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부터 내리기 시작했던 비는 어제 오후에 그쳤습니다. 퇴근길에 빵집에 들렀습니다. 스몰토크에 일찍 도착해서 <빵과 장미> 영화 상영회를 준비한 분들을 위해 요깃거리를 챙기고 싶었습니다. 스몰토크에 도착해 보니 영상기와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음료를 마실 수가 없어서 미리 음료를 주문했어요. 제가 사들고 온 빵과 다른 레드스타킹 멤버가 사 온 도넛과 같이 먹기 위해 바닐라라떼를 주문했습니다. 빵 몇 조각과 도넛 두세 개 정도 먹고 나니까 금방 배가 불렀습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스몰토크에 많은 분이 찾아왔습니다. 다행히 의자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막 시작할 때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영화 초반부를 보지 못했어요.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서 영화의 중요 장면을 놓쳤을까 봐 마음속으론 초조했습니다. 영화 중반부터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 각자 영화 감상평을 자유롭게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연히, 어제의 화제 인물 '안희정'과 미투 운동'에 대한 얘기도 나왔습니다.

 

어제 영화 상영회 후기를 작성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필기를 했는데, 후기를 쓸 필요가 없어졌어요. 오늘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영화 상영회 공식 후기가 공개되었거든요. 공식 후기를 작성한 분이 핵심 내용만 쏙쏙 골라 잘 정리했습니다. 후기에 영화에 대한 주요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없고요, 이미 <빵과 장미>를 보신 분은 다른 분들의 느낀 점을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8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레드스타킹에서는 <빵과 장미>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인 찬스와 트위터, 인스타그램에서 보시고 손님 8명이 와주셨어요.

 

여성의 날의 유래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빵과 장미’를 줄 것을 외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빵은 생존권, 그리고 장미는 참정권을 의미했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빵과 장미는 여성의 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티브 삼아 제작한 영화입니다.

 

 

 

 

 

이런 모임에서는 재미없는 영화를 본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오셨다면,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셨을 것 같습니다. 참석하신 몇몇 분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는데요. 여성이 노동뿐만 아니라 성상납, 몸까지 착취당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주인공 언니의 상황과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좀 아쉬웠던 점은 국내 포스터의 내용은 영화 본연의 내용을 나타내기 부적절했고요(빻았다고 하죠?ㅎ) 로맨스도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찐한 키스신 밖에(?) 없고 스토리 연관성도 떨어져요)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 우리 사회와도 비슷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노동조합 활동가, 새터민, 여성이주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투쟁하는 모습, 여성으로써 겪는 문제들을 표현했기 때문에 대구분들이 보기엔 빨갛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 존재할 수 있는 평범한 여성들의 일이 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개인들의 연대와 작은 승리의 경험들이 쌓이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어제 저는 ‘세계 여성의 날’의 유래와 독일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에 대해서 소개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불필요한 설명이 많았습니다. 1911년에 체트킨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하자는 제안이 나온 이후로 프랑스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여성의 날을 지정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될 것을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콩도르세(Condorcet)의 사망일에 맞춰서 세계 여성의 날이 정해졌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저 다음 분이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뻔했어요. 제가 표현력이 부족한 탓에 언급해도 되지 않을 부연 설명을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미리 조사한 내용을 모임에서 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뭔지 따져가면서 검토해야겠습니다.

 

 

 

 

 

 

 

※ 커피 사진, 영화 포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사진들은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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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즈음 2018-03-0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행사 넘 부럽네요. 많은 분들에게 귀중한 시간이었겠어요

cyrus 2018-03-07 18:51   좋아요 0 | URL
혼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던 시절이 부끄러웠습니다. 소중한 경험 덕분에 페미니즘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전보다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 - 유전자와 문화의 이중 나선 사이에서
데이비드 슬론 윌슨 지음, 황연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한한 자연의 진리를 알아내려는 과학자들의 지적 분야인가? 아니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학문인가? 우리는 과학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바꾸는 실용 학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해도 과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 사람, 특히 문과 출신들은 과학이 수학 다음으로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과학적인 사고 없이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과생으로 수능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 고등학생 1학년의 나는 과학을 암기 과목처럼 공부했다. 이런 잘못된 학습법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늦바람이 들어 독서로 과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이런 학습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의 묘미를 점점 이해할수록 과학을 재미없게 공부한 것을 후회했다. 과학은 정말로 우리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고, 어렵기만 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의식과 함께 비로소 과학은 존재 의미가 있게 된다. 과학이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학문이라면 우리는 과학을 수행 도구로 삼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네이버후드 프로젝트》(사이언스북스, 2017)는 진화론이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진화론의 유용성에 천착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5년간에 걸친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미국 뉴욕주 도시 빙엄턴(Binghamton)의 변천 과정, 인구 구조, 빈부 격차 등을 진화론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빙엄턴 네이버후드 프로젝트(BNP)’이라고 명명한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는 도시에 대한 과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600쪽이 넘는 이 책을 보는 독자는 누구나 이 한 권의 책을 낳기 위해서 저자와 BNP에 참여한 사람들이 흘린 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이 종교와 문학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어떤 의미에서 과학이 좋은 학문인지를 역설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종교와 같은 문화도 진화한다고 주장한 진화론자답게 ‘진화적 패러다임(Evolutionary Paradigm)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을 제공’[1]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상을 이해(경청: listening)하며 현존하는 세상의 문제들을 개선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하기(고찰: reflecting) 위한 학문이다.

