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둑의 최후는 교수형뿐이라네 - 애서가들의 장서표 이야기
쯔안 지음, 김영문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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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표는 책의 속표지에 붙여 소유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시다. 책의 소유자를 알리는 장서표는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의 징표이기도 하다. 장서표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우표만 한 크기지만, 규모가 매우 다양하다. 장서표에는 ‘Ex Libris’라는 라틴어가 들어가는 게 불문율로 돼 있다. 영어권에서는 ‘Bookplate’라고도 쓴다. 또 장서가의 이름이나 연대를 쓰기도 하고 책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시, 격언들을 넣어 장서표의 무게를 더해주기도 한다. 문자와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장서표는 판화로 제작되는 게 보통이다. 판화로 만든 것이 예술작품으로 사랑을 받는 것은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책이 그리 귀하지 않은 지금 장서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됐다. 장서표 문화가 일찌감치 자리 잡아 수집 문화의 하나로 성장해온 유럽,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실정이다.

 

 

 

 

장서표를 소개한 책 제목이 살벌하다. 책 도둑의 최후는 교수형뿐이라네. 평생 책 읽기와 장서표 수집에 탐닉해온 한 중국 애서가의 반어적 욕망이다. 저자는 책에 대한 탐닉이 장서표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독서광의 공감을 사고 평균적 독자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새삼 강조한다. 저자의 장서표 사랑은 장서표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서표 안에 새겨진 상징을 해독한다. 장서표의 내용은 장서가의 직업, 취미, 세계관 등이 압축되어 있다. 장서표에 자주 등장하는 사물은 당연히 책이다. 현재는 발전된 제지술과 인쇄술 덕분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 책이지만, 과거엔 특별한 사람이나 소장할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장서표에는 그 귀한 책에 소유와 애정의 표시를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새겨져 있다.

 

세상은 남자에 의해 움직이고, 그들은 여자의 보호자로서 소유권을 주장했다. 남성 애서가들은 책과 여자가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독과 결핍을 느끼는 남성 애서가들을 위해 벌거벗은 여성이 그려진 장서표가 제작되었다.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책을 읽었고, 자신만의 장서표를 이용했다.

 

 

 

 

미국의 판화가 록웰 켄트는 부부애를 기념하기 위한 장서표를 제작했다. 장서표에는 켄트와 아내 샐리(Sally)가 맞잡은 손동작이 그려져 있고,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샐리가 독서를 좋아하는 여성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책과 거리가 먼 전통적 여성이었다면, 장서표에 이름이 새겨진 사실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서표를 찬찬히 살펴보면 샐리를 향한 켄트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장서표에 자신의 아내를 록웰 켄트의 아내 샐리가 아닌 샐리 켄트,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 형태로 새겼다. 이 장서표에 책은 중요하지 않다. 장서표의 진정한 주인공은 샐리다.

 

장서표 수집가가 소개한 다양한 장서표를 보면 저마다 장서표 주인들의 삶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표는 단순히 문자와 그림이 조화를 이룬 예술 작품이 아니라 인류의 삶 전체를 문자와 그림으로 형상화한 기념비다. 책 속에 있는 작은 기념비. 자신의 물건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럽다. 장서표는 애서가를 위해, 책에 의해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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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3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13 18:15   좋아요 1 | URL
장서표, 장서인조차 없습니다.. ㅎㅎㅎ

국내에 남궁 산님의 장서표가 유명합니다. 저는 장서인을 갖고 싶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6-12-13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서표는 소장용책에만 사용해야할 것 같네요. 그렇지 않으면 중고서점에 팔 때 제 값 못 받을 거 같네요^^

cyrus 2016-12-14 08:11   좋아요 1 | URL
정말 운이 좋으면 중고서점, 헌책방에 유명인의 이름이 있는 장서표가 붙은 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로또에 당첨될 확률에 가깝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12-15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서표 참 멋지네요. 저런 것을 만들어서 가진 책마다 하나씩 넣어두는 것인가요?? 가끔 보면 비슷하게 책에 그냥 쓴 건 봅니다만, 디자인해서 따로 만든건 못 봤어요..저는 책제목이 참 맘에 듭니다.ㅎㅎ

cyrus 2016-12-15 07:46   좋아요 0 | URL
네. 책 속표지 안에 붙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소유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책 제목이 장서표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
 
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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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의 외모에 박남준의 요리 솜씨를 가진 여자라면 

내 당장 결혼하겠소.” 

