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펼쳐진 여자 펜싱 에페 단체전 8강에서 에스토니아에 한 점 차로 아쉽게 졌다. 우리나라는 초반부터 밀리는 모습이었지만 신아람, 최은숙 선수의 활약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인정 선수가 막판에 점수를 허용하면서 경기는 에스토니아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포털사이트의 올림픽 응원 게시판에 최인정 선수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네티즌들은 실점을 쉽게 내준 최 선수의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비난했다. 그리고 경기 후 최 선수 혼자 웃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힌 것도 비난의 화근이 됐다.  

 

 

 

 

 

그런데 한 선수에게 향한 비난의 강도가 너무 심하다. 상스러운 언어로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하는 수준이다. ‘년’이 들어간 욕설을 퍼붓는 것은 약과다. 성차별적인 내용의 댓글이 많았다. 남자들은 일 못 하는 여자를 보면 자식 뒷바라지나 하라고 말한다. 여성의 무능력함을 조롱하는 발언이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일어날 때 여성 운전자는 비하의 대상이 된다. 운전 못 하는 여자를 ‘김여사’로 취급한다. 덩치가 있고, 목소리 큰 남자들은 운전하는 여자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한다. “여자가 집구석에 들어가서 밥이나 하지, 무슨 운전이야!”

 

남자들은 스포츠 중계방송을 볼 때 여자 선수들이 화장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성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한다. 만약 패색이 짙은 경기가 나오면 옅은 화장을 한 선수들을 비난한다. “이 중요한 경기에 화장하고 나오다니. 이길 의지가 전혀 없어 보여.”, “화장할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해라.”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오랜 시간동안 화장에 공들인 선수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과하지 않을 정도로 연하게 화장을 하는 선수들이 있을 것이다. 화장하는 시간은 경기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화장한 선수를 경기를 망치는 문제 선수로 매도하는 것은 몰상식한 여성비하다.

 

 

 

 

 

올림픽 기간에 언론들은 외모가 특출한 운동 선수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특히 여성 선수들이 카메라에 잡히면 외모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4년 동안 묵묵히 운동만 했던 선수가 한순간에 연예인 외모 뺨치는 특별한 선수로 알려진다. 언론은 이런 선수들의 등장을 고대한다. 그리고 대중은 언론이 연예인급으로 포장한 운동 선수에 열광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시드니 올림픽 공기소총 종목 은메달리스트 강초현 선수다. 그녀는 ‘초롱이’라는 별명으로 하루아침에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 이후로 언론과 방송은 외모가 뛰어난 여성 선수가 등장하면 ‘미녀’, ‘얼짱’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만약 최인정 선수가 8강전 승리의 주역이 되었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극적인 승리에 흥분한 아나운서의 입에 “새로운 미녀 검객이 나타났다!”라는 멘트가 자연스럽게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미녀 검객’은 성차별 단어이다. 베이징 올림픽에 은메달을 목에 걸어 주목받은 남현희 선수도 한때 ‘미녀 검객’이라는 별명이 따라왔다. 언론은 운동 선수 별명 짓기에 재미 들렸나 보다. 이제는 남현희 선수를 ‘엄마 검객’으로 소개했다. 여성을 육아와 모성애와 관련된 성(性)으로 보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으로 스포츠 경기 중계를 마음껏 볼 수 있다. 중계방송을 보면서 운동장에 땀 흘리는 선수들에게 응원 메시지도 보낼 수 있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인터넷 생중계도 문제점이 많다. 선수들에게 악의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경기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 분노를 표출한다. 더 심각한 것은 표출 대상이 여성 선수들이라는 점이다. 여성 선수들을 비하하는 악성 댓글이 필터링 없이 노출되고 있다. 댓글을 다는 사람이나 그걸 보는 사람들은 여성혐오, 성차별 발언의 심각성을 모른다. 특히 인터넷 중계를 시청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악영향을 준다. 여성혐오, 성차별 발언을 정당한 비판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그들의 발언을 대놓고 비판하면? ‘메갈충’이라고 욕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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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12 19:4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2016-08-12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12 19:50   좋아요 0 | URL
저도 대화를 나누다보면 성차별적 발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면 모르고 지나치기 쉬워요.

