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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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와 히틀러는 이념적으로는 상극이지만 선전과 선동의 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말로 하는 전쟁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들이 즐겨 쓰는 선전술로 상대방에 대한 낙인찍기가 있다. 특히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우파들을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등으로 규정하면서 민심을 유혹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진보좌파 세력이 득세하면서 보수우파 세력에 대한 낙인찍기가 유행했다. 군사정권 시절에 나왔던 빨갱이란 단어가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빨갱이는 국어사전에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망둑엇과의 바닷물고기란 두 가지 의미로 나와 있다. ‘빨갱이란 단어를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바닷물고기를 비유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 한국의 현실에서 진보좌파 세력은 배제되어야 할 대상, ‘빨갱이와 동의어로 통용됐다. 기득권이 친일과 친독재라는 자신들의 추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국 보수를 자처하며 활용해온 낙인이다. 이렇다 보니 빨갱이뿐만 아니라 인민’, ‘동무도 우리 사회에서 극히 민감하게 취급되는 단어가 되었다

 

인민은 우리말 국어사전에도 있다. 인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자연인을 의미한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구절을 게티즈버그 공원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귀에 박았다. 본디 인민이라는 용어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나타내는 용어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민을 쓴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인민은 백성을 뜻한다. 북한은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닌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 주입하는 무기로 삼고 있다. 이로 인해 남한에 인민이 설 자리가 없다. ‘인민공산주의자와 같은 맥락의 단어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작년에 조선일보는 전교조 위원장이 인민이 들어간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의 사상을 의심하는 내용의 사설을 실은 적이 있다.

 

기득권으로 눌러앉은 보수우파는 전체적인 맥락보다 단어에 집착하거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뜬금없는 이유를 들면서 사상을 검증하려고 달려든다. 그들의 머릿속에 기준이 불명확한 검열이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생기는 크고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노동자니, 민중이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엄청 많은 수의 인구가 사는 중국의 사정도 피차일반이다. 중국 공안당국은 네티즌이 올린 민감한 어휘나 단어들을 죄다 걸러낸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보다 노골적으로 검열에 들어간다. 그곳에 혁명이란 단어도 쓸 수가 없다. ‘64이라는 날짜가 인터넷에 등장하면 공안당국 검열관이 출동한다. 64일은 톈안먼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중국 네티즌들은 공안당국의 검열을 피하려고 ‘64‘535로 바꿔놓았다.

 

위화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작가다. 그는 어두컴컴한 공안당국의 검열 그림자에 가려진 단어들을 찾아냈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단어가 바로 인민이다.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첫 번째 주제가 인민이다. 톈안먼 사건은 중국 인민의 정치적 열정이 크게 집중되었던 중요한 날이었다. 거대한 탱크 앞에서 중국인들이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단합하여 맞서면 빛보다 더 멀리, 그리고 빠르게 전달되는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하지만 톈안먼 사건이 일어난 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그토록 뜨거웠던 민주화에 대한 인민의 열기는 허무하게 식어버렸다.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인민에서 국민이 되었다. 혁명이 지나간 뒤에 국민이 된 중국인들은 정치적 열정 대신에 부에 대한 열정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위화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열정을 상징했던 인민이 점점 잊히는 세태를 아쉬워한다.

 

 

 

 

인민을 그리워하는 위화의 심정이 이해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중국보다 여러 차례 정치적 열정을 크게 발산했던 시기가 많았다. 민주화의 꿈이 군부정권에 의해 처참히 무너진 가운데 나라 전체가 정신적 공황기를 맞은 불안정한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의 소중한 불씨를 지켜나간다는 일념에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민중이었다. 518일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민중항쟁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민중은 이제 먹고살기에 바쁜 국민이 되었다. 국민은 순종적인 성품과 안정적인 생활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리고 민중뿐만 아니라 민주화라는 단어를 진보좌파, 운동권 세력들이 즐겨 쓰는 민감 어휘라고 생각한다. 518일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는 폭동으로 비하한다. 우리나라는 검열 기관이 없는데도 자기들이 똑똑한 검열관인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보수우파 쪽 국회 어르신이나 지식인들은 비상식적인 편견을 동원해서 종북주의자 색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의 선동에 동화된 사람들도 인터넷에서 서식하면서 자칭 검열관 행세를 한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는 자신이 검열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나라다.

