휩쓸던 유럽에서는 열등한 인종을 동물로 비하하는 학문이 유행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인간을 10개 종(種)으로 분류, 흑인을 가장 야만적인 종족으로 규정했다.

 

 

 

 

 

그는 흑인종이 원숭이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했다. 미개한 종족은 발달한 종족의 관리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의 견해는 나중에 나치주의자들의 인종차별 정책에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헤켈은 과학의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진화(evolution)와 진보(progress)를 손잡게 했다. 그의 인류기원설은 폐기되었지만, 진화와 진보의 불편한 동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탈리아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Cesare Lombroso)는 범죄자는 원숭이에 가까운 유전자를 지녔고, 동물의 모습과 비슷한 일명 범죄형 얼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죄자의 해부학적 특성을 과거로 퇴화하는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선천적 범죄자의 안면 현상을 넙치나 가자미 같은 물고기 형상과 비교했다.[1]

 

 

 

 

 

 

 

 

 

 

 

 

 

 

 

* 루이스 캐럴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월의봄, 2015)

* 허버트 조지 웰즈 《타임머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진화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던 19세기 유럽인들은 ‘고등 계급’과 ‘하급 계급’이 있듯이 이와 비슷한 ‘고등 동물’과 ‘하등 동물’이 있다고 믿었다. 극단적인 이분법은 계급 차별의 기준이 되었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물고기와 개구리 머리를 한 두 명의 시종이 등장한다. 사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물고기와 개구리에 가깝다.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는 《타임머신》에서 지하에 사는 흉측한 종족 몰록을 ‘동굴에 사는 흰 물고기’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다고 묘사했다.[2]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설에 등장하는 80만년 후의 미래 인류 엘로이와 몰록은 19세기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풍자한 것이다.

 

 

 

 

 

 

 

 

 

 

 

 

 

 

 

 

 

*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전집 1》 (황금가지, 2009)

 

 

진화에 역행하는 현상, 즉 퇴행이라는 주제는 그 성격상 작가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다. 특히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인스머스의 그림자』(The Shadow Over Innsmouth)생물학적 퇴행의 공포감을 잘 표현한 수작이다.

 

 

 

 

 

이 작품의 배경 인스머스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가상의 마을이다. 과거에 인스머스는 번영한 항구 마을이었으나 ‘불길한 전염병’이 덮쳐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 변했고,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작품에서 인스머스 주민들은 물고기 또는 양서류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인으로 묘사된다. 러브크래프트는 인스머스 주민들을 ‘진화를 거스르는 열등한 존재’로 그렸는데, 그들에 대한 공포는 작가 개인이 체험한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앵글로색슨 족이 가장 위대한 인종으로 추켜세웠고, 흑인과 아시아인은 악랄하고 미개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

 

동물을 보면 떠올리는 혐오감은 인간의 오랜 타성이며 그 동물의 부정적 면을 또 다른 인간의 약점에 비유하는 인식 역시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대한 맹렬한 욕구를 바탕 삼은 인류의 진보는 사회의 차별 ·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다윈은 진보로 둔갑한 진화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다윈의 추종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차별의 양상을 자연스러운 진화의 산물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친밀하지 못한 존재를 무섭거나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과 적개심은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불순한 생각이다.

 

 

 

[1]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17쪽

[2] 허버트 조지 웰즈 《타임머신》 106쪽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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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 한 권으로 보는 인상주의 그림
제임스 H. 루빈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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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미술을 주제로 한 책이 새로 나왔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땐, 그저 흔한 미술책인 줄 알았다. 이 책의 절반이 내가 아는 내용으로 채워졌으면 속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확실히 이 책에는 기존에 나온 인상주의 미술 관련 서적과 차별화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의 저자 제임스 H. 루빈(James H. Rubin)은 19세기 유럽 미술, 특히 인상주의 미술을 연구한 미술사학자이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루빈의 책이 《인상주의》(한길아트, 2001)였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원제가 ‘How to read Impressionism : ways of looking’이다. 부제로 사용된 구절 ‘ways of looking’은 올해 1월에 타계한 존 버저(John Peter Berger, 국내에서는 ‘존 버거’로 알려진 유명한 작가)의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열화당, 2012)를 패러디한 것이다. 루빈은 그림을 바라보는 버저의 방식, 즉 ‘주의를 기울여 보는 방법(look)’을 빌려 인상주의 그림을 독창적으로 해석한다.