낭자 2016-08-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가 지나친 여성비하˝가 있다면 ˝적절한 수준의 여성비하˝도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제목이네요.

cyrus 2016-08-12 19:59   좋아요 0 | URL
`적절한 수준의 여성비하`가 있겠습니까? `적절한 김대기`라는 말은 있습니다만...

stella.K 2016-08-1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치 않아도 강초현 드라마에 예전 경기장면이 잠깐 나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더군. 정말 풋풋했는데 귀엽기도 하고.

그런데 이 나라가 어쩔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평소 땐 관심도 없다가 올림픽에 나간 게 죄냐?
저런 말까지 듣게?
저런 손모가지들은 재봉틀로 드르르 박아줘야 하는데...ㅉ

cyrus 2016-08-12 20:04   좋아요 0 | URL
강초현이 조성모랑 의자매 맺었던 것 기억나요. 그것도 큰 화제였죠. 2000년은 조성모의 해였으니까요. 근황을 알아보니까 결혼했더군요.

도쿄 올림픽 때 최인정 선수가 금메달 따면 욕하던 사람들 태세전환하면서 칭찬했을 거예요. 인터넷 스포츠 생중계 채팅창도 진짜 성희롱, 지역비하, 여혐발언 많이 나옵니다.

yureka01 2016-08-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디디어 영상시대대라서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앞으로도 심해질듯....

cyrus 2016-08-13 07:48   좋아요 1 | URL
네. 외모차별 비하 표현이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일베의 용어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상으로 매우 직접적이고 공격적이다. 일베 회원들은 보수적 정치성향을 유머로 표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그들의 발언은 이성과 지성에 대한 혐오와 맞닿는다. 일베 자신들 스스로 병신이라고 부른다. 일베는 그들만의 용어를 만들어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한국 여성들을 김치녀로 지칭하며 심한 욕설과 성적 폭력이 포함된 게시물들을 소비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표현하며, 호남인들은 홍어로 불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서는 운지라는 표현으로 조롱하고 있다. 일베 용어는 재미로 웃고 넘기기엔 극단적 폭력성과 특정 지역과 진영에 대한 비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프로그램 개발자 이준행 씨가 일베 게시물을 분석한 사이트를 공개한 적이 있다. 일베 내 추천 수가 높은 게시물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욕설이 포함된 게시물이 5천 개 넘었다. 그 밖에도 많이 나온 키워드가 여자(4,321), 노무현(2,339), 종북(1,633), 광주 (1,622),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 단어·1,564), 민주화(1,204), 섹스(616) 등이 있었다. [1]

 

문제는 이러한 용어들이 일상생활에 침투했다는 점이다. 일베를 접속하는 이들에게는 일정한 내성이 생긴다. 노골적인 지역감정 조장 발언,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 등을 용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우려가 있다. 혐오 표현은 단순히 그 말을 직접 듣는 특정 개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혐오의 대상이 된 속성을 가진 집단 전체에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크다. 이렇듯 혐오 표현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나 폭력 행동, 즉 혐오 범죄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알라딘 서재도 혐오 발언의 위험성에 쉽게 노출된 곳이다. 일베 회원들은 이곳에서도 자신들의 색채를 여실히 드러낸다. 알라딘 회원이 아니거나 회원 계정 로그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댓글을 작성할 수 있다. 그래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단원고 학생들을 주제로 한 글에 일베 용어를 사용하면서 조롱하는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비회원계정으로 댓글을 남겼기 때문에 그들이 누군지 알기란 불가능하다. 혐오 발언 댓글을 피하려면 댓글 작성자 권한을 설정해야 한다. 그러면 알라딘 회원이 아닌 사람은 댓글을 쓸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안심하기에 이르다. 알라딘 회원 계정으로 혐오 발언 댓글을 남길 수도 있다. 알라딘에 서재명과 서재를 운영하는 회원 닉네임을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서재 활동을 하지 않지만, 일베 용어를 서재명과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회원들이 있다. 과연 이들은 일베 회원일까, 아니면 일베 용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용한 것일까?

