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결혼이 위험 부담인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우에노 지즈코.미나시타 기류 지음, 조승미 옮김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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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非婚)이 늘고 있다. 예전에는 나이가 차서도 결혼을 안 하면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어 자신도 초조해하고 부모들은 끙끙 앓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되었다. 이렇게 비혼을 결정하는 독신이 늘어나는 이유는 젊은 연령층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대한 반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진출 등이 꼽힌다. 비혼 선호는 역시 여성에게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지난해 발표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 결과에 따르면 미혼 인구 비율은 전체 연령대에서 증가했다. 특히 30대 미혼비율 증가율은 전연령대 중에서 가장 높았고, 학력이 높은 여성일수록 미혼 비율이 높았다[참고] 대학원 졸업 이상 고학력 여성 넷 중 한 명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다.

 

사실 많은 여성이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밝히기를 꺼린다. 여성들이 독신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변의 편견 때문이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사소한 실수도 결혼을 못한 이유로 둔갑하고 주변 사람들의 부당한 간섭과 충고에 시달리게 된다. 성품이 아주 강하거나 무디지 않은 이상 여간해서는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와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는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독신에 대한 편견이 비혼 여성을 힘들게 한다고 말한다. 그녀들은 비혼도 가족의 한 형태임을 인정해 달라고 주문한다

 

결혼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여겨져 왔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혼이 가지는 사회적 · 개인적 기능. 우선 결혼은 당사자에 대해 남편과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와 함께 대부분 사회에서 성인(成人)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남편은 사회적 부권(父權)을 승인받는다. 가부장으로서의 남편의 역할은 가족의 안정에 기여한다. 자발적 비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제도라고 하는 가정의 틀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우에노와 미나시타는 자발적 비혼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사회의 의식도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가족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출산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독신인 우에노는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잃고 남편과 아이에게만 매달린 채 살아가는 기혼 여성들을 안타까워한다. 일본과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들에게 굴레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결혼으로 인해 성립되는 가정이 여성에 대한 억압 장치로 작용한다. 결혼해도, 안 해도 여성이 겪어야 할 고충이 많다. 그러다 보니 비혼모는 흔히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이거나 성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탈선해 사고를 낸 철부지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우에노는 한 부모 여상 가장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인 위험 부담을 반영하지 못한 사회보장제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한부모 가정에게 지원하는 양육비는 월 12만 원이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비혼 여성 입장에서는 아이와 함께할 생활이 걱정된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혼 출산이든, 비혼 출산이든 이들을 뒷받침할 제도가 더욱 탄탄해져야 한다는 게 두 전문가의 공통된 입장이다.

 

우에노와 미나시타의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독신 남녀도 한 가족이다라는 새로운 가족관에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결혼과 비혼 사이에 갈등하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 결혼의 의미를 재정립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관문을 거쳐야만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책임 있게 사느냐가 성숙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혼은 선택이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여전히 독신, 특히 싱글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매도하거나 가족을 해체하는 존재로 폄하하는 인식이 남아있다. 유럽 국가들처럼 비혼 가정을 배려하는 법과 제도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인식이 부족하다. 단지 타인이 결정한 삶의 과정이 나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에 불과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참고] <비혼 택하는 고학력 여성들대학원 졸업 여성 23.4% ‘결혼 안 해’>

여성신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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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7 09:23   좋아요 2 | URL
결혼을 기피하는 원인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미혼, 비혼자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결혼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코발트그린 2017-02-17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운 주젭니다.......

cyrus 2017-02-17 09:27   좋아요 0 | URL
네. 개인이 편하게 살고 싶으면 독신으로 살아가도 좋은데, 저출산 문제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건 사실입니다.

