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체험 문학

 

 

cyrus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어서 먼댓글로 달아 봅니다.

 

"내 생각에 영국인들에게는 괴테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cyrus 님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제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견해는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견해가 아닐까 싶어서요.

 

저로서는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듯한 표현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또 생경스럽기만 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추측을 '영국인들에게'까지 적용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견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cyrus 님의 글 때문에 오늘 제가 일부러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자격이 충분한 '랄프 왈도 에머슨'의 글까지 다시 찬찬히 읽어 봤습니다. 에머슨이 마침 토머스 칼라일의 절친이기도 했기 때문에 괴테보다 셰익스피어에게 훨씬 더 이끌렸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에머슨이 그렇게나 편협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여기서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을 통해 '인류를 빛낸 대표적인 위인' 가운데 괴테를 포함시키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그가 다룬 위인은 단 여섯 명이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 시인 셰익스피어, 세속의 영웅 나폴레옹, 문학가 괴테, 신비가 스베덴보리, 철학자 몽테뉴가 그들인데, 괴테를 이들과 같은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머슨이 괴테를 얼마만큼 존경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괴테가 셰익스피어를 얼마만큼 우러러 보았는지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책을 사두기만 하고 여태까지 읽어 보진 못했습니다만, 일본 최고의 셰익스피어 연구자가 쓴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라는 책을 통해 그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cyrus 님께서 '가벼운 농담조로 지나치듯이' 말씀하신 대목을 두고 제가 너무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어쨌든 오늘 제가 다시 책을 펼쳐 찾아 읽은 대목을 참고삼아 덧붙입니다.

 

 * * *

 

괴테의 예술론은 에커만이 지은 <괴테와의 대화>에 나와 있다. 거기에서 괴테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조금 소개하겠다.

 

"그는 인간생활의 모티브란 모티브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려냈고, 또 모두 표현해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선명함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

 

"무대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좁다. 그뿐인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마저 그에게는 너무나도 좁았다."

 

괴테의 이런 견해, '선명하고 자유로움으로 넘쳐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것을 써냈고,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표현해냈다.

 

그가 정말 대단한 부분은 인간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감정적 부분인 사랑, 증오, 질투 등의 희로애락 전부를 써냈다는 사실이다. 사랑만 해도 연인 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부, 부모자식, 형제, 사제, 친구의 사랑을 모두 그려냈다. 그것이 만약 교과서처럼 규정화해 써내려간 것이었다면, 누구나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반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글은 정말 '선명함과 자유로움으로 넘쳐나고' 있다. 거기에는 정말 당할 재간이 없다.

 

 - 오디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게 찾아왔다』, <03.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괴테의 이 말을 인용했을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극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셰익스피어의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테의 말대로 더 이상 쓸 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극작가, 소설가, 시인은 사라져야 하는가? 사실 그렇지는 않고,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괴테의 말 뒤에 얼마든지 번안을 하거나, 자극을 받아 새로운 것을 쓰려고만 하면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 오디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게 찾아왔다』, <03.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 * *

 

괴테는 결코 만인에게 친숙해질 수 있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순수한 진리에 몸을 바치고 있다기보다는 자기수양·인간완성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자연·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해 위대한 자아완성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그를 이익으로 꾀거나 속임수에 빠뜨리거나 위협을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자제심과 극기심이 많아 누구에게나 단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까'라는 시점에서만 평가를 내리고 모든 것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양식으로서 계속 흡수하는, 끝없는 자아완성의 화신ㅡ그것이 괴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지위도 명예도 건강도 시간도, 더없이 높은 실재조차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아완성의 달인이고 모든 예술과 과학, 그 밖에 무엇이건 왕성하게 관심을 나타내는 위대한 아마추어였다. 예술을 사랑했지만 전문적인 예술가가 되지는 못하고, 영적인 센스는 충분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엄격한 심령주의자가 되지는 못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제2장, 위대한 자아완성의 초인, 문학가 괴테>

 

 

대부분의 현자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이럭저럭 어림짐작 내에 들 정도인데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인류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열심히 읽으면 그의 사고회로를 뒤쫓는 것은 어떻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손을 들게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그 걸출한 묘사력, 창조력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셰익스피어처럼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 <제3,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 시인 세익스피어>