 

 

* 슨상 : 16

* 노알라 : 12

* 응딩, 응딩이 : 7

* 노운지 : 4

* 야기분좋다 : 4

* 노무노무 : 3

* 노시개, 노시계 : 3

* 놈현 : 3

* 김치남 : 3

* 보슬아치 : 2

* 핵펭귄 : 1

* 홍어친구코알라 : 1

* 홍어민주화운동 : 1

* 전라디언 : 1

* MC무현 : 1

* 전땅크각하 : 1

* 빨통녀 : 1

 

 

혐오 발언 규제에 찬성하는 찰스 로렌스는 혐오 발언을 언어에 의한 뺨치기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언어 뺨치기에 당하기 쉽다. 예전에 나도 당한 적이 있다. 지역 차별의 심각성을 주제로 한 글에 어떤 사람이 전라도를 비하하는 댓글을 남겼고, 작년에는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들을 비하하는 댓글도 봤다. 두 개의 댓글 모두 비회원 계정으로 작성된 것이다. 일베는 자신의 성향과 다른 세력과의 대립을 유도하여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세를 확장한다. 그들의 어이없는 발언에 반박하거나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소용이 없다. 게릴라성 테러를 연상시키는 언어 뺨치기를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정체를 숨기는 비회원은 막을 방법이 없다. 인간적인 예의가 눈곱만큼 없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는 수밖에.

    

 

 

[1] <‘일베분석한 일베리포트 등장언어폭력 위험수위”> 매일경제, 201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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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05 18:33   좋아요 0 | URL
반대 세력에 향한 반감을 부추길 수 있다면 일베를 동원하는 일은 어렵지만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일베도 일당 받으면서 집회 시위를 한 어버이연합처럼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감은빛 2016-08-0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선 아직 댓글테러를 당한 적이 없지만, 예전에 쓰던 블로그에선 개발반대 관련 글에 자주 욕설이 난무하곤 했죠. 그런 댓글이 달리면 전투력이 막 올라가죠. ㅎㅎ

cyrus 2016-08-06 20:09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정말 악플 청정지역이죠. 네이버, 페이스북은 전쟁터입니다. ㅎㅎㅎ

페이스북 한참 빠졌을 때 논쟁하는 것을 지켜만 봐도 지쳤습니다. ^^;;
 
복지의 배신
송제숙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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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사랑하는 이웃님, 제 블로그에 우연히 들어오신 분들, 멀리 계신 재외교포 여러분. 추억의 가요 두 곡 듣고 가셔요.

 

 

 

 

 

               

 

* 한스밴드 - 오락실 (1998년)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 시험성적 아신 건 아닐까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엔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생략)

 

 

※ 요즘 아이들은 이 노래가 수지가 부른 CM송(비타500 광고)으로 알고 있더라...

 

 

 


                

 

 

* god - 어머님께 (1998년)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한스밴드는 발랄한 10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노래들을 발표하며 인기를 얻은 밴드 그룹이다. 한스밴드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 ‘오락실’은 IMF로 인해 실직한 ‘고개 숙인 아빠’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내 기성세대들로부터도 인기를 얻기도 했다. 1999년을 앞두고 있는 무렵, god가 첫 앨범 ‘어머님께’를 들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IMF 시절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어머님께’는 생활고에 시달렸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 미안함을 노랫말로 표현했다.

 

IMF 경제위기는 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었다. IMF 한파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와 노숙자들은 정부를 저주의 눈으로 바라봤다. 직장과 삶의 의욕마저 잃은 노숙자들은 서울역과 시내 각 지하철역으로 몰려들었다. 김대중 정부와 사회 및 종교단체들이 실업자들에게 최소한의 급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노숙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서울역은 노숙자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대합실 입구 한쪽을 아예 ‘노숙자 쉼터’로 지정했다. 김대중 정부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저소득층과 노숙자, 노인에 대한 생계지원 등 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복지서비스 제공의 틀을 수요자 중심으로 정립했다. 정부는 앞장서서 ‘21세기 창조적 지식기반 국가건설’이란 기치를 걸고 각 부문별 ‘신지식인’을 선정했다. ‘신지식인론’을 등에 업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벤처창업이 그 시대의 으뜸가는 교양교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제숙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우리가 다시 떠오르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의 한국사회를 재조명한다. 그리고 지금도 뜨거운 ‘복지’라는 이슈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와 민생 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최저 생계 기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으로 ‘복지국가’가 성립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송 교수는 이를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라고 규정한다. 정부는 모든 국민의 생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부가 내세운 복지는 노동인구의 수를 늘려 양질의 노동력을 충당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즉 복지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으로 분류했다. 전자는 얼마든지 취업이 가능한 노숙자와 청년 실업자들이며, 후자는 실업 여성에 속했다. 여성 실업자 혹은 여성 노숙인은 복지 혜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정부가 규정한 조건에 충족하는 국민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같은 해에 나온 한스밴드와 god의 노래 속에 신자유주의 사회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한스밴드의 ‘오락실’ 속 아버지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잔뜩 듣는 무능한 가장이지만, 복지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실업자다. 반면 아내(또는 어머니)는 삶의 의욕을 잃은 가장들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은 취업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고, 실업자로 전락한 여성 근로자는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재취업이 어려운 여성 근로자는 집안일을 맡았다. 정부는 일자리를 잃은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 경제위기 이후로 급격히 증가한 ‘가족해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나긴 경제 불황은 복지 혜택을 적게 받은 여성 근로자의 생계를 위협했고, 가장 없이 간신히 집안일과 육아를 홀로 책임지는 어머니는 복지 사각지대 속에 살아야 했다. 우리 사회가 ‘어머님께’를 들으면서 흘린 눈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여성의 모성애에 감동한 것이다. 가난 때문에 배고픈 아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을 양보한 어머니의 모습은 숭고한 모성애로 포장되었다.

