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원소 이야기 - 주기율표의 마지막 빈칸을 둘러싼 인간의 과학사
에릭 셰리 지음, 김명남 옮김 / 궁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현대 화학의 발전은 주기율표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오래전부터 계속됐지만, 화학의 지식이 폭발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바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제작이었다. 지금의 주기율표를 완성하는 데 기여한 사람이 멘델레예프다. 주기율표는 ‘화학의 지도’이다. 이 믿음직한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화학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주기율표는 원소를 성질의 대칭성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렇게 성질에 맞도록 배열하다 보면 빈칸이 생기고, 여기에 들어갈 원소를 과학자들이 찾아낸다. 멘델레예프는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빈칸을 그냥 두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는 빈칸에 다른 원소를 억지로 채워 넣지 않았다. 대신에 빈칸에 채워지게 될 원소의 이름과 성질을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주기율표는 이과 계열 학생들에게 암기의 고통을 안긴다. 그러나 주기율표 때문에 고통받는 과학자들도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 (궁리, 2018)주기율표의 빈 칸을 채우려고 했던 과학자들의 노력과 시련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일곱 원소는 프로트악티늄(Pa), 하프늄(Hf), 레늄(Re), 테크네튬(Tc), 프랑슘(Fr), 아스타틴(At), 프로메튬(Pm)이다. 이 일곱 원소는 멘델레예프가 남긴 빈칸을 차지하고 있다. ‘멘델레예프의 숙제’에 도전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빈칸에 채워질 원소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옥신각신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과학을 갖고 놀았다. 그렇지만 일곱 원소를 발견하기 위해 뛰어든 과학자들은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멘델레예프의 숙제는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상, 즉 ‘명예’를 건 숙명의 과제였다.

 

프로트악티늄은 발견되기 전까진 ‘우라늄에 든 미지의 물질 Urx’로 알려졌다. 독일의 화학자 리제 마이트너오토 한, 프리슈 슈트라스만 이 세 사람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함으로써 원자폭탄 제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토 한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독가스 연구에 차출되었다. 실험실에 남게 된 마이트너는 혼자서 연구를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 이 물질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녀는 엄청 고생했다. 마이트너는 한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악티늄 실험에 쓸 백금 용기들을 주문했으니 며칠 안에는 받을 테고, 받자마자 시작할 겁니다. (…‥) 역청 실험이 지연된다는 데 화내지 마세요. 정말로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요. 나 혼자서는 우리 셋이 함께 실험하던 때만큼 많은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고무관 3미터를 무려 22마르크나 주고 샀지 뭡니까! 청구서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죠. (141쪽)

 

 

마이트너는 두 사람이 해야 할 연구까지 혼자서 진행했다. 그러나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섰고, 유대인이었던 마이트너는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스웨덴으로 도피했다. 마이트너와 한은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핵분열 연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마이트너는 자신의 업적이 오토 한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한은 핵분열 발견의 공로로 1944년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마이트너가 세상을 떠난 후 1992년에 109번 원소가 발견되었고, 새로운 원소는 그녀의 이름을 따 ‘마이트너륨(Mt)’으로 명명되었다. 사후에 그녀의 업적이 재조명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한 공로는 오토 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프로트악티늄의 정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마이트너의 외로운 노력을 부각한다.

 

하프늄을 먼저 발견한 공로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과학자들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프늄을 발견한 디르코 코스터죄르지 헤베시는 독일의 화학자 닐스 보어가 소장으로 몸담은 덴마크 코펜하겐 연구소 소속 학자였다. 하프늄은 72번 원소인데 코스터와 헤베시가 하프늄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 학자 팀이 72번 원소는 ‘셀튬’이라고 발표했다. 코스터와 헤베시는 프랑스 학자 팀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였다. 총성은 멈췄으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 국가 간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랑스와 영국은 연합국을 형성하여 독일과 맞붙었다. 연합국의 과학자들은 전쟁 중립국인 덴마크를 독일과 같은 편으로 여겼고, 코스터와 헤베시의 논문을 재반박했다. 이 ‘진흙탕 싸움’에 그 당시 물리학과 화학을 대표하는 러더퍼드와 보어까지 휘말렸다.

