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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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조직적으로 국민을 관리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10년 불황에 못 견딘 일본 사회도 천황제와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극우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이른바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일정 부분 전체주의로의 회귀심리다.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자유주의를 우리는 당연하고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개인의 자유가 거의 부각되지 않았던 부족공동체 시절부터 오랜 역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등장했고 최근에야 획득된 삶의 방식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판은 인류 정치사를 전제군주제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보는 전통적 기술방식 대신 전제군주제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플라톤(Plato)은 국가가 정의 · 선(善) · 덕(德)을 토대로 할 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도자는 방향을 제시하는 자가 되어야 하므로 국가 장래에 도움이 되는 ‘목적’, 즉 정의, 선,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는 위태롭다. 그렇지만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에는 정치공동체의 부활에 대한 깊은 소망이 담겨 있다. 플라톤의 목적주의 국가론은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적 독립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이다. 칼 포퍼(Karl Popper)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을 ‘유토피아적 공학(utopian engineering)’으로 이름 붙이면서 사실상 전체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유시민은 홉스(Hobbes)의 국가론과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통치술이 서로 잘 어울리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절대왕정의 역할에 힘을 실어 준 두 사람의 정치사상은 국가주의 국가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후, 군주들은 국가 존속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모든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국가주의 국가론은 목적주의 국가론에서 파생된 이론이다.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하여 국가가 모든 종류의 정의와 불의에 대한 해석을 독점해야 한다. 홉스가 생각하는 국가의 목적은 사회 내부의 무질서를 방지하고,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재 의의는 있을 수 없다. 자기 보전을 지향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에 동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와 홉스 등에 의해 강화된 지도자는 지상의 절대적 궁극목표로서 신(神)을 대체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존재 및 역할 자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 이론도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Marx)는 국가가 소멸하여 특권계층과 지배계층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의 연합체가 들어서는 것으로 예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반 개인주의적 입장을 보인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위계질서 회복이 아니라 개개인의 평등을 위해 공동체를 주장했지만, 나중에 소련 등 사회주의 전체국가들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다.

 

전체주의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안정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시켜 지도자의 무한 권력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개인의 자유 보장은 국가 중심의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국가가 국민의 신념을 ‘그르다’고 평가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옳은’ 이념을 주입하고자 하는 국가주의 국가론이야말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된다. 2017년 3월 10일 우리나라는 헌정사상 유례없는 ‘대통령 파면’ 결정을 확인했다. 민중의 힘으로 권력을 오 · 남용한 지도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린 과정을 지켜본 저자는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혼란으로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를 추스를 수 있는 대안의 국가론으로 자유주의 국가론을 제시한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오래 살아남겠지만 사회적 · 기술적 분업이 더욱 넓고 깊게 이루어지고 정보통신기술과 지식혁명이 진전될수록 기반이 점차 약해질 것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이 위축되면서 생기는 담론시장의 공백을 채울 다른 유력한 국가론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담론은 자유주의 국가뿐이다. (79쪽)

 

역시 ‘프티부르주아 리버럴(petit bourgeoisie liberal, 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다운 저자의 생각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약해질 것으로 보는 저자의 전망에 동의할 수 없으나 그가 정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주의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날의 자유주의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용어로 자주 쓰인다. 특히 시장경제를 전파하는 친 기업단체 자유경제원이 거의 자유주의를 독점하다시피 전파하는 바람에 누군가가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하면 그쪽 단체와 연관된 이데올로그(Ideolog)로 오해한다. 자유주의는 국가에 소속되는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민중에 뿌린 사상이다. 오로지 재벌 중심의 자유 시장경제를 지키려는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빌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한다. 특정 권력에 기대면서 자신과 다른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억압하는 그들은 우파도 아니며 자유주의도 아니다.

