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인물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내밀한 흠은 있다. ‘완전무결한 위인’이 어디 있으랴. 어렸을 적 아동용 위인전 읽으며 감동했던 위인들의 또 다른 면을 좀 더 커서 알게 됐을 때 실망하게 된다. 그 개운치 않은 감정은 ‘지적 성장’을 위해서 한 번쯤, 아니 배움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겪어야 할 성장통(growing pain)이다.

 

 

 

 

 

 

 

 

 

 

 

 

 

 

 

 

 

 

*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근대 지식인의 시조로 추앙받는 사상가이다. 루소가 생각한 아동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도시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미개인’[1]을 만드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기원을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찾았다.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 즉 미개인은 자신이 선한지 악한 것인지 구분할 줄 모르는 자유롭고 순수한 존재였다. 하지만 미개인은 공동체 경험 속에서 파괴되고 만다. 비교의식과 소유욕이 결합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켰고 불평등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새물결,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한길사, 2003)

* 장 자크 루소 《에밀》 (책세상, 2003, 요약본)

* 이기범 《루소의 에밀 읽기》 (세창출판사, 2016)

* 고봉만, 황성원 《루소, 교육을 말하다 : 에밀 깊이 읽기》 (살림, 2016)

 

 

 

 

인간 중심의 사회는 결국 사람을 가꾸는 것으로 귀결된다. 계몽사상이 대두하기 전 어린이들은 ‘덜 자란 어른’으로 취급받았다. 어린이는 ‘이성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 학칙과 규율로 통제하는 기숙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하류층은 아동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아동의 노동을 당연시했다. 18세기부터 유럽은 중세의 케케묵은 미몽을 훌훌 털어내면서 이성의 여명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이 싹트면서 루소는 아동교육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 생각이 집약된 것이 《에밀》이다. 이 책에서 에밀은 틀에 짜인 기숙학교식 교육이 아닌 순수한 자연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아동 성장 시기별에 적합한 전인교육을 중시한다. 교사는 아이 스스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말은 이와 부합된다. 따라서 루소가 지향하는 아동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 폴 존슨 《지식인의 두 얼굴》 (을유문화사, 2005)

* 리오 담로시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교양인, 2011)

 

 

 

그러나 루소 정작 자신은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루소가 자신의 다섯 명 자식들을 보육원에 보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는 루소가 비정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동에 대한 의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과거 인식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그 시대에 자식을 보육원에 맡기는 일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른’과 구별되는 ‘아동’의 개념이 확립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어린이는 ‘보호와 교육을 받아야 할 인격체’로 여전히 대우받지 못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책세상, 2011, 요약본)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연암서가, 201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다. 이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녀를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어머니’, 또는 ‘아나키즘을 체계화한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두 번의 자살 기도와 사생아를 출산한 사생활 때문에 그녀는 보수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철저히 묻혔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권의 옹호》는 남녀평등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부여를 강조한 책이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남녀 모두 이성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 카리 우트리오 《이브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0)

 

 

 

 

그러나 그녀는 니콜라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제외한 여성의 교육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 계몽 사상가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특히 계몽사상의 거두로 많이 언급되는 루소에 실망한다. 콩도르세는 여성의 평등을 옹호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쓰기 위해 콩도르세의《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책세상, 2002)을 참고했다고 한다.[2]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를 통해서 루소의 《에밀》에서 드러나는 아동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에밀》에 등장하는 소피는 에밀의 배우자다. 에밀은 소피에게 타인, 즉 남자에게 정성과 배려를 베푸는 삶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피를 가르치는 에밀의 태도에서 여성을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확인한다. 남성 계몽 사상가들은 여성을 ‘감성’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여성에게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을 위한 여성’으로 맞춰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사회를 ‘운명의 철 침대’로 비유한다.

 

 

 

 

여성이 단순히 남성을 기쁘게 하고 남성에게 복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결론은 오로지, 그녀가 자신을 남성에게 적합하게 만들고자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여성의 특성을 억지로 부풀리거나 혹은 축소해서라도 거기에 끼워 맞추어야만 하는 ‘운명의 철 침대’이다. [3]

 

 

《여권의 옹호》 집필 이후 울스턴크래프트는 1796년에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를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리아는 남성의 활동을 위해 희생당하는 여성을 상징한다. 모이라 퍼거슨은 마리아를 ‘여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소설 인물의 중요한 선조’로 평가한다.[4] 계몽주의 열풍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인간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 ‘인간’에 ‘여성’은 제외되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소녀들도 국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이 복종해야 될 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창비, 1979)