 

 

 

 

 

루빈이 주의를 기울여 본 대상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선호한 주제와 기법 들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도시 풍경, 유흥 장소, 철도 교(橋), 공장 등 19세기 근대 파리의 생활상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소재들을 그렸다. 인상주의하면 보통 자연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풍경뿐 아니라 파리 근대생활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미국 인상주의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메리 커샛(Mary Cassatt)은 미국에 인상주의를 전하고 특유의 사조로 잘 발전시켰던 여성 화가이다. 그녀는 주로 중상류층의 침실과 거실 같은 사적인 공간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비록 그림 1점만 소개됐지만, 미국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 차일드 해섬(Childe Hassam)도 주목해볼 만하다.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인상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양식뿐 아니라 화가 개개인이 가진 특징적인 화풍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루빈은 친절하게 비교 도판까지 수록하면서 독자들이 한층 깊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그림이 특이하게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작품이다. 폴록은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현대적인 화가의 작품이 왜 근대적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과 한자리에 배치되었는지 궁금하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

 

 

 

 

 

 

 

 

 

인상주의 미술이 정점을 찍었던 19세기는 그야말로 ‘이미지의 시대’였다. 이때부터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진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술에 매료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진기처럼 언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많은 이미지를 묘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나와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다양한 색채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파리 거리, 비 오는 날』에서 한가롭게 산책하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전했다.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은 산업화의 중심에 선 노동자들의 모습에 매료됐다. 이렇듯 우리는 인상주의 그림에서 그 시대가 낳은 눈과 마음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문명의 변화는 세상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또한 변화시킨다. 그 변화를 예전의 방식으로 담기 힘들다면, 미술은 새로운 방식을 탐색해 나가야 한다. 인상주의 그림에는 근대가 낳은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본 화가들의 탐색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속에는 화가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깊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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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22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고 여기서 잭슨 폴락의 그림을 만나게 될줄이야..ㅎㅎㅎㅎ
이 화가의 그림이 모티브가 되어 제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아놔~
1950년대에 현대추상주의 그림이 나온다는게 참 대단한 ~~~

그럼요..예술에서 안목을 기르는 방법 역시 책에서 부터 시작이죠..
어떤 작품이든지 간에 그 작품에 대한 심안이 필요하고 왜 그림이 나오게 된
뒷배경이 항상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그 배경과 시대상과 작가의 개인의 삶이 믹스된 것이 곧 작품의 해석으로
연결되거든요..좋은 책 만났네요.안목을 길러야 할 이유..충분합니다~

cyrus 2017-03-23 17:23   좋아요 2 | URL
그림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독서가 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미술과 사진 같은 분야를 이해하려면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

stella.K 2017-03-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삼. 얼마 전 모처에서 이벤트 때 응모했다 미끄덩~ㅠ
책 표지가 맘에 들더군.ㅎ

cyrus 2017-03-23 17:24   좋아요 0 | URL
혹시 서평단 이벤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이벤트가 있는 줄 몰랐어요. 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봤습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

AgalmA 2017-03-22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리 커샛 그림 색감 정말 좋네요^^
왜 인상주의 책에 잭슨 폴록일까....
문득 외관을 지워버리고 색의 향연만 남았던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 그림이 스쳐 갑니다. 빛의 달라짐을 홀린 듯이 따라갔던 그 멋진 작업이.
잭슨 폴록의 그림은 전체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의 색을 따라가며 그 움직임을 살필 때 이해가 더 넓어진다고 하죠. 그가 색채에 홀린듯이 따라갔던 길을 우리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느껴야 소통의 길이 넓어지겠죠.
제 인상평은 여기서 이만ㅎ

cyrus 2017-03-23 23:46   좋아요 1 | URL
Agalma님의 생각이 책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인상주의를 추상표현주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화파로 해석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내용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떤 책의 리뷰를 확인할 때 100자평을 거른다. 한줄 평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줄 평이든 100자평이든 짧은 리뷰 중에는 ‘평(評)’으로 보기 힘든 것이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100자평에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낮은 별점을 준 100자평은 실소를 자아낸다.

 

 

 

 

 

 

 

 

 

 

 

 

 

 

* 앨런 S. 밀러, 가나자와 사토시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

 

 