 

유시민은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 및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가장 정의롭다고 알려진 민주주의도 언제든 중우정치와 조작된 여론에 함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급기야 대중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다른 쪽 극단인 전체주의를 향해 질주하기조차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동 정치가, 아첨하는 정치꾼, 여론을 조작하는 정치인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 탓만 할 일은 아니다. 정치는 지식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폐해에 대한 일부 비판 때문에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에는 이를 방지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있다. 바로 표현의 자유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으뜸가는 원칙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 유권자들이 할 일이다. 우리는 전보다 더 강력해진 ‘표현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자유주의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숙고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냉소하는 낡은 힘을 물리칠 시기가 온 것 같다.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러보낸다면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약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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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19 20: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말씀처럼 사회갈등과 이로부터 파생된 혼란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 인위적인 안정을 강요하는 문제가 전체주의 국가의 특성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휴전상태라 국가에 의한 강제가 합법화되고 있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요.. 이제는 이러한 잘못된 상식이 고쳐질 때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4-20 13:25   좋아요 1 | URL
국가주의 국가론의 기반이 점점 약해질 거라 보는 유시민씨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어제 대선 후보들의 (개그, 중구난방) 토론을 보셨으면 아셨을 거예요. 남북통일이 되지 않는 이상,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갈등은 이어질 것입니다.

서니데이 2017-04-1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개정신판으로 소개되는데, 이전의 책과 개정판의 차이가 많은가요?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7-04-20 13:25   좋아요 1 | URL
구판은 읽어보지 않았어요. ^^;;
 

 

 

 

일본어 ‘후조시(腐女子)’는 한국말로 옮기면 ‘썩은 여자’로 해석된다. 원래 남성 동성애를 그린 만화나 소설, 즉 야오이(やおい)와 BL(Boy’s Love)을 즐겨 읽는 여성들이 자조의 의미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지금은 만화와 소설에 푹 빠진 2, 30대 여성 오타쿠(otaku)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일본의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타쿠는 ‘마니아(Mania)’의 일본식 표현이다. 야오이와 BL을 보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드는 자연스러운 취미활동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기성세대의 눈에는 오타쿠가 비정상으로 보인다. 오타구의 성적 환상은 평범하지 않아서 오타쿠는 변태이거나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편견이 생긴다. 그래도 취미와 관련된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 오타쿠를 이해하는 시선이 부쩍 많아졌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몰입할 때 고립한다. 반대로 은둔형 외톨이는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집 안에만 지낸다. 그동안 오타쿠는 방구석에 처박혀 하나에만 몰두하는 은둔형 외톨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덕후’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양지로 나왔지만, 여전히 ‘오타쿠 문화’의 확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남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라마, 야오이 등 비현실 속 등장인물의 연애담에 푹 빠져 현실에서의 연애와 결혼을 등한시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은 이미 인구절벽으로 치닫고 있고, 결혼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덕후 문화’가 확산될수록 젊은 비혼 인구는 증가하게 될까?

 

 

 

 

 

 

 

 

 

 

 

 

 

 

 

 

* 우에노 치즈코, 미나시타 기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동녘, 2017년)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는 덕후 문화의 영향이 비혼(非婚)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녀라면 누구나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고 나면 한 번쯤은 멋진 왕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소녀들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꿈을 꾼다고 해서 실제로 왕자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소녀들은 성장하면서 현실과 상상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는 사실, 이젠 다들 안다. 대신 ‘왕자님’은 TV 드라마에 있고 하이틴 로맨스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야오이 · BL 문화를 잘 모르거나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야오이와 BL을 보는 소녀들이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과 거리가 먼 착각이자 편견이다.

 

미나시타는 동성애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는 기혼 여성이고, 이성애자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알고 지냈고, 지금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여사친’은 야오이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녀 역시 작년에 결혼했다. 야오이와 BL를 좋아하는 여성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야오이 · BL 문화가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에노는 후조시가 동성애 커플을 좋아하는 이유를 ‘남장한 이성애 커플’에 대한 환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므로 여성은 야오이와 BL를 보면서 느꼈던 사춘기 시절의 성적 환상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끗이 지우는 일과 같다.

