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행복의 비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강주헌 옮김 / 큰나무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발자크의 단편소설 ‘사랑과 행복의 비밀’(원제: 가정의 평화)‘아듀’가 수록되어 있다. 두 편 모두 <인간 희극>에 포함된 단편소설이다. 발자크의 초창기 작품이라서 원숙기에 나온 장편소설들보다 덜 알려진 점이 아쉽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은 1830년에 발표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발자크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두 편의 이야기는 나폴레옹 전성기(‘사랑과 행복의 비밀’)와 그 전성기가 끝나갈 무렵의 시대(‘아듀’)를 배경으로 한다.

 

 

 

 

 

오토 폰 파버 두 파우르  「베레지나 강 건너기」 (19세기경)

 

 

‘아듀’는 1812년 베레지나 전투 때문에 생이별을 하는 연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베레지나(Beresina)는 강 이름이다. 빅토르 페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베레지나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은 바람에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빅토르 원수’가 바로 빅토르 페랭이다. 이야기의 슬픈 결말보다 러시아군의 공격과 추위 앞에 두려워하는 프랑스군을 묘사한 장면이 더 인상적이다.  서로 살아남으려고 강을 건너는 뗏목 위에서 동료를 밀치는 프랑스군의 이기적인 행동은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랑과 행복의 비밀》의 역자는 발자크의 삶과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 소개할 뿐, 두 편의 작품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지 않았다. 역자는 발자크의 소설이 ‘재미있다’, ‘지루하지 않다’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크게 띄워주고 있지만, 그에 비하면 작품 해설이 너무 빈약하다. 나폴레옹이 등장했던 프랑스 역사를 모른다면 나폴레옹 시대를 설명하는 발자크의 서술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발자크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프랑스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발자크의 소설에는 당대 사회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언급되는 문장이 많이 나온다. 이런 문장에 역자가 주석을 달아서 설명하지 않으면 독자는 발자크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다. 독자가 발자크의 소설을 재미없어하는 또 다른 이유가 번역에 임하는 역자의 태도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Le Peau de Chagrin (1831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에 수록)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욕망이 유령처럼 떠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존재다. 욕망은 삶의 기본 조건이지만, 때때로 존재론적 절제를 거치지 않을 때 자신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괴물이 된다. 우리는 늘 절제와 자기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대개 승자는 후자다. 많은 사람이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압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욕망이 사라질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으로 추방당할 뿐이다. 무의식 속으로 숨은 욕망은 의식으로 떠오르는 길을 차단당한 채 점차 정신적 상처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심리적 콤플렉스는 신경증이나 정신분열과 같은 증세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욕망의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행동하기 때문에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제거하라고 강조하는 꼰대 느낌의 가르침만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에 나오는 주인공 라파엘은 열정적인 삶을 꿈꾸었으나 겨결국에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그에게 인생이란 한 판의 도박이다. 라파엘은 도박에 빠져 마지막 한 푼까지 다 날려 쪽박을 차게 된다. 회한 끝에 삶을 마감하기로 작정하고, 센 강에 밤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강변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나귀 가죽을 얻게 된다. 이 가죽은 마법의 부적이다.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 그야말로 우연히 도깨비 방망이를 얻게 된 형국이다. 그 대신 소원 하나 이루어질 때마다 가죽의 크기뿐만 아니라 라파엘의 목숨도 줄어든다. 빈털터리가 된 라파엘은 가죽의 영적인 힘을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다. 가죽 덕분에 라파엘은 단숨에 부자가 되고, ‘라파엘 드 발랑탱’이라는 귀족 이름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라파엘은 더 많이 욕망했다. 가죽과의 거래가 계속될수록 그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몸의 이상 신호를 느끼게 되자, 불안한 라파엘은 가죽을 늘이는 방법을 찾아보지만 허사였다. 라파엘이 삶을 욕망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나귀 가죽의 역설은 파우스트가 그 자신의 영혼을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거래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욕망을 좇는 사람들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행복한 삶의 잣대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오로지 물질적인 부만을 욕망하면서 삶 전체를 그 욕망 충족에 맡긴다. 라파엘은 물질적인 부를 얻기 위한 야망이 과도하게 넘친다. 가죽을 얻게 된 그 날 저녁에 라파엘은 친구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얘기한다.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대목이 장황해서 지루하긴 하지만, 그가 욕망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눈총과 학대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 공부를 하기를 원했고, 아들의 일상을 사사건건 개입했다.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에 부담을 느낀 라파엘은 3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돈과 명성을 안겨다 주는 소설을 쓸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류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던 중 라스티냐크(<인간 희극>의 특징인 ‘인물의 재등장 수법’이 적용되어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나귀 가죽》에서도 등장한다)의 도움으로 페도라 백작 부인과 허망한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의 상심 끝에 도박에 빠져든다. 라파엘의 고백이 지루하게 느껴져도, 작가의 암울한 과거를 생각한다면 주마간산 격으로 읽을 수 없다. 가죽을 얻기 전, 라파엘의 삶은 발자크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어머니는 소설을 쓰기를 원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머니의 경제적 지원이 끊긴 발자크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썼다. 자신도 라파엘처럼 훌륭한 걸작을 남겨서 어머니 앞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발자크는 문학적 성공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명예의 맛을 너무나도 간절했기에 그 맛에 중독되고 말았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발자크는 돈과 여자들을 향해 열심히 쫓아 따라갔다. 발자크에게도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수명을 단축하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발자크는 정열적인 글쓰기를 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욕망이 컸다. 어쩌면 그는 명예의 보상이 따라오는 문학에 대한 욕망이 남다른 문학적 열정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이 가죽을 늘리고 싶었던 것처럼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들을 <인간 희극>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전집으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다행히 발자크의 나귀 가죽은 줄어들지 않았다. 세계문학사에 ‘발자크’라는 이름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인간이 가진 물욕은 끝이 없는 것인가. 그 욕망의 한계는 어디인가. 쾌락, 소유의 욕망이 정상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떨쳐낼 수 없는 숙명의 늪이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인간다운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삶의 토대마저 잃어버리고 내면의 황폐함만 남게 된다. ‘인간의 내면’까지 해부하여 관찰하고 싶었던 발자크는 그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욕망이 한 사람을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잡히지 않는 욕망을 바라보는 라파엘은 마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굶주림의 천형을 받은 탄탈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탄탈로스의 죄명은 욕심이다. 신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 역시 상류층 사람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끝없는 욕망의 끝은 허무의 끈이다. 그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인간은 늘 좌절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5-08-0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어디서 보던 표지가 보여 깜짝 놀랐어요 ㅎㅎ
도둑이 제발 저린셈~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고 봉인해 뒀는데 사이러스님덕분에 다시 볼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ㅎㅎ