 

 

새 원소를 둘러싼 끔찍한 진흙탕 싸움이 싫습니다. 죄 없는 우리까지 말려들고 말았지요. (보어가 러더퍼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71쪽)

 

 

하프늄이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영국의 <런던 타임스>는 자기 나라 출신 과학자가 72번 원소를 발견했다면서 자화자찬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국수주의에 취한 영국은 웃지 못할 ‘흑역사’를 남겼다.

 

《일곱 원소 이야기》는 원소를 둘러싼 과학자들의 치열한 경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학, 아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과학 업적에 대한 관심이 뜨거우면 과학자들은 국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정치적 접근은 오히려 과학 연구의 진전과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다. 과학자로서의 국수주의적 시각은 연구 자료를 오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프늄의 발견 사례처럼 ‘국가 싸움에 학자 머리 터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일곱 원소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주기율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주기율표를 외워야 하는 학생? 아니면 주기율표의 빈칸만 보면 참을 수 없는 과학자들? 지금도 주기율표는 학생과 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화학의 지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당분간 학생과 학자들은 주기율표를 만나면 학을 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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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9 23:34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정기(중간, 기말)고사 화학 시험을 친 적이 있어요. 시험 범위에 주기율표가 포함되어 있었어요. 화학 시험치기 전에 진짜 열심히 외운 게 주기율표였어요.. ㅎㅎㅎ
 

 

 

 

지난 월요일(4월 23일)《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 1, 2, 5장을 함께 읽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라서 그런지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적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총 일곱 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 모임에 특별한 손님 한 분 오셨어요. 영남일보 소속 기자님인데, 대구에 있는 페미니즘 모임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페미니즘 모임에 오래 활동한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기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잘 하셔서 저는 인터뷰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실은 제가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에요. 저는  내심 조용히 묻어가길 바랐는데 기자님이 저에게도 질문했어요.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는지 물어봤어요. 저는 가부장제, 남성 연대(Homosocial)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돼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오늘 영남일보 기사가 나왔어요. 이 기사에 레드스타킹과 경북대학교의 대학생 페미니스트 모임인 KFC(Kyungbuk University Feminist Club)가 함께 소개됐어요. 대구에 음지에서 활동 중인 페미니즘 모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임들이 더욱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 [“위드유” 페미니즘 ‘열공’ 모임 늘고 있다]

영남일보, 2018년 4월 26일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80426.010210749320001

 

 

 

원래 저녁 7시 30분부터 독서 토론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인터뷰 시간이 늘어난 관계로 8시 조금 넘은 뒤에야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 [레드스타킹의 선택]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이 책은 우리나라 페미니스트가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독자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일 수 있습니다. 진○님은 이 책을 두 번 읽고서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특히 권김현영 님이 쓴 1장(『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은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어요. 멤버들은 1장에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몇몇 내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효○ 님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벗어나라”는 권김현영 님의 입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성범죄가 일어나면 피해자 여성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무조건 피해자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피해자를 적극 지지해주는 것만이 페미니스트의 역할이고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의 목적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권김현영 님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성폭력 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혜○ 님은 권김현영 님이 쓴 ‘들어가는 글’ 9쪽의 문장을 보자마자 슬펐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언제까지 페미니즘 정치학은 피해 경험의 공통성에서 의식 고양의 ‘땔감’을 구하고,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늘 같은 곳을 맴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수많은 문제적 개인들을 지목하면서 가해의 목록을 늘리고 피해 증거를 수집하며 억압받는 경험의 공통성에 천착하는 것은, 결국 여성을 피해라는 현실에 정박시키는 것은 아닐까.

 

 

‘의식 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란 1960년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점(가부장제 사회, 남성중심주의 문화)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하여 극복하려는 의식을 고취하는 운동 방식을 의미합니다.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

 

 

 

의식 고양 운동을 전개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경험, 성폭력 경험 등을 공유하고 나누는 모임을 결성하거나 관련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녀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론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 맞서 싸웁니다. 하지만 70년대 전후 이후부터 급진 페미니스트의 입지는 좁아지고, 페미니즘 내 노선 분열이 장기화하면서 여성해방 운동은 ‘의식 고양’만 외치는 수준으로 그치고 맙니다. 급진 페미니스트 특유의 행동주의가 사라지면서 급진 페미니즘이 표방한 정치성(“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잘 보여준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는 의식 고양 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입니다.