 

반면 일부 남성은 포르노 영상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섹스의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포르노 배우가 등장하는 야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여성은 포르노 배우처럼 저렇게 해야 한다는 환상과 강박관념을 갖는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도 현실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래도 이성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이 기억나게 되고, 그것을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음경이 커야 섹스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사랑하는 여자의 동의 없이 항문 성교를 시도하는 등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서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2017년)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남자들은 비현실적 드라마에 푹 빠진 여성이 현실 구분 못하는 ‘김치녀’, ‘된장녀’가 될 수 있다고 악의적으로 왜곡한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 원인의 오류’에 가까운 여성 차별이며 여성이 향유하는 하위문화마저 무시하고 있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야오이 · BL 문화를 비정상으로 보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 또한 잘못된 원인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오류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비혼 문제의 원인을 덕후 문화의 확산으로 보는 전문가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야오이와 BL를 보는 여성들을 심각하게 바라볼 것이고, 여기에 팔을 걷은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야오이와 BL을 불태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거로 믿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야오이와 BL를 보는 것도 문화를 향유하는 일이라는 점을 떳떳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오이 · BL 문화를 누리는 여성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비정상인’과 결혼을 기피하는 ‘이기적이며 까다로운 여성’으로 동시에 낙인찍힌다. 나는 야오이와 BL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야요이 · BL 문화가 사회 망조의 조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테르(Voltaire)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오이 · BL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 취향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이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 딴지 걸기

 

“옛날엔 2PM의 <죽어도 못 보내>가 참 좋았는데, 이제 이런 노래를 들으면 안전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왜 죽어도 못 보내는 거냐?” (《대한민국 넷페미史》 90쪽)

 

→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른 가수는 ‘2A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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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토낑 2017-04-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혼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었네요. 저는 완전 의외에요. 제주변에도 비혼선언하신분들 꽤나 있으시지만 저런 이유로는 전혀 없으셔서요 ㅎㅎ

cyrus 2017-04-09 08:03   좋아요 0 | URL
야오이를 본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될 리가 없고, 결혼을 기피한다고 원인으로 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2017-04-1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4 21:24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며칠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매일 글을 올리면 보는 분들 입장에서는 지겨울 수도 있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7-04-15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화책을 보거나 전자오락을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었죠.ㅎㅎ 20년이 지나고 나니 왜 우리나라에선 Nintendo를 못 만드냐던 인간이 나왔구요.ㅎㅎㅎㅎㅎ 사실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들이 용납되긴 해요.. 학자들이야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내놓는 걸로 밥먹는 사람들이구요..ㅎㅎㅎ

cyrus 2017-04-15 19:52   좋아요 0 | URL
게임과 만화책을 성적 향상에 방해되는 악의 축으로 설정되다보니 지금도 그런 속설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노르베르토 보비오, 문학과지성사 (1992년)

*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 사계절 (2017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두 개의 이념 중 어느 한쪽을 맹신하면 심각한 갈등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와 민주주의이며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불의와 권위주의 세력이다. 그 결과 지지자의 수가 힘이고 힘이 정의가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다수의 횡포’이다. 다수의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 내세우는 다수결 원칙은 사실상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논리를 민주주의적인 것처럼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다수의 독재’로 둔갑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본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기본권과 개인적 자유의 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국가나 사회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에 강력히 반대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개인에게 이러한 자유가 최대한 허용될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 전체적으로 행복이 극대화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 질서가 개인과 국가의 부를 함께 증대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도 시장경제 질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칭’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다. 자칭 자유주의자와 손을 맞잡은 우파 정치권과 극우 언론은 노조 결성을 ‘빨갱이’, ‘체제 전복 세력’으로 매도하기에 바쁘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다. 특정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이념과 신념을 쉽게 조종할 수 있다. 원칙 없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변질한다.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자유주의의 토양이 부실하면, 성숙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 우리나라 경우 좌우간 갈등, 분단 시대로 넘어가는 격동기를 겪었기에 정치 상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당연히 이 시기 국회의 정치적 성숙도는 낮았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헌의회부터 헌법 굴절의 역사는 시작됐다. 헌법기초위원회가 의원내각제를 기초로 한 헌법 원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 때문에 이는 하루아침에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그가 대통령제를 택하면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확실한 권력자로 자리매김했다. 1952년 7월 ‘발췌개헌’을 통해 직선제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했고, 1954년에는 대통령 중임 제한 규정에 부딪히자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억지스러운 근거를 가져오면서 부결됐던 헌법개정안을 하루 만에 번복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독재정치를 위해 대통령중심제를 택했던 것이 그 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독재, 장기 집권,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