 

 

중국과 우리나라, 이 두 개의 국가는 지금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빛에 둘러싸여 있다. 자본주의 세계의 국민은 이 빛을 받으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너무나도 따뜻한 자본주의의 빛은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빛을 영양분 삼아 경제가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빛에 오래 적응한 국민은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과거 민중또는 인민시절처럼 부당한 사회제도를 거부하려는 횃불 같은 열기를 발산하지 못한다. 국민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력보다는 일상에서 수동적인 회피로 일관한다. 심지어 삶의 편의성을 누리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기도 한다. 이미 중국에서는 홀유(忽悠)’라는 말이 유행했다. 홀유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는 행위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경쟁 사회에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로 이해한다. 이렇다 보니 법에 위반된 행위를 저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버젓이 위반 행위를 저지른 자들은 그냥 뻔뻔하게 변명을 한다. “이런 게 바로 민중의 지혜이지요.” 그것도 민중의 의미를 왜곡까지 하면서 말이다.

 

 

 

    

햇빛이나 인공조명을 너무 오래 쬐면 몸에 악영향을 끼친다. 자외선이 강한 햇빛은 피부를 상하게 하고, 인공조명의 과도한 빛은 불면증을 일으킨다. 강렬한 자본주의의 빛은 사회의 건강을 악화시킨다.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부패지수에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몸은 비대해졌다. 국민 혈압 오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거짓말 일삼는 국민의 도덕심은 시커멓게 변하면서 상하고 있다. 위화는 홀유의 세계속에 사는 심정을 부조리 소설을 읽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나름대로 점잖은 표현을 써가면서 중국 사회를 비판했다. 혹시 위화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궁금하다. 남한 사정도 중국만큼이나 숨 막힐 지경이다. 불과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에 비하면 자유는 넘친다. 그러나 삐딱한 시선이 넘친다. 곳곳에 상대방을 조롱하는 혐오 발언이 난무하고, 거짓과 위선이 처세술로 변질하였다. 왜곡, 편견의 영향력이 높아지다 보니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도 많지 않다. 사회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에 휩싸이면 심리적 탈진상태에 빠져 버린다. 그러면 현실을 개선하려는 의지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강한 민중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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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 프로파간다가 강할수록 변질되는 현상...다 그렇더라구요. 오늘도 역시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6-17 11:29   좋아요 1 | URL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루쉰P 2016-06-18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준만 교수님이 말한 `증오산업주의`가 생각이 나요. 철저하게 적을 가르지 않으면 정치하는 사람들..음 그러니까 권력자들 혹은 출세주의자들이라고 할까요? 권력자들은 적을 만들고 그들을 공격하는 언어를 만들고 그래야지 만이 `인민`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기름진 배를 배불리 찌울 수 있으니까요.

전 아직 `위하`를 읽어 보지는 못 했어요. 시루스님께서 중국의 현실이나, 지금 우리의 현실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을 얘기해 주셨듯이 전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어느 정도 민주주의적(?)체제는 필요하다고 보기는 해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체제안의 사람들 문제라고 생각이 들어요.

위하는 중국의 체제가 검열도 심하고 민주주주의 국가와 중국을 비교해서 비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를 보면 그리고 미국도 보면 과연 민주주의라는 국가가 중국의 체제와 달리 뭔가 더 나은 점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거든요. 부정은 더 어둠으로 숨고, 인민을 속이는 솜씨는 더 교묘해 졌죠.

그렇다고 중국의 체제가 낫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의 체제 역시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보거든요. 어떤 체제든 그 안의 인간들의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그 사상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체제를 인간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게끔 힘 써야 할까? 그런 것이 각각 현실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체제가 낫고, 그 체제가 아니니까 우리는 문제가 많다 그런 것은 좀...받아 들이기 어렵다고 할까요? 전 그런 생각이에요. ㅎ