 

다시 권김현영 님의 글로 돌아갑시다. 권김현영 님은 피해자의 경험 및 입장에 동일시하고, 피해 사실 폭로에 급급한 페미니즘 정치학이 피해 여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혜○ 님은 피해 여성만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페미니즘 정치학의 한계가 안타깝게 느껴져서 서글펐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경북대 미투’ 기자회견에 참석한 은○ 님은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피해자를 연대하는 방식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죠. 은○ 님의 의견과 비슷한 내용이 권김현영 님의 글에 나옵니다.

 

 

피해 사실 공론화에 동참한 지지자들 역시 어려움을 겪는다. 용기의 대가가 신상 위협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을 지지하고 연대했던 이를 가장 미워하기도 한다. 자신의 피해를 앞세워 대의를 확인하려던 건 아니냐며 피해자가 연대자를 비난하는 경우는 자주 목격하고 경험한 일이다. (26쪽)

 

 

저도 그랬습니다. 실제로 미투 운동을 계기로 성폭력 경험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를 만나 봤는데요, 피해자 마음속에 남아있는 정신적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분이 담담하게 자신의 아픈 경험을 말했을 때 저는 어떠한 ‘조언’을 하지 않고, 경청만 했습니다. 저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일본 여성이 쓴 수기 《소생하는 영혼》 (현민시스템, 1996)에 있는 구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 [품절] 호즈미 준《소생하는 영혼》(현민시스템, 1996)

 

  사람에게 ‘조언’은 필요 없다. 사람은 본래 자기 안에 회복에 필요한 모든 것, 답도, 힘도, 지니고 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울게 놔두었던 사람이 있었다. 설교, 조언, 위로, 일체 없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게 놔두었던,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아준 사람이.

  사람에게 재출발할 용기를 주는 것은 이런 부드러움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부드러움이 생각날 때마다 용기와 격려를 다시 얻게 된다.

 

(252쪽)

 

 

 

성폭력에 관한 편견이 강한 사람일수록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낮아지고, 가해자와의 합의를 원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는 사회적 편견(“성폭력의 원인은 피해자의 몸가짐과 복장에 있다”)에 저절로 학습되어 착각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걸까?” 효○ 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명예와 사회적 편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의 상황을 ‘학습된 착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토론 시간이 부족해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다룬 2장과 정희진 님이 쓴 5장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정희진 님의 글을 이어서 함께 읽기로 기약했습니다. ‘꽃페미’ 두 번째 강연(나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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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7:02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을 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고 있네요. 이럴수록 더욱 겸손해야죠.. ^^;;

페크pek0501 2018-04-3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습된 착각이 많습니다. 영화 드라마 광고 등에서도 그걸 보면서 우리 머릿속에 입력되는 것들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어 버리는 거죠.
제가 읽은 책에도 그런 게 나옵니다. <재밌다고들 하지만~~>에.

cyrus 2018-05-01 11:5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운 <건축학 개론>에 여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남성의 시선, 또는 여성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문제 있는 장면을 그냥 지나치거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그랬어요. 영화를 호평하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면 영화의 사소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해요. ^^;;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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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상대편이 컴퓨터인지 진짜 인간인지 대화 당사자인 사람이 구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통해 진짜 인간의 반응과 컴퓨터의 반응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설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을 제시하여 튜링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방 안에는 중국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중국어로 적힌 질문을 받으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답변을 보낸다. 질문자는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중국어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존 설은 ‘중국어 방’의 역설을 들면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스스로가 어떻게 자의식과 마음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총체적 지적능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이 있다(한 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과연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이 편안함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차(茶)가 될 수 있을까? 위안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맴도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철학만 한 게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김재인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컴퓨터와 마음’이라는 제목의 철학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 들뢰즈에 대한 언급(133, 174쪽)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저자의 논변을 ‘거들고 있는’ 엑스트라다. 사실 이 책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철학자는 플라톤데카르트다.

 

저자는 튜링의 오래된 질문, 즉 “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몸과 마음, 생각, 시간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하는 것(과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성찰(인문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창구로 통하는 겹창이다.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탐구대상이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아직 마음과 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밝혀낸 것은 없다. 따라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그 ‘내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내공’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즉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 등의 창조적인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인공지능이 시행착오, 즉 ‘버그(Bug)’를 만나면 작동이 멈춘다. 창조적인 일은 인공지능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할 능력이다.