 

진화론의 대가로서의 면모만이 이 책을 채우고 있지 않다.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인식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그리고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켜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 테아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저자의 색다른 진화론적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신 무신론자’로 분류되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샘 해리스(Sam Harris),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를 비판하는 대목도 눈여겨 볼만 하다. 재미있게도 윌슨 역시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는 신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 종교를 없앤다고 해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믿음 및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유전자와 문화의 이중 나선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저자는 이 부제를 통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얽힌 복잡한 상호 작용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즉, 인류는 유전적 진화에 덧붙여 문화적 진화를 진행해왔으며, 두 진화는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었다.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가 어떻게, 왜 출현하고 살아남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이 실마리를 놓치면 인류, 우리의 미래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상할 수 없게 된다. 진화는 양면의 동전이다. 인류는 이 땅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가장 오래된 ‘운명의 동전’, 즉 ‘진화’라는 이름의 동전을 던졌다. 매번 결정적 고비를 맞이할 때면 삶과 직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전을 던졌다. 다행히 인류는 몇 차례 ‘행운’이라는 결과를 얻어내 순탄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기세등등한 인류가 동전의 영향력을 잊어버린다면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윌슨은 인류가 ‘진화 과정의 현명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은 실생활과 분리될 수 없으며, 진화론은 역동적인 우리의 유전자, 문화를 이해하게 해주는 유용한 이론이다.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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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작용을 보니 저자가 비판한 「이기적 유전자」의 밈(meme)이 떠오르네요.

cyrus 2018-03-06 15:20   좋아요 1 | URL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테아르 드 샤르댕을 옹호하는 저자의 주장이 흥미로웠습니다. <네이버후드 프로젝트>를 읽기 전에 역시 저자가 쓴 <종교는 진화한다>를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
 

 

 

 

 

다시 공지합니다. 3월 5일 월요일 저녁 7시 스몰토크에서 영화 상영회가 있습니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가 상영됩니다.

 

 

 

 

 

 

*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feminism_talk/

 

 

 

- 시간: 2018년 3월 5일(월) 저녁 7시

- 장소: 대구 카페 스몰토크

- 참가비: 무료 (음료 개별 주문)

- 신청 : @hippie_yolo DM

 

 

 

영화 러닝타임은 110분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영화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현재까지 영화 상영회 참석 의사를 밝힌 외부 손님은 총 아홉 명입니다. 여기에 내일 참석하는 레드스타킹 멤버들까지 포함하면 스무 명이 넘은 인원이 스몰토크에 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좌석을 많이 준비하려고 합니다. 내일 오전에도 참석 신청 가능합니다.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분은 여기 댓글에 참석 의사를 알려주셔도 됩니다. 영화 상영회를 준비하는 레드스타킹 멤버들에게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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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을 맞이하야 요즘 활발하시는 모습
이 아주우~ 보기 좋습니다.

cyrus 2018-03-13 15:01   좋아요 0 | URL
집돌이로 살아왔는데, 좋은 분들을 만나게 돼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네요. ^^
 

 

 

 

 

 

 

 

헌책방에 잠들어 있는 오래된 책, 또 알라딘 서점에 있는 책을 잘 넘겨보면 편지부터 일기, 사진 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알라딘 서점에서 절판된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봄날에, 2017)을 만났습니다. 책 뒷날개에 편지글이 적인 엽서 한 장이 끼어 있었습니다. 엽서에 담긴 글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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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0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사로운 봄햇살 같은 글이네요!
근데, 장선생은 이 소중한 엽서가 들어있는 책을 왜 팔았을까요?

cyrus 2018-03-05 00:00   좋아요 0 | URL
책 안에 엽서가 끼여 있는 줄 모르고 팔았을 수 있어요. 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ㅠㅠ

레삭매냐 2018-03-0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렇게 중고서점에서 사연 있는 책을 만날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 책이 왜 헌책방에 와 있을까 싶더라구요.