 

(《시인의 밥상》 20쪽)

 

 


  
요리 솜씨가 뛰어난 매력적인 남자 시인이기에 그의 팬을 자처한 남성도 있다고 하더라. ‘버들치 시인’ 박남준이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가난하지만 여유롭게 사는 모습 덕분이다. 그는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서 혼자 밥해 먹고, 혼자 꽃도 보고, 글을 쓰면서 지낸다. 사람들은 그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내놓은 마음 씀씀이에 행복해한다. 그는 나눔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행복하기 살기 위해서 요란하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면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사소하고 단순하다. 가끔 사사로운 시간 없이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이 인생 종반기에 이르러서야 크게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놓쳐버린 일상의 행복,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흘려보낸 뼈저린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한 밥상에 둘러앉아서/사는 게 별거야’(『한 밥상에』)라고 노래했나 보다. 지인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소박한 행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작은 평화와 행복은 위대하기조차 해서 숙연해진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면 사람에게는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욕심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걸 알고 아무리 누르려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제각각 소중함을 지닌 우리지만 늘 상대와 견주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물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것이 버들치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새끼 낳은 고양이를 위해 자신이 평소에 먹지 않은 소고기 반 근을 사오면서 밥을 챙겨주고, 식사하기 전에 죄인처럼 기도하면서 늘 미안해하던 사람. 그게 버들치 시인의 삶이다. 그 여리고 맑은 시인의 심성이 공지영의 문장에 투명하게 비친다. 험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민망한 마음이 들다가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고된 일을 참아내는 그의 모습이 존경스럽다. 공지영의 말대로 버들치 시인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이것은 시인의 타고난 털털함과 겸손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인이 사물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내면을 꿰뚫어 볼 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산다는 것을 무엇일까. 얼마나 더 많이 가지면서 누려야 사는 걸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빵만으론 살 수 없음을, 빵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다. 《시인의 밥상》은 특별한 음식에 대한 정보를 가르쳐주는 데에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사는가?’가 아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동안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물질만을 추구하며 바삐 걸어가는 많은 독자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이제 《시인의 밥상》을 읽은 독자가 대답할 차례이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이 물음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이 무한하다는 생각으로 오만하지 않고, 타인에게 베푸는 마음이 넘쳐나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다. 행복도 햇살처럼 문을 닫으면 들어올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는 있으면서 어디에도 들어 올 수 없게 마음의 문을 걸어두고 행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전박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행복은 소질이 필요하다. 부족과 불만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자세야말로 행복의 소질을 키우는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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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12-02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에 소질이 필요하다는 말 오늘의 한 말씀으로 찜합니다.. 아무나 행복할 수는 없나 봅니다.. 좀 맘 불편한 일이 있었는데.. 사이러스님 글 덕분에 소질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ㅎㅅㄴ

cyrus 2016-12-02 21:46   좋아요 0 | URL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주는 일이 꼭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껴준다면 그거야말로 양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받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고, 이를 악용한다면 주는 사람이 피해를 얻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남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도 적당선이 있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태도가 무조건 좋고, 꼭 실천해야하는 건 아닙니다. ^^;;

개새 2016-12-02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적인것 아침에일어나서 밤늦게 잠들때까지 소소한거 매일반복되는일상 그게 행복이란걸 모를때가있기때문에 찾으려애쓰는거

cyrus 2016-12-02 21:48   좋아요 0 | URL
세상이 각박하고, 안 좋은 상황이 계속 일어나면 과거의 소소한 경험이 상당히 좋게 느껴집니다.