*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2000)

* 캐럴 페이트만, 메어린 린든 쉐인리 엮음 《페미니즘 정치 사상사》 (이후, 2004)

* 스테퍼니 스탈 《빨래하는 페미니즘》 (민음사, 2014)

 

 

 

 

그러나 그녀의 급진적 주장에는 시대적 한계가 드러나 있다. 그녀가 생각한 《여권의 옹호》의 예상 독자는 귀족적 허영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비교적 생활 여건이 우수한 부르주아 계급 여성들이다. 철학, 역사, 정치학 등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고 자란 소녀’들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하층계급 여성을 남녀공학 교육 대상에서 제외했고, 하급계급 여성에게 막일과 바느질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하급계급 여성을 ‘이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여권의 옹호》에서 하녀는 남녀평등을 실현한 부르주아 부부의 행복을 위한 희생자로 전락한다.

 

 

나는 허드렛일만 하녀에게 맡기고 자녀들을 스스로 돌보며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한 여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다. 이 소박한 그림을 보며 마음이 흡족해졌을 때, 나는 각자가 각자의 지위에 따르는 의무들을 이행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또 서로 독립적인 이 부부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5]

 

 

영국의 사회주의 여성학자 실라 로보섬(Sheila Rowbotham)은 울스턴크래프트의 혁명적 사상이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가 강조한 교육이 ‘산업 자본주의에 적합한 여성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라고 지적한다.[6] 울스턴크래프트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서구 백인 페미니즘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서구 백인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여성 억압만을 강조해온 울스턴크래프트의 페미니즘을 문제 삼는다. 하층계급 소녀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식들을 보육원에 맡긴 루소처럼 ‘구시대적 관행’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의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접근법은 다양하다. 사상을 이해하는 수많은 관점 중 하나가 절대적인 혜안이 될 수 없다. 단일한 관점은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을 도울 뿐이며 사상의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언급한 루소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두 사람의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뚜렷한 한계는 그들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흠이 되지 못한다. 단 하나의 결점을 기준으로 그의 사상 전체를 쓰레기통에 넣을 수 없다. 위대한 사상을 머리로 흡수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특징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불편한 지식의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엄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두렵고 괴로운 ‘지적 성장통’이 와도 조금이나마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1] 《루소, 교육을 말하다》 55쪽

[2] 《이브의 역사》 175쪽 

[3] 《여성의 권리 옹호》 73쪽 

[4] 《영미 여성 소설론》(정우사, 1995) ‘『여성의 학대 혹은 마리아』- 소설적 옹호’ 편, 20쪽 

[5] 《여성의 권리 옹호》 123쪽

[6]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천》 『여성해방 이론의 선구자들(1)』 21쪽 (실라 로보섬의 <Women, Resistance and Revolution>(1972년 출간)의 제2장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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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2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넓고도 깊이있는 지식! 리뷰 잘 읽었습니다.루소 와 울스턴크래프트..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해도 ‘시대적 한계‘는 있을수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cyrus 2017-10-26 11:16   좋아요 1 | URL
철학 사상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가의 생애를 먼저 조사하거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 속에 스며든 철학자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철학자의 생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면 사상의 장점만 보여요. 나중에 사상의 문제점을 알게 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철학을 보는 시야의 범위가 결정됩니다.
 