시루스님의 좋은 글을 읽으니 여러모로 긴 댓글을 썼네요 ㅋ

cyrus 2016-06-20 00:10   좋아요 0 | URL
진지한 생각이 담겨 있는 이런 댓글, 환영합니다. ^^

좋은 말씀 하셨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내부의 혼란이 점차 증가하고 있어요. 미국도 예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래드 다이아몬드가 이번에 나온 신작에서 미국의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미국에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로 알려지던 미국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간이 만든 ‘~주의’는 절대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장점이 많이 알려져서 그렇지 단점도 있으니까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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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쇼다’. 우리나라 1세대 프로레슬러 故 장영철의 발언으로 우리나라의 프로 레슬링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WWE는 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WWE는 아주 잘 짜인 쇼다. 트릭(trick)과는 다르다. 프로레슬링은 영화나 연속극처럼 자신의 배역에 따른 역할(entertainment)을 수행하는 것이다. WWE의 모든 경기의 승패는 경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있다. 하지만 이것을 문제 삼는 팬들은 거의 없다. WWE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악역을 하는 선수가 선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료 프로 레슬러 선수와의 급작스러운 갈등으로 인한 배신, 혹은 현 WWE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 그의 가족을 직접 각본상에 포함하며 권력에 놀아나는 레슬러들 등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물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잘 짜인 시나리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팬들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몸을 사리지 않은 선수들의 고난도 묘기에 열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프로레슬링 무대와 같다고 말했다. 소설가는 프로레슬러에 해당한다. 누구나 링 위에 오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링 한가운데에 선 소설가는 다음 상대를 기다린다.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 그렇지만 링 위의 현장, 즉 문단(文壇)은 냉혹하다. 링이 널찍해도 거기에 올라오려는 소설가들이 너무나도 많다. 링은 포화 상태다. 소설가가 소설로 먹고살려면 끝까지 버티어 살아남아야 한다. 레슬링에 관심 없는 독자는 하루키의 표현이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이 소설과 같다고 말하다니.

 

나는 하루키가 소설가의 세계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독자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렸다면 원고지에 옮겨 써 내려 가면 된다. 소설이 다 완성되었으면 문단의 링 위에 오를 준비한다. 자신의 소설을 독자들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다. 사각 링 주변에는 곧 무대에 등장할 선수를 기다리는 수많은 관객이 있다. 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면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문단의 링 위에 들어서게 될 신진 작가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가 쓴 소설이 마음에 들면 찬사를 보낸다. 반면, 소설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야유를 한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레슬링 경기가 지루하게 진행되면 실망한 관중들이 ‘우~~’하는 야유 소리를 낸다.

 

 

 

 

 

소설가의 세계는 ‘배틀 로열(battle royal)’이다. 배틀 로열은 레슬링 경기 방식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10명 혹은 20명이 동시에 링 위에 경기한다. 링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순간, 탈락한다. 탈락한 선수는 패자 대열에 합류한다. 배틀 로열의 승자가 되려면 동료 선수들을 링 밖으로 몰아내면서 끝까지 링 위에 살아남으면 된다.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 용기가 대범한 신진 작가는 자신이 배틀 로열에 당당히 우승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얼마 안 돼서 링 밖으로 떨어진다. 링 위에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의 선수에게는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영광이 주어진다. 문단의 링 위에 오래 살아남으면서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고,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은 작가에게는 명예로운 ‘문학상’이 주어진다.

 

레슬러의 선수 생활은 길어봤자 평균적으로 10년이다. 그만큼 전성기도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 선수들의 공격에 끄떡없던 튼튼한 육체가 점점 노쇠화되면 경기에 뛸 수가 없다. 운동 신경이 상당히 좋으나 불의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는 레슬링 선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전성기는 얼마나 될까. 하루키는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을 10년으로 잡았다. 작가 생활 10년째로 접어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 이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이전보다 더 나은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하루키가 말하는 ‘영속적인 자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물고기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소설가의 숙명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역설적인 말이지만, 소설 한 편 잘 쓰려면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써야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작업이 몹시 둔해 빠진 일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원고지 속으로 들어간다. 사각의 원고지는 작가 혼자만 올라서는 링이다. 문단의 링에 오르기 전 작가는 원고지 한가운데 앉아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심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루키는 글을 지속해서 쓰려면 끈질기고 다부진 기본 체력을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하는 하루키의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가의 링에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오래 버티는 건 아니란다.’ 그런데 정작 하루키 본인은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문장을 만들 때가 항상 즐겁단다. 이 사람 뭐야, 무서워!