 

조국 분단이 더욱 고착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이 정통성 없는 권력 아래서 체계적으로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득권을 누려왔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옹호하고, 미화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대통령께서는 그의 거의 전 생애를 민주주의의 발상지이고 가장 모범국인 미주에서 지내셨습니다. 미주에서 공부를 해서 최고 학위를 받으시고 또 미주에서 거의 일생을 혁명운동 독립운동에 공헌한 어른이십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한 민주주의자입니다. 그 어른이 헌법에 의지해서 국회에서 당선이 되었고 또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어른입니다. 그 어른은 헌법에 의지해서 앞으로도 행동할 것입니다. [1]

 

이 발언을 한 사람은 4·19 혁명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외무부 장관 허정이다.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킨 뒤 새로 발족한 제2공화국의 내각에 권한을 넘겨줬다. 기분 탓인가. 이승만 하야 이후에 나타난 허정 권한대행 체제를 바라보면서 박근혜와 황교안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허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의 망명을 도운 사람이다. 황교안은 초대 법무부 장관 이후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해왔고, 제기되었던 각종 문제에 대해서 통상 박근혜를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놀랍게도 50년대 국회의 수준과 지금의 국회 수준이 거의 비슷하다. 반세기동안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가치가 정치권력 아래서 훼손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외면한 구체제를 그리워하고,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던 수구세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박근혜 탄핵 표결을 반대하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서 김 의원은 박근혜가 ‘1원 한 푼 안 받은 지도자’라고 했다.[2] 전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은 2012년 대선경선 후보 시절 박근혜의 5·16 역사관 문제를 적극 옹호했다.[3] 박근혜는 5·16 군사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면서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녀의 과거 발언은 5·16 군사 쿠데타를 헌법 전문에 넣어 ‘혁명’으로 정당화한 박정희 대통령의 헌법 개헌 시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뭐든지 싸우려고 하고, 상생이 아니라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또 국민을 어떻게 편안하게 할 수 있느냐.” [4]

 

이 발언을 누가 했는지 아는가. ‘수인번호 503번’으로 구치소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면서 일갈했다. 그리고 수인번호 503번은 십여 년 지난 후에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수인번호 503번은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되어 국정 운영을 하다가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당했다. 파면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헌재는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를 저질렀다고 봤다. 뭐든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상생이 아니라 상쟁하려는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자유와 민주라는 두 개의 가치 중에서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 다만, 국민을 상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모두 이해시켜 나가는 데 있어 이념적 편협성을 극복해야 한다. 헌법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우게 하는 좋은 영양분이다.

 

 

 

 

[1] 《헌법의 상상력》 118쪽

 

[2] [김진태, 박근혜 탄핵 표결 앞두고 “1원도 챙긴 적 없는 지도자”]

스포츠동아, 2016년 12월 19일

 

[3] [이정현 “역사 평가는 다양, 김일성 찬양하듯 한군데로 몰수 없어”]

매일경제, 2012년 7월 25일

 