2017-02-17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7 14:07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이 있으신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댓글에 말씀하시기가 곤란하시면 서재 방명록에 글 남기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통화 연결을 원하시면 010-9177-5018로 연락주세요. ^^

2017-02-1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현대의 지성 59
노르베르토 보비오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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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흔히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와 혼동되고, 상호 대립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가치와 사고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자유주의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와 반공주의와 손을 잡고 말았다. 잘못된 만남이다. 이로 인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반국가 및 반체제세력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고,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에 기댄 위정자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유신체제식 자유주의’를 펴나갔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정부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기본적 원칙뿐만 아니라 주권 재민 사상, 인권 존중 이런 것들을 훼손시켜왔다. 유신체제의 반공주의는 ‘자유’를 지키자는 이념과 아주 거리가 멀다. 전체주의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자유를 찾으려는 이념이라기보다 북한과 사회주의에 향한 증오의 이념이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과제는 자유와 평등, 이 두 개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다. 평등 문제와 관련된 자유민주주의적 이론 경향은 크게 ‘자유평등주의’와 ‘자유지상주의’로 나눌 수 있다. 존 롤스(John Rawls)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 자유주의에 평등주의의 장점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자유지상주의자적 입장에서 롤스에 대항하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국가의 역할이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질서의 한계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구현하려고 한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적 구분과 대립이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구실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에 대한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대립하는 상황을 사회 분란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로부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혔다. 자유주의는 이미 허점이 드러난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마르크시즘(Marxism)과 전체주의적 권력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를 경계했다.

 

전통 사회주의의 한계는 명백히 지적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의에 입각한 평등의 가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평등이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뜻깊은 성찰을 제공해주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구조적 불평등을 철저히 분쇄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각종 권리의 행사에 부당한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체제이다. 보비오는 두 가지 이념 사이에 생긴 차이점의 간격을 줄이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를 제안한다. 자유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참여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과물이나 가치의 균등한 배분, 즉 사회적 시민권을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형태이다.

 

일부 지식인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유사회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결합해서 경제 불평등이 어느 정도 교정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가 ‘자유사회주의’의 실효성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이다.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관용’은 기득권층에 흡수돼 버려 보수주의에서는 ‘질서와 안정’의 하위 개념이 되고 말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란 자유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예찬론에서 벗어나 자유주의가 발전 과정에서 보여준 문제점도 숨김없이 지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원리와 가치를 존중한다면 개인적 자유, 정치적 자유, 관용 등을 배반하는 사실들을 정직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다수의 횡포’라는 것이다. 대중은 다수가 지지하는 여론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이를 악용했을 때, 민주적 정치 문화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국 정치의 이념 대결은 매우 후진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배제한 채 일방적 주장만 내세우면 민주사회의 통합과 균형이 파괴된다. 이런 점에서 진보와 보수는 극단주의와 거리를 두고 좀 더 현실적이고 온건한 정치적 지형으로 이동해야 한다. 두 가지 이념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유사회주의’는 여전히 매혹적인 정치적 기획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는 한 단계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멀기만 하다. ‘자유사회주의’의 수용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 패러디한 리뷰 제목의 원본 : 오모리 후지노의 라이트노벨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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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21:3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점점 커지는 이념의 돌연변이가 정말 심각합니다.
 

 

 

 

 

 

 

 

 

 

 

 

 

 

 

 

 

 

 

 

* 《아내 가뭄》 (동양북스, 2016년)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해제는 정희진 씨가 썼다. 해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싶은 남성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가장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남성도 읽기를 권한다. 아, 얼마 전 모 지역 평생학습관에서 만난 어느 남성 수강생에게도 권한다. 그는 '노총각'이라는 표현도 못 참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그런 그가 내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장가를 가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단 여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여성에 관한, '결혼과 연애를 위한' 인식론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자신과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14~15쪽)

 

 

나는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여성주의는 '기본적인 교양'이 될 수 있을까? 이 전제가 성립된다면, 결론으로 페미니스트는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된다. 그런데 나는 결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양'과 '여성주의', 이 두 가지 개념의 광범위한 의미를 되짚어보면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들녘, 2001년)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한빛비즈, 2014년)

 

 

먼저 '교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양은 한 가지 의미로 정의되기 어렵다. 그리고 교양을 정의한 생각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채사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공통분모다.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아울러서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공통분모.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 넓고 얕은 지식, 즉 최소한의 지식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격증이다. 성인들의 대화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 자격증은 최소한의 지식이다. (5~6쪽)

 

 

채사장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각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지식을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하기 위해 넓고 얕은' 것이라고 했다. 툭 까놓고 말하면, 교양이란 성인들의 대화 놀이에 눈치껏 참여하여 아는 척할 수 있는 기본 규칙이 된다. '지대넓얕' 열풍이 불기 이미 수십 년 전에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을 '의사소통할 때 사용하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이는 채 사장의 생각과 비슷하다. 슈바니츠는 (의사소통을 채사장 식 표현으로 비유하자면) '성인들의 대화 놀이'를 '사회적 게임'으로 비유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알려준 대로 교양을 배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아는 척', '배운 척'할 수 있다.