 

송 교수의 책은 원래 영어로 된 저작물이다. 학술논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딱딱한 문체가 완독을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이 간략하게 정리된 책의 ‘여는 글’을 참고하면 된다. 이제 복지를 좌파들의 전유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민심을 얻으려는  우파들은 좌클릭을 해서라도 복지 정책 도입을 표방한다. 우파와 복지의 기묘한 만남은 이미 IMF 시절부터 이루어졌다. 좌파 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러면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침투되었다. 집권 정부의 이념에 상관없이 우리나라는 완벽하지 않은 복지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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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02 10:16   좋아요 1 | URL
과거에 같이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희망의 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의지마저 상실되어 무기력해지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린다 2016-08-0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으로서 안타까운 일들이네요..

cyrus 2016-08-02 10:18   좋아요 0 | URL
네. 여성들이 복지 혜택, 취업 기회가 부족했는데도 여성들은 이미 사회적 보장을 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행복하자 2016-08-0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스밴드의 노래를 모르고 수지의 비타500을 알고 있는 저는 요즘 세대?ㅎㅎ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 극단적인 표현을 피하고- 노래중 하나가 지오디의 어머님께 에요 ㅠㅠ

cyrus 2016-08-02 10:20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세대에 끼고 싶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6-08-03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기력함이 가장 큰 문제같습니다. 조장된 가짜 희망은 나쁘지만, 뭔가 의욕이 있다는 건 중요한데 말이죠.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내년이 걱정되는 이유입니다. 전 `선생님 사랑해요`가 더 좋았더라능...ㅎㅎㅎㅎ GOD의 경우엔 표절논란이 있어서 좀..글구 사실 가자 듣고 있으면 눈가가 촉촉해지기 때문에 open된 장소에선 듣지 않습니다.

cyrus 2016-08-04 10:37   좋아요 0 | URL
`선생님 사랑해요`가 한스밴드의 대표곡이죠. 정말 아쉬운 그룹이에요. 학생 때 가수로 데뷔한 것이 독이었어요. 소속사가 노예처럼 굴리는 바람에 롱런하지 못하고 너무 빨리 묻히고 말았어요.
 
책의 역습 Idea Ink
우치누마 신타로 지음, 문희언 옮김 / 하루(haru)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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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생각마저 든다. 독서는 삶의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좋은 책과의 우연한 만남,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우연은 잊힌 책을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불러들인다. 그게 운명을 결정짓는 필연이 된다. 책 한 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만의 최고의 책으로 남거나 출판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또는 어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사실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우연이 아니다. 독서가 좀 더 즐거운 만남이 될 수 있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서점이 많아져야 한다.