 

 

 

 

 

하루키를 프로레슬러로 비유하면 ‘WWE의 아이콘’ 존 시나(John cena)에 가깝다. 그는 경기에 쉽게 지지 않는다. 경기 우승 횟수가 많다. 그는 의료진조차 최소 6개월의 회복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을 내린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과 3개월도 안 돼 링으로 복귀한 적이 있다. 꾸준함의 대명사로 인정받은 존 시나는 헐크 호건을 이은 ‘WWE의 선역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프로레슬러 팬들이 만든 존 시나의 별명이 ‘존 나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존 나쎄’다. 칠순을 눈앞에 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하게 소설을 쓰고 있다. 문단의 링 위에 서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고독한 글쓰기를 놓치지 않는 그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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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05-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재밌게 읽고 갑니다. ㅎㅎ

cyrus 2016-05-19 15:59   좋아요 0 | URL
알라딘 북플에 진짜 재미있게 글 쓰시는 몇 몇 분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 마태우스(서민)님 블로그 즐찾 해두세요. ^^

보물선 2016-05-1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존나쎄^^

cyrus 2016-05-19 16:00   좋아요 0 | URL
띄어쓰기를 잘 해야 됩니다. ㅎㅎㅎ

수이 2016-05-1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팬은 아니지만 팬이었던 적이 있었는데_ 현역 작가라는 점에서 역시 존경심.

cyrus 2016-05-19 16:01   좋아요 0 | URL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열심히 쓰잖아요.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호빵 2016-05-1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나쎄였군요 ㅋㅋㅋ

cyrus 2016-05-19 16:02   좋아요 0 | URL
하루키가 마라톤을 즐겨 하는 이유도 기초 체력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

yamoo 2016-05-18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 문학상은 돌려먹기 같다는..^^;;
근데, 워째 하루키의 비유가 좀 거시기 하네요. 소설가는 1:100의 싸움이 아닌 거 같습니다. 누구나 복수로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루키가 비유로 든 그로레슬링은 녹다운 방식인 거 같은데..


어쨌거나 타이틀은 정말 재밌네요~ㅎ 존 나쎄..ㅋㅋ

cyrus 2016-05-19 16:08   좋아요 0 | URL
사실 이 글은 10% 부족한 서평입니다. 제가 약 빨면서 글을 쓰는 바람에 하루키의 표현을 제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저는 하루키의 ‘프로레슬링’ 발언 의미를 경쟁 관계로 해석했어요. 그렇다 보니 뜬금없이 WWE, 존 시나 얘기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러니까 하루키는 링 위에 혼자 서 있는 레슬러(소설가)가 스스로 지쳐가는 과정을 알려주고 싶었을 겁니다. ^^

yureka01 2016-05-1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문학은 타고난 글의 근육이 있어야 되더군요..ㅎㅎㅎㅎ

cyrus 2016-05-19 16: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양한 소재의 생각을 영양분으로 삼아 글의 근육을 만들어야합니다. ^^

비로그인 2016-05-1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초고를 쓰고 다시 일본어로 자신의 작품을 번역한다는 하루키의 집필방식이 전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ㅜㅜ 진정 `존 나쎄`다니!! ㅎㅎㅎ

cyrus 2016-05-19 16:12   좋아요 0 | URL
그 내용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영어로 초고를 써서 다시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 지 궁금했어요. 정말 하루키는 대단한 능력자입니다. ^^

보슬비 2016-05-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질투나요. 존 나쎄서...

cyrus 2016-05-19 16:14   좋아요 0 | URL
소설을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쓰기가 어렵다고 말해 놓고선, 자기는 글쓰기가 힘들지 않다고 했으니 질투가 날 만합니다. ^^

transient-guest 2016-05-1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을 읽고 문단은 배틀로얄 같구나 했는데, 바로 쓰셨네요.ㅎㅎㅎ 하루키와 존 씨나...재미있는 비교 같습니다.