2016-12-02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2 21:52   좋아요 0 | URL
‘나는 자연인이다‘가 중장년층의 무한도전이라고 하더군요. ㅎㅎㅎ 저희 부모님이 챙겨보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야산에 집을 지으려면 집터가 공적 및 사적 소유지인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땅에 집 지으면 법적 문제가 생겨요. 말년에 자연과 벗 삼아 생활하려다가 한 순간의 착오로 인해 꼬일 수 있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12-03 0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복잡하고 지칠 땐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언젠가 조금 더 조용한 곳에서 평화롭게 남은 생을 살겠다고...-_-: 그런데 막상 도회지를 떠나면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네요. 사실 유비쿼터스 환경은 이미 상당히 조성이 되었는데, 클라이언트들은 아직도 제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실 인터넷, 전화, PC, 프린터/스캐너만 있으면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죠...main freeway라인에서 조금 떨어진 곳 농장을 사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일하고 책읽고, 운동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community를 꾸려보고 싶네요.

cyrus 2016-12-03 09:5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도 시골에서 책만 있으면 살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 이거 하나라도 없으면 허전함이 느켜져서 제대로 전원 생활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나비종 2016-12-03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돈이 100만원이었습니다. 백만원만 있으면 정말 행복할텐데 했죠^^;
책꽂이에 꽂혀있는「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볼 때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의 가치는 무엇일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ㅎㅎ
토요일 아침을 따뜻하게 흐르게 해주는 글입니다. 이렇게 또 행복이 다가왔네요.^^

cyrus 2016-12-03 09:58   좋아요 0 | URL
어른이 되고나니까 백만원 모아서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세금에, 기타 용도로 쓰게 되면 남는 게 없어요. 제게 특별히 백만원이 주어진다면 전액을 책장을 장만하거나 책을 사는 데 쓰고 싶습니다. ^^;;

나비종 2016-12-03 10:06   좋아요 1 | URL
통장은 단지 월급 버스가 잠시 지나치는 정류장일뿐ㅎㅎ
옷 대신 책을 선택해 헐벗고 다니는 요즘은 욕심을 줄여야지 줄여야지 암시를 준답니다. 내 몸 하나에 필요한 옷은 한 벌이면 충분하다며. .

cyrus 2016-12-03 10:21   좋아요 0 | URL
역시 알라딘의 시인다운 멋진 표현입니다. ^^

나비종 2016-12-03 10:30   좋아요 0 | URL
시인이라니요^^;; 되도 않는 시를 남발하는 다작 인간일 뿐입니다ㅎㅎ
근데 cyrus님, 진지하게 여쭤보는 건데요, 제가 글짓기대회를 나가려고 하는데 시가 좋을까 산문이 좋을까 고민 중입니다. 제 서재의 유일한 댓글러로서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cyrus 2016-12-03 10:35   좋아요 1 | URL
저 같은 경우에는 글짓기대회에 참가하면 산문 부문을 항상 선택했어요. 운문은 넘 어렵게 느껴졌거든요. 나비종님은 평소 습작 시를 쓰셨으니까 당연히 시 부문으로 참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물론 산문을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나비종님은 산문과 운문 두 장르를 병행하면서 글을 썼으니까요. 저는 중딩 때 백일장 이후로 시를 써본 적이 없어요. 독후감이나 리뷰를 많이 썼어요. ^^
 
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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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그리고 또 다른 충전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란 그렇게 큰 사건들에서만은 아니다. 그저 잔잔한 일상사에서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음식을 눈으로 즐기고 맛에서도 감동적인 만족한 식사가 되었다면 그 또한 휴식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속내를 음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살뜰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졌다.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음식으로 표현한 책이다.

