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으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그 날이 생각난다. 4,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조금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들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페이스북에서 여성 시인 ‘임 씨’를 알게 됐다. 임 시인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하게 된 것을 수락한 계기로 서로 알기 시작했고,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한 번은 임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장문에 가까운 글을 남겼다. 임 시인은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惡)’이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악’이 하나의 문학적 소재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나는 그 글을 보는 순간, 임 시인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문학 작품에 드러난 악’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언급했다. 아니, 그런데 내 댓글에 시인의 ‘페이스북 친구’ A가 답글을 달았다. 나는 A와는 일면이 없었다. 프로필 사진으로 봐서는 A는 중년층 남성이었다. A는 내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내가 시집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면서, 보들레르가 악에 탐닉했다기보다는 기독교 정신도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들레르의 시 제목 하나를 언급했는데, 지금은 그게 제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A의 답글 하나로 인해 임 시인의 글을 지적했다가 도리어 제3자에게 지적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시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식으로 좋게 답글을 남겼다. A의 반박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남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논쟁을 해봤자 어차피 내가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때 나는 임 시인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고, A와 임 시인은 서로 페이스북 글에 ‘좋아요’를 많이 눌러줄 정도로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다. 임 시인이 내 의견을 옹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임 시인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답글을 달았는데, 역시 내 의견에 동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시집을 다시 읽었다. 시집은 윤영애 교수가 번역한 ‘문학과지성사’ 판본이다. 내가 잘못 안 건지, 아니면 A가 잘못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시집을 정독했다. 그런데 몇 번 읽어봐도 A가 알려준 시 제목이 ‘문학과지성사’ 판본에 없었다. 만약 A가 프랑스어로 된 시 제목이나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알려줬으면 그게 무슨 시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A가 알려준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복수(?)의 기회는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

 

몇 년 지나고 나서야 여기서 A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나 자신이 쪼잔해 보인다. 그래도 이번에 보들레르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이 알게 된 생각만큼은 꼭 밝히고 싶다.

 

 

 

 

 

 

 

 

 

 

 

 

 

 

*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1974년)

* 《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악의 꽃》 (황현산 역, 민음사, 2016년)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번역본은 ‘문학과지성사’ 판본(윤영애 역), ‘민음사’ 구판(김붕구 역), 그리고 구판을 절판시키고, 작년에 새롭게 선보인 ‘리뉴얼판(황현산 역)’이다. ‘문학과지성사’ 판본은 1857년 초판 출간 당시 윤리성 논란으로 삭제된 6편의 시뿐만 아니라 《악의 꽃》 2판에 실을 예정이었던 에필로그의 초고도 수록되었다. ‘민음사’ 구판과 ‘리뉴얼판’은 선집 형태이다. 한 권에 수록된 시의 편수가 적지만, 프랑스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문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번역이 다른 세 권의 시집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세 권의 번역본마다 약간씩 번역 어휘의 차이점은 있다. 다만 그걸 비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수의 번역본을 읽은 진짜 이유가 보들레르의 시를 바라보는 번역자들의 관점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수』(L’Ennemi)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 시는 세 권의 번역본 모두 수록되었다.

 

 

내 청춘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하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빠알간 열매 몇 안 남았네.

나 지금 사상(思想)의 가을에 닿았으니,

삽과 갈퀴를 들고 다시 긁어 모아야지,

홍수가 지나며 묘혈처럼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놓았으니.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들이

모래톱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활력이 될 신비의 양분을 얻을지를?

― 오 괴로워라! 괴로워라! 시간은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정체모를 원수는

우리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지는구나!

