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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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중략)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172~173쪽)

 

 

 

 

 Scene #1  너무 예민했던 젊은 영혼

 

문학 고전을 읽다보면 누구보다도 세상살이가 캄캄하고 답답하게 여겨지는 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는 인류 역사 이래 어제, 오늘의 화두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세계 속에서 당당히 주체로 서지 못하고, 늘 무언가에 이끌려 사는 듯한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면 사는 데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거기에다 가난과 질병 등의 개인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부여받은 이들에게는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때로 사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물음에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자신의 전부를 혹독하게 산산조각 내는 이들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는 나이와 지위, 시대를 불문하고 늘 따라붙는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누구나 삶에서 가장 예민한 시절이 있다. 하이틴 무렵이다. 영혼과 지혜의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극대로 나타나는 시기면서도 동시에 억압의 굴레를 가장 수치스럽게 느끼는 때다. 순수 영혼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서, 삶의 굴레를 감당하게 되는 성인기로의 통과 과정이기 때문에 하이틴의 촉수는 그만큼 예민하다.

 

한스 기벤라트라는 젊은 영혼이 있었다. 그는 그 전환기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순수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에게 억압의 굴레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가중되는 억압의 수레바퀴 아래서 가련한 영혼 한스는 그만 질식하고 만다.

 

책을 덮는데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더니 주인공이 죽은 것이다. 한스의 죽음을 그토록 허무하게 이끌고만 원인이 무엇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신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고도의 억압기제가 그를 신경쇠약으로 만들어서 그럴까, 마을에 사는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그를 충격으로 밀어 넣었을까, 급작스레 떠나고만 하일너의 실종이 그의 의지할 바를 없애버려서 그럴까, 자신의 수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하던 교장이 한스의 변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대를 포기하고 말아서일까.

 

어쩌면 그 모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서 생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게 한 건 애정 없는 기대감으로 꽉 찬 억압의 사슬이었으며, 누구나 다 타고난 바가 다르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권위 있는 자들의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유일하게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어려서 돌아가셨고, 간신히 마음을 얻고 세상을 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준 시인 친구는 생사를 알 수 없다. 총체적인 질풍노도의 소용돌이는 그를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던 것이다.

 

 

 

 Scene #2  주어진 길을 찾지 못하다 

 

한스는 학교와 사회라는 두개의 큰 수레바퀴 아래 깔려 절망하다가 안타깝게 죽어간 슬픈 영혼의 초상이다. 그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을 꿈꾸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에게 고통스런 번민이 찾아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역설이다.

 

금단의 정원, 비좁은 새장 안에서는 영혼의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한스, 그래서 결국 영원히 자유로운 안식의 세계로 서둘러 떠나버린 한스. 학교와 세상에 드리워진 억압의 굴레가 조금만 더 느슨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지평이 좀 더 넓게 펼쳐져 있었더라면, 한스라는 젊은 영혼은 그렇게 죽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우연으로써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헤세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한스가 고향에서 발견한 것은 보통 사람 사이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그것과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의도한 길이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 또는 정신적 추구의 길이 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높고 낮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고, 그것을 통하여 모두의 삶에 기여하는 것일 뿐이다.

 

헤세는 자신의 고등학교 중도 퇴학을 설명하면서 자기는 열두 살에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시인을 위한 정해진 길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한스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행복을 발견함과 동시에 정신의 길이 자신의 길임을 새삼 깨닫게 되지만, 그에게 주어진 특정한 길을 찾지 못하다가 죽음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세는 교육을 세속적인 출세에만 연결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통념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 결과 그는 교육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생각한 감이 있다. 그러나 『수레바퀴 아래서』의 체험적 기록이 교육의 근본에 대하여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Scene #3  수레바퀴는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한스는 죽기 전에 갑갑한 세상에 대한 울적한 심정을 못 이긴 나머지, 흐리멍텅한 상태로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 시구를 읊조린다.

 

 

아, 나는 피곤합니다.

아, 나는 지쳤습니다.

지갑에는 돈 한 푼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습니다.