 

저자는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일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분위기가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튜링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한 호흡에 끝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라는 부제를 감안하면 과학보다는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다루다 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보인다. 170~175쪽에 저자가 새뮤얼 버틀러《에레혼》(김영사, 2018)의 ‘기계들의 책’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버틀러는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기계도 인간처럼 진화하여 ‘재생산(생식)’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기계(기술)의 진화’를 예언하는 입장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실은 버틀러는 ‘기계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계의 진화’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미래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에레혼》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에레혼》의 ‘기계들의 책’은 기계의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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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1:40   좋아요 0 | URL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불평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돈, 정보, 그리고 기술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가질 것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부가 편중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본 글은 작품에 대한 줄거리, 결말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토 준지 컬렉션 9화 첫 번째 에피소드

화가

 

 

 

 

 

모리 미츠오는 인기와 실력 모두 겸비한 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전이 열린 전시장에서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토미에. 화가는 토미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그림에 대한 감상평을 알려달라면서 접근한다. 토미에는 그림 속 여자 모델이 멍청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델이 된다면 아주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고 추파를 던진다.

 

 

 

 

 

 

토미에는 이 세상에 자신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한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화가는 토미에의 초상화를 완성했지만, 토미에는 그 그림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면서 조소한다. 그녀는 화가의 자존심을 꺾어놓고 유유히 떠난다. 체면을 구긴 화가는 전시회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완벽한 토미에’를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화가는 토미에가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려내지 못해 슬럼프에 빠진다.

 

 

 

 

 

화가는 친구로부터 조각가 이와타 타미오의 근황을 알게 된다. 조각가는 새로운 모델을 만난 이후로 연작 조각상을 발표하여 큰 주목을 받는다. 그 연작 조각상의 제목은 ‘토미에’다. 화가는 조각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조각가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조각가는 ‘토미에는 나만의 것’이라면서 공개를 거부한다. 토미에의 미모에 완전히 홀린 화가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조각가를 죽인다. 화가는 조각가의 작업실에 들어갔으나 그곳에는 산산조각이 나서 널브러진 토미에 조각상들과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서 있는 토미에가 있었다. 토미에는 조각가가 조각상 전부 부숴버렸다고 울면서 하소연한다. 토미에의 가짜 눈물에 홀린 화가는 ‘완벽한 토미에’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화가는 토미에의 매력에 완전히 지배당한 채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토미에는 화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모두 나를 죽이려고 해요.”

 

 

화가는 토미에에게 완성된 그림을 보여준다. 토미에는 그림 속 여성은 자신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를 가리켜 ‘최악의 화가’라고 말하면서 멸시한다. 화가는 자신을 비웃는 토미에의 모습에 분노를 폭발하고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인다. 미쳐버린 화가는 토미에의 시체를 토막 낸다. 그러나 토미에는 죽지 않는다. 잘린 토미에의 신체 부위는 세포처럼 재생하여 ‘새로운 토미에’가 되어 자란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1 : 토미에 Ⅰ》(시공사, 2008)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2 : 토미에 Ⅱ》(시공사, 2008)

 

 

 

 

『화가』《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1 : 토미에 Ⅰ》에 수록된 이야기다. 토미에는 이토 준지 작품 속 등장인물 중에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토미에는 유혹으로 남자를 낚아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이다. 토미에의 외모에 홀린 남자들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으나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녀의 매력에 헤어 나오지 못한 남자들은 살인 욕구를 느껴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나 토미에는 불사(不死)의 존재이다. 토막 난 신체 부위는 ‘새로운 토미에’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부활한 토미에‘들’은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며 남자들에게 접근한다.