하청사회 - 지속가능한 갑질의 조건
양정호 지음 / 생각비행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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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자유 시장 경제가 이루어지려면 누구에게나 균등한 경쟁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시장에서의 분배야말로 정의로운 분배가 된다. 성별과 재산, 연령이나 사회적 계층을 불문하고 능력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렇게 볼 때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자유주의 이념이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입만 열면 자유 시장 경제를 외치지만 정작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원리인 공정한 경쟁 관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불평등한 경쟁 관계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나라 경제가 소수 재벌 ·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고수해 대 ·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이 여전하고, 자영업자나 청년층 · 노년층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리는 한계상황이다. 여기서 ‘갑을관계’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갑과 을은 불균형적인 권력 관계를 상징한다. 갑은 권력자, 을은 종속자다. 우리나라에서 갑은 대기업, 을은 중소기업이다. 갑이 원청업체라면 을은 하청업체가 된다. ‘기업 간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며 불공정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설립된 공정거래위원회는 갑과 을의 동등한 거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갑이 을을 대등한 계약의 당사자로 보지 않고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상대로 여기는 사회에서 시장 경제 체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몇 년 전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경제민주화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갑’의 횡포에 무력한 ‘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들은 이익만을 좇는 대기업의 무분별한 탐욕을 막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원론적인 구호만 되풀이하는 경제민주화 담론은 ‘갑’이 국내시장에 구축한 독점적 시장 구조를 깨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냄비에 담긴 경제민주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식어갔다. 산업 현장에서 계약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는 도를 넘어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갑의 횡포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하청사회》(생각비행, 2017)는 갑이 횡포 수준을 넘어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연결 고리를 끊고, 갑을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양정호 씨는 갑이 을에게 군림하는 현상이 증가하는 사회가 더는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는 갑질이 판치는 사회를 ‘하청사회’라고 부른다. 갑을관계를 바탕으로 하청사회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은 ‘지대추구행위’‘외주화(outsourcing)’다. 지대추구행위는 공정 경쟁의 기회를 축소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행태이다.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의 등장은 지대추구행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건물을 빌려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 치솟는 임대료다. 결국, 임대료 부담으로 장사를 접는다. 역세권이나 대표적 지역 상권 등의 임대료는 계속 오르고 있다. 상권이 뜰 경우 대기업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오면서 영세 자영업자들은 주변 상권으로 밀려 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일어난다. 건물주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갑’이다. 그들은 별다른 생산 활동 없이 초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건물주들은 임대료 수익으로 다른 부동산을 매입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대수익을 확대하고 있다. 시장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는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경제에 위배된다.

 

외주화는 급격히 변화된 경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국내기업들이 내세운 경영 방식이다. 한 기업이 ‘모든 것을 잘 하기’보다 ‘한 가지를 더욱 잘하기’ 위해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그 이외의 것은 다른 전문회사, 즉 하청업체에 맡겨 시너지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외주화 경형의 핵심은 기업과 하청업체가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생산성 향상과 경비 절감을 해오게 되고, 진정한 상호이익 관계가 확립된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노사협력 · 상생 협력을 외치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친기업 정책을 펼친 정부의 비호 아래 거대한 갑이 된 경제 권력은 경제적 을인 하청업체에게 위험한 일을 전가했다.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불공정한 계약과 열악한 노동 조건은 하청업체 재해의 원인이며, 잊을만하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같은 산업재해가 발생한다.

 

사회가 성숙해지려면 그때그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불공정한 갑질 문제가 그중 하나다. ‘지대’를 편하게 받아먹어 독점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면 누구나 ‘갑’의 위치에 오르려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할 수 있다. 저자는 지대추구행위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상황을 지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최상위가 건물주와 임대사업자라고 한다. 갑질 문화를 확대 재생산 하는 ‘보이지 않는 나쁜 손’이 아이들에게까지 뻗친 지 오래됐다. 이 아이들이 비정상적인 사회 속에 성장하면서 또 다른 ‘갑’이 된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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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지대추구때문에 경리단길,
망리단길의 토박이 영세상인들이 쫒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장경제의 거대한 전환이 필요할 것 같네요

cyrus 2017-10-15 17:27   좋아요 0 | URL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씨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완전히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했어요. 그렇지만, 피해를 받는 영세상인들을 살릴 수 있는 대책은 마련해야 합니다.

2017-10-14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5 17:30   좋아요 0 | URL
이명박근혜 시절에 재벌, 친기업 정부에 기생하는 자본적 파쇼들이 너무 설쳐댔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10-15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 세대가 성공적으로 풀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 세대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거라고 믿습니다

cyrus 2017-10-15 17:33   좋아요 2 | URL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책임 지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다음 세대에 떠넘기면 골치 아픕니다.

transient-guest 2017-10-17 0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도화하려는 노력, ‘이런 것은 옳지 못하다‘ 또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의견의 공론화, 및 개인들의 차원에서 이런 행위가 나쁘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는 교육까지 어느 한 가지만 건드려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겠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적절한 밸런스를 잡는 건 참 어렵네요.