cyrus 2018-03-05 00:04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점 직원들은 파는 책들의 품질 상태를 따질 때 책 한 권 꼼꼼하게 확인하던데 왜 이 엽서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궁금해요. 저도 종종 책을 팔지만, 저자의 친필 사인, 보내는 분의 편지글이 있는 책을 팔지 않아요. 안 읽어도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려고 합니다. ^^

이하라 2018-03-0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서점에서 다른이의 추억과 만날 때도 있군요. 헌책이란 낱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울렁이는 조합 같아요.

cyrus 2018-03-05 00:06   좋아요 0 | URL
책 속지에 적힌 편지와 메모를 읽어보면 과거 사람들의 생각과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가끔은 명문에 가까울 정도로 좋은 글을 만날 때가 있어요. ^^

붕붕툐툐 2018-03-0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소가 절로 머금어지는 감동적인 글이네요~ 저 엽서에 등장하는 할머니같이 늙고 싶네요~~

cyrus 2018-03-05 00:08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면 유머 감각이 떨어져요. 체코 할머니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해주는 귀여운 유머(?)를 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북프리쿠키 2018-03-0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행운이군요ㅎ
전 피떡된 모기사체나 코딱지 몇점 이외에
발굴된 게 하나도 없네요.-.,-

cyrus 2018-03-05 00:11   좋아요 1 | URL
벌레 사체 테러... ㅎㅎㅎ 생각하니까 끔찍하네요.. ㅎㅎㅎㅎㅎ
책 읽다가 책에 깔려 죽은 벌레를 만나면 기분 찝찝해요. 책에 묻은 코딱지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책에 남은 코딱지 흔적을 못 봤을 수도 있어요.. ^^;;

오후즈음 2018-03-0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 가끔 저런 쪽지가 나를 치유해주는데 말이죠 ㅠㅠ

cyrus 2018-03-06 11:46   좋아요 0 | URL
상대방의 진심이 듬뿍 담긴 손편지가 어두운 헌책방에 있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워요.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 - 봄날에 출판사 여성주의 문학
제인 오스틴 외 지음, 박영희 옮김 / 봄날에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앙증맞다. 이 책을 만든 출판사 이름이 예쁘다. ‘봄날에’다. ‘봄날’이 아니다. ‘봄날에’ 출판사는 1인 출판사다. 책 만드는 일, 번역, 홍보 등 모든 출판 업무를 한 사람이 전담한다. ‘봄날에’ 출판사 대표 박영희 님은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그녀는 2014년 네이버 포스트에 영어 회화 콘텐츠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영어 교재(《두근두근 이제 영어로 말해요》, 《겁 없이 잉글리시 20일 동사 편》)를 펴냈다. 박 대표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를 번역하기 위해 시를 공부한 대단한 노력파이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앙증맞은 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제인 오스틴과 19세기 여성 시집 : 찬란한 숲을 그대와》이다.

 

‘앙증맞다’가 주로 ‘깜찍하다’의 의미로 쓰이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작으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추어 아주 깜찍하다’이다. 내가 언급한 ‘앙증맞다’를 이해하려면 ‘갖출 것은 다 갖추다’에 중점이 돼야 한다. 이 시집에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열다섯 명의 여성 시인이 쓴 총 10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세 자매(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 조지 엘리엇, 메리 셸리, 루이자 메이 올컷, 루시 몽고메리 등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들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소설가들도 생전에 시를 썼고, 시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그녀들이 쓴 시는 작품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여성이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왜 19세기에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없었던 걸까. 남성 시인에 필적할 만한 여성 시인이 없어서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성의 문학적 재능은 남성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제도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성의 문학 활동을 제약했다. 19세기 문단은 여성에게 ‘작가’라는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출판사들은 여성이 쓴 글을 상품성이 높다고 보지 않았다.

 

이 부당한 상황은 제인 오스틴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오만과 편견》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받은 인세가 110파운드였다. 19세기 영국 파운드 가치와 현재 파운드 가치를 비교하면 차이가 있지만, 110파운드를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6만 4천 2백 원 정도 된다. 오스틴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 금액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건, 《오만과 편견》 2쇄가 나왔는데도 그녀는 인세를 받지 못했다. 에밀리 디킨슨과 브론테 세 자매는 가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특히 브론테 세 자매가 활동했던 영국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무시했고 조롱했다. 여성 작가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 중심 문단의 구태를 거부한 세 자매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글을 썼다.

 

이 시집에는 20세기에 활동한 여성 시인의 시도 있다. 사후에 퓰리처상을 받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가 쓴 『거울』이라는 시를 읽어 보자.

 

 

나는 은색이고, 정확해. 나는 선입견이 없지.

내가 보는 건 뭐든지 바로 삼켜버려

있는 그대로, 사랑이나 증오로 부옇게 흐리지도 않아.