 

(『원수』, 김붕구 역)

 

 

이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들레르 연구가와 번역가들은 이 시의 제목인 ‘원수’의 정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보들레르는 늘 ‘권태’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한 환멸을 떨쳐내려고 상상의 낙원을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공상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했고, 그는 시를 통해 증오와 환멸을 드러내며 폭력과 악의(惡意)를 언어로 표출했다. 시인은 자기 회한과 허무를 곱씹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는 과정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지옥의 시간’이었을 터. 윤영애 교수는 ‘원수’의 정체가 ‘생명을 파먹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붕구 씨는 다른 견해를 밝혔는데, ‘권태’ 또는 ‘회한’이라고 했다. 리뉴얼판의 번역을 맡은 황현산 교수는 ‘원수’를 단수의 의미가 아닌 복수의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다른 시에서 두려운 존재로 언급된 ‘시간’, ‘죽음’, ‘권태’는 물론이고, 시인을 괴롭힌 질병인 ‘매독’까지 거론된다.

 

 

 

 

 

 

 

 

 

 

 

 

 

 

 

*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년)

 

 

보들레르의 시 한 편을 바라보는 번역가의 시선이 다르듯이 《악의 꽃》을 딱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다. 내가 보들레르를 ‘추(醜)와 악의 미학을 발견한 시인’이라고 평가해도 맞다. A처럼 시에서 기독교 정신과 유사하다고 느꼈다면 그 의견 또한 맞다. 사실 보들레르는 어떤 시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방해하는 신에 반항하고 모독하는 한편, 또 다른 시에서는 신을 찬양한다. 어느 불문학자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마니교(Manichaeism)의 교리를 읽어내기도 한다.[1] 시집 전체의 일부를 말해도 좋으나, 그 일부를 전체로 말하는 것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에 가깝다. 자신의 의견만 믿고, 상대방의 의견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이다. 《악의 꽃》 한 번 제대로 읽었다고해서 그 시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고 볼 수 없다. 시를 읽을 때마다 '악의 꽃'에서 나는 향기가 달라진다.

 

 

[1]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보들레르의 명증(明證)’ 244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02-10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면 cyrus님 같은 상황은 늘 마주치게 되는 거 같습니다.
해석의 옹호보다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에 늘 응원보내요 :)

cyrus 2017-02-10 10:45   좋아요 1 | URL
해석의 옹호에 매달리면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하다고 해도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경계하려고 합니다. ^^

마립간 2017-02-1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어지만 이해를 못해서,) 가지고 있지만,

cyrus 님이 제시한 반례로서 문학을 확장한 예술의 경우로 뭉크와 같은 악마파 그림이 어떠하였을까 생각합니다.

cyrus 2017-02-10 10:48   좋아요 0 | URL
보들레르와 뭉크는 상징주의에 분류됩니다. 여기에 마립간님이 말씀하신 악마파, 혹은 악마주의로 상징주의 문학 · 예술에 포함됩니다. ‘예술 작품에 드러난 악’에 대해서 논한다면, 뭉크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

잠자냥 2017-02-10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쪼잔함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 아닐까요? ㅎㅎ

cyrus 2017-02-10 10:50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번역본 한 권만 다 읽으면 그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했어요. 여러 권의 번역본을 읽어보니까 예전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현대의 지성 59
노르베르토 보비오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평점 :
품절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흔히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와 혼동되고, 상호 대립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가치와 사고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자유주의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와 반공주의와 손을 잡고 말았다. 잘못된 만남이다. 이로 인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반국가 및 반체제세력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고,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에 기댄 위정자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유신체제식 자유주의’를 펴나갔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정부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기본적 원칙뿐만 아니라 주권 재민 사상, 인권 존중 이런 것들을 훼손시켜왔다. 유신체제의 반공주의는 ‘자유’를 지키자는 이념과 아주 거리가 멀다. 전체주의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자유를 찾으려는 이념이라기보다 북한과 사회주의에 향한 증오의 이념이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과제는 자유와 평등, 이 두 개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다. 평등 문제와 관련된 자유민주주의적 이론 경향은 크게 ‘자유평등주의’와 ‘자유지상주의’로 나눌 수 있다. 존 롤스(John Rawls)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 자유주의에 평등주의의 장점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자유지상주의자적 입장에서 롤스에 대항하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국가의 역할이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질서의 한계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구현하려고 한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적 구분과 대립이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구실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는 상황을 사회 분란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로부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혔다. 자유주의는 이미 허점이 드러난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마르크시즘(Marxism)과 전체주의적 권력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를 경계했다.