cyrus 2015-08-08 20:18   좋아요 0 | URL
라파엘이 고백하는 대사를 끝까지 참고 읽으셨다면 소설의 절반을 다 읽으신 겁니다. 그 다음 장면부터는 이야기 진행이 빨라져서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

yamoo 2015-08-0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모으고 있슴다. 한 열 댓권 모았는데, 발자크의 이 작품은 아직이네요. 리뷰를 보니, 구입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흠...그러고 보니 발자크 작품은 아직까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네요. 어여 구입하여야 겠습니다~ 덕분에 컬렉션 추가 항목이 늘었어요!^^ 감솨~

cyrus 2015-08-08 20:20   좋아요 0 | URL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의 인기에 가려진 발자크의 최고 작품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이 비교해서 읽어볼 수 있는 소설입니다. ^^

페크pek0501 2015-08-0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이 있어야 삶의 성공도 있지만, 욕망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욕망의 포로가 되고 나면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그 삶은 망가진 인생을 향해 가고 있기 마련이죠.
어느 정도의 욕망만 가져야 하는지 어느 선에서 만족이란 깃발을 꽂아야 하는지, 그걸 아는 게 어렵습니다.
˝‘인간의 내면’까지 해부하여 관찰하고 싶었던 발자크는~~˝ - 제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 문장에 있군요. ^^

성실함이 느껴지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5-08-08 20:2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요즘 인문학을 강조하면서 강연을 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절제하라고 말하는데, 말이야 쉽죠.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펜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다

 

 

※ 굵은 글씨체로 된 것은 국내에 번역된 작품

 

 

 

 

 

 

 9. <인생의 첫출발> 문학과지성사, 2008

13. <사랑과 행복의 비밀> 큰나무, 2000

28. <무신론자의 미사> 펀앤런, 1996 (절판)

 

 

※ 수정: <그랑드 브러테슈> (단편) 

세계 공포 문학 걸작선 : 고전편(황금가지, 2003) - 그랑드 브러테슈

등대지기(작은키나무, 2006) - 라 그랑드 브르테슈

고전공포걸작선(바른번역, 2011 / eBook) - 브러테슈 저택에서 생긴 일

 

 

 

 

 

 

 

34. <유르슐르 미루에> 만남, 1997

47. <골동품 진열실> 국학자료원, 1999 (절판)