 

 

 

 

 

 

 

 

 

 

 

 

 

 

 

 

 

 

*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아트북스, 2018)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창비, 2017)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지만지, 2011)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문학과지성사, 2001)

 

 

 

 

토미에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화가의 모습은 ‘강박적 아름다움(convulsive beauty)’을 재현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미술사가 핼 포스터는 초현실주의 미술을 재정립하기 위해 ‘강박적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제시한다. ‘강박적 아름다움’은 ‘익숙한 낯섦(uncanny, 언캐니)’이 주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언캐니의 정의를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의 저서를 참고해야 하지만, 이 언캐니를 문학적 효과로 적절히 활용한 E. T. A. 호프만의 소설 《모래 사나이》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수월하다(프로이트가 호프만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언캐니’ 개념을 도출했다고 알려졌는데, ‘언캐니’를 제일 처음 쓴 사람은 독일의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취다). 《모래 사나이》에 언캐니가 산출하는 감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드러난다. 소설의 주인공 나타니엘은 자신이 사랑하는 올림피아와 입을 맞추는 순간, 섬뜩함을 느낀다. 나중에 나타니엘은 그녀의 정체가 사람이 아니라 ‘자동인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미쳐버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관점으로 언캐니를 설명하자면, 언캐니는 ‘억압된 것이 어떤 다른 경험 때문에 다시 나타나는 상황’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에로스(eros)를 삶의 욕망, 즉 ‘삶 욕동’으로 이해하여 찬양했다. 즉 삶과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 욕구를 샘솟게 하는 것이 에로스이다. 그러나 핼 포스터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원하는 삶 욕동 속에 ‘죽음 욕동’이 내포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삶 욕동’과 ‘죽음 욕동’을 서로 대비되는 개념이 아닌 ‘결합 상태’의 개념으로 보았다.

 

 

 내가 보기에 초현실주의는 에로스의 사랑을 내세우면서도, 그와는 반대로 죽음 욕동의 언캐니함이 가리키는 쪽을 향했다.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 9쪽)

 

 

초현실주의자들은 죽음 욕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성’을 지목한다. 초현실주의자들도 세기말적 공포의 기운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은 쾌락과 고통,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여 여성에게 요부, 즉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양산한 팜므 파탈은 ‘성적인 것(삶 욕동)’과 ‘파괴적인 것(죽음 욕동)’이 결합한 상징이다. 팜므 파탈에는 가부장적 사회에 반기를 들고, 남성을 위협하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팜므 파탈의 유혹이 주는 ‘쾌락’을 선호하면서도 파멸의 길로 몰고 가는 ‘파괴적인 힘’을 낯설어했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캐니로부터 아름다움을 해방하기 위해 여성을 ‘처벌’하는 사디즘(sadism)을 지향했다. ‘그녀(팜므 파탈)를 좋아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다시 이토 준지의 『화가』로 돌아가자. 화가는 토미에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비정상적으로 창작 욕구를 드러낸다. 그가 토미에를 만나지 않았으면 ‘완벽한 토미에’를 그리는 데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실패했고, 토미에는 화가의 자존심을 긁는다. 화가는 사랑스러운 토미에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했을 때 자존심에 상처를 준 불편한 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토미에를 죽이고 만다. 화가가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가학적인 처벌’이자 그녀를 파괴하면서 느끼는 일종의 ‘성적인 쾌락’이다. 『화가』는 ‘열린 결말’이다. 이토 준지는 토미에가 부활한 이후 화가의 삶을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아마도 토미에 여려 명 부활하면 화가는 영원히 토미에의 ‘강박적 아름다움’에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강박적 아름다움’은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다. 시시포스는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놓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를 굴려 산 위로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올라가는 방향의 고통과 내려가는 방향의 절망을 무한 반복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강박적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예술가들이 감내해야 하는 형벌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을 ‘팜므 파탈’로 설정하여 가학적으로 대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반응과 토미에를 잔혹하게 죽이는 『화가』의 결말은 ‘여성혐오(misogyny)’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이토 준지의 ‘토미에 시리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불안과 공포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여성 혐오의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성(모델)을 착취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성적 욕망을 조합한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페미니스트 미술 연구가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의 도마에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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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 준지에게 토미에라는 캐릭터는 단연 에이스급이라 생각됩니다^^:)

cyrus 2018-04-25 20:31   좋아요 1 | URL
<소용돌이> 다음으로 유명한 이토 준지의 작품이 <토미에> 시리즈죠. 애니 2기가 제작된다면 토미에 에피소드가 반드시 나올 거예요. ^^

2018-04-25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5 20:34   좋아요 0 | URL
미술을 공부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 섹슈얼리티를 ‘예술‘로 인정받으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표현을 허용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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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정말 심각해”라는 생각으로 대충 반응하고 넘겨버리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너무나도 쉽게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문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다. 우리는 이 ‘성폭력’이 끔찍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지만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문제, 피해자와 지원자들만이 가해자를 상대로 싸우는 문제, 즉 일반 시민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로 설정되자마자 개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 두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무관심은 타인을 배제하는 행위가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하고 침묵하면서 그 문제에서 멀어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이런 상태에 오랜 시간 지속한다면 개인의 분별력과 사유능력이 상실돼 부조리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했다.