나는 잔인하지 않아, 그저 진실할 뿐.

자그마한 신의 눈, 모서리는 네 개.

나는 대개 맞은편 벽을 보며 명상하지.

벽은 분홍에 반점이 좀 있어. 오래도록 쳐다보니

마치 내 심장의 일부 같아. 하지만 점멸하지.

얼굴들과 어둠은 되풀이해서 우리를 갈라놓아.

 

지금은 나는 호수야. 한 여자가 내게로 고개를 숙여,

진짜 자신을 찾고자 내 범위를 조사하고 있지.

그리곤 거짓말쟁이들한테로 몸을 돌려, 촛불이나 달빛.

나는 그녀의 등을 봐, 그리고 진실하게 비추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손놀림으로 내게 보상해.

나는 그녀에게 중요해. 그녀는 왔다가 갔다가 하지.

아침이면 그녀의 얼굴이 어둠을 대체해.

내 속에 그녀는 소녀를 익사시켰고, 내 속에 늙은 여자가

하루하루를 향해 솟아올라, 꼭 끔찍한 물고기 같아.

 

 

(실비아 플라스 『거울』, 186쪽)

 

 

시의 화자인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다. 화자는 거울 속에 있고, 그녀는 거울 밖에 있는 ‘나’, 즉 실제 나의 모습을 편견 없이 그대로 바라보면서 묘사한다. 시인은 거울을 통해 진실 된 ‘나’를 보려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색한다. 『거울』은 ‘언어로 만들어진 자화상’이다. 플라스뿐만 아니라 여성 시인들은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과 싸우며 고뇌의 진실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은 외로운 날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쓰라린 삶의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픔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의식 잃어가는 울새 한 마리

둥지로 돌려보낸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 『상처받은 가슴 하나 위로할 수 있다면』, 41쪽)

 

 

시집의 후반부에는 열다섯 명의 시인들의 삶을 소개한 약전이 있다. 그녀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및 사진 몇 점도 실려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앙증맞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인 출판사가 ‘앙증맞은 시집’을 만든 일은 아주 소중한 시도다. 남성 중심 문인들의 업적만으로 가득한 문학사에 가려질 뻔한 여성 시인들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삶과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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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3-0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1년도 안 돼서 절판이란 게 충격이다.
그나마 인터넷 교보는 파네.
알라딘에서 팔면 적립금으로 샀을 텐데...ㅠ

cyrus 2018-03-04 10:56   좋아요 0 | URL
마이리뷰, 100자평이 단 한 편도 없는 것도 놀라워요. 정말 잘 만든 책이에요.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

겨울호랑이 2018-03-03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숨은 보물을 찾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정말 많은 노력?

cyrus 2018-03-04 10:58   좋아요 1 | URL
노력도 쪼금 있긴 하지만, 나머진 운입니다. ㅎㅎㅎ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에요. 오스틴에 관한 책을 찾다가 운 좋게 절판된 시집을 만났어요. 제인 오스틴의 시를 소개한 책이 국내에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실 2018-03-0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증맞은‘ 표현 참 좋아해요.
봄날에~~ 굿!
봄을 맞이하는 준비로 이 시집을 구입하겠습니다.

세실 2018-03-0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절판이래요...

cyrus 2018-03-04 11: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ㅠㅠ 시집에 수록된 시 작품들이 많고, 시인의 삶을 소개한 해설이 아주 충실했습니다.

스윗듀 2018-03-04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 저는 <오만과 편견>을 읽고 제인 언니한테 꽂혀서는 폭풍검색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알라딘 품절도서센터를 통해서 엄청 오래 기다려서 받았었어요ㅎㅎ 저도 cyrus님처럼 아니 이 책이 왜 리뷰도 없고 100자평도 하나도 없고 벌써 절판됐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알라디너분들께 소개해드려야겠다! 한게 벌써 한달 전인데.....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만 cyrus님한테 뺏겼네요😅 하하하ㅏ핫 그래도 cyrus님이 소개해주시는 게 더 신뢰감이 갈 것같긴해요 ㅋㅋㅋㅋㅋㅋ cyrus님 찌찌뽕!

cyrus 2018-03-05 00:17   좋아요 0 | URL
구하기 힘든 책을 얻게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좋은 시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글이 길어질까 봐 참았어요. 사실은 시 한 편을 타이핑하는 게 귀찮았어요.. ㅎㅎㅎ

책 소개하는 데 순서가 중요하나요? 책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 진심과 정성을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됩니다. 스윗듀님의 시집 소개를 기대하겠습니다. 스윗듀님은 이 시집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

카알벨루치 2018-07-1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사요? 사고싶은데....

cyrus 2018-07-20 06:46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라서 살 수가 없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