cyrus 2017-10-18 12:4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불리한 사람들을 돕는 정책이 나오면, 반드시 그 정책 때문에 피해를 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17 0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땅덩이가 넓은 미국 같은 경우 한 분야의 시장을 독점하려면 유통망을 모조리 접수하는 것이지요. 석유회사 처럼요. 반면에 한국같이 땅덩이가 좁고 인구가 과밀한 나라는 목이 좋으면 무얼 팔아도 다 잘팔려요. 그래서 아예 좋은 상권을 잡고 그 땅을 독점해버리죠. 대표적으로 롯x몰,이x트몰 같은거죠 그안에 영화관부터 음식점 쇼핑업체를 그 땅에 아에 집적해서 몰아넣는 방식이죠. 그래서 결국에 제품의 품질이나 가격싸움보다 부동산싸움으로 문제가 귀결되어버려요. 한국에서 특히나 토지문제를 풀기힘든게 이런 자본의 독점화 현상에 알맞는, 지대추구사회에 취약한 지리구조를 갖췄달까요..

cyrus 2017-10-17 12:52   좋아요 0 | URL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프리즘메이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대추구행위의 문제점을 줄일만한 해결책이 나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우리 곁의 난민 - 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 마이너리티 리포트 1
문경란 지음 / 서울연구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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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간 존중을 헌법의 최고 가치로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발전되어 온 인간 존중은 오늘날 여성, 어린이, 근로자, 장애인, 난민 등 사회의 약자에 대한 인권 보호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난민 문제에 대한 대응이 소극적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 국제난민협약에 가입했다. 난민협약은 국제협약으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으므로 한국 정부는 난민에 대한 보호 의무가 있다. 그렇지만 정부가 1명의 난민을 정식으로 받아들인 연도는 2001년이다. 난민 지위를 받지 못한 신청자들은 ‘인도적 지위(humanitarian status)’에 속한다. 그들은 난민이 될 수 있는 법적 요건이 부족하지만, 일정 기간 국내에 체류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누적 인도적 지위자 수가 천 명을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 난민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난민’으로 생활하려면 복잡한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난민이 되기 위해선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공개해야 한다. 난민협약이 규정한 ‘박해’는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성폭력, 강제 결혼, 할례 의식 등 성적 박해에 벗어나려는 여성들도 난민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목숨 걸고 가까스로 한국으로 건너온 난민 신청자들의 손에 근거 자료가 있을 리 없다. 여기서부터 난민 신청자들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정부가 다문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받는 난민과 인도적 지위자 들이 많다. 인도적 지위자는 진학과 직업의 자유가 없어 공장에서 단순 노동직으로 살아간다. 난민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고, 서울에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난민들은 서울에 가기 위한 교통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사실상 혼자서 외출이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녀들 역시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외톨이로 지내기 쉽다. 그리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오전 시간에 한정되어 있어서 일하는 난민들은 사실상 배울 기회를 받지 못한다.

 

최근에는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지면서, 난민들의 삶을 가로막는 장벽이 더욱 견고하게 높아지고 있다. 갈등과 분쟁이 국지화하면서 국경을 넘지 못하는 국내 난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박해를 피해 탈출한 난민들을 사회에 해를 끼치는 불법 이민자로 바라본다. 난민 문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비판은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 자체에 대한 것이다. 《우리 곁의 난민 : 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서울연구원, 2017)는 이 문제를 지적한다. 외국인에 대한 이중 잣대. 한국인들은 평등과 관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종 및 국적 차별이 몸에 배어 있다. 미국, 유럽 출신의 외국인이 방송인으로 활동하거나 정계에 진출하면 ‘푸른 눈의 한국인’이라며 환영하는 목소리 일색이었다. 그런데 필리핀 출신의 이민자인 이자스민이 국회의원이 됐을 때 악의적인 인종차별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자스민을 비난한 사람들은 그녀의 국정 활동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인터넷으로 떠돌던 허위 정보를 믿고 혐오 발언을 내뱉었다. 같은 외국인이라도 잘 사는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백인에게는 호의를 보이면서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로 분류되는 동남아 출신 유색인종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 여성도 성차별의 피해자가 된다. 고국의 기나긴 내전을 피하고자 한국으로 온 난민 여성들이 있다. 전쟁은 약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극단적으로 증폭되는 끔찍한 상황이다. 전쟁 속에서 여성은 자국 남성을 위한 성 노리개가 되거나 점령세력 남성이 가하는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전쟁의 폭력은 우리 역사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여성들은 강제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여성들은 한순간도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난민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고통을 피하고자 한국으로 왔지만, 이곳에서도 이중삼중의 고통이 그녀들을 위협한다. 난민 여성은 ‘외국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경제적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안정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별과 고통을 겪는 난민 여성에게 한국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녀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욕해도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난민 여성들은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있는 입’이 없다. 부당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사회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난민 여성은 점점 고립되고, 사회는 난민 여성의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

 

이 책에 7명의 난민 여성들은 용기 있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의 사연을 보게 되면 타자에 대한 관용을 말로만 외치던 우리 사회의 위선적인 민낯을 확인할 수 있다. 난민 여성의 인권 문제는 ‘한국 여성이 처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페미니즘 열풍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려면 난민 여성을 소외하면 안 된다. 따라서 난민 문제는 ‘인간’의 문제로 확장되어야 한다.