 

 

 

 

 

*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현실문화, 2016년)

 

 

 

그런데 여성주의(혹은 여성학)가 교양의 범주가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남이 알려준 대로 배운다고 해서 얻는 지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단순히 교양을 '지식인이 중요하다고 알려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인식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대학교에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강좌가 많이 생겨났다. 여성학에 생소한 남녀 대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학은 모든 남녀, 특히 남학생이 알아야 할 기초 교양이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자신의 강좌에 수강 신청하는 남학생들의 수에 흡족해할 것이다. 그리고 교수는 강좌를 수료한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교수가 정말로 있다면, 내가 한 번 묻고 싶다. "여성학을 배운 남학생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성차별 문제 앞에서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주의 학자 레나테 클라인(Renate Klein)은 자신이 직접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교양으로서의 여성학'의 한계를 확인했다. 그녀는 여성학을 배우는 남학생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전문가' 유형. 이 유형의 남학생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는 잘 알고 있으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주의를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두 번째 유형은 '낭만적 기교자' 유형이다. 이 남학생은 여성주의를 하나의 지식으로 이해한다. 여성주의가 남성을 비판해도 여성주의자들의 발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여성주의를 아는 척한다. 그래서 이 유형을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지막 유형은 '가여운 아이들' 유형이다. 이 유형의 남학생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좋게 말하면 여성주의를 이해하려는 가상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주의는 누군가가 알려줘서 배워야 할 지식이 아니다. 여성이 불편해하는 각종 상황을 자기 일인 것처럼 이해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진짜 목적이다.

 

 

 

 

 

 

 

 

 

 

 

 

 

 

 

 

 

 

*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2002년)

*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년)

* 《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년)

 

 

나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를 다른 유형의 남학생과 상대할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남성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를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여성주의의 장점을 잘 얘기하지만, 실상 여성 문제 앞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학을 사람이 알아야 할 교양으로 소개한 디트리히 슈바니츠도 교양을 갖춘 남성의 우월감을 경계했다.

 

 

남성들에게 몸에 밴 나쁜 습관들 중 하나가 호언장담이다. 남성들은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허세를 부린다. 자신들이 잘났다고 으스댄다. 남성들은 여자, 재물, 명성,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되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683쪽)

 

 

'성인들의 대화 놀이'나 '사회적 게임'에 나서는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럴듯한 말로 여성주의를 대화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른다. 대화 도중에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들이 불쑥 퀴즈를 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다.

 

"cyrus씨. 벨 훅스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뭐라고요? 그것도 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지적 우월감에 빠진 남자는 재수 없는 '교양 있는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리고 겉만 포장된 교양미를 뽐내 여성으로부터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정희진 씨가 《아내 가뭄》 해체에서도 밝혔듯이 여성주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노총각이 배워야 할 교양'이 아니다.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여성주의는 '가짜 여성주의'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주의는 교양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 힘들게 만드는 각종 사회 문제(가부장제, 성차별, 여성 혐오 등)를 문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1] 이게 내가 스스로 질문한 생각에 대한 답변이자 이 글의 결론이다.