(183쪽)

 

 

한스는 성공을 강요하는 세상에 지쳤고 피로을 느꼈다. 지갑에는 돈 한 푼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다. 그뿐만 아니다. 한스가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다. 그는 꿈도 없었다. 인생이 달린 입시 제도에 지쳐 열정과 꿈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슬픈 시구다.

 

시대가 변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도식이 있다면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원래의 나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치스런 놀음이며, 우정 또한 성공에 저해가 된다면 끊어야 하는 것이며 오로지 믿을 바는 신격화된 우상에의 복종과 권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상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권력이거나 돈, 지위나 명예, 인기나 몸과 같은 표면적 허상 같은 것들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고, 그에 따른 불이익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 사회는 그런 자를 신경 쇠약이거나 의지 박약, 정신 착란 등의 이상증후군 환자로 진단하고 판명하여 제 집으로 보내버린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죽음은 우연을 가장한 명확한 사회적 타살이다.

 

독일어의 직업이라는 말, ‘Beruf’에는 부름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교육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부름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자기 형성을 꾀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또 직업의 부름에 맞아야 한다. 이 과정은 책만으로 또는 시험공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회와 장인적 수련, 거기에서 오는 삶의 기쁨. 이런 모든 것이 자기형성에 관계된다. ‘수레바퀴’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아득하기만 한 이야기로 들린다. 수레바퀴는 지금도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 하더라도 꿈을 꾸는 자들의 마음은 늘 따뜻했으면 좋겠다. 인간이 타고난 바가 다 다르듯이 꿈도 사랑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돈이나 지식, 외모만으로 한 인간을 단정 짓지 말고,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자신이 정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노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나태함의 문제로만 치부해야 할까. 자유로운 꿈을 꾸지 못하도록 눈치를 주는 기성사회의 시선이 열정이 넘치는 젊은 영혼을 무력하고 무능한 몽상가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지지하고 믿는다면 혹독하게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올해 새해 소망으로서 꿈을 꾸는 자는 아름답다는 말이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한낱 구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부모님들, 아니 어른들. 젊은 친구들의 꿈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그걸 이루기 위해서 진심으로 도울 마음이 없다면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제발 젊은 친구들에게 꿈이 뭔지 물어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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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1-0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건강하고 평온한 새해되세요.

젊은 친구들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꿈이 뭐니... 하고 쉽게 물어볼 문제가 아닌거 같아요.
기성 세대 역시 자신의 꿈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괴로와하니까요.
그만큼 자신에게 만족하고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날이 화창하고 따스하네요, 올해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cyrus 2014-01-06 02:32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마고님~ 어느 정도 삶의 목표를 잡아야 하는 철들 나이가 되었는데도
가끔 감정이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오네요. 그래도 스스로 마음 추스리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요즘 날씨가 참 좋네요. 당분간 또 날씨가 춥다던데 감기 조심하세요 ^_^

아이리시스 2014-01-0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이 책 읽었어요, 유년시절에나 읽었을 법한데, 저는 헤세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제야 조금씩 다가오는 걸 보면. 무척 재미있었고, 결말에 놀랐어요,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데미안>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고, 다른 작품도 좀 더 천천히 기회를 봐야겠어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다시 한번 인사해요. 감기 조심하구요^^

cyrus 2014-01-08 21:01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이번에 지금까지 번역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어보려고 해요. 요즘 알라딘 중고샵에 가면 헤세가 쓴 책 몇 권 구입하곤 해요. 이제 <게르트루트>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크눌트><데미안> 순으로... ^^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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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모모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로자 아줌마를 잃을까봐서다. 더 이상 창녀의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아이들도 다 떠났고, 모모 혼자서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킬 뿐이다. 모모는 어느 날, 로자 아줌마의 처녀 시절 사진을 보고 슬픔에 잠긴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던 로자 아줌마, 이제는 늙고 병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한 때를 기억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잊혀야 할까.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로자 아줌마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둘만이 아는 지하실 방에서 잠자듯 조용히. 모모는 지하실에서 로자 아줌마의 시신과 함께 3주를 더 지낸다. 아직 어린 모모에게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와 관심을 끌기 위해 물건을 훔치는 모모가 점점 애틋한 사랑을 깨닫고 행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원초적 의문이 든다.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서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타인을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모는 열 살인 줄 알고 살아가다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 온 아버지에 의해 갑자기 열네 살이 된다. 모모 역시 신이 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마침내 열네 살임을 자각하는 것이 사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모가 자신의 나이를 깨닫듯이 갑자기 훌쩍 커버리는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은 어리둥절하고 설레지만 아픈 것이다. ‘1년’이라는 길면서도 적지 않은 세월의 횟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제야 느끼게 되는 은밀하고 위대한 삶의 변화.