 

 

 

 

※ 리뷰의 제목은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의 단편소설 제목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를 차용해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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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13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첨에 이런 알찬 리뷰 쓰려고 그런거거든요? 근데 쓰고나니 무도사 배추도사. 와......

비결 좀 알려주세요.

cyrus 2017-10-14 15:44   좋아요 0 | URL
syo님의 글에는 syo님만의 개성이 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 글을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양념과 기름기를 뺀 싱거운 음식’입니다. syo님의 글을 음식으로 비유하면, ‘맛있는 음식’입니다. 지금처럼 syo님이 만들고 보여줄 수 있는 글의 맛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이 알라딘 마을에 각자의 개성을 내세워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저에게 배워야 할 점은 1도 없습니다. ^^

서니데이 2017-10-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요.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금요일 밤 되세요.^^

cyrus 2017-10-14 15:47   좋아요 2 | URL
잘못된 편견으로 한 번 낙인찍힌 사람일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편견에 갇힌 사람들은 발화자를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2017-10-14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4 15:48   좋아요 0 | URL
중요한 기사를 잘 보셨군요. 이 기사를 모르거나 못 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거예요. ^^


임모르텔 2017-10-14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닿네요
제겐 아는 베트남 여동생이 있어요. 저보다 한국어구사력이 더 좋아서 자주 수다를 떨죠.
올 가을 함께 여행가자고 그러는데~ 이 글읽고 시간내어 같이 가을여행을 가야겠단 생각이..문득!!! .^^

cyrus 2017-10-14 15:52   좋아요 1 | URL
제 외숙모가 베트남 사람입니다. 시골에 사는 외삼촌과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저도 외숙모를 가족처럼 대하다 보니 다문화 정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올빼미님의 소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AgalmA 2017-10-14 0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별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난민 수용 상황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라고 하면 가짜들 많이 드러나죠. 여차하면 애국심이 강한 것도 죄냐 등등으로 주위의 표도 모으면서....글로는 감출 수 있어서 이건 산파술이 필요한 영역ㅎ

cyrus 2017-10-14 15:5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난민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요. 난민 문제도 복잡해요. 종교, 문화적 차이 등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편견을 걷어내야 합니다. 일반인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난민 문제를 접근할 때 가짜 정보, 허점이 있는 정보를 걸러내는 일입니다.

2017-10-14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4 16:02   좋아요 4 | URL
탈북자도 난민입니다. 밀당 중인 트럼프와 김정은이 전쟁 한 판 하자고 제대로 뜨면 대한민구 인구도 난민이 됩니다. 전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전을 피해 우리나라로 건너 온 난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웃긴 일이에요. 우리나라도 언제 전쟁 날 지 모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민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요.

sprenown 2017-10-14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민여성이 그러고 보니 우리사회의 최고 약자네요
관용의 미덕은 언제쯤?

cyrus 2017-10-14 16:04   좋아요 2 | URL
난민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지 않는 한 난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난민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sprenown 2017-10-14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뿌리깊은 인종차별에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들다..일자리문제까지.
못할짓 많이 하고 있네요.
사실 얼마전까지 고아수출 하고 베트남 전에서 양민 도 많이 학살했었던 나란데..최소한의 양심과 인류애 회복을 바랍니다!

transient-guest 2017-10-17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민이면서 여성이라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한국은 난민 뿐 아니라 사실 인종차별문제도 심각한데 사회적으로는 별로 인식을 못하고 있는 상황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트럼프 때문에 난민인정/이민권이 나빠지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우호적인 난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여 정착시키는 제도의 활용, 그리고 민간단체의 활동으로 그나마 나은 형편입니다. 특히 난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여서 인구감소가 심각한 지역으로 이주시켜 지역을 활성화시킨 사례도 있어 인구감소가 이미 현실인 한국도 적극적인 검토와 제도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관용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탕인 종교에서조차 일상적인 차별과 인권탄압이 이루어지는 나라라서, 그리고 국민의 다수가 그 종교에 적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구요).