 

책으로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방법도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다 본 책을 덮고 나서 일상생활에 마주하는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성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지적받아도 된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외부의 시선에 절대로 움츠러들어선 안 된다. 나는 얕은 여성학 지식으로 전문가인 척하는 '가짜 여성주의자'가 아닌 합리적 비판을 수용하면서 차근차근 배우는 '나쁜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다. 당연히 이 글에 드러난 내 생각에도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수염 달린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1] 원문 :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것을 문제로 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미셸 푸코의 말,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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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0: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레나테 클레인은 남학생 유형을 소개하면서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입장이 강화될수록 남성은 페미니즘을 멀리할 겁니다. ‘남성은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단정하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저는 반박하고 싶습니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2017-02-0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9 16:5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님의 생각이 저와 비슷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님 같은 분처럼 페미니즘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은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고,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합니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내 생각과 다른 의견과 충돌하면, 의사를 밝히기 위한 목소리가 위축되거나 최악의 경우, 반목의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의 저자가 일부 페미니스트의 독단적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자의 입장에 동의해서 ‘남자는 절대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페미니즘은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설로 믿어진 페미니즘 이론들을 반박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 등장할 거고, 그렇게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질 겁니다. 이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서 과거의 이론만 안다면, 사회가 변화해서 생기는 새로운 남녀 간 문제에 대응하지 못합니다. 저도 많이 부족해서 계속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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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남자는 바깥 일, 여자는 집안일’로 부부의 역할이 또렷하게 구분돼 여성은 ‘가정주부’라는 이름으로 집안에 묶였었다. 남자가 설거지나 빨래 등 가사 일을 거들거나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서게 되면, 주위 눈치를 살펴야 했고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슈퍼마켓에서나 부부가 함께 시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남편이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하고, 또 부엌을 들락날락하며 접시를 나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 뿐만 아니라 전업주부의 가정에서도 더 이상 집안일은 여성만의 몫은 아니다. 부부가 가사 노동을 함께하는 인식이 생기고 있지만, 외국과 비교하면 아직도 멀었다. 특히 남성은 남편이 가사 노동을 하는 것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열악해지는 기혼 여성의 근로조건 문제를 외면한다.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은 아내의 노동 문제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짚는다. 성인 대다수는 ‘일하는 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도 바람직한 아내상은 ‘가족의 뒷바라지를 잘하는 여성’이라고 여긴다.

 

퇴근하고 집에 와도 쉬지 못하고 집안일에 매달리는 맞벌이 아내들은 가사노동의 양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과의 가사 분담률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직도 많은 맞벌이 아내들은 자신이 직장을 가졌기 때문에 집에 남아있는 어린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걸음이 바쁘다. 어머니는 마땅히 집에서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일을 하도록 허락한 남편에게 고마워서 늘 반찬도 제대로 하려고 애쓴다. 여성들과 함께 일한 남성들은 기혼 여성이 직장에서도 집 생각하는 것에 못마땅해한다. 이러한 남성들은 여성의 일차적 역할을 가사와 양육노동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직장을 가졌던 여성도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에 안착한다.

 

1980년대 말, 일하는 엄마들의 이중역할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대안으로 ‘마미 트랙(mommy track)’이 거론되었다. ‘마미 트랙’은 출산과 양육을 전담하는 여성 인력의 특수성을 십분 고려해, 직업을 갖는 순간부터 임금 수준은 물론 승진 배치 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는 엄마들만의 트랙을 의미한다. 엄마에게 ‘마미 트랙’을 제공해줌으로써 일과 가족의 양립을 위한 선택지를 제공해주자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마미 트랙’은 일과 가족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상적인 대안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엄마들이 편하게 걷을 수 있는 ‘꽃길’이 되지 못했다. ‘마미 트랙’은 ‘여성은 일차적 양육자’라는 가부장적 성별 분업구조 인식을 강화한다. 여기서도 가사 및 양육을 여성의 일차적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미 트랙’에 향한 대중의 관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자 또다시 여성의 가사 노동 가치를 인정해주길 촉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거세졌다. 여기서, 애너벨 크랩은 이러한 반응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녀는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사 노동을 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저 여성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주어진 과업을 적절히 잘하라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결국, 아내는 자신에게 자꾸만 눈치 주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그녀들은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노력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그녀들의 심각한 ‘선택의 문제’가 된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일을 못 하면 ‘무능력한 여성’,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아주 무능력한 여성’으로 비난받는다. 여성이 겪는 이중고의 진통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은 집안일 못한다고 해서 여성처럼 욕먹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안일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데 반해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율이 저조하다면 여성에게는 결혼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출산이 여성에게 전통적 역할로의 복귀를 의미하거나 육아와 직장의 이중부담을 감내해야 한다면 누가 여성에게 출산을 권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중부담 상황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일과 가족의 균형이 일하는 아내에게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상식적으로는 남편에게도 필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남편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는다. 회식과 야근이 일상화돼 있는 조직문화에 획기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남편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일 중심 이데올로기’에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남편들도 살림과 관계된 경험담을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이 상상만 해도 부끄럽다거나 혹은 여성이 득세하는 말세적 현상이라고 느낀다면 그런 남편은 어떤 형태로든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맞벌이 아내들이 남성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직업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만큼 남편들도 살림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부부 모두 함께 걸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꽃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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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08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주 아내에게 요리를 해줄 수 있기를...^^. 청소도 ..쓰레기 버리는 일도..모두 내손으로 할 수 있기를...그럼 아내로 부터 사랑받습니다..~~~~분담 꼭해야 합니다..~~(어제 집에서 혼자 대청소 했습니다~~^^) 칭찬 많이 들었어요 ..고맙다고 ~~^^ ㅋㅋㅋ