cyrus 2016-05-19 16:15   좋아요 0 | URL
간만에 약 빨고 썼습니다. ㅎㅎㅎ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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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 펼친다. 몇 년 전에 읽은 책이다. 펴보니 군데군데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 어떤 쪽에는 연필로 끼적여 적은 나름대로 주석도 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책의 내용이 생소하다. 책 속의 기록은 남아 있어도 머릿속 기록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과 망각 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살아간다. 잊지 못하는 것도 무서운 고통이지만 너무 잘 잊는 것 또한 끔찍한 일이다. 남들은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덜컥 겁이 난다. 인간이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는 건 단 2초에 불과하다. 그 이후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도 기억 덕분이다. 단기기억은 금방 사라진다. 반면 같은 정보가 반복되거나 개인적 감정과 얽히면 장기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또 시각과 감성, 공간이 한데 어우러진 경험이나 지식일수록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망각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불상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온전한 의식과 정신을 말살한다. 자그마한 회복의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는 완벽한 불치병이다.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만큼 애절한 게 있을까. 치매로 과거를 잃어가는 이와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의 사투는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백혈병과 더불어 멜로영화의 단골 소재다.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은 알츠하이머병이 소재다. 그러나 수많은 로맨스에서 반복된, 닳고 닳은 얘깃거리가 아니다. 하얗게 지워져 가는 기억과 그것을 붙들고 싶은 욕망,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생의 원초적 의문을 매만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에세이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그려낸다.

 

솔닛은 자신의 어머니 곁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란 놈을 만났다. 그렇게 어머니의 뇌는 잠들어버렸다. 마다가스카르 섬에 사는 나방은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신다고 한다. 나방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든 새의 눈물에 접근한다. 그 눈물엔 뭔가 달콤한 유혹이 있는 것 같다. 새와 나방은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는 비유다.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불청객을 맞게 된 그녀는 버텨내야만 할 슬픔에 천천히 자신을 적신다. 슬픔을 먹으면서 지낸다. 그런데 그 슬픔은 결코 달콤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것’들이 점점 잊힌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메마르면서 사라지는 눈물 한 방울을 훔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힘겨운 고통의 나날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솔닛은 어머니의 망각을 받아들이는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했다. 망각의 미로 속에 강제로 유폐된 기억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이야기의 실타래를 끊임없이 푼다. 그녀의 이야기는 살구 열매부터 시작해서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 등 어지러이 오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전혀 소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끄럽게 이어 붙이는 이야기의 마름질 솜씨가 뛰어나다. 그녀의 글에서 생의 무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읽기, 쓰기, 듣기 행위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삶을 긍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15쪽)

 

 

이야기가 있는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솔닛은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수록 깨어 있는 상태는 유지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꾼이 된다. 망각의 그림자를 피해 새로 발견한 일상의 세계 속에 발을 딛게 되어 거기에 정착하려는 여행자다. 기억을 잃어버린 이야기꾼은 ‘짐 없는 여행자’다. 망각과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다. 기억들이 최근의 것부터 서서히 삭제되고, 남의 얘기를 듣는 행위조차 너무나 피곤하다. 말과 글이 엉키고, 소리와 이미지가 뒤섞이는가 하면, 환각과 환청이 찾아온다. 일기장과 약이 아니면 오늘이 며칠인지도 알 수 없다.

 

각자의 찬란한 기억들은 누구나 한번은 지나왔음직한 과거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 들어 있었다. 그 특별하지 않은 ‘과거의 것’들은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때로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현재를 이룬 과거를 관조하고 촘촘히 기억해내는 과정은 현재와 미래만을 주시하는 일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세상에는 잊어야 할 것과 잊어도 될 것,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많이 잊는다. 겪은 일을 모두 기억한다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은 선택적 망각을 감행한다. 그러나 망각이 주는 부재의 고통은 극복되거나 잊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들도 왔다가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야기라는 생의 한 조각 하나하나 잘 모아서 거대한 인생의 모자이크를 완성해갈 도리밖에 없다.

 

 

 

※ 딴죽걸기

 

* 파멸로 이어졌던 유럽 세계와의 접촉, 1972년 부활절에 시작된 그 접촉 이후에 이스터 섬의 원주민이던 라파누이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 의식을 좀 더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94쪽, 초판 1쇄)

 

⇒ 이스터 섬은 1722년 부활절에 처음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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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7 12:51   좋아요 1 | URL
사소한 것들의 기억이 너무 쉽게 잊히는 과정이 죽음보다 더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 개정신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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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이란 이름 다음엔 자연스럽게 ‘감옥’이란 단어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선생은 감옥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가장 저주받은 운명을 축복으로 바꾼 사람이다. 어둡고 암울한, 분노와 저주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지혜와 사색의 산실, 때론 축복과 은혜처럼 여겼다. 선생의 생각이나 정서의 형성에 더 큰 계기를 제공한 것은 오히려 오랜 감옥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책으로 구성했던 사회론 대신 가장 소외된 밑바닥 인생을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사회에 숨겨진 모순구조를 통해 사회를 새롭게 바라봤다.