 

누구에게나 갑자기 열네 살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 내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었고 그 나이가 아니었으면, 알고 있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모모가 자신이 난쟁이가 아닐까 의심하듯 우리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 볼 수 있다. 그런 단계를 밟으면서, 그제야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이 자연히 저절로 자라나고 삶에 대한 통찰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생은 자기 앞에 놓여있다. 로자 아줌마의 시체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모모에게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모의 말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싸늘해진 로자 아줌마 곁에 누워있던 열네 살 모모는 결코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으며 단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저 로자 아줌마가 보고 싶을 뿐이라고. 어떤 사랑이든 간에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보고, 아프게 헤어져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건 마치 물에 들어가 본 사람과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물의 감촉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차이만큼 엄청나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가 얘기해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모모가 의지하고 사랑한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한 해가 끝나갈 무렵에 서먹해진 친구, 곁에 있는 동반자, 점점 주름 깊어가는 부모님까지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소한 감정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게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말 소중한 삶의 감각이다. 그들 중에는 하밀 할아버지처럼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는 관계도 있어서 행복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게 모모가 말해 준 삶의 진리이니까.

 

결국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14세 소년 모모가 하는 말이다. 차마 부끄러워 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소설 속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해야겠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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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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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Scene #1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

 

며칠 사이로 북한 최고 권부에서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의 영상이 실황중계나 하듯 내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옛날에도 최고 통치권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몇 차례나 되풀이되는 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당사자 측에 의해 그 과정이 외부로 낱낱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충격적이다. 과연 21세기는 IT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제국가의 권력투쟁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의지와 야심, 권모술수와 잔인함, 모략 등 부도덕한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고 하는 마키아벨리즘도 어디까지나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군림이다. 북한은 오직 권력의 유지와 군림만을 위하여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시 통제, 인간성이 머물 곳도 피할 곳도 없게 하였다. 오늘의 북한과 비슷한 상황으로, 실제 배경이 되었던 소련 공산주의는 벌써 붕괴되었으나 북한은 아직도 건재하다.

 

엄격하고 잔인한 공포 통치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고문, 격리시켜 저항의지를 꺾는다. 불평하는 사람을 밀고하게 만들어 가혹하게 처벌한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역사기록이나 사실을 조작, 윤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북한만이랴. 전체주의적인 경향은 파편화된 형태, 숨은 형국이라 해도 어디서나 끈질기게 작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기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그러하다. 힘 있는 자가 전횡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고의 진영을 궁지에 몰리는 형국을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게 되면 점점 독재 권력처럼 무서워진다. 게다가 억지 논리를 내세우는 권력자들의 말장난은 이제 ‘힘 있는 자가 말을 지어내고 그들은 그 말장난으로 힘을 유지한다’는 고전적 어록, 즉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격언이 실감난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라고 하는데 새삼 두렵게 들린다. 조지 오웰은 이보다 더 정확한 어법으로 ‘과거를 지배한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이는 역사의 기록도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되고 만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힘의 세습’, ‘권력의 세습’ 나아가 ‘이익 집단의 세습’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역사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기록된다면 엄연한 사실마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Scene #2 『1984』를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

 

권력의 세습에 기대어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와 인생을 감시하고 강요하는 체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설명하고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1984』에서 나오는 정말 끔찍한 사례 하나 제시한다면 단언컨대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1984』의 오세아니아에선 연애가 금지된다. 사람들은 오직 ‘빅 브라더’(Big Brother)를 사랑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사상경찰의 고문과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를 포기한다. 줄리아라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2+2=4’라는 진실이다.