cyrus 2017-02-08 17:02   좋아요 0 | URL
유레카님이 항상 제 글의 첫 번째 댓글을 남길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사모님 자랑을 할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딸내미 자랑, 사모님 자랑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제가 결혼하게 되면 부부 금술이 좋지 않을 때 유레카님에게 상담 받아야겠어요. ㅎㅎㅎ

yureka01 2017-02-08 17: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상담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내가 먼저 한다라는 생각..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먼저 몸으로 움직임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액션이 답입니다.^^
세치혀 놀리는 사랑법은 가짜이거든요...ㅋ

우민(愚民)ngs01 2017-02-08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말씀에 동감...
재활용은 제 담당이 된지 꽤 됐네요 문제는 처음에는 고맙다고 하더니
이제는 당연한 듯 ^^
이게 생활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2-08 17:04   좋아요 0 | URL
옛날 같았으면 남자들이 ngs님이 아내 앞에 기죽는 남편이라고 놀려댔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ngs님과 유레카님 같은 남편 분들을 질투하거나 놀려선 안 됩니다. 결혼 안 한 남자들이 부러워해야 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

yureka01 2017-02-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gs01님 ㅎㅎㅎㅎㅎ 고맙단 소리 안해도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ㅋ

stella.K 2017-02-0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부터 나영석 PD가 구혜선과 안재현 앞세워
<신혼일기>라는 걸 방영하기 시작했는데
새로 시작해서 그런지 나름 재밌고 신선하더군.
거기서 보면 남편인 안재현이 가사에 적극적인데
결혼 초기에 남편이 어떻게 가사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결혼생활의 성패가 좌우되지 않을까 싶어.
그런 프로는 네가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말야.
독신으로 쭈~욱 살 것이 아니라면 말야.
신혼부부가 싸우면 어느 부분에서 싸우게 되는지
애정을 느낀다면 어느 부분에서 느끼는지 생각해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봐져.
물론 이런 예능 프로는 별 기대없이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하겠지만 말야.ㅋ

cyrus 2017-02-08 17: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저는 방송에 나오는 부부 모습은 믿지 않아요. 방송에 약간의 연출이 있을 수 있거든요. 연예인 부부나 커플이 행복하게 알콩달콩한 모습으로 방송해놓고선, 몇 년 후에 이별, 이혼 크리 맞으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어요. 그들의 좋은 모습에 익숙한 대중은 실망감에 욕설을 퍼붓고요... ^^;;

stella.K 2017-02-08 18:02   좋아요 0 | URL
ㅋㅋ 당연해. 다 편집이야.
그런 건 사실 보다 편집의 묘지.
말에 의하면 차승원이가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더군.
그런데도 삼시세끼 어촌편에서 얼마나 잘 나오디?
그거 다 편집한 거 잖아. 그것 때문에 차줌마로 뜨고.
팩트 보자고 그런 거 보는 거 아냐. 편집의 기술 보자고 보는 거지.ㅋ