 

음식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책들은 손맛이 더해진 조리방식을 보여주며 독자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생활의 냄새와 추억의 맛이 더해진 책 속 음식을 보며 독자들은 그 음식을 찾아서 먹게 된다. 《어른의 맛》을 보고 읽노라면 일본 음식의 맛이 궁금해진다. 일본과 한국의 음식문화와 조리법은 비슷한 듯 닮았으면서도 여러 차이가 있다. 사실 책 속에 소개된 특색 있는 일본의 전통 음식은 일본에 가보지 않는 이상 경험하기 힘들다. 또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 우리의 미각으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맛이다.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의 인기요인은 먹음직스러운 음식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리적 허전함과 불안감, 뭔가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 같은 무의식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음식은 어느 민족에게나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음식은 국경을 초월하여 민족 정체성이나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초적 방법이다. 여기에 우리 민족에게 밥상은 식구가 둘러앉아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서로의 안녕과 가족애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어느 나라에나 사람이 있고 가족이 있기에 이들과 함께하는 그 나라만의 가족 음식도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저자는 늦은 밤에 아버지가 사준 주먹초밥과 김초밥을 먹었던 어린 시절의 순간에서 가족의 포근함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천천히 나무도시락 끈을 풀자 주먹초밥(니기리즈시)과 다랑어나 오이가 들어간 김초밥이 화려하게 담겨 있다. 그걸 보는 순간 잠기운이 싹 달아난다. 옆에 있던 여동생도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앞으로 쭉 내민다.

 

뭐부터 먹을까. 젓가락을 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컵에 든 차가운 물을 마시며 아버지가 말한다. “요코는 오징어, 게이코는 새우.”

 

기분 좋아서 아무렇게나 한 말일 뿐인데 고민고민하던 마음을 들킨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말대로 젓가락을 움직인다. 와사비의 맛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 가지고 오신 나무도시락 초밥 때문에 알게 됐다. 아버지가 사 온 그 나무도시락 초밥도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와사비가 적었던 것 같다. 가족을 위한 야식이기 때문에 와사비를 아주 연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그랬던 것 아니었을까.

 

(《어른의 맛》 43쪽)

 

 

이 글에 묻어 나오는 포근함은 세계 어느 나라에 살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고 느껴봤을 것이다. 그 와사비 맛은 순식간에 그녀를 유년의 어떤 기억들로 데려다주었다. 이 기억은 억지로 생각해서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맛이 몸속의 무엇을 건드려 몸속으로부터 빠져나오는 특별한 기억이다. 이런 특별한 맛의 기억이 추억으로 남고 행복한 삶 일부가 된다면, 성공한 어른으로 자랐다는 방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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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것만큼 가장 즉각적인 것도 없는 만족감이죠..
반대로 ..먹지 못하는 것만큼 또 불행한 것도 없으니까요..
안먹고도 살수 있다면...또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먹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신이겠지요..ㄷㄷㄷ

cyrus 2016-11-23 13:18   좋아요 1 | URL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음식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대표적인 분이 저희 어머님입니다. ^^;;

레삭매냐 2016-11-2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빌려다 보려고 했는데. 먼저 읽으셨네요.

cyrus 2016-11-23 13:19   좋아요 0 | URL
일본 음식이 낯설고, 음식 사진이 많지 않아서 공감 얻기 힘든 글이 많았어요. 그래서 책 별점 3개 줬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11-23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책이 또 늘어나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제가 책을 읽으려고 태어난 건가 하은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ㅋㅎㅎㅎㅎ

cyrus 2016-11-23 13:21   좋아요 0 | URL
일본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공감하기 힘든 글이 많았습니다. 《황석영의 밥도둑》이나 공지영의 《시인의 밥상》을 보는 것이 낫습니다. ^^;;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피터 멘델선드 지음, 김진원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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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지나친 독서로 실명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을 무렵이었다. 보르헤스는 노트도 없이 기억에만 의존해 문학에 대한 사랑을 내보였다. 그의 소설 쓰기는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상상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한데 모아놓고 독자들이 혼돈과 착각 속에서 삶의 현상과 본질을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칼과 쟁기가 팔의 확장이라면,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말했다. 눈이 멀었으면서도 계속해 책을 사 모았던 그는, 독서를 향한 치명적 열정을 보여줬다. 책은 보르헤스의 존재양식 그 자체였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보르헤스가 인용한 괴테의 시구처럼 독서 행위는 실명의 진행 과정과 다르지 않다. 책은 상상의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경험의 총합이 무조건 진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책은 상상의 공간, 즉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얼굴에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불러낼 수 있다. 소설의 이국적 장소를 친숙한 동네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볼 수도 있다. 때로는 문장 일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그냥 건너뛰어 넘어가기도 한다. 책 표지 전문 디자이너로 활동한 피터 멘델선드는 독서 행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누구나 당연하게 믿었던 책을 읽는 행위가 실제로는 책을 보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확신한다. ‘책을 보는 행위에는 독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상상력 등이 동원된다.