[4] [박 대표 “대통령 헌법수호 원칙 의심”] 연합뉴스, 2004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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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05 16: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자유‘만 강조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평등‘만 강조하는 나라가 북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현실적으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이념만 강조하는 사회가 정상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04-05 16:13   좋아요 2 | URL
그동안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잘못 배웠고,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평등’을 지향하는 건데, ‘사회주의는 악의 이념’, ‘사회주의=북한식 공산주의’라는 편견 때문에 ‘평등’을 언급하면 ‘빨갱이’ 소리 듣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전체주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대학생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그때 어떤 학생이 공산주의라고 대답했어요. 정말 웃픈 일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한 교수님이 보수주의자인데, 그 학생의 대답을 듣고 어이없어 하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4-05 16:20   좋아요 3 | URL
^^: 교수님께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말이라고 설명하셨겠네요.. 현실에서는 양 극단 사이에 모호하게 수많은 체제들이 있고 이들의 정치, 경제체제가 복잡하게 얽혀서 명확하게 정의내리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체제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건 구성원들 다수가 동의하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캐모마일 2017-04-06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글의 의미가 더 와닿습니다. 밀은 민주주의 하에서 다수의 횡포를 걱정하면서도 노동자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급진주의 운동을 실천했다고 하는데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란 책도 밀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7-04-06 16:09   좋아요 1 | URL
예전부터 밀의 <자유론>을 읽으려는 마음만 여러 번 했지, 정작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어요. 저는 밀의 자유주의를 좋아해서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
 

 

 

지난 3월 7일에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에 대한 생각을 소신 있게 밝힌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몇몇 분들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의견 덕분에 제가 글을 쓰면서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버리지 못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잘못된 생각의 편린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문제의 문장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분의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남성과 여성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반영된 논지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관음증의 의미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영화나 소설 등 문화계 전반에 숨어있는 ‘관음증적 시선’을 읽어내는 훈련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쓰면서 인용한 나탈리 앤지어의 문장 일부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친구에게 자기 어린 딸을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딸을 수전이라고 부르자. 어머니는 신생아인 나 말고도 더 큰 딸이 있었으므로, 여자아기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수전의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음순의 동그란 둔덕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클리토리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음경 같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기 음경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아기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코끝이나 새끼손가락처럼 보였고, 어머니가 천으로 닦아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약간 단단해졌다. 어머니는 수전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모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1]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는 튀어나온 음핵(clitoris)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깔끔한 형태의 음핵을 선호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생각을 ‘남성 중심적 사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튀어나온 음핵을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을 실제로 본 적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통으로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예쁜 음핵’이 있다고 믿었고, 그런 음핵을 가진 여성과의 잠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남성들이 있다는 근거만으로 ‘튀어나온 음핵을 선호하지 않는 것’을 ‘남성 중심적 사고’로 일반화했습니다.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처럼 여성도 튀어나온 음핵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깔끔한 음핵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핵의 형태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마음대로 소유했던 과거의 남성들은 음핵이 ‘남성의 성적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신체 부위’로 생각했습니다. 과거 남성들은 여성이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심지어 여성이 성적 쾌락을 느낄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동아시아, 2017)

*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북하우스, 2009)

 

 

중세의 남성들은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규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불행하게도 ‘마녀사냥’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이 황당무계한 근거가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누구도 이 어리석은 광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마녀재판을 주관하는 집행관의 아내조차도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여 침묵했습니다. 단지 음핵이 튀어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마녀라는 억울한 누명을 받으면서 죽어간 여성이 많았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은 1593년에 일어난 처형에 대한 목격담입니다.

 

처형이 끝나…… 세 마녀의 숨이 완전히 멎자 집행관은 그들의 옷을 벗겼고, 앨리스 새뮤얼이라는 여성의 발가벗겨진 몸에서 작은 살덩어리를 발견했는데, 마치 젖꼭지인 양 반 인치 정도 길이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집행관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도 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렇게 은밀한, 볼 것이 못 되는 부위를 노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결국에는 그토록 이상한 물체를 감추는 것도 꺼림칙해 보였다.[2]

 

 

다음으로 이브 엔슬러(Eve Ensler)의 연극 작품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에 수록된 ‘보지에 관한 사실,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이 내용 역시 1593년 마녀 재판에 있었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고요, 《마이 버자이너》에도 나옵니다.