 

동네 책방을 운영하는 우치누마 신타로는 ‘책과 사람과 우연의 만남을 만든다’고 믿는다. 책은 읽는 사람의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저 어떤 한 사람이 지어낸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책의 운명은 어떤 독자와의 만남의 순간에 정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한 권의 책이라면, 누가 나를 집어 드는가 하는 게 내 운명을 결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책과 서점의 미래는 불길하다. 이미 동네서점들이 문을 닫았으며 몇 안 되는 서점들도 경영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스마트폰과 영상매체에 밀려갈수록 책의 입지가 흔들리고, 특히 학술서적과 교양서적의 판매량 감소추세가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만화책, 수험서 같은 실용서 등이 시장 규모를 키우며 출판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마디로 잘 팔리는 자기계발서와 실용서적만 만들겠다는 출판경향은 ‘지식 전파’라는 출판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린다. 실용서적은 교양서적을 즐겨 읽었던 독자층의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탄탄했던 독자층이 사라지면 동네서점이 설 자리도 줄어든다.

 

운영난에 허덕이는 서점들은 베스트셀러만 잘 관리하면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식의 임기응변에 머물러 있다. 출판이 차지하는 사회적 중요성과 비교하면 그동안 정부와 사회의 관심은 너무 적었다. 일본의 상황도 국내 현실과 너무나도 닮았다. 그렇지만 우치누마 신타로는 꿋꿋이 자신만의 기획을 펼쳐나가면서 동네 책방을 운영한다. 그가 만든 책방 ‘B&B’는 맥주와 책을 파는 서점이다. 책방 이름은 책(Book)과 맥주(Beer)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책의 역습》은 도발적인 제목이다. 서점의 위기를 바라보는 저자의 자신만만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책 판매에 의존하는 서점들이 수익을 위해 특정 장르의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과 달리, B&B는 고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폭넓은 세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소다. 책 매출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서점이 추천하고 싶은 책들을 당당하게 진열할 수 있다. B&B는 개점 이래 매일 거르지 않고 유명 작가를 초청한 강연이나 전문가들과의 대화 등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B&B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이벤트는 고객 유치에 크게 기여한다.

 

우치누마 신타로는 불황이야말로 책을 위한 역습을 시도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가 알려주는 아이디어를 들어보면 ‘아, 이렇게도 책을 팔 수 있겠구나’라는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문득 년째 계속돼 온 서점의 탄식이 다시 음미 되었다. 지금도 간신히 문을 여는 서점들이 책에 의존해 살림을 꾸려가는 현실은 안다. 그러나 이 장기불황에서 탈출하는 궁극적인 방도는 ‘대박의 꿈’이 복권처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독자의 요구를 간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좁아지는 사태야말로 서점에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종이책을 파는 것만이 ‘앞으로의 동네 서점’의 일은 아닙니다. 우선 결정한 것이 매일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 맥주를 비롯하여 음료수를 제공하는 것, 책을 진열한 책장을 중심으로 가구를 판매하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194~195쪽)

 

한 번쯤 ‘동네 가까운 곳에 여가를 보낼 공간이 있었으면...’이라고 꿈꿔본 적이 있다. 어느 때나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쉴 수 있고, 원하는 교양 강좌를 들을 수 있는 공간. 우치누마 신타로는 책만 팔아서는 이익을 내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고객들이 서점에 들어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만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런 변화의 도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의 역할이다. 달라진 독자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걸 담아낼 책을 소개하는 데 더 골몰하는 서점이 없다면 독자인식의 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네 서점은 자본력이 달려 이 같은 방식은 언감생심이다. 서점으로서 소중한 것을 지키는 동시에 다양한 수익원을 균형 있게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만 생존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출판산업 생태계 속에 우리나라 서점들이 역습할 힘이 너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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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26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딸아이 수학 교재 참고서 확률과 통계라는 책 두권 주문했습니다.
알라딘에서 판매지수 세일포인트가 무려 5만 포인트가 넘더군요.

학습 참고서가 일반 단행본이 5만 포인트면 초히트 책이 될 것이겠죠.

지금 중소서점은 이미 고사당했습니다.

자본이 들어가야하는데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투자할 여력이 안되고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자본이 모이질 않아서 투자할 생각이 없고....
따라서 책을 낼 사람도 줄어들 것이고...
책 내는 비용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한.....

맨부커상인가요..이거 받았다고
반짝 한국소설이 상빨로 뜬 적있지만

그저 어떤 상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피겨 피자도 모르는데 김연아가 올림픽 우승했다니까 피겨이고,

박인비가 골프우승이니 골프일뿐..

그래도 스포츠는 홍보라는 매리트라도 있어 투자라도 한다지만,
책은 그야말로..,무주공산....

지성이 설자리가 없어지는 이유겠지요...

매년마다.....끝 모를 추락....