어떤 100자평 작성자는 책에 별점 한 개를 줬다. 그 사람은 아주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과학적 사실의 좋은 점은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사실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들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학자들이 진화심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입씨름하는 것은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진화심리학 연구 결과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한 가지 콕 집어 말하자면 가설을 지지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기 위해서 비판한다. 연구 결과는 어떤 현상을 탐구하면서 확인하게 된 관찰 결과일 뿐이다. 가설을 재검증하는 절차를 통해 최종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함부로 ‘사실’로 결론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화심리학자들도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신중해진다.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펴낸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책이 관찰 결과를 기술(記述) ·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자신들은 관찰 결과로부터 어떤 결과나 결론도 끌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학에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1]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과학자이든 페미니스트이든 신뢰할만한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나오면,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도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가설을 동의하지 못해 거부할 수도 있다. 진화심리학이 가장 많이 받는 비판 거리 중 하나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점이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할 때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옹호한다고 해서 그들을 불순한 동기로 이론을 정당화하는 ‘나쁜 놈’으로 몰아세우지 말 것.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사회생물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의 공통점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 깊숙이 자리하는 인간 본성의 실체를 밝히는 분야이다. 굴드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면서도 그를 차별을 유도하는 악의 세력으로 험담하지 않았다. 굴드가 사회생물학의 등장을 우려한 진짜 이유는 사회생물학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보수성이 강한 학자나 정치인이 진화심리학 가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진화심리학 가설이 주는 불편함을 못 느낀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자가 풍만한 가슴의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흡족할 만한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첫 번째 가설. 풍만하게 느껴지는 무거운 가슴은 작은 가슴에 비해 나이가 들수록 ‘처진 가슴’으로 변하기 쉽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눈으로 보고, 여자의 나이를 판별할 수 있다. 젊은 여성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프랭크 말로위의 주장,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참고)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두 번째 가설. 남자는 젊고, 건강하고, 임신 가능성이 높은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한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 형태를 건강한 배우자를 찾기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여성의 가슴은 남성에게 잠재적인 배우자임을 알려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신호이다. 첫 번째 가설과 일맥상통하다. (바너비 딕슨과 앨런 딕슨의 주장, 《가슴 이야기》 참고)

 

 

 

 

 

 

 

 

 

 

 

 

 

 

 

 

* 데즈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문예춘추사, 2011)

* 데즈먼드 모리스 《벌거벗은 여자》 (휴먼앤북스, 2004)

 

 

 

마지막 가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가설에 비해 오래된 것이다. 올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의 《털없는 원숭이》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으로 (또 한 번) 언급해본다. 여자의 가슴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성적 신호이다. 자신의 주장이 비판받게 되자 모리스는 2004년에 출간한 《벌거벗은 여자》에 여자의 가슴은 양육(모유 수유)과 성(性), 두 가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남자가 여성의 가슴을 선호하는 것에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이를 진화의 관점으로 남자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젊은 여성이 큰 가슴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모리스는 가장 완벽한 반구 모양의 가슴이 완성되는 여성의 나이를 25세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통으로 여성이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가슴 형태가 처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놓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임신기(姙娠期)와 수유 기간이 되면 원래 가슴 형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가슴이 커진다. 임신한 작은 가슴의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작은 가슴의 여성이 남성의 배우자 선택에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 가슴 크기로 나이를 판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25세 여성 모두가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의 가설대로 여성의 가슴이 남자들을 위한 신체적 신호가 되어야 한다면, 가슴의 크기가 거의 같아야 한다.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는 처진 가슴을 나이 든 여성과 연관 짓는 주장에 반대한다. 젊은 나이에 가슴이 처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가설 모두 여성 가슴의 필요성을 오로지 남성의 기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슴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진화한 신체 부위이다. 물론, 수유 목적으로 가슴이 발달했다는 주장 또한 가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세 가지 가설을 마치 설득력 있는 사실인 것처럼 믿는 경우이다. 이를 비판하면서 양육 기능으로서의 가슴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남성들은 그런 비판 입장을 페미니스트의 분노로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가설을 검증할 기회가 축소되고,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못하는 깊숙한 도그마(Dogma)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이 글의 결론을 내리자면, 여성이 가슴이 생긴 이유와 남성이 풍만한 가슴을 선호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줄 이론은 없다. 앞에서 설명한 이론들은 ‘과학적 지식에 입각한 추측’, 즉 과학적 가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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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 페미니즘 서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들 혹은 별점 테러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3-22 09:59 
    마티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동녘사이언스, 2017)에 별점 테러 혹은 ‘100자평’ 테러를 저지르는 분들 논조를 보면 아주 단정적이고, 독단적이고, 훈계조이고, 혹은 꽤 전투적입니다. 아마도 제가 추측하기에 이들 과격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덕하 씨가 운영하는 《진화 심리학 카페》(http://cafe.naver.com/evopsy2014)에서 온 분들 같습니다. 이덕하 씨의 페미니즘에 대한 전투적이고 과격한 견해에 영향을
 
 
2017-03-21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2 11:36   좋아요 0 | URL
‘어엽다’가 ‘어렵다+귀엽다’가 합친 말입니까? ㅎㅎㅎ

마립간 2017-03-22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다시 꼼꼼히 읽고 숙고해야겠지만, 진화론에 대한 비판( 예를 들면 창조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다른지 얼른 납득이되지 않는군요.

cyrus 2017-03-22 11:39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은 제 글을 보고 특별한 생각을 하셨군요. 제가 이제 막 진화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터라 계속 관련서적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7-03-22 19:10   좋아요 0 | URL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마립간 2017-03-2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개의 문장을 제 페이퍼에 인용합니다.

cyrus 2017-03-22 11:40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