 

 

1593년 마녀재판에서 기혼남성인 한 법관이 처음으로 클리토리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악마의 젖꼭지’라고 이름 붙이고 마녀의 유죄 증거로 사용했다. 법관은 ‘그것은 젖꼭지처럼 튀어나온 0.5인치 길이의 살덩어리로, 첫눈에는 알아볼 수 없게 은밀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지만 종국에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고 말하며 마녀로 기소된 여성의 그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다 보여줬다. 구경꾼들은 그런 것을 본 일이 없었고, 그녀는 마녀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됐다.[3]

 

 

음핵은 여성미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깔끔한 음핵이 예뻐 보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할수록 여성도 튀어나온 음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튀어나온 음핵이 못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의학적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음핵을 외관상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이 수술을 담당하는 미국인 의사는 스스로 ‘여성 성기 미용 의사’라고 소개합니다. 《마이 버자이너》의 저자 옐토 드렌스는 음핵도 성형수술의 대상이 되는 세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저도 저자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깔끔한 음핵을 선호하는 것이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인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성 성기 미용 의사는 성기의 비대칭을 모조리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의사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는 수많은 사진들을 보았는데, 엄청나게 다채로운 개개인의 다양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 일종의 표준 음부로 탈바꿈한 데 무척 놀랐다. 우리가 보는 포르노 사진들 역시 손질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은 점점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다.[4]

 

 

포르노 여배우는 카메라 앞에서는 아름답게 포장된 존재입니다. 남성이 좋아하게끔 꾸미는 거죠. 포르노 여배우 대부분은 왁싱으로 음모를 제거합니다. 그러면 카메라로 비추는 음핵은 깔끔하게 보입니다. 포르노를 자주 보는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환상을 가집니다. 남성이 음모 한 올도 덮여 있지 않은 깔끔한 음핵에 익숙해지면 평범한 여성의 음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음모가 수북하다거나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자 친구 또는 아내와의 섹스를 거부하는, 웃지 못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여성의 신체 일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섹스를 거부하고, 그녀와 헤어지자고 요구하는 남성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남성은 여성의 신체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리석은 남성의 이야기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제목은 ‘음모’입니다.

 

 

 

 

 

 

 

 

 

 

 

 

 

 

 

 

 

* 정희진 엮음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

 

 

 

음핵은 신체 일부입니다. 음핵이 조금 튀어나왔거나 모양이 이상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성호르몬 이상 원인으로 음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 입구가 막혀 있거나 지나치게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 그리고 해부학상 여성의 신체를 가졌으나 남성 생식기와 유사한 신체 기관을 가진 이들을 ‘인터섹스’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 딱 두 가지 성별의 차이가 통용된 사회는 인터섹스를 성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터섹스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면, 의학적인 문제가 없어도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 대신 ‘비정상’, ‘잘못 태어난 기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처럼 신체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여성의 신체를 왜곡하고, 억압하는 일이 재현됩니다.

 

어느 분께서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자유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성 중심적 시선에 갇히는 바람에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기혐오는 여성 개인 선호에서 비롯된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가부장제 문화에서 내면화된 증오와 억압입니다.[5]

 

 

 

[1] 나탈리 앤지어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구판) 107쪽

 

[2]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17쪽

 

[3]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73쪽

 

[4]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428쪽

 

[5]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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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4 21:37   좋아요 0 | URL
팬티에 가려지는 신체 부위 선호에 따라서 이성을 만나는 남자들이 이해가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오히려 그들이 절 이상하게 생각해요. ˝네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구나˝라는 식으로 말해요. 이 말이 거의 팩트 폭력급이라서 더는 말하지 못해요. ^^;;

2017-03-15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20:36   좋아요 1 | URL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인용한 글 제목을 패러디했는건데, 다시 보니까 제목에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어요. 제목 수정했습니다. ^^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차별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대통령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이나 포용력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저급한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저급한 편견이 사회에 팽배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차별화에 따른 차등적 보상원리가 모든 사람을 더 열심히 살게 하고 나아가 사회 · 경제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분배정책이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해 마음껏 재능과 창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결과의 불평등을 받아들인다. 분배 위주 정책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면 남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이 올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개혁의 기본 방향이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 쪽으로 설정돼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 모두를 위한 시장 개혁이 이루어지면 누구나 살맛 나는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재벌만 살맛 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착각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심어줬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마음가짐이다. 이 문제점은 상대방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일부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국가의 내분을 조장하려는 좌파의 선동으로 우기는 박사모, 동성애자를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혐오하는 기독교인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믿는 ‘도덕’을 내세운다. 이 ‘도덕’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정반대인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도덕을 몰이해하는 성향이 타인에 대한 무지한 편견을 만들어낸다.