cyrus 2017-10-17 12:56   좋아요 1 | URL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주기 위해서는 정부가 난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자문제의 시대 - 젠더와 교육의 정치학
다가 후토시 지음, 책/사/소 옮김 / 들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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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젠더(Gender)’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로 급상승했다. 그 이유가 젠더 폭력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발언이 입방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요즘 세상은 성 평등을 넘어 여성 우월 시대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은 당 혁신위원회가 주최한 한국 정치 : 마초에서 여성으로여성 정책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상황에 문제의 발언을 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면 애초에 토크콘서트 제목을 자유한국당 정치 : 마초에서 마초 킹으로라고 정했어야 했다.

     

홍 대표의 발언에 공감하는 네티즌들이 적지 않다. ‘젠더 폭력이 언제부터 일반 상식이 되었느냐고 따지는 네티즌이 있는가 하면, 메갈리안과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신조어또는 은어를 왜 알아야 하느냐고 비난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사람들이 젠더 폭력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정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진지하게 비판하고 싶다면 최소한 젠더같은 용어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젠더젠더 폭력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서구권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했던 용어가 우리나라에 늦게 알려졌다.

     

홍 대표의 발언도 문제 있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류 위원장의 발언이다. 류 위원장의 발언은 페미니즘을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담론으로 만드는 위험한 프레임(Frame)이다.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 사상이 아니며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여성운동의 대상은 여성과 남성 모두 포함된다.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이 그 정당한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여성운동을 펼치는 것은 예민하거나 별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반감을 보인 일부 남성들은 우리 사회가 이미 여성 상위시대라며 역차별을 호소한다. 이미 남성 역차별이 문제가 되었다는 인식은 일베 등의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대두했다.

     

젠더 문제와 교육을 접목시키고, 남녀평등교육에 주목한 일본의 교육가 다가 후토시의 정의를 빌리자면 우리 사회는 남자문제의 시대에 들어섰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남자 문제가 거론됐다. 남성들보다 학업과 업무성과, 리더십 등에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의 영향력이 거세지면서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는 남성들이 생겨났다. 일본 사회에 직업이 없고,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 Training)이 얼굴을 내밀었다. 니트족이 일본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되자 니트족 남성들을 여성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페미니즘의 등장으로 밀려난 피해자로 인식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남성 위기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림으로써 여성을 적대시한다.

     

그러나 다가 후토시는 남자를 여성보다 못한 사회적 약자로 거론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는 철저히 남성우위의 사회[1]라고 말한다. 그는 여성과 페미니즘에 반감을 느끼는 편견속에 은폐된 남자를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를 검토하고, 남성우위체제를 무리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가 강요한 남성성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다가 후토시는 남녀 모두 남녀 권력의 비대칭성 문제에 고통받는다고 주장한다. 여권이 신장하면서 역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남성, 여전히 남성이 유리한 사회에 소외당한다고 느끼는 여성 모두 남성여성이라는 고정 틀에 맞춰진 젠더 규범과 남성이 사회적 주도권을 잡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일자리 기회가 높아지게 된 원인을 단지 페미니스트들의 여권 신장 운동이 맺은 결실로만 볼 수 없다. 남자의 일자리 기회가 줄어들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근대 사회의 산업 구조는 남성의 노동을 능력으로 인정해주었다. 이때 여성은 일할 능력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노동 가치를 낮게 바라봤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서비스 산업의 확대로 여성의 고용 노동 수요가 높아졌다. 과거처럼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로 믿었던 남성들은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능력주의적 경쟁이 펼쳐지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고, 밀려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낀다. 따라서 남성의 고용 불안정 원인을 여권 신장과 이에 기여한 페미니스트 탓으로 돌리고,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가 후토시를 페미니즘 진영으로 분류하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는 고정적 · 비대칭적 남녀의 존재양태의 문제점을 하며 남녀 개인이 자유롭게 기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막는 사회적 규제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다가 후토시는 젠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들, 젠더 자유주의(자유주의 페미니스트가 지향하는 입장)’젠더 평등주의(한쪽 성이 불리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 때문에 남녀 권력의 비대칭성이 발생한다는 입장)’을 비교하면서 각각 입장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설명했다. 젠더 자유주의와 젠더 평등주의는 공통으로 남성이 월등한 우위에 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다만 문제의 원인을 접근하는 시선은 다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일본 사회와 비슷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 남성의 고용 불안정 원인을 무조건 여성에게만 전가할 수 없다. 남성들에게 제공할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경제 구조와 정책에 더 큰 책임이 있다.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남성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유리 천장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사회도 철저히 남성우위의 사회이다. 결국, 남녀 모두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일자리 파이를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면서 네 탓 공방을 벌이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무의미한 일이다.