 

 * *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12-13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국 문학에 자부심 강한 영국인이 제 글을 본다면 펄쩍 뛸 수 있겠군요.. ^^;;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된 제 문장이 본의 아니게 읽는 이에게 왜곡된 의미로 전달될 수 있으니 문제의 표현을 삭제하겠습니다.

oren 2017-12-13 12:03   좋아요 0 | URL
비단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한테도 cyrus 님의 표현은 쉽게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게 저의 솔직한 판단입니다. 문학의 거장들을 두고 ‘우열‘을 판단하는 일은 전문가들에게도 몹시 어려운 문제일 수 있을 텐데, 제가 아는 한 그 어떤 사람도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판단은 여태껏 접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cyrus 님께서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나 판단 근거들‘이 너무 궁금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데, cyrus 님께서 표현 자체를 삭제하시겠다니 제가 도리어 뻘쭘해지는군요...

카스피 2017-12-13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두분다 넘 대단하세요^^

oren 2017-12-13 15:54   좋아요 0 | URL
다소 심각하게 쓴 글인데, 제 글의 논지를 너무 벗어난 댓글 같아서 할 말이 없습니다요. ㅠㅠ

cyrus 2017-12-1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생각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삭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실존 인물이 아닐 거라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괴테는 평생 동안 글을 많이 남겼고, 활동적으로 살아온 작가입니다. 셰익스피어보다 괴테의 삶이 워낙 뚜렷해서 저는 셰익스피어보다 괴테에 더 끌리게 됐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 반영된 문장이 나온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괴테를 셰익스피어보다 우위에 두는 근거가 빈약했습니다. 그러니 문장을 삭제한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oren님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드백을 한 것입니다.

oren 2017-12-14 01:09   좋아요 1 | URL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일수록 ‘작가의 삶에 관한 기록‘은 당연히 부실하기 마련이라고 봅니다. 문학 역사상 가장 우뚝한 두 사람으로 평가받는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와 같은 작가의 삶이 괴테보다는 훨씬 흐릿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그들의 문학적 성과가 더 낮게 평가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문득, 문학 비평계의 거목인 헤럴드 블룸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렸었는지, ‘세익스피어를 둘러싼 음모론‘은 또 어땠는지 궁금해서 다시 찾아 읽어보게 됩니다.

* * *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 * *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 * * * *

“설마 이 모든 것을 윌리엄이 썼다고 믿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내뱉은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문인집안 출신도 아니고,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적도 없는 시골 출신 청년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갑자기 그토록 많은 걸작을 쏟아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진짜로 원작자가 맞느냐는 논쟁을 키운 건 미국 여성 델리아 베이컨이었다. 그녀는 영리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열다섯에 소녀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채 교사로 일하던 즈음에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빠져들었다. 각종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 그녀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이 유명한 얘기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등장한다.

선량한 베이컨: 곰팡이 냄새 어린 채.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황량한 논법.251) 한 길을 걸어가는 암호의 사기꾼들. 위대한 탐색의 탐정가들. 무슨 도시로, 위대한 명사들이여?

251) Shakespeare Bacon‘s wild oats. 미국의 여류 소설가 델리아 베이컨(1811∼1859,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인척관계라 주장함)은 그녀의 저서인 『드러난 셰익스피어 연극의 철학(Philosophy of the Plays of Shakespeare Unfolded』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다고 주장함.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은 그보다 학식이 많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씌어졌을 것이라는 부정적 설도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조차 델리아 베이컨의 의견에 대해 동조 내지는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대표적 인물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단정 짓지는 못해도 프랜시스 베이컨 등 주변 인물의 도움이 분명 있었을 거라며 델리아의 의견을 옹호했다. 에머슨과 오랜 우정을 쌓았던 토머스 칼라일도 델리아의 작업을 지지했다. 에머슨과 소로우 등과 함께 콩코드에서 함께 살았던 너대니얼 호손은 델리아의 책 출간을 은밀하게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닌 셈이다. ‘음모론적 시각‘은 무슨 일에든 개입하기 좋아하는 법이다. 그런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자.
(http://blog.aladin.co.kr/oren/9415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