 

 

 

 

 

 

 

 

 

 

 

 

 

 

 

 

* 앨런 G. 존슨 《사회학 공부의 기초》 (유유, 2016)

 

 

차별과 편견을 용인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회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런 존슨(Allen G. Johnson)은 어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학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사회학은 사회의 고통이 특정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원인을 알아내고, 그 잘못된 상황이 개선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은 ‘우리 자신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세상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학문’이다.[1] 이러한 사회학의 기본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 공동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이러면 이성의 힘이 작동할 수 없게 되고, 사회 문제를 오로지 그 문제와 관련된 개인의 원인 탓으로 돌린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2012)

 

 

우리는 사회 전체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진리 또는 문화를 의심과 검증의 여지 없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직관’을 의미하는 ‘빠른 사고(시스템 1)’와 ‘이성’을 뜻하는 ‘느린 사고(시스템 2)’가 충돌하면, 직관이 인간의 판단과 생활을 지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의 뇌는 느리고, 복잡한 과정의 절차를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빠르고 손쉽게 결정하려는 직관에 의존한다. 문제는 이 직관을 ‘합리적 이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즉 자신은 정확한 판단을 내렸으니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신뢰한다. 사회 집단에서의 소속감과 안정을 지향할수록 이성의 힘이 약해진다.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박사모나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이 용돈 벌기 위해 태극기를 들면서 ‘종북 척결’, ‘박근혜 대통령은 죄가 없다’라고 외치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최소 저항의 길’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 ‘최소 저항의 길’은 복잡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워서 간편한 절차나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을 의미한다.[2] 박사모 회원,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광장에 모이는 노인들은 ‘탄핵 반대 집회’를 통해 소속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들이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 보수’로서의 의무감을 내세워 태극기를 휘날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은 단순하다. ‘탄핵 촉구 집회’에 대항하는 ‘태극기와 성조기 콜라보 집회’를 열면서 혼란스러운 국정이 정상화되길 바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을 어긴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우니까. ‘좌파 세력이 음모를 꾸민다’ 식의 허위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 노인들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를 교묘히 이용한 허위 선동을 ‘진실’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 데버러 헬먼 《차별이란 무엇인가》 (서해문집, 2016)

 

 

박사모의 탄핵 반대 집회를 응원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녀의 행동은 사회 안정화를 저해하는, 불필요한 일이다. 현 정부는 색안경을 낀 채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세력들의 도 넘은 행동과 비하 발언을 용인하고 있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비하 행위가 권력의 힘에 기댈수록 위험해진다. 권력과 결합한 비하 행위는 상대방의 도덕적 가치를 낮게 보는 ‘부당한 차별’이 된다. 즉 비하 행위를 하는 자는 자신의 ‘도덕’에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반면에 상대방이 주장하는 ‘도덕’이 잘못되었다고 무시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회 구성원은 HSD(history of mistreatment or current social disadvantage) 속성을 가지게 된다.[3] 기성 집단은 이 HSD 속성을 가진 특정 집단을 차별하고 비하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세월호 사고 소식에 지친 사람들이 ‘최소한 저항의 길’을 택한 지 오래됐다. 그들은 세월호 사고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여전히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형성된다. 비록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암묵적인 차별이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면 차별과 비하 행위에서 비롯된 불의의 사태를 방관하는 것이다.

 

 

 

 

[1] 앨런 G. 존슨 《사회학 공부의 기초》 14쪽

[2] 같은 책, 44쪽

[3] 데버러 헬먼 《차별이란 무엇인가》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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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4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5 14:1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