 

인간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다른 사람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 감사의 존재다. 신영복 선생은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는 묵자의 말을 인용한다. 옛날에는 거울이 없어 맑은 물을 거울로 삼던 시대였다. 거울(물)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 비춰 자기 모습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진리’를 강조한다. 그 사회 속에 나는 내 밥그릇을 챙기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갔다. 물질적 부를 추구하며 과시하는 삶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 보일 수 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화려한 모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편견과 이기심은 자신의 모습에만 매몰되고 다른 이들의 삶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반성을 거치지 않아 나온 부산물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딱딱해지게 되어 있다. 살아서 유연하던 근육과 뼈는 시체가 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진다. 유연하지 못하고 시체처럼 굳어진 이념의 노예가 되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이다. 자신만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흑백 논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우리 사회에 소통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들보다 불행한 존재는 없다. 결핍증 환자는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만한 너그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포용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공존과 상생의 규칙을 모르는 데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들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만든다. 자격지심은 헛된 자존심으로 헛된 감정싸움을 불러일으킨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처럼 엄정하게 해야 한다는 뜻. 맨스플레인(mansplain) 성향이 있는 나였기에 이 말에 비춰 보니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는 타인의 실수에 대하여는 냉혹하게 평가하는가 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올바르지 않은 판단 속에 남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표출한다. 그래서 비판의 칼날을 자신에 향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홀로 잘났다는 마음, 자신이 옳다는 마음, 자신을 합리화하는 ‘꼰대’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도그마의 권력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이다.

 

 

 

 

‘함께 맞는 비’라는 휘호를 보면서 내가 기억했던 ‘공감’이 잘못 변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에 내리는 비를 홀딱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지는 못할망정 빗방울이 튈까 봐 피하기만 했다. 남을 돕는 삶을 살자고 하면서 나 자신부터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면 꿈과 이상은 높은데, 재능과 실력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럴 때 어떤 이들은 냉정한 현실을 말하며 꿈을 접으라고 한다. 하지만 꿈을 꼭 이루겠다는 절실함, 그리고 약간의 우직함만 있다면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 믿고 싶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라고 한 신영복 선생의 역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삶은 모두 순간순간의 과정이다. 실천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제보다 스스로 가하는 강제 즉, 자율의 의지가 중요하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진작에 ‘지기추상’의 철학을 배웠더라면,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이란 구절처럼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끝까지 아집을 추구하는 무식함이 사라졌을 텐데. 너무 후회된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온’ 선생의 빈자리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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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1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좀더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을텐데 말이죠..

cyrus 2016-05-12 17:09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참된 어른이었습니다. 다른 서재 이웃분들의 서평 덕분에 처음으로 <처음처럼>을 읽었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습니다.

yamoo 2016-05-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영복 님의 책을 3권 갖고 있지만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한 참 후에나 읽게 될 거 같아요. 요즘 동양철학 계에서 핫하신 분을 만나 그 분 책들 다~~읽고 도올 전집을 다 읽은 후에야 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참된 어른 인지 아닌지는 제가 신영복 님의 행적을 거의 몰라 평가하기 곤란하구요. 단지 투옥에서 고생하셨고, 그곳에서 쓴 책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감명을 줘서 저도 몇 권 구해놓았을 뿐입니다. 신영복 님 글을 읽으면 저도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겠죠~ 미래의 제 독후감처럼 사이러스 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예감에 저도 이런 글 비스무리하게 리뷰를 작설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은지라..ㅎ

cyrus 2016-05-13 16:48   좋아요 0 | URL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처음처럼>, <나무야 나무야>를 읽은 게 전부입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동양철학은 어려워요. 신영복님의 삶을 반추하는 평전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
 
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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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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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팔’ 선우가 아닙니다.