그러니 약간만 손해 봤다 생각들면
바로 트렁크 열어서 몽둥이 들고 보복하는
욱 하는 야만성 사회가 되려나 봅니다.ㄷㄷㄷ

cyrus 2016-07-27 16:15   좋아요 0 | URL
포켓몬고 게임이 잘 되니까 정부가 게임 관련 규제 정책을 모두 해제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게임 산업이 부흥하면 경제 활성화에 이롭다고 생각했을까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게임도 문화 콘텐츠이고, 책도 당연히 문화 콘텐츠입니다. 출판사, 동네서점 그리고 책을 사는 국민들이 도서정가제에 대해서 할 말 엄청나게 많은데, 정부는 출판 사업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 2016-07-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공급률 문제가 생각나기도 해서 마음이 씁쓸하네요. 합의는 되었지만 문제의 근원인 독서 인구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중소서점 중에도 강의나 북토크 같은 행사를 통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쉽게 해결될 것 같진 않고.. 대형출판사나 서점연합회에서 독자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구나라는 걸 이번 사건을 통해서 실감했습니다..

cyrus 2016-07-27 16:18   좋아요 0 | URL
문제점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출판사와 서점연합회뿐만 아니라 책을 사는 우리 소비자들도 불만이 있는데, 왜 소비자들의 입장을 쏙 빼놓고 출판사와 서점연합회끼리만 대립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정부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나와같다면 2016-07-26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위로받고 싶다면 위로받을 준비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 책에서 위로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준비가 된 사람만 위로받을 수 있어요..
유시민 `공감필법`

cyrus 2016-07-27 16:20   좋아요 0 | URL
유시민 씨가 맞는 말씀을 하셨네요. ^^

쭈니 2016-07-2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어려운 문제인거 같습니다
출판사와 서점이 다 같이 상생하고
독서인구도 늘어나고
다 잘되면 좋겠습니다.

cyrus 2016-07-27 16:2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예전 같았으면 이 책을 쓴 저자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하면 점점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커져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네서점의 미래가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어요.

2016-07-27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27 16:25   좋아요 1 | URL
지금은 동네서점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만, **님 말씀처럼 마음을 비우고, 다시 한 번 새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 성공했던 것을 잊지 못하면 변화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7-27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도 그렇고, 이벤트로 계속 이어가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봐요. 이상북스 같은 경우는 무척 rare한 경우인데, 우선은 주인장이 책도 쓰고, 문화공간도 만들고, 무엇보다 적게 벌어도 하고 싶은 걸 하는 삶을 추구하니까요. 근데, 사실 가게운영하듯 애 기우고 집 사고, 흔히 말하는 중산층생활을 영위하기엔 서점은 노답이죠...요즘처럼 책 안읽는 시대라면. 저는 인문학붐, 강의, 강연도 그렇고 무엇을 해도 사실 다시 책읽기의 붐이 오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과 게임, 그리고 TV가 없는 세상이라면 모를까...그런데 이 책은 저도 읽고 싶어서 보관함에 담았습니다.ㅎ 요즘 서재활동이 참 지지부진하네요, 전..

cyrus 2016-07-27 16:3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아주 많아서 과거처럼 책의 재미만 추구하는 세상으로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저는 t-guest님의 서재 활동이 뜸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최소 한 달 동안 업데이트가 없으면 서재 활동이 뜸해졌다고 생각해요. 글은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쓰는 것이 좋습니다. ^^

서니데이 2016-07-2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중복이라서 그렇게 더운 모양이예요.
cyrus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7-27 18:51   좋아요 1 | URL
네, 고맙습니다. ^^
 
현대조선잔혹사 사탐(사회 탐사) 2
허환주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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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은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다. ‘안전제일표지판은 안전을 주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공통기호다. 그렇지만 사람의 안전이 제일중요하다고 내세운 안전제일주의는 생산제일주의 앞에서는 무용하다. 조선소들이 생산제일주의에 집착, 안전을 무시하고 작업을 강요해 산업재해가 급증하고 있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에게 드리워진 산업재해, 그 죽음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어지지 않았다. 프레시안의 허환주 기자는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선소에 일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바짝 쫓아다녔다. 그 그림자를 붙잡을 수 없었지만, 하청노동자들이 어떻게 조용히 죽음 속으로 사라졌는지 낱낱이 파헤쳤다. 현대조선잔혹사세계 1위 조선소라는 허명에 숨겨진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담아낸 르포다.