북프리쿠키 2017-02-0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은 죄책감과 연민으로 와이프를 보다듬고, 머리로는 오늘부터 잘하자고
다짐하는데, 문제는 이놈의 비계덩어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네요. ㅠ

cyrus 2017-02-08 17:09   좋아요 1 | URL
솔직히 말해서 제가 결혼하면 책 읽느라 집안일을 소홀히 할 겁니다. 유레카님이 말씀했듯이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아무 2017-02-0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의식 구조의 개선이 제도의 개선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마미 트랙 같은 경우는 제도가 의식을 고착화시킨 경우 같네요. 예전에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도 가사 노동의 문제를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는 여성은 늘었지만, 그것이 가사 노동 종사자의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얘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어찌됐든 남성 개개인의 실천과 의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제도도 갈 길이 아직 먼 것 같습니다..ㅠㅠ

cyrus 2017-02-08 20:20   좋아요 0 | URL
제도 도입이 의식 구조 개선에 기여한다고 볼 수 없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 남편의 육아휴직제도가 보편화되지 못한 실정입니다.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도 승진과 연관되는 업무 분위기 때문에 주저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엄마에게 부담 주는 육아휴직제도만으로 한계가 있어요.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전통주의, 분단, 지역주의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도에서 보수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지키고자 하는 질서 · 가치가 분명치 않다. 반공 이념의 논리에 경도된 사회적 성향을 말하는가. 아니면 안정 추구의 논리를 그렇게 부르는가. 일단 사회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온건한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주류인 보수주의자라고 무리하게라도 규정키로 하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중산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재벌은 다수 국민의 원망과 불신을 받아왔다. 이들이 아니라면 서민들이 보수주의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간주해 자신들을 보수로 이해하고, 보수 야당 세력을 진보라고 비판해 온 군부 독재의 기준이 보수-진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보수는 군부 독재에도 또 지역주의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는 친일 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독재와 지역주의와 반공 이념에 의존했다. 비생산적인 우리나라 정치는 흑백논리의 불모다. 이분법에 찌든 보수주의자들에겐 조화와 절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양보나 타협은 곧 변절이나 패배로 치부될 뿐이다. 중도나 중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회색분자로 매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 행태가 ‘내 편’은 무조건 따르고 ‘네 편’은 무조건 내치는 패거리 문화로 이어진다.

 

한국에 ‘자칭’ 보수주의 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의 정의가 없다. 보수 철학을 근간으로 하더라도 합리적 보수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도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고, 사회정의에 부합돼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의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보수주의에 대해 냉정한 성찰을 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의 지적 전통 위에서 보수주의의 이념적 기원과 그 전개과정을 특유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보수주의의 복잡한 전개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를 내세운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바라는 계몽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반응의 결과로 나온 것이 보수주의다. 이처럼 근대성의 부정에서 나온 것이 보수주의였고 근대성의 대변자로 자임한 것이 자유주의였다. 고전적 보수주의를 단순히 수구나 반동(反動)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해석이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점진주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옛것만을 수구하거나 새로운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점진적인 개혁에도 찬성한다. 이들이 개혁하는 목적은 나라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개혁이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1970년 이후 보수주의는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항했던 보수주의는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한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포용한 보수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주의는 냉전 시대부터 시작해서 극우만이 보수인양 이야기된다. 서구처럼 근대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를 한 번도 제대로 경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세력과의 공정한 대화와 논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대화는 이념에 치우친 이익집단의 싸움판으로 변질했다. 보수주의가 살 길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보수 이념에 맞는 개혁을 지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스크러튼이 내세우는 보수주의의 핵심 원칙은 ‘자유’와 ‘책임’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보수 세력은 자기성찰의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여된 극우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극우주의자는 법을 무시하고,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와 도덕이 있으며,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자는 현실 세계의 관행들이 자신의 철학과 다르다고 격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개혁방안을 기획하고 설득을 통해 국민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보수주의자의 품격이 없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되다 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수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 얼굴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다. 전자는 ‘차이’와 ‘이견’을 낯설어하고 비정상으로 여기는 문화적 유전자가 있다. 미래의 후손에게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가르치려고 한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늘 책임을 자신에게 찾는다. 또 과거의 지혜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는 희생과 책임의 상징이다. 보수는 그 사회의 책임 있는 중심 세력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더욱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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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4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론 보수주의자가 다수주의자로 보이곤 합니다. 자신들의 의견, 지지자가 더 많으니(자의적이면서, 통계도 자의적ㅎ) 옳다라고 말하는 억지주장들을 보면. 어떤 주의자라 할 때 그 합리성에는 늘 한계가 있죠.
케이시 <장소의 운명>에서 흥미로운 제시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속에서 장소를 한꺼번에 잃은 사람들에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달라졌다고. 그래서 핵무기는 모든 장소를 없앨 공공의 적. 이데올로기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에겐 잃지 않을 정신적 장소였을 겁니다. 즉 한국에서 6.25 이후 공고해진 반공주의가 단순히 어떤 세력의 공작이나 세뇌로만 뿌리를 내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죠. 그렇더라도 한국의 보수주의는 대수술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집단 이기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작동할 한국이길 기원합니다