49. <잃어버린 환상> 서울대학교출판부, 2012

 

 

 

 

 

 

 

51. <랑제 공작 부인> 금성출판사, 1988 (절판)

54. <사라진느> 문학과지성사, 1997

57. <파시노 케인> 이북코리아, 2013 (E-Book)

 

 

 

 

 

 

 

 

 

 

 

 

84. <거짓말에 관하여> 중명, 2004 (외국 작가 단편 모음집, 절판)

 

 

 

 

 

 

 

101. <농민들> 이론과실천, 1990 (절판)

102. <시골 의사> 새미, 2004 (절판, E-Book으로 재출간)

 

 

 

 

 

 

 

 

 

107. <나귀 가죽> 문학동네, 2009

111. <사라진느> 문학과지성사, 1997

113. <고리오 영감 / 절대의 탐구> 동서문화사, 2012

117. <사랑과 행복의 비밀> 큰나무, 2000

122.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창비, 2010

128. <세계의 환상소설> 민음사, 2010

130. <사라진느> 문학과지성사, 1997

131. <루이 랑베르> 문학동네, 2010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5-08-0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 님 볼 때마다 경탄이.. 정말 사이러스 님은 책을 사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잘난 척하려는 허세도 없고.. 고급진 정보는 꽤 많고.. ㅎㅎ 그렇습니다.

cyrus 2015-08-06 21:22   좋아요 0 | URL
글 한 편 올릴 때마다 잘못 적은 내용이 있을까봐 어제 쓴 글은 다음 날에 다시 읽어봅니다. 정말 민망해요. 틀린 맞춤법에다가 어색한 문장이 보여요. 글을 못 쓰더라도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위해서라면 올바른 정보를 소개하려고 노력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5-08-0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씀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아 좋아요 누르지 못하고 오늘은 그냥 지나칩니다. ㅎ 폭염에 건강 조심하세요. 특히 이웃님 대구 사시잖아요...

cyrus 2015-08-06 21:27   좋아요 0 | URL
작품 목록을 설명하는 글이 먼저 나와야하는데 제가 실수로 목록을 먼저 올리고 말았습니다. 재미없어 보이는 글은 ‘좋아요’ 안 눌러주셔도 되고, 눈팅만 하셔도 됩니다. 다이제스터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

지금행복하자 2015-08-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이 적은것 같아요.. 어쩌죠~~ 작품보다 작가이름이 더 익숙해요 ㅎㅎ

cyrus 2015-08-06 21:38   좋아요 0 | URL
발자크 하면 <고리오 영감>이 워낙 유명해서, 다른 작품들은 잘 읽혀지지 않아요. 프랑스 근대사에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면 지루하거든요. ^^

오후즈음 2015-08-0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책중에 읽은게 고리오 영감밖에 없네요. 정말 많은 책들이 있는데 소개된것이 극히 일부라는 생각에 씁쓸하네요.
그나저나 정말...cyrus님 글은 늘 감탄합니다!!

cyrus 2015-08-07 18:03   좋아요 0 | URL
발자크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권의 책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한 것뿐인데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저도 <고리오 영감>만 읽고, 발자크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어요. ^^
 
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001-809] 비둘기

 

 

 

비둘기 하면 ‘평화의 상징’이란 이미지가 등식처럼 붙어 다닌다. 그런 긍정적 이미지 덕분에 비둘기는 오랫동안 호의호식했다. 하지만 이제 행복한 시절은 갔다. 비둘기가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됐다. 이제 배설물, 털 날림 등으로 문화재나 건물에 피해를 주는 비둘기는 누구나 지자체장의 허가를 받아 포획할 수 있어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에서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조나단 노엘은 소설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노년의 은행 경비병이다. 어느 날 문밖에 앉아있는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 조나단은 좁은 방 안에서 지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외톨이다. 조나단에게 비둘기는 평범한 새가 아니라 타자의 간섭이 차단된 자유로운 공간을 침범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온전히 이기적으로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처 입은 마음을 자가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기간이 길어지면 문제가 된다. 예컨대 《비둘기》의 조나단처럼 오랫동안 고립 기간이 지속한다면 정상적인 사회적응발달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과 같아진다. 타인과의 소통도 없이 ‘정지’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인간의 뇌는 마치 컴퓨터와 같이 모든 사건을 기억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건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망각이란 방법을 통하여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관하는 모습이 달라져 의식에 잡히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뇌는 기억에 관련된 사실성만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에 포함된 감정들도 함께 기억한다. 그중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들, 특히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 과거의 어떤 일은 고통의 감정과 함께 머릿속에 저장됩니다. 그리고 비록 의식 속에서 사건 자체에 대한 사실성과 감정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잠재의식 안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활동성 세균처럼 다른 부위까지 번져나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현재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 침범하는 트라우마가 된다.