 

조선소 산재 사고 희생자 대부분은 하청노동자다. 하청노동자는 원청업체와 하청계약을 맺은 업체에 소속된 노동자를 일컫는다. 기업이나 회사는 그때그때 고용조정을 쉽게 할 수 있는 하청노동자들을 선호한다. 이러한 사업주의 욕심이 하청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니 4대 보험과 퇴직금 등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는 남의 얘기다. 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회피하는 위험한 작업을 맡고 있다. 급증하는 일감을 처리하기 위한 무리한 조업일정 강행으로 인명 사고가 일어난다. 하청노동자들을 옥죄는 것은 산업재해에 대한 공포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원칙적으로 원청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산재 건수를 많아지면 행정적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원청은 산재가 발생하면 그 노동자가 소속된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끊어버린다. 하청업체는 하청노동자들이 산재를 당하더라도 쉬쉬한다. 하청노동자들은 원청과 하청업체에 의해 철저하게 법의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다.

 

미래를 위한 안전보다는 당장의 경비 절감을 위해 동원되는 각종 편법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부실한 안전설비,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작업일수록 전혀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을 투입하는 하청업체의 구조적 문제점은 죽음의 그림자를 숙성시키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하청노동자들이 노조를 세워 산재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자신들의 처지를 절박하게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안전 불감증에 의한 단순한 사망사고로 보는 조선소의 입장이었다. 안전 교육을 담당하는 원청업체가 노동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고작 정신 바짝 차리면서 일하라고 말할 뿐이다. 사업주는 무재해 명예를 위하여 노동자들의 부상과 사망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사업주 지정 병원은 그들의 조치에 순순히 동조한다. 사람 목숨보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주와 병원의 은밀한 결탁이 노동자들을 두 번 울린다.

 

지금도 일용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으로 작업하면서도 산업안전에 대한 대책 없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회사 측 관계자들은 사고원인과 책임문제를 하청업체에 떠넘긴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현대중공업 현장에는 근로기준법은 남의 나라 법이다. 자산과 소득뿐 아니라 위험까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위험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매해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결코 흘려들을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개미처럼 일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의 비보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분석한 기사도 또는 그 사고의 책임을 추궁하는 기사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조선소 산업재해 문제를 폭로하고, 규탄하는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이 극한직업이라서 너무나 많이 다치고, 죽는 현상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조선소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사고에 굳게 입을 다무는 현대중공업과 정규직 노조의 반응보다 더 심각하다. 하청노동자들의 죽음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빨리 잊히기를 원하는 현대중공업을 옹호하는 입장과 다를 바가 없다. ‘안전제일표지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조선소에 있는 안전제일 표지판은 안전을 제 일처럼 여기는 냉정한 작업장의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자가 다치거나 죽었을 때 회사는 ‘자사의 안전을 제일중요하게 생각한다.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회사가 많은 사회에 노동자들의 진지한 분노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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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7-21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을 지지합니다.
분노의 목소리만 커질 게 아니라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cyrus 2016-07-22 07:29   좋아요 0 | URL
조선소 노동자들의 삶이 메인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 좋겠는데,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사가 많지 않아서 관심 받을 기회가 적습니다.

yureka01 2016-07-2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생각은 사업주,,대표에게 사고나면 구속시키면 됩니다.
아무리 돈 아끼려고 안전에 투자를 하지 않아도
대표가 구속되면 감방 안갈려고 알아서 먼저 안전에 투자하라고 지시내릴 겁니다.
벌금 따위로는 택도 없거든요.

직원이 아무리 안전애 투자 하자고 건의해도 경영자나 대표자의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돈 나간다는 비용으로 생각하니..안되죠..아주 중벌로 .....


말로는 안전에 주의 하라고 떠벌려도 안전시설 등안시하고 이게 생명보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으니 사고 자꾸나죠.

cyrus 2016-07-22 07:34   좋아요 1 | URL
일본 같은 경우, 작업장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업주는 엄벌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업재해가 생기면 일단 사고정황을 살펴보겠다면서 사업주 처벌을 미룹니다. 이렇다 보니 보상 문제도 차질이 생깁니다. 누가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사고 원인을 다치거나 죽은 노동자에게 떠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