cyrus 2017-02-04 16: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말로만 ‘보수 개혁’만 외치지 말고,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보수 개혁’을 지향하는 바른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표심을 얻어 보려고 새누리당과 선을 긋는데, 그런 단기적인 행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샤벳 2017-02-04 21:07   좋아요 0 | URL
동감

yureka01 2017-02-04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흔히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보수는 상당히 왜곡되었죠. 지켜야할 가치로운 것이란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담보로 해야하거든요.정의.믿음.신뢰.정직.이런가치가 역사성을 가진 보수거든요.그런데 작금의 보수는 안보라는 구실로 권력에 빌붙어서 꼴통이 되었죠.

cyrus 2017-02-04 16:54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이 ‘안보’만 찾는 바람에 정작 ‘자유’와 ‘정의’, ‘신뢰’의 가치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qualia 2017-02-04 20:10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 무리들의 안보는 그들만의 안보죠. 기득권을 위한 안보, 친일/외세의존세력을 위한 안보, 사적 정권 유지를 위한 안보일 뿐입니다. 그것을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한 안보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공정한 탄핵 심판에 전념해야 할 헌재 위원 중에 특정 종교인인 한 위원이 극우 세력 언론과의 (기획) 인터뷰에서 좌빨,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나라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개솔(bullshit)을 운운하더군요. 다는 아닙니다만, 지금 한국의 50~60대 이상 세대 중 대부분이 저런 개솔스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발 제가 틀리길 바랍니다만.)

이 지독히도 노예스런 국민들과 그 나라, 한국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을 거듭해서 겪어도, 나라가 절단나고 다시 망해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깨닫지 못할 국민이고 민족이고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격하게 보일 텐데요. 저도 그건 압니다만, 한국/한민족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역사가 미래를 예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인구폭발, 기후격변, 전세계적 식량부족, 자원고갈 등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핵무기 따위 가공할 대량파괴 무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강대국 간의 충돌 위험성도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인류사에서 3차대전이나 그에 준하는 전쟁 발발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헌데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한국인들이 어떻게 각종 대규모 전쟁에 임해왔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봅니다. 2차대전 말기 패망해가는 일제한테 선전포고 하나 못한 한국/한국인들이었죠. 너무나 비굴하고 너무나 수동적인 노예들의 필연적 행동 양태였던 것입니다. 독립은 남들이 가져다준 것이었지 우리가 자력으로 쟁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21세기라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외세 의존 성향과 동족끼리의 대결의식은 더 강화됐고, 한반도가 남북, 전라/경상으로 사분오열됐으니 훨씬 더 악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쭝궈, 닛뽕, 러시아, 미국, 등등의 자국 이기주의, 제국주의적 성향도 현대적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강대국끼리의 적대적 공존을 위해 그들끼리 밀약하고 그들 마음대로 약소국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할 수 있는 국제정치역학적 환경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구한말에 견줘볼 때 지금이 결코 더 나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결론은 한국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세와 대결하기는커녕 자기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극렬한 대결에 광분하는 어리석은 민족은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를 것이고 또한 반드시 멸망해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이고 인류의 당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