 

 

 

 

[1] 다가 후토시 남자문제의 시대,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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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1 0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1 12:43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평등‘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분명 한쪽 성별이 불리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양성평등‘을 둘러싼 젠더 자유주의와 젠더 평등주의의 입장이 다릅니다.

블랙겟타 2017-09-21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사두기만 하고 아직은 안읽어봤는데 cyrus님께서 잘 정리해주셔서 직접 읽고싶은 마음이 더 생겼네요.

cyrus 2017-09-21 12:44   좋아요 2 | URL
이 책에 유용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제 리뷰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양성평등교육‘의 한계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책에 《남성성/들》을 인용한 내용도 있습니다. ^^

AgalmA 2017-09-21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능의 우월에 대한 논의는 늘 논란을 양산하긴 하지만 교육이 확대되면서 여성의 취업률이 늘어나고 사회진출이 높아진 건 통계적으로 사실입니다. 남성이 기득권을 차지하며 여성까지 라이벌로 두지 않기 위한 사다리차기가 많았다고 봅니다. 여성이 대학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세계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학계나 연구 과정 들어가는 건 더 어려웠고요.
이런 경제적 사회 기반적 문제 때문에 한국에서 군대 문제가 끝없이 대두되는 것이죠. 불평등하며 권리를 뺏기는 거라는 아우성이 나올 만하죠. 예전엔 남성이 군대 다녀오면 대학 졸업한 여성은 취업해있는 상태가 왕왕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임금불평등, 성적 차별 그런 건 또 보지 않죠. 다들 자기 이익과 권리를 따지다보니 간과하는 게 너무 많아요.

그나저나 요즘은 유명세 타고 코미디 보여주려면 코미디언 되는 거보다 정치인되는 게 더 나은 듯? 홍이나 트럼프 보면...

cyrus 2017-09-22 20:08   좋아요 2 | URL
UN 연설을 ‘아무말 대잔치‘로 만들어버린 트럼프. 역시 클라스는 다릅니다. ㅎㅎㅎ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컨텍스트 52
주디스 핼버스탬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나는 미니애폴리스에 강연을 하러 가는 길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일이 있다. 나는 과감하게 여자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칸을 찾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요, 경비원 여기요!” 금세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어떤 여자가 나를 남자나 소년으로 오인하고 경비원을 부른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문 앞에 있던 두 경비원은 실수를 깨닫고 우물우물 사과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1]

 

 

이 황당한 사연의 주인공은 퀴어 이론(queer theory: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등 성 소수자 중심의 담론을 연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는 주디스 핼버스탬(Judith Halberstam)이다. 현재 그의 이름은 잭(Jack) 핼버스탬이다. 핼버스탬은 남자 같은 여자. 그의 남자 같은 외모 때문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변태 취급을 당해 쫓겨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화장실을 성별 이분법으로 나눴을 때 성 소수자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상황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충분히 여성스럽다고, 혹은 남성답다고 여길 것이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남성성을 혹은 여성성을 더 드러나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보통의 우리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여성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남성이라고 생각하나요? 몸은 여성인데 성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어떤 이는 그의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남성도 여성이 아닌, 3의 성(Third gender)[2]을 가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낯설고, 특이한 존재로 바라본다.

 

여성의 남성성(famale masculinity)(이매진, 2015)은 성 이분법을 깨뜨리는 퀴어 담론을 통해 대중문화 속 여성의 남성성을 분석한 책이다. 퀴어 이론이 낯선 독자라면 이 책에 나오는 퀴어 용어와 퀴어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책의 옮긴이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지만, 방대한 내용을 수월하게 따라가기 위해선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본적인 퀴어 용어를 숙지하는 것이 낫다.