 

조나단의 트라우마는 가족과의 이별과 사랑의 실패이다. 가족 구성원에 소속되지 못한 경험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덫이 되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며 비둘기 한 마리 앞에서 겁에 질린 모습에 더욱 자신감이 없어진다.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여겨 스스로 ‘불쌍한 존재’라는 망상에 시달린다.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고독감에 익숙해진 조나단은 사회 안에서 스스로 규정지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행동으로 실행할 능력이 없는, ‘참아내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조나단의 심리 상태는 자신의 능력을 알 수 없는 수족관의 돌고래와 같다. 수조에 갇힌 돌고래처럼 사람들도 가정환경, 인간관계 등 수많은 수조라는 한계들로 개개인을 옭아맨다. 비둘기조차 일상을 위협하는 칼날이 되어버리는 위험한 고독이 심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살기 위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감정을 마비시켰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 척하는 사람이 더욱 외롭다.

 

일상은 별 생각이나 느낌 없이 익숙해진 채 반복된다. 사소한 감정의 상처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적당히 마비시킨 채 시간은 무심히 흐른다. 하지만 우리는 조나단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된 감정의 상처가 곪으면 한 사람의 내면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jung 2015-07-07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의 상처로 50살이 되도록 내면의 고독속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찾아온 비둘기에게 공포를 느끼나 고독속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는 줄거리네요..
고독은.. 이겨낸다기 보다는..고독을 씹으면서..뭔가 내면의 강함을 다져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물론 이 책의 중년 주인공과는 다른 심정일 수도 있지만요..
조나단이 과거의 감옥에 갖혀 고독속에서 살아왔지만..그 고독 밖으로 자유를 찾아나가고 싶은 갈망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겠죠.. 그리고 그 계기가 비둘기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cyrus 2015-07-08 18:20   좋아요 0 | URL
저는 <비둘기>의 결말이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나단이 비둘기가 있었던 자리에 돌아가면서 깨끗해진 상태를 보면서 끝이 이야기가 나잖아요. 다시 읽어봐도 결말이 조나단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 건지 아니면 여전히 고통에서 못 벗어난 건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양철나무꾼 2015-07-0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문이요~^^
리뷰 밑에 죽기전에 읽어야할 책1001 프로젝트는 말이죠.
누구의 프로젝트인가요?
그리고 리뷰 밑에 저런 박스태그가 보이면,
`죽기전에 읽어야할 책`인가요?@@

해피북 2015-07-08 16:23   좋아요 0 | URL
저도 양철나무꾼님 말씀처럼 그게 궁금했어요 어젠 죽기전에 읽어야할 1001책에서 목차도 훑어보기도 했는데 말이죠 ㅋㅂㅋ,,

cyrus 2015-07-08 18:23   좋아요 0 | URL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문학작품들을 읽으려고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나오는 책들을 무조건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 독서 분야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찌 보면 단순무식한 독서죠. ㅎㅎㅎ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82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향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코끝을 스쳐 지나갈 뿐, 콧속에 가둬둘 수가 없다. 기억 저편에 살짝 묻어뒀다가, 어느 순간 다시 불러내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천부적인 후각을 가졌더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황홀한 향기들 전부 맡아볼 수 있을까. 후각을 새롭게 일깨워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그동안 살면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코를 확 뚫어준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사랑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소녀들을 스물다섯 명이나 죽인다. 바람에 실려 온 소녀들의 향기에 취한 그르누이가 망설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는 광기로 치닫는 인간의 섬뜩한 탐미 본능을 보여준다.

 

그르누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냄새조차 맡아본 적 없는 고독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서식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향기로 만들어내는 일로 대신한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는 고독한 주인공은 말한다. 존재의 영혼은 향기라고. 《향수》가 독자에게 호기심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냄새를 표현한 활자 이미지를 실제의 영상 이미지로 바꾼 톰 튀크베어 감독의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소설을 꼭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설은 수억 개의 후각세포가 엉켜 있는 듯한 생생한 후각적 묘사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후각의 제국으로 가는 초대장이며, 어두컴컴한 18세기 파리의 뒷골목으로 스며들어 가는 입구이다.