 

전통 사회주의의 한계는 명백히 지적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에 입각한 평등의 가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평등이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뜻깊은 성찰을 제공해주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구조적 불평등을 철저히 분쇄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각종 권리의 행사에 부당한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체제이다. 보비오는 두 가지 이념 사이에 생긴 차이점의 간격을 줄이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를 제안한다. 자유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참여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과물이나 가치의 균등한 배분, 즉 사회적 시민권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형태이다.

 

일부 지식인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유사회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결합해서 경제 불평등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가 ‘자유사회주의’의 실효성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이다.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관용’은 기득권층에 흡수돼 버려 보수주의에서는 ‘질서와 안정’의 하위 개념이 되고 말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란 자유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론에서 벗어나 자유주의가 발전 과정에서 보여준 문제점도 숨김없이 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존중한다면 개인적 자유, 정치적 자유, 관용 등을 배반하는 사실들을 정직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다수의 횡포’라는 것이다. 대중은 다수가 지지하는 여론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이를 악용했을 때, 민주적 정치 문화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국 정치의 이념 대결은 매우 후진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배제한 채 일방적 주장만 내세우면 민주사회의 통합과 균형이 파괴된다. 이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는 극단주의와 거리를 두고 좀 더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치적 지형으로 이동해야 한다. 두 가지 이념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사회주의’는 여전히 매혹적인 정치적 기획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는 한 단계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기만 하다. ‘자유사회주의’의 수용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 패러디한 리뷰 제목의 원본 : 오모리 후지노의 라이트노벨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2-09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21:3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점점 커지는 이념의 돌연변이가 정말 심각합니다.
 

 

 

 

 

 

 

 

 

 

 

 

 

 

 

 

 

 

 

 

* 《아내 가뭄》 (동양북스, 2016년)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해제는 정희진 씨가 썼다. 해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싶은 남성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가장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남성도 읽기를 권한다. 아, 얼마 전 모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만난 어느 남성 수강생에게도 권한다. 그는 '노총각'이라는 표현도 못 참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그런 그가 내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장가를 가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단 여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여성에 관한, '결혼과 연애를 위한' 인식론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과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4~15쪽)

 

 

나는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여성주의는 '기본적인 교양'이 될 수 있을까? 이 전제가 성립된다면, 결론으로 페미니스트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된다. 그런데 나는 결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양'과 '여성주의', 이 두 가지 개념의 광범위한 의미를 되짚어보면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들녘, 2001년)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한빛비즈, 2014년)

 

 

먼저 '교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양은 한 가지 의미로 정의되기 어렵다. 그리고 교양을 정의한 생각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채사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공통분모다.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공통분모.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 넓고 얕은 지식, 즉 최소한의 지식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증이다. 성인들의 대화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 자격증은 최소한의 지식이다. (5~6쪽)

 

 

채사장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각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지식을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해 넓고 얕은' 것이라고 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교양이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눈치껏 참여하여 아는 척할 수 있는 기본 규칙이 된다. '지대넓얕' 열풍이 불기 이미 수십 년 전에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을 '의사소통할 때 사용하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이는 채 사장의 생각과 비슷하다. 슈바니츠는 (의사소통을 채사장 식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성인들의 대화 놀이'를 '사회적 게임'으로 비유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알려준 대로 교양을 배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아는 척', '배운 척'할 수 있다.