 

퀴어(Queer)의 사전적 의미는 기묘한, 이상한, 괴상한이다. 처음에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1980년대 이후 동성애 운동가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된 단어이다. 여성 역할을 하는 게이를 보텀(Bottom), 남성 역할의 게이를 (Top)이라 부른다. 레즈비언 남성 역할은 부치(Butch), 여성 역할은 (Femme)이라 칭한다. 그러나 이는 동성애를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으로 본 것이고, 동성애를 성애의 역할에 한정시킨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드랙 킹(Drag King)드랙 퀸(Drag Queen)은 각각 단순하게 번역하면 남장 여자, 여장 남자다. 이들은 공연 행위를 통해 반대의 성이 되거나 중간자적 성의 경계를 즐긴다. 트리바드(tribade)는 레즈비언의 동의어이며 레즈비언 간의 비삽입 성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조금씩 다르다. 먼저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성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이나 성호르몬을 투여하진 않더라도 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된다. MTF(male-to-female) 트랜스여성은 남성에서 여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 FTM(female-to-male) 트랜스남성은 여성에서 남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이다.

 

핼버스탬은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남성성-여성성등 삶의 형태를 억압적으로 작동시키는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성 소수자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 역사적 담론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약자인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차별받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담론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성 소수자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손쓰기 어려운 딜레마가 된다. 페미니스트들(레즈비언 페미니스트도 포함됨)FTM남성 진영으로 넘어간 여성 운동의 배신자로 본다.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성차별로 인식하는 FTM은 레즈비언와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처럼 흉내 내면서도 남성 전체를 악마로 매도하는 부정 세력으로 생각한다. FTM여성혹은 레즈비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남성성이 돋보이는 복장을 착용한다. 핼버스탬은 FTM부치 동성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이성애 규범성 형성에 기여하게 되고, ‘혐오에 이르는 성 소수자 차별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성 정체성은 인구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억지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면 편견이 생기고, 차별과 혐오가 양산된다. 동성애 코드를 시종 무겁게 다루던 TV와 같은 주류 매체가 성 소수자의 문제를 세련되게 풀어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방적으로 되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속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과 현실의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대중문화 속 동성애는 한 가지 측면만 보여줄 뿐 실제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지 못하다.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들과 같은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고 동성 간의 사랑은 대개 비극적 사랑으로 왜곡된다. 성 소수자의 목소리를 당사자들이 직접 표출하려는 욕망은 진작부터 강했다. 성 소수자는 우리 사회 문화지형에서 투명인간으로 치부되거나 드러나는 경우라도 피해야 할 존재 또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돼온 탓이다. 성 소수자 혐오와 차별은 오래된 문제지만, 최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극우 세력이 늘면서 혐오 발언이나 행위가 더 만연한 상황이다. 성 소수자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오려면 페미니스트들의 참여를 통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남성성을 읽기 바란다. 성 소수자들을 외면하든 지지하든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또는 몸과 마음이 남자로 바뀐 사람을 법률상 여자로 계속 묶어두는 것은 성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억압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1] 주디스 잭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49~50

 

[2] 여성의 남성성49쪽에 3의 성의 원어를 thirdness’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3의 성을 영어로 표기할 때 ‘thirdness’보다는 ‘Third gender’로 쓰고 싶다. ‘Third gender’는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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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9-19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기 쉽지 않은 책은 읽으셨네요.^^

저는 (문화적 경험의 차이로 인해?) 읽지 않고 건너 뛴 부분이 있었습니다.

cyrus 2017-09-19 18:11   좋아요 1 | URL
퀴어 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은 거라 ‘수박 겉핥기식‘으로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저도 퀴어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퀴어 영화가 언급된 챕터는 건너 뛰었습니다.. ^^;;

나와같다면 2017-09-19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Sadie Lee 의 ‘Raging Bull‘ 강렬하네요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cyrus 2017-09-19 18:14   좋아요 1 | URL
어떤 현상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고 해도 편견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

csp 2017-09-19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달 전 같은 저자의 <가가 페미니즘>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었는데요. 소개하신 글을 보니 이 책도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네요.

cyrus 2017-09-19 18:15   좋아요 2 | URL
《여성의 남성성》이 《가가 페미니즘》보다 먼저 나왔으니 저자의 대표작으로 보면 됩니다. ^^

yamoo 2017-09-19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미미즘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으시는 사이러스 님^^

안 읽는 분야가 별로 없으신 듯...그러고보니 경제 분야는 리뷰가 많이 없으신 듯...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치네요..ㅎㅎ

cyrus 2017-09-19 19:37   좋아요 2 | URL
네, 맞습니다. 제가 가장 안 읽는 책의 분야는 경제, 종교입니다. 이 두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될 겁니다.. ㅎㅎㅎ

2017-09-19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19 19:39   좋아요 1 | URL
‘제3의 성‘ 또는 ‘안드로진‘이라고 부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