 

 

 

 

 

 

‘시그널’ 선우도 아닙니다.

 

 

 

 

 

노래 부르는 선우도 아니에요.

 

 

 

 

 

 

야구(해설)하는 선우 또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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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찾는 선우가 누구인지 제 얘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백석 ‘함주시초-선우사’ 중에서, 《정본 백석 시집》 83쪽)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다. 먹을 때는 생활이고 먹고 싶을 때는 그리움이다. 맛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삶과의 맞대면이다.’ 작가 김훈은 소래섭의 《백석의 맛》에 붙인 꼬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이다. 어느새 우리는 이런 궁핍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옛 맛을 찾게 되니 말이다. 음식에도 사연이 곁들여지면 그악스럽게 먹어도 부끄럽지 않고 조악한 푸성귀 몇 잎에조차 행복해진다. 백석‘반찬 친구(선우, 膳友)’는 가자미다. 백석은 가자미 반찬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친근한 대상처럼 묘사했다. 시인에게 반찬은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 되고 고독을 잊히는 친구가 된다.

 

맛에 대한 기억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맛은 각자의 혀에 코와 기억으로만 느낄 수 있다. 백석은 이 오묘한 상황을 불현듯이 실감했다. 우리에게 흰밥과 가자미는 어쩌다 먹는 별미지만, 백석에게 그것은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행복의 기억을 덤덤하게 곱씹는데 이만큼의 이야기들이 나오는가 보다. 백석에게 가자미가 있다면, 황석영에게는 굴비가 그런 음식일 게다. 고추장에 담근 굴비는 기억 속에 희미해진 작가와 어머니의 소중한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무더운 여름날에 입맛이 없을 때 찬물에 밥을 말아서 찢어놓은 구운 굴비와 열무김치를 먹으면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기억한다. 이만한 밥도둑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황석영의 밥도둑》에서 우리의 미각과 후각을 유혹하는 밥도둑들은 주인공이 아니다. 진짜 주인공이 따로 있다. 바로 밥도둑들의 유혹을 그리워하는 우리다. 백석은 ‘쓸쓸한 저녁’을 맞이하면서 진짜 밥도둑이 실은 가자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밥도둑은 원래 일하지 않고 놀고먹기 만하는 한량을 의미한다. 시인은 밥상에 오른 가자미를 보면서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반찬 선(膳)’은 ‘희생’을 의미하는 한자다. 가자미는 시인의 입맛을 살리기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했다. 어머니는 까다롭고 철없는 어린 미식가를 위해 부엌에서 적지 않은 희생의 시간을 보냈다. 싱크대가 없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수만 번 도마 위에 칼질하고, 수만 번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어린 밥도둑이었던 황석영은 굴비 반찬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50여 년이 걸렸다. 작가의 어머니는 고추장 범벅이 된 갈비를 직접 손으로 찢었다. 이런 희생과 정성의 손맛이 굴비 조각 속으로 배어 들어가면 별식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아무리 까다로운 미식가라 하더라도 최고 음식을 꼽으라면 유명한 조리사가 만든 음식이나 산해진미가 아닌, 어머니 손맛을 꼽는 것을 봐도 그렇다.

 

부모는 우리 모두 미식의 스승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부모의 맛을 닮아간다. 작가는 연인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장아찌를 먹어본다. 그 과정에서 궁핍 속에서 살아남은 아버지가 흘러내렸던 짭짤한 땀 맛을 안다. 그러면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유별난 사랑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장아찌와 밥 한 덩이는 고통의 맛을 잊게 해주는 아버지의 유일한 반찬 친구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배워 온 기억의 재현을 통해 우리는 맛을 알아간다. 아니 단순히 맛을 알아간다는 차원을 넘어 부모님을 이해하고 닮아가고 있는 것이고, 동질감을 느낀다. 부모와 자식 간 정이 음식으로 통하는 것을 보면, 음식만큼 정을 나누고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작가에게 음식은 ‘음식’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바로 ‘우정’과 ‘나눔’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김용태와 함께 먹었던 부대찌개, 감자탕, 낙지볶음은 작가의 추억을 뜨끈하게 하는 반찬이다. 소주와 곁들인 이 저녁 음식들에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충만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 속에 친구의 이야기가 채워져 있다. 작가는 날이 추워지면 부대찌개를 찾는다. 친구는 작가의 결핍을 채워주는 반찬(膳) 친구를 선물(膳)로 주고 떠났다. 오랜만에 만난 반찬 친구는 또 다른 친구의 추억을 낳는다. 추억이라는 놈은 그것이 기쁜 것이었든 슬픈 것이었든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기에 불쾌한 녀석이 아니다.