 

불특정 여성을 공격하거나 강간한 범죄를 ‘그들(피해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는 너다’,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등의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였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우리(여성)’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피해자의 ‘정체성’을 우리와 동일시하게 됐지만 피해 자체는 여전히 타자화하는 우를 범했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은 성폭력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미투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책이다.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가 세 번째로 기획한 책이다(첫 번째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두 번째 책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그 출발로 권김현영‘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라는 용어의 한계들을 살핀다. 그녀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편을 들고, 피해자를 위해 폭로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으로는 성폭력 문제를 ‘권력과 폭력’의 문제로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윤리-정치적 결단은 공동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폭력을 관리하고 해결하려는 절차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다.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라는 역할’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자의 권리만을 특별하고 이질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처럼 비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권김현영, 63쪽)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성폭력 근절을 위해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는 목록을 늘리면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하지만 점점 피해자의 폭로가 공론화가 되면서 피해자는 ‘싸우는 사람’이기보다 ‘보호받을수록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했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편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건 해결에 목소리를 내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피해자에 연대하는 사상이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더 고통받는가’ 식으로 경쟁하는 길로 빠진다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든다.

 

‘2차 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차 피해’라는 용어를 살펴봐야 한다. 2차 피해는 피해자가 1차 피해(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부당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2차 피해’ 사례가 피해자의 증언을 불신하고, 소극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태도이다. 그런데 2차 피해는 성폭력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부추겼다. 가해자로부터 법적으로 공격받는(무고죄, 명예훼손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2차 피해’ 대신 ‘2차 가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무분별하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2차 가해’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그렇게 되면 공론장에서 주목해야 할 1차 피해, 즉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만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반 성폭력 운동 전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도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비판한다. 그녀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억압자 또는 피해자로 규정하는 반응이 여성 자체를 ‘남성 권력의 피해자’로 한정된다고 지적한다.

 

 

피억압자 스스로 피해자화는 경우, ‘피해자화’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남성 권력의 피해자라고 보고 여성에게 그에 맞는 이미지와 역할을 요구한다. 또한 ‘피해받은 불쌍한 여성’은 여성의 존재성을 남성과의 관계로만 한정하는 방식이다. 남성 권력은 여성이 피해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피해 여성만이 남성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희진, 223쪽)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권김현영과 정희진의 입장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폭로’하고 ‘발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페미니즘의 진짜 역할이고,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실천해야 할 자세이다.

 

이 책의 2장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기록하고, 관련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온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3장(한채윤)4장(루인)퀴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성소수자 관련 쟁점들을 다룬다. 앞서 《피가페》가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페미니즘과 퀴어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1] 그리고 성 소수자도 같은 성 소수자 또는 비(非) 성 소수자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며 죽음을 부르는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성폭행을 경험한 레즈비언, 트랜스 여성도 미투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혹자는 페미니즘 책에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글이 두 편씩이나 있다는 점에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특히 성 소수자를 배격하고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진영에 속한 독자라면 3, 4장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란스’는 성 문화 연구 모임이다. ‘페미니즘 문화 연구 모임’이 아니다. ‘성(性)’에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이 성적 피해를 보는 이유는 ‘복장’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이 갖는 권력과 폭력성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그런 폭력성에 대해 침묵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만들었다. 이런 위계적 관계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계획적 함정에 고스란히 빠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런 모순된 구조를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정희진은 성 소수자를 차별하고, ‘여성 순혈주의’만 고집하는 TERF를 에둘러 비판한다. 그러면서 ‘퀴어’가 빠진 페미니즘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페미니즘도 퀴어 이론도 결국 차별 받지 않고, ‘인간’으로 존중받는 삶을 위한 사상이다.

 

성적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이다. 그래서 퀴어 정치는 페미니즘의 성립 조건이다. 이는 마치 계급이 젠더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시키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다. 젠더 환원주의나 ‘여성 순혈주의’는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하지 않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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