 

인간은 오늘날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보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오페라 공연은 대사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연극 공연은 화려한 무대 위에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본다. 물론 음악을 듣고, 대사를 듣지만, 그것은 시각의 보충 감각에 불과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시각 위주의 감각 체계는 강력하게 통용되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각적 조화와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그르누이는 시각 위주의 문명을 거스르는 안티 히어로다.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소통하고 역시 창조하는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후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원작에서 냄새나는 문장을 따라가지 못했고, 관객들은 그르누이의 살인 행위와 향수 한 방울로 750명의 군중을 조종하는 마지막 장면만 기억할 뿐이다. 영화의 충격적인 영상미가 시각 문명을 거스르는 후각 천재 그르누이를 엽기적인 살인마로 만들어버렸다. 원작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쥐스킨트가 《향수》의 영화화에 무려 15년 동안 반대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평가절하 받는 감각이다. 우리는 냄새 맡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냄새야말로 생존과 생식에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우리가 동물의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물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피하고 잘 요리된 음식과 매력적인 이성에게서 나는 냄새에 끌리는 것은 축적된 경험적 지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진화된 본능에 가깝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류는 향수를 만들었다. 오늘날 초호화 건물로 알려진 베르사유 궁전에 왕족과 귀족 들이 살았을 때 불결한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귀족들이 궁전의 넓은 정원이나 실내 커튼 뒤에서 볼일을 봤다. 그래서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다양한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향수는 인류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귀중품이 아니라 악취 나는 인류의 본성을 가리려고 몸에 입는 얄팍한 가면이다. 향수의 역사 속에 고귀한 냄새만 쫓아 청결한 척하는 추악한 인간의 이중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향수》는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추악한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설이 들어 있다. 살인으로 빚어낸 향수는 귀족,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매료시켜 그르누이의 죄를 잊어버리게 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고약한 치부를 망각하는 인간의 모순을 의미한다. 마치 겉은 화려하나 건물 내부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던 베르사유 궁전처럼 말이다.

 

최상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그르누이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 사회가 만들어 낸 불행한 사생아다. 냄새가 없다는 이유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르누이를 인간 대접하지 않은 그들도 선하다고 볼 수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꾸짖는 격이다. 결국, 《향수》에서 주인공의 삶을 판단하는 독자의 감상적 역할은 무의미해진다. 부처는 향을 가까이하면 성품이 향기로워지고 악을 가까이하면 악취를 풍기게 된다고 가르쳤다. 독자들 가운데 마음속에 품고 있는 향기가 아름다운 자는 그르누이에게 돌을 던져라.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5-06-3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를 읽고 신선한 충격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죠. 튀크베어의 영화도 아름답지만 cyrus님 말씀대로 원작을 못 따라와요. 연기 천재 벤 위쇼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그루누이의 존재감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랑받고싶은 욕망과 존재 이유를 찾는 그루누이...

cyrus 2015-07-01 18:07   좋아요 0 | URL
원작을 읽을 때 그르누이의 향수에 취한 사람들이 집단 섹스를 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영화에서 그 장면을 봤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이 충격적인 장면 하나 때문에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 원작이 야하다는 생각했을 겁니다. ^^;;

초딩 2015-07-0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두를 읽다가 어느 영화가 생각났는데, 15년을 반대했던 그 영화가 맞는 모양이네요 :)
크게 잊고 있었던 것인만큼 더 신선항 충격일 것 같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

cyrus 2015-07-01 18:11   좋아요 0 | URL
초반에 그르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이야기가 지루할 겁니다. 이 부분만 지나면 흥미진진할 겁니다. ^^

해피북 2015-07-0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의 뿌리가 다른지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되네요 ㅋ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단순히 살인과 냄새에만 초점을 맞춰 좀 짜증냈던 기억이 납니다(원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아서요ㅋ) 이 글을 읽으니 오래된 기억 속의 향수를 다시 꺼내보고 싶어지네요 ㅎ

cyrus 2015-07-01 18:16   좋아요 0 | URL
제가 <향수>를 처음 읽었던 때가 10년 전이었어요. 그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친구들이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만 보고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향수>를 읽는 10, 20대 독자들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

서니데이 2015-07-0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수>가 처음 우리나라에 출간 되었을 시기에 이 책에 대해서 소개를 읽고는 그후로 제대로는 읽진 않았네요. 향수와 향기라는 것이 그 때는 조금 독특하다 느껴졌던 것 같긴 해요. 그 사이 영화로도 나왔고, 많이 알려져서 아는 책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기회되면 읽어봐야겠어요.
cyrus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15-07-02 21:33   좋아요 1 | URL
영화도 나와서 이 책을 안 읽어도 대략 줄거리를 알 수 있게 되었죠. 그래도 읽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원작의 묘사가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