 

독자는 책 앞에 서면 장님이 된다. 두 눈으로 글을 보고 있어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으로 봤던 내용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책읽기는 두 눈을 감은 세계와 비슷하다. 눈꺼풀 같은 막 뒤에서 일어난다. 일단 펼쳐놓은 책은 눈 먼 사람인 척한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 장씩 넘겨야 비로소 현상세계에서 나는 떠들썩한 자극을 봉쇄하고 상상은 날갯짓을 한다. (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76)

 

현실적인 세계를 드러내길 좋아했던 플로베르는 소설을 통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속 문장과 단락은 스크린이 되고, 독자는 관객처럼 스크린 속 구체적인 현실을 경험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절구절 문장을 씹어 먹었어도 독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마담 보바리의 결말은 책 안 읽는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모두 보바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는 이레네오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정상이다. 푸네스처럼 말에서 떨어지면서까지 기억력의 천재가 되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비록 기억력의 천재가 되지 못해도, 상상력의 천재는 될 수 있다. 독자는 눈뜬장님이 되어 상상의 날갯짓을 활짝 펼치기만 하면 된다. 보바리 부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여성이지만, 독자는 자기가 알고 지낸 모든 여성의 얼굴들을 동원하여 부인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한다. 보바리 부인이 과거의 첫사랑 모습으로 될 수 있다.

 

나처럼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비판할 근거를 취하기 위해 책 읽는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는 자기 생각에 혼자서 맞장구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책을 꼼꼼하게, 분석하듯이 읽는 독자는 자신이 한 번 읽었던 책의 내용을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피터 멘델선드의 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의 독자가 공공연히 알고는 있지만, 확인하면서 해부하고 싶지 않은 은밀한 독서 행위를 정면으로 포착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 책을 보게 되면 자신의 상상 밀실을 들킨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만나고 다니는 동안, ‘눈뜬장님이 되어 딴생각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눈이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독서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자를 추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자와 문자로 조형된 세상, 그리고 그사이 행간에 은닉된 세상과의 접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곧 이성인 시대는 지났다. 역시 보르헤스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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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명하면서까지 독서라니....상상이 안되지만....
그런데 상상불가한 일을 상상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대단하네요..
책은 이성의 시대를 넘어 상상의 이상의 시대로 ^^...

cyrus 2016-11-02 19:18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에 유명 작가들이 언급되었는데요, 이상하게도 저자가 보르헤스를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르헤스가 생각났습니다. ^^

stella.K 2016-11-0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고 싶기는 한데
네 글 읽으니까 생각 보다 좀 어려울 것도 같다.

cyrus 2016-11-02 19:20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의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못했군요. 그런데 알라딘으로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요. 거짓말 아니고, 책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가 디자이너라서 글보다는 그림을 많이 채워 넣었어요. 정말 글보다 그림이 많습니다. ^^;;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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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각을 열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한 현상 너머의 본질을 캐는 통찰력. 그것이 시인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 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이런 통찰력이 잘 스며들어 있는 산문집이다. 시 속에 삶의 풍경은 어떻게 비치고, 함축될까? 시인은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때로는 통일신라의 기와 조각 무늬를 감상하면서 '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는 공상에 잠긴다. 또 리치먼드의 길을 더듬으며 에드거 앨런 포를 회상하기도 하고, 이인성의 수채 풍경화에서 풍경의 의미를 배운다. 멀리 보들레르까지 가지 않더라도 화가와 시인의 관계를 정의한 예술가는 적지 않다. 강연균 화백이 그랬던가? "시인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는 그림을 통해 시를 이야기한다"라고.