 

 

 

 

 

*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년)

 

 

 

그런데 여성주의(혹은 여성학)가 교양의 범주가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남이 알려준 대로 배운다고 해서 얻는 지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단순히 교양을 '지식인이 중요하다고 알려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대학교에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강좌가 많이 생겨났다. 여성학에 생소한 남녀 대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학은 모든 남녀, 특히 남학생이 알아야 할 기초 교양이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자신의 강좌에 수강 신청하는 남학생들의 수에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강좌를 수료한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교수가 정말로 있다면, 내가 한 번 묻고 싶다. "여성학을 배운 남학생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차별 문제 앞에서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주의 학자 레나테 클라인(Renate Klein)은 자신이 직접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교양으로서의 여성학'의 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여성학을 배우는 남학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전문가' 유형. 이 유형의 남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는 잘 알고 있으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주의를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두 번째 유형은 '낭만적 기교자' 유형이다. 이 남학생은 여성주의를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한다. 여성주의가 남성을 비판해도 여성주의자들의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여성주의를 아는 척한다. 그래서 이 유형을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지막 유형은 '가여운 아이들' 유형이다. 이 유형의 남학생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여성주의를 이해하려는 가상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주의는 누군가가 알려줘서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다. 여성이 불편해하는 각종 상황을 자기 일인 것처럼 이해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진짜 목적이다.

 

 

 

 

 

 

 

 

 

 

 

 

 

 

 

 

 

 

*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2002년)

*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년)

*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년)

 

 

나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를 다른 유형의 남학생과 상대할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남성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여성주의의 장점을 잘 얘기하지만, 실상 여성 문제 앞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학을 사람이 알아야 할 교양으로 소개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도 교양을 갖춘 남성의 우월감을 경계했다.

 

 

남성들에게 몸에 밴 나쁜 습관들 중 하나가 호언장담이다. 남성들은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허세를 부린다. 자신들이 잘났다고 으스댄다. 남성들은 여자, 재물, 명성,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되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683쪽)

 

 

'성인들의 대화 놀이'나 '사회적 게임'에 나서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럴듯한 말로 여성주의를 대화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른다. 대화 도중에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들이 불쑥 퀴즈를 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다.

 

"cyrus씨. 벨 훅스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뭐라고요? 그것도 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적 우월감에 빠진 남자는 재수 없는 '교양 있는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리고 겉만 포장된 교양미를 뽐내 여성으로부터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정희진 씨가 《아내 가뭄》 해체에서도 밝혔듯이 여성주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노총각이 배워야 할 교양'이 아니다.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여성주의는 '가짜 여성주의'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주의는 교양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 힘들게 만드는 각종 사회 문제(가부장제, 성차별, 여성 혐오 등)를 문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1] 이게 내가 스스로 질문한 생각에 대한 답변이자 이 글의 결론이다.

 

책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방법도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다 본 책을 덮고 나서 일상생활에 마주하는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지적받아도 된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외부의 시선에 절대로 움츠러들어선 안 된다. 나는 얕은 여성학 지식으로 전문가인 척하는 '가짜 여성주의자'가 아닌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나쁜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다. 당연히 이 글에 드러난 내 생각에도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1] 원문 :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미셸 푸코의 말,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145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2-0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0: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레나테 클레인은 남학생 유형을 소개하면서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입장이 강화될수록 남성은 페미니즘을 멀리할 겁니다.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단정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저는 반박하고 싶습니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2017-02-0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6:5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님의 생각이 저와 비슷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님 같은 분처럼 페미니즘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은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고,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합니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내 생각과 다른 의견과 충돌하면, 의사를 밝히기 위한 목소리가 위축되거나 최악의 경우, 반목의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의 저자가 일부 페미니스트의 독단적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자의 입장에 동의해서 ‘남자는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페미니즘은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설로 믿어진 페미니즘 이론들을 반박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 등장할 거고, 그렇게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질 겁니다. 이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서 과거의 이론만 안다면, 사회가 변화해서 생기는 새로운 남녀 간 문제에 대응하지 못합니다. 저도 많이 부족해서 계속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에는 ‘남자는 바깥 일, 여자는 집안일’로 부부의 역할이 또렷하게 구분돼 여성은 ‘가정주부’라는 이름으로 집안에 묶였었다. 남자가 설거지나 빨래 등 가사 일을 거들거나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서게 되면, 주위 눈치를 살펴야 했고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슈퍼마켓에서나 부부가 함께 시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남편이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하고, 또 부엌을 들락날락하며 접시를 나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 뿐만 아니라 전업주부의 가정에서도 더 이상 집안일은 여성만의 몫은 아니다. 부부가 가사 노동을 함께하는 인식이 생기고 있지만, 외국과 비교하면 아직도 멀었다. 특히 남성은 남편이 가사 노동을 하는 것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열악해지는 기혼 여성의 근로조건 문제를 외면한다.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은 아내의 노동 문제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짚는다. 성인 대다수는 ‘일하는 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도 바람직한 아내상은 ‘가족의 뒷바라지를 잘하는 여성’이라고 여긴다.