 

백석의 「선우사」 마지막 두 행은 험한 세상과 대면하려는 시인의 자존심이 드러난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함주시초-선우사’ 중에서, 《정본 백석 시집》 84쪽)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밥을 잘 먹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으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다시 숟갈을 들게끔 식욕을 생기게 한다. 아마도 백석과 황석영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만, 백석이 정다운 마음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황석영은 맛을 보면서 입 안에 맴도는 추억을 더듬는다. 맛있는 음식에는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과의 친밀성이 담겨 있다.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 아무리 배불러도 맛있던 기억은 소박한 밥상을 그립게 한다. 먹는 행위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거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생의 의욕을 잃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친구 같은 음식에 대한 사람의 감정에는 권태가 없다. 내 마음을 훔치는 밥도둑과 함께 하면 누구 하나 부럽지 않다.

 

그런데 ‘먹고사니즘’에 사로잡혀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음식의 진정한 소중함을 잊고 지냈다. 음식이 풍족한데도 나를 즐겁게 해준 밥도둑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외로운 우리는 텔레비전에 갇혀 남이 먹는 행위를 보면서 위로받으려고 한다. 텔레비전 화면에 ‘어머니의 손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 연예인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없다. 우린 이제 그 음식을 먹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먹방 열풍’과 유명 음식점을 알리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맛있는 추억을 공유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먹고 노느라 바빴던 밥도둑(한량)은 이제야 맛있는 추억을 간직한 밥도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럴수록 경제적 여유 걱정하지 않고도 정겨운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반찬 친구가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보고 싶다, 내 밥도둑 선우야!

 

 

 

 

※ 서평대회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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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북 2016-03-2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문드문 접하기만 했던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문득 아이들이 좋아하는, 백석 시인의 [개구리네 한솥밥]도 떠오릅니다^^

cyrus 2016-03-28 15:29   좋아요 0 | URL
<정본 백석 시집>을 추천합니다. 옛 말이나 북쪽 방언 풀이가 잘 되어 있어서 가독성이 좋습니다. ^^

yureka01 2016-03-28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먹는다는 것이상의 먹기에 대한 이야기.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3-28 15:31   좋아요 1 | URL
살면서 먹어왔던 음식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부럽습니다. ^^

단발머리 2016-03-28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표지는 많이 보았는데 정말 따뜻한 내용이군요.
어제 저녁에 피자시켜준 이 엄마는... 웁니다.

좋은 리뷰예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래요~~

cyrus 2016-03-28 15:33   좋아요 0 | URL
저는 어제 점심으로 라면, 저녁에는 족발을 먹었어요. ㅎㅎㅎ
저보다 서평을 잘 쓰신 분들이 많습니다. 행운이 따라줬으면 좋겠습니다. ^^

세실 2016-03-28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맛있는 음식에는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과의 친밀성` 이 말이 와닿네요.
선.우! 반찬과 친구라니.....시인의 감성은 역시!!!
참 깔끔하면서 명쾌한, 찡한 리뷰네요^^ 베리 굿!

cyrus 2016-03-28 15:36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혼밥 먹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어딜 가든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그래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먹는 식사 시간이 제일 좋아요. 백석 시인은 얼굴도 잘 생겼고, 감수성도 풍부해요. ^^

표맥(漂麥) 2016-03-2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수상권 리뷰군요... ^^

cyrus 2016-03-28 15:39   좋아요 0 | URL
제가 출판사 서평대회에 응모하면 징크스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칭찬한 글은 낙선되었습니다. ㅎㅎㅎ

비로그인 2016-03-2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문의 알찬 글이네요.
서평대회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래요.

cyrus 2016-03-28 21:19   좋아요 0 | URL
일반 독자가 서평대회용 글을 보는 것이 심사하는 분이 보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두 사람 모두 만족시키는 좋은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이 글을 칭찬하는 분들이 많아서 낙선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