 

윈스턴을 신문하는 사상경찰관은 ‘2+2=5’를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빅 브라더가 인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포기하고 ‘2+2는 5이다’고 말한다.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진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

가상의 1984년 빅 브라더 그리고 (수치상으로) 30년 후 현실의 북한 빅 브라더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북한 최고의 히트곡이 되어 허울뿐인 ‘위대한 영도자’에게만 (억지로) 바치는 찬가가 떠올린다. ‘그이 없인 못살아’, 진실을 포기하고 권력을 향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맹세한다면 각인을 위한 강요에 속박당하는 것이다. 노동신문으 시작을 알리는 일면 한가운데에 박힌 위대한 영도자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노래를 절절하게 불러 달라고.

 

『1984』는 언제나 읽어도 암울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안 그래도 지금 ‘갑’들의 횡포가 존재하는 소설 같은 현실 그리고 오웰이 제작한 현실 같은 소설 둘 다 본다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김씨 일가가 만든 우스운 나라의 이야기까지 접하면 평소에 안 나던 싫증도 밀려온다.  

 

빅 브라더가 소설에서만 나올법한 가상의 존재처럼 우리 세상에 유명무실해진다면 그무거운 마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이미 이런 사회를 예언한 오웰의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역겨운 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올곧은 정신력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삶을 바꾸어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이 이처럼 정확하게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을 예언한 능력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지적 성실성으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 좌파 편에서 싸웠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좌파정권 안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목도하였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친소분자들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일으킨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체험하였다. 그 자신도 희생될 뻔하였다.

 

공산전체주의의 위선을 발견한 그는 죽을 때까지 13년간 수많은 기사, 논평을 통하여 이 진실을 알리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으면서, 객혈을 해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가면서 『1984』을 완성하였고 1년 뒤 죽었다. 죽음이 코앞에 두면서도 진실을 본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쇠약해진 몸을 문학의 힘에 의지했다. 그런 점에서 『1984』는 미래의 인류에게 선물한 ‘진실의 눈’인 셈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1984년의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하고 있다.

 

 

 

 Scene #3  ‘자신의 언어’로 거대한 세상과 맞서다

 

‘1984년의 세계’에 사는, 아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외부뿐 아니라 과거와도 단절되어 있다. 권력은 과거로부터도 단절되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선조들보다 자신들이 잘 살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대중에게 강요에 가까운 강조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 기록은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진실성에서 오늘의 필요에 맞추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애정성에서 하는 주민감시나 억압만큼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과거는 기록 및 기억과 부합해야 한다. 권력이 모든 역사기록과 주민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과거는 권력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향에만 맞추어진다.

 

언어를 지배하는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되기에 오세아니아에서 '존재'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며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이러한 삼엄한 통제 가운데 윈스턴은 용기를 내어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하고 1984년 4월4일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조심스럽게 펜을 든다. 체제에 반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행위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직조하려는 것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윈스턴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윈스턴이 느끼는 한없는 무력감은 언어의 불능이 사고의 마비, 존재의 무기력임을 뜻한다. 그간 당국의 통제 아래 생활하던 윈스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낯설고도 괴로운 변신 과정이다.

 

그래도 윈스턴은 점점 더 자신의 언어를 토하며 일기를 써내러 가고, 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불만과 의문 역시 차츰 구체화된다. 하지만 거대한 세상과 맞서기에는 ‘자신의 언어’로 구체화된 생각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윈스턴의 반발은 당국의 체포로 끝난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 윈스턴은 자신을 포기하고 체제에 순응한다.

 

 

 

 

 Scene #4   “빅 브라더가 아직도 건재하는 세상, 안녕하지 못하다!”

 

우리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사소한 일탈을 저지르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정상적인 삶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고 그게 바로 삶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과 정보를 특정한 누군가가 열람하고 데이터화하여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이런 일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적되어 이용 가능한 개인정보들, 안전을 명분으로 한 무작위 감시 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 나가야 할 핵심 화두가 될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오웰이 쓴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에 사는 사람들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미스터 오웰 그리고 빅 브라더.