 

퇴근하고 집에 와도 쉬지 못하고 집안일에 매달리는 맞벌이 아내들은 가사노동의 양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과의 가사 분담률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직도 많은 맞벌이 아내들은 자신이 직장을 가졌기 때문에 집에 남아있는 어린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걸음이 바쁘다. 어머니는 마땅히 집에서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일을 하도록 허락한 남편에게 고마워서 늘 반찬도 제대로 하려고 애쓴다. 여성들과 함께 일한 남성들은 기혼 여성이 직장에서도 집 생각하는 것에 못마땅해한다. 이러한 남성들은 여성의 일차적 역할을 가사와 양육노동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직장을 가졌던 여성도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에 안착한다.

 

1980년대 말, 일하는 엄마들의 이중역할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대안으로 ‘마미 트랙(mommy track)’이 거론되었다. ‘마미 트랙’은 출산과 양육을 전담하는 여성 인력의 특수성을 십분 고려해, 직업을 갖는 순간부터 임금 수준은 물론 승진 배치 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는 엄마들만의 트랙을 의미한다. 엄마에게 ‘마미 트랙’을 제공해줌으로써 일과 가족의 양립을 위한 선택지를 제공해주자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마미 트랙’은 일과 가족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상적인 대안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엄마들이 편하게 걷을 수 있는 ‘꽃길’이 되지 못했다. ‘마미 트랙’은 ‘여성은 일차적 양육자’라는 가부장적 성별 분업구조 인식을 강화한다. 여기서도 가사 및 양육을 여성의 일차적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미 트랙’에 향한 대중의 관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자 또다시 여성의 가사 노동 가치를 인정해주길 촉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거세졌다. 여기서, 애너벨 크랩은 이러한 반응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녀는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사 노동을 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저 여성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주어진 과업을 적절히 잘하라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결국, 아내는 자신에게 자꾸만 눈치 주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그녀들은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노력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그녀들의 심각한 ‘선택의 문제’가 된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일을 못 하면 ‘무능력한 여성’,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아주 무능력한 여성’으로 비난받는다. 여성이 겪는 이중고의 진통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은 집안일 못한다고 해서 여성처럼 욕먹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안일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데 반해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율이 저조하다면 여성에게는 결혼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출산이 여성에게 전통적 역할로의 복귀를 의미하거나 육아와 직장의 이중부담을 감내해야 한다면 누가 여성에게 출산을 권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중부담 상황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일과 가족의 균형이 일하는 아내에게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상식적으로는 남편에게도 필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남편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는다. 회식과 야근이 일상화돼 있는 조직문화에 획기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남편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일 중심 이데올로기’에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남편들도 살림과 관계된 경험담을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이 상상만 해도 부끄럽다거나 혹은 여성이 득세하는 말세적 현상이라고 느낀다면 그런 남편은 어떤 형태로든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맞벌이 아내들이 남성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직업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만큼 남편들도 살림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부부 모두 함께 걸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꽃길’이 보인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2-08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주 아내에게 요리를 해줄 수 있기를...^^. 청소도 ..쓰레기 버리는 일도..모두 내손으로 할 수 있기를...그럼 아내로 부터 사랑받습니다..~~~~분담 꼭해야 합니다..~~(어제 집에서 혼자 대청소 했습니다~~^^) 칭찬 많이 들었어요 ..고맙다고 ~~^^ ㅋㅋㅋ