 

 

 

나는 풍경을 사랑한다. 풍경이란 살아있는 공간이다. 나의 눈길이 닿을 때까지 그 공간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죽어있던 공간이 내 시선이 닿는 순간 목숨을 가진 표범처럼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수많은 풍경 -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풍경이(또한 한 순간이) 나의 망막을 보이지 않는 인두로 지지는 것이다. 그때 그 풍경은 나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피 흘리는 풍경' 중에서, 38쪽)

 

 

시인에게 있어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망막세포 하나를 죽여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눈에는 죽어 있던 공간이 하나의 역동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 공간 안에서 선과 점과 면은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풍경이 그려진 시는 '움직임의 시'이자 '깨달음의 시'다. 얼핏 보면 정적인 시인의 풍경 속에는 움직임과 깨달음의 '가쁜 숨'과 땀방울이 들어 있다. 그 들이켜고 내쉬는 숨과, 솟아나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새겨 넣는 시인의 손은 섬세하면서도 둔중하다. 거기에는 섣부른 계몽의 교훈이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묘사도 없다. 평이한 묘사와 진술만으로 자연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을 빚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밋밋해 보이지만 힘차며 그래서 아름답다.

 

풍경을 받아들이면서 체험하고, 성찰한 것을 근거로 완성한 시는 오래 간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은 단순히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숨과 땀방울이 스며든 존재로 표상되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의 소도구가 된다. 숨겨진 부분, 가려진 부분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견자가 시인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허만하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가려진 부분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자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다. 딱딱한 기계의 눈으로 결코 읽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새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허만하 시인의 글은 감정의 묘사에, 자잘한 교훈에 자족하는 오늘날의 언어들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그 불완전한 언어의 틈 한가운데를 허만하 시인이 성큼성큼 걷고 있다. 저기 십리 밖 풍경 냄새 맡으러 시인이 걸어간다.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위해선 그가 표식으로 뿌려놓고 간 조약돌을 잘 챙겨야 한다. 낯설면서도 깊은 언어로 뭉쳐진 텍스트의 조약돌(박남수,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 쥘 쉬페르비엘[주])을 줍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 허만하 시인은 ‘6월에 바라본 한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제목의 글에 쥘 쉬페르비엘(Jules Supervielle, 1884~1960)의 시를 인용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2000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쉬베르비엘의 시는 널리 소개되지 않았다. 비록 시집은 아니지만, 쉬페르비엘의 소설이 2014년에 《바다 위의 소녀》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이 국내에 유일하게 정식으로 소개된 쉬페르비엘의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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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 시인들에게는 민감한 안테나가 있는 것이죠....

cyrus 2016-11-01 09:01   좋아요 1 | URL
정말 부러운 능력입니다. 그런데 음흉한 몇 몇 시인은 엉뚱한 안테나로 여성에게 접근했습니다..

매너나린 2016-10-3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들어 시인들의 시를 편견없이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슬픕니다. . .

cyrus 2016-11-01 09:06   좋아요 2 | URL
반갑습니다. 매너나린님. 저는 한국 작가의 소설이나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한 이후로 실망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내 문학 작품을 즐겨 읽은 독자들이 더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한편으로는 심각한 상황들이 빨리 잊혀질까 봐 걱정입니다.

2016-11-0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03 15:45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북플로 보기 힘듭니다. 글이 길거든요. 분량을 줄인 게 A4 용지 1장 반 정도 나오는데, 스마트폰으로 보면 눈에 피로감이 금방 생겨요. ^^

마르케스 찾기 2016-11-03 22:43   좋아요 1 | URL
ㅋㅋ 노트북으로 읽어서 괜찮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폰을 거의(아니 전혀라 할 만큼ㅋ) 사용하지 않는 터라ㅋㅋㅋ

다른 리뷰들보다 더 찬찬히 꼼꼼히 읽게하는 힘과 정보가 있어 재밌게 잘 읽었어요.

cyrus 2016-11-04 17:27   좋아요 1 | URL
정성을 담아서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글을 찬찬히 보면 독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