여러분은 이제 정확히 30년이 흐른 '1984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Good Morning, Mr. Orwell」장면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3년 12월 31일부터 1984년 1월 1일 사이 TV로 미국, 유럽, 한국 등의 현재 모습을 동시 분할 화면 등의 표현 방법을 통해 실시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TV의 긍정성, 또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견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오웰의 영혼을 향해 우주적 인사를 건넨 백남준은 이 세상에 없다. 역사적인 비디오 아트가 공개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낙관적 예언은 일부 맞다. 하지만 오웰이 진짜로 경계할 것은 경고했던 빅 브라더의 존재를 간과했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이 낳은 신기술이 전통적인 권력구조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빅 브라더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른바 빅브라더의 감시를 용이하게 해준다. 10면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더라. 빅 브라더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빅 브라더는 백남준이 좋아했던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은밀하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거대 권력이 인터넷과 핸드폰을 감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나의 머리와 마음까지도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세상이다. 끔찍하다.

 

만약에 지금 백남준의 영혼이 하늘에서 오웰의 영혼을 만나 인사를 건넨다면 오웰은 그의 인사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쌀쌀 맞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Mr Paik, It is unpleasant!’,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백남준의 인사를 이렇게 맞받아쳤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21세기 고도의 정보사회를 향해 던진 오웰의 디스토피아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응답할 때가 됐다.

 

 

 

 Scene #5  우리 국민들은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다 

 

바야흐로 겁박의 시대다.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국민들에게 으르렁대고 민중의 지팡이를 휘둘러 댄다. 겁이 없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할 정치를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감시와 개입을 시도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권력의 횡포와 오만이 판을 친다.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했는데 국가 권력은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늘에 있는 오웰이 이런 세상을 보고 있다면, 안녕하지 못하는 세상에 분노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도둑질 하지 마라”와 함께,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는 것이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운 권력의 감시와 개입은 비윤리적인 범죄 행위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멍청하지 않다, 그런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권력의 잠재적 위협에서 국민 각자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지키는 길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된 암울한 세상을 보여주는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언컨대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오웰의 소설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설마 이 소설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든 개인을 감시, 통제하고 싶은 권력자들끼리 공유하고 읽는 지침서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책 읽을 수 있는 한가로운 여유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키워 나가고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악취미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1984』는 소설이다. 빅 브라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지 마라. 독자에게 양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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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43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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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교회에서 울린 단 한 번의 종소리가 얼어붙은 강을 타고 마을에 들어선다. 시간을 굽는 빵가게를 지나 차가운 손을 비비며 꽃을 파는 여인을 위로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자를 스친다. 도시를 울리는 청명한 종소리가 있는 시간,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떨어지는 눈송이보다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크리스마스이브다. 남루한 옷차림의 과일장수가 열손가락만으로도 계산되는 수입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나가던 부랑자에게 사과 하나 건네 줄 수 있는 날, 당장 집에 먹을 것이 없더라도 따뜻한 난로가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날, 다리 밑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의 주머니가 가득 채워질 만한 날이다.

 

이런 날, 스노우볼 같은 지구에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송이가 한 사내만은 그저 스쳐지나간다. 그 앞에서는 종소리도, 눈송이도 힘없이 사라질 뿐이다. 평생 크리스마스 캐럴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을 것 같은 스크루지 영감. 그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들떠있는 당신을 노려보며 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은 모조리 푸딩과 함께 푹푹 끊여 버려야 해.”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으레 화제에 오르는 캐릭터가 산타클로스와 스크루지다. 산타는 착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데 반해 스크루지는 인색한 성격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선행의 주인공인 산타 할아버지는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동화속의 인물일 뿐이다. 오히려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스크루지 영감이 우리들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다.

 

 

 

 Scene #2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저 스크루지에게 돌을 던져라

 

스크루지를 보면 말 한 번 걸면 짜증 섞인 욕설이 나올듯한 욕쟁이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크루지를 욕하지 말자. 디킨스가 묘사하는 스크루지는 인색하고 욕심스러울망정 남에게 그렇게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젊어서부터 어렵게 모은 돈이기에 아끼면서 지내는 모습이 너무 지나쳐 사랑과 인정이 메마른 구두쇠의 화신처럼 비쳐질 따름이다. 자기 집이나 상점에서도 추위를 겨우 이겨낼 만큼만 석탄을 때는 정도다.