cyrus 2017-02-08 17:02   좋아요 0 | URL
유레카님이 항상 제 글의 첫 번째 댓글을 남길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사모님 자랑을 할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딸내미 자랑, 사모님 자랑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제가 결혼하게 되면 부부 금술이 좋지 않을 때 유레카님에게 상담 받아야겠어요. ㅎㅎㅎ

yureka01 2017-02-08 17: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상담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내가 먼저 한다라는 생각..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먼저 몸으로 움직임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액션이 답입니다.^^
세치혀 놀리는 사랑법은 가짜이거든요...ㅋ

우민(愚民)ngs01 2017-02-08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말씀에 동감...
재활용은 제 담당이 된지 꽤 됐네요 문제는 처음에는 고맙다고 하더니
이제는 당연한 듯 ^^
이게 생활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2-08 17:04   좋아요 0 | URL
옛날 같았으면 남자들이 ngs님이 아내 앞에 기죽는 남편이라고 놀려댔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ngs님과 유레카님 같은 남편 분들을 질투하거나 놀려선 안 됩니다. 결혼 안 한 남자들이 부러워해야 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

yureka01 2017-02-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gs01님 ㅎㅎㅎㅎㅎ 고맙단 소리 안해도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ㅋ

stella.K 2017-02-0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부터 나영석 PD가 구혜선과 안재현 앞세워
<신혼일기>라는 걸 방영하기 시작했는데
새로 시작해서 그런지 나름 재밌고 신선하더군.
거기서 보면 남편인 안재현이 가사에 적극적인데
결혼 초기에 남편이 어떻게 가사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결혼생활의 성패가 좌우되지 않을까 싶어.
그런 프로는 네가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말야.
독신으로 쭈~욱 살 것이 아니라면 말야.
신혼부부가 싸우면 어느 부분에서 싸우게 되는지
애정을 느낀다면 어느 부분에서 느끼는지 생각해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봐져.
물론 이런 예능 프로는 별 기대없이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하겠지만 말야.ㅋ

cyrus 2017-02-08 17: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저는 방송에 나오는 부부 모습은 믿지 않아요. 방송에 약간의 연출이 있을 수 있거든요. 연예인 부부나 커플이 행복하게 알콩달콩한 모습으로 방송해놓고선, 몇 년 후에 이별, 이혼 크리 맞으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어요. 그들의 좋은 모습에 익숙한 대중은 실망감에 욕설을 퍼붓고요... ^^;;

stella.K 2017-02-08 18:02   좋아요 0 | URL
ㅋㅋ 당연해. 다 편집이야.
그런 건 사실 보다 편집의 묘지.
말에 의하면 차승원이가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더군.
그런데도 삼시세끼 어촌편에서 얼마나 잘 나오디?
그거 다 편집한 거 잖아. 그것 때문에 차줌마로 뜨고.
팩트 보자고 그런 거 보는 거 아냐. 편집의 기술 보자고 보는 거지.ㅋ

