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장을 수집한다. 그러니까 책을 수집해서 그 속에 들어있는 보물 같은 문장도 모은다. 문장을 수집하면 즐겁다. 좋은 문장을 흉내 내기 위해 모으는 것이 아니다. 좋은 문장 속에는 힘이 있다. 문장의 힘은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간다. 그 힘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서 기록한다. 하나의 문장에서 똑같은 문장이 복제된다. 벤야민은 복제가 아우라를 잃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문장의 아우라는 어디를 옮기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하는 행위야말로 문장의 아우라를 잃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다. 독자의 눈에 띄지 못한 문장은 자신의 아우라를 보여줄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문장 수집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장 수집가는 거대한 바다 같은 책 속에 항해한다. 그는 활자로 이루어진 섬들 사이에 이리저리 지나간다.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문장은 독자의 눈길이 무수히 찍힌 섬이다. 이 섬은 되도록 피하자. 낯선 문장은 태초의 섬이다. 항해가인 문장 수집가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문장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한다. 문장 수집가는 의미 있는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노트에 기록한다. 아니면 그 문장을 소유하는 의미로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모험심 넘치는 문장 수집가들이 제일 선호하는 바다(책)는 무엇일까. 하나하나 열거하면 너무나도 많다. 아무래도 명언 모음집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가의 글일수록 빛나는 문장들이 종이에 숨겨져 있다. 칼릴 지브란은 명언 모음집에 자주 나오는 대표적인 작가다. 사실 그의 글은 지나치게 명상적이고 초월적이어서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글 속에 있는 하나의 문장은 독자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브란의 문체는 평이하고 간결하다. 산문 형식으로 갖춘 글 속에서 시어에 가까운 운율이 살아 있다. 그래서 지브란의 글은 여러 번 읽어야 문장의 함축성까지 이해할 수 있다. 속독은 지브란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문장 하나의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약칭 ‘보여줄 수 있는 사랑’)는 지브란의 경구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지브란과 메리 엘리자베스 해스켈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에서 발췌한 문장을 잠언시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해스켈이 지브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췌한 문장도 몇 개 있다. 편지글에서 발췌한 문장뿐만 아니라 지브란의 대표작들에서 발췌한 문장과 지브란이 직접 그린 그림(크기가 작다)도 있다. 판형은 시집과 비슷하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초판은 1988년에 나왔다. 당시 초판의 가격은 3000원이었다. 알라딘에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검색하면 출판연도가 1991년으로 나온다. 1991년은 2판이 나온 해이다. 1995년에 3판을 찍었으나 판형과 표지는 동일하다. 2003년에 새 표지로 개정판이 나왔다. 구판과 개정판 모두 절판되었지만,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인기에 힘입어 초판본 형태로 재출간되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읽고 나면 지브란의 여자관계가 궁금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 뒤편에 지브란과 메리 해스켈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독자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내용이 부족하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알렉상드르 나자르의 《칼릴 지브란》(작가사랑, 2007)을 읽으면 된다. 알렉상드르 나자르는 지브란의 고국인 레바논 출신의 작가다. 나자르는 지브란의 편지와 각종 기록들을 바탕으로 지브란 평전을 완성했다.
지브란과 해스켈은 1904년 미국 보스턴에서 처음 만났다. 이 때 지브란은 보스턴에서 생애 첫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지브란은 전시회의 그림을 보는 헤스켈의 모습에 한 눈에 반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지브란 : 이 그림, 내가 그렸다능.
해스켈 : 웬열? 정말 님이 그렸다고?
지브란 : ㅇㅇ 내가 님을 위해서 이 그림에 대해서 설명해줄게.
해스켈 : 와, 정말! 님 좀 짱인듯. ♡♡
지브란은 그녀를 위한 큐레이터로 나섰고, 해스켈은 지브란의 예술적 감각을 눈여겨 봤다. 해스켈은 지브란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여학교를 세웠을 정도로 지적인 여성이었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지브란도 해스켈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면서 마음껏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해스켈 덕분에 지브란은 일 년 동안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지브란은 자신이 쓴 글을 출판하기 전에 해스켈에게 퇴고를 부탁했다. 그녀의 도움을 거쳐 간 지브란의 책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예언자》다. 지브란은 그녀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자신의 작품에 메리 엘리자베스 해스켈의 약자 ‘M.E.H’으로 시작하는 헌정사를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과 우정 사이를 놓고 오락가락했다. 지브란은 해스켈의 소개로 알게 된 그녀의 친구 에밀리 미첼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해스켈은 그 두 사람의 애정 관계가 지속하기를 바랐다. 지브란의 여자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어머니의 존재를 갈망했던 그는 자신보다 연상이거나 예술을 좋아하는 지적인 여자들을 좋아했다. 1910년에 지브란은 해스켈에게 청혼을 해보지만, 거절당한다. 그녀는 생각을 바꿔 지브란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나, 며칠이 지나서 자신의 승낙을 번복했다. 해스켈이 지브란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해스켈은 결혼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원했을 것이다. 해스켈은 지브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그리고 그를 물심양면 살펴주는 후원자 역할이 되고 싶었다. 지브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브란을 도와주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 해설에 의하면 지브란의 또 다른 후원자로 ‘메리 쿠리’(나자르의 지브란 평전에는 ‘마리 엘 쿠리’로 표기되었다)라는 여성을 거론했다. 그러나 이 설은 메리 쿠리의 주치의에서 나온 증언에 불과하다. 물론, 메리 쿠리도 지브란이 만난 여성 중의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메리 쿠리가 헤스켈만큼 지브란을 도와줬는지 알 수 없다. 나자르는 메리 쿠리를 단 한 번만 언급했다. 해스켈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는 지브란의 여자로 본 것일까. 레바논 출신의 기자(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지브란과의 관계를 증명해주는 메리 쿠리의 편지를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참고로 지브란이 마이 지아데라는 여류 수필가에게 보낸 편지글만 모은 책은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터》 명진출판사, 2001)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에 있는 문장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 보물 하나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유년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오래도록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 우리네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영혼이 추억의 자리를 더듬는 것이다. (36쪽)
뜨겁게 사랑했던 작가의 글이 있는가.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구석진 곳에 잠들고 있을 추억의 책을 더듬어보자. 오랜만에 책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그러면 당신이 밑줄로 남겨 둔 보물 문장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