북프리쿠키 2017-02-0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은 죄책감과 연민으로 와이프를 보다듬고, 머리로는 오늘부터 잘하자고
다짐하는데, 문제는 이놈의 비계덩어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네요. ㅠ

cyrus 2017-02-08 17:09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말해서 제가 결혼하면 책 읽느라 집안일을 소홀히 할 겁니다. 유레카님이 말씀했듯이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아무 2017-02-0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의식 구조의 개선이 제도의 개선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마미 트랙 같은 경우는 제도가 의식을 고착화시킨 경우 같네요. 예전에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도 가사 노동의 문제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는 여성은 늘었지만, 그것이 가사 노동 종사자의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얘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어찌됐든 남성 개개인의 실천과 의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제도도 갈 길이 아직 먼 것 같습니다..ㅠㅠ

cyrus 2017-02-08 20:20   좋아요 0 | URL
제도 도입이 의식 구조 개선에 기여한다고 볼 수 없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 남편의 육아휴직제도가 보편화되지 못한 실정입니다.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도 승진과 연관되는 업무 분위기 때문에 주저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엄마에게 부담 주는 육아휴직제도만으로 한계가 있어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권을 읽어보신 독자라면 그 책에 인용된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시구를 봤을 것이다.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 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미학 오디세이 1》 150쪽)

 

 

이 시의 제목이 『어머니를 위한 발라드』로 되어 있다. 발라드(ballade)란 유럽 중세에 유행한 자유로운 형식의 담시(譚詩)다. 《미학 오디세이 1》에 인용된 시구는 전체 내용의 일부이며 비용이 1461년에 발표한 <유언의 노래(Le Testament)>에 수록되었다. 발라드의 원제는 ‘Ballade pour prier Nostre Dame’이다. 이 제목은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한 발라드(송면, 《유언시》)’, ‘성모에게 기도하는 발라드(송면, 《프랑수아 비용 : 그 생애와 시 세계》)’, ‘성모에게 기도드리는 발라드(김준현, 《유언의 노래》)’로 번역되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불쌍한 늙은 여자외다.

제가 속하고 있는 성당에는

수금(竪琴)과 비파(琵琶)가 그려진 천국의 그림과

죄인들이 업화에 타는 지옥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저를 무섭게 하고 하나는 저를 기쁘고 즐겁게 하나니

 

(『성모에게 기도하는 발라드』 중에서, 《유언시》 128쪽)

 

저는 늙고 불쌍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글자 한 자 읽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제가 속한 교구의 교회에서, 저는 봅니다,

하프와 류트가 있는, 그림으로 묘사된 천국을,

그리고 단죄받은 죄인들을 불길에 끓이는 지옥을,

하나는 저를 두렵게 하며, 다른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성모에게 기도드리는 발라드』 중에서, 《유언의 노래》 53쪽)

 

 

그런데 《유언의 노래》에서는 원제가 ‘Ballade pour prier Notre Dame’으로 되어 있다. ‘Nostre’에서 ‘s’가 빠졌다. 오자로 보일 수 있으나 ‘Notre Dame’도 ‘성모’를 뜻하기 때문에 인쇄상 오류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아마도 ‘Nostre Dame’은 중세 시대에 사용했던 고어(古語)였을 것이다. 그런데 ‘Nostre Dame’을 인터넷 불어사전에 검색하면 ‘성모’가 아닌 생각지 못한 단어가 나온다.

 

‘Nostre Dame’은 예언가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의 본명과 같다. 우리가 잘 아는 이름은 라틴어고, 그의 프랑스어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Michel de Nostredame)’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을 ‘노스트르담에게 기도하는 발라드’로 읽을 수 있다. 이것만 가지고 비용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비용은 1431년에 태어나서 1463년(추정)에 사망했고,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보다 훨씬 늦은 1503년에 태어났다. 굳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시를 쓴 사실 그것 하나뿐이다. 비용은 8행시로 구성된 시를 남겼고, 노스트라다무스는 4행시로 이루어진 예언 시를 남겼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는 세기말에 다시 주목받았고, 지구 종말론을 언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떡밥’이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레프 2017-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심오합니다

cyrus 2017-02-08 11:01   좋아요 0 | URL
비용의 시 중에 심오한 분위기를 내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 의식이 반영된 것도 있어서 지금 보기에는 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