 

조금 달리 바라본다면 그렇게 비난을 받을 만한 부류는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을 위해 흥청망청 쓰는 것도 아니고 씀씀이를 줄여가며 재산을 지키려 드는 데야 누구라도 나무랄 수 없다.

 

그는 우리보다 열심히 일했고 우리보다 검소했으며 우리보다 열심히 세금을 냈다. 그의 검은 옷차림과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그 돈을 다 어디에 숨겨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보다 부지런히 살며 돈을 모았다. 말투와 표정을 제외하면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성직자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다. 가족을 떠나 홀로 지내는 성직자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혈육도 무시하고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사는 스크루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규칙을 지키고 사는 또 하나의 성직자와도 같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이 메마르는 고독의 그늘에 갇힌 현대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물론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상점에서 일하는 점원의 급료를 자꾸 깎으려 든다거나 이웃을 돕는 데 인색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월급을 기꺼이 더 얹어주려는 기업주가 드물고, 불우이웃 돕기에 대부분 등한하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캐릭터일 따름이다. 지금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스런 까닭이다.

 

그가 숭배하는 돈, 그것만 바라보며 벽에 똥칠하지 않고도 먹은 욕을 명줄삼아 오래오래 살 스타일이다. 이 규칙적인 인간 스크루지는 그래서 독자들이 잊고 있거나 알면서도 스스로 묵인했던 인색한 인심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보려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심술궂은 시선 속에서는 그를 조롱하며 바라보는 우리도 멍청하고 방탕한 광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Scene #3  없는 산타를 기다리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렸을 때 동화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하는 이야기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스크루지는 세 명의 유령을 만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따뜻한 이유는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에 끼워 넣어 억지로라도 만들려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내 것을 나누며 선을 베풀어 모두가 행복해야 의미가 있다는, 식상하지만 인류가 이뤄내야 마땅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요인으로는 비교효과를 들 수 있다. 돈 많은 구두쇠 스크루지의 외로운 크리스마스이브와, 돈 없는 가족의 따뜻한 크리스마스이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흡사 비교체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스크루지의 비참한 죽음 이후 아무 의미 없어진 그의 구두쇠 노릇과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은 한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현실 사회의 문제점은 스크루지에 있다기보다 선물을 받기만을 내심 바라면서 오지도 않을 산타에 기대려는 분위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생활이 고단할수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선물 보따리를 둘러멘 산타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다가 눈을 뜨고는 끝내 산타가 오지 않은 데 실망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처지다. 우리는 우습게도 세상에도 없는 산타는 잘 기다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법을 몰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고독을 삼키는 ‘어른 아이’ 스크루지가 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에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설혹 받은 경우라 해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친구들에 비해 선물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나마 산타가 방문해 주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들뜬 나머지 다시 이듬해를 기대하면서 차츰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났던 기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화려한 차림의 산타들이 각종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면 이제 산타는 동화 속의 인물이기보다 장삿속을 위한 세일즈 도구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산타가 등장하는 요란한 크리스마스 행사들이 도리어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고 동심을 멍들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산타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푼다면서 은근히 제 실속만 차리려는 사람들도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Scene #4  오늘의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우리는 스크루지의 여행을 통해 외톨이로 지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환경을 만난다.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로웠고 고독했다. 가난은 그에게 한평생의 짐이 됐다. 어린 시절, 누군가 그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선물했다면, 마음을 위로하는 크리스마스를 만들어줬다면 어쩌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돈보다 마음이라는 이 유치한 원리를 그가 진정으로 깨닫기에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혹시 그의 변화가 효과 있는 이유를 스크루지의 재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린이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아닌 진짜 원작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가 가난해서 물질을 베풀지 못하더라도 스크루지의 각성은 의미를 지닌다.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그 양을 떠나 황폐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크루지의 고지식한 인간성이 훨씬 더 돋보이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유령의 안내로 과거와 미래 세계를 두루 둘러본 그는 자신의 인색함을 깨닫고 선뜻 거액의 자선 기부금을 내놓기도 하지 않는가.

 

혹시 자신이 스크루지와 비슷하다면 각자 스스로의 미래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단 하루라도 좋다. 특히 바로 이맘때.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와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아무 날이어도 상관없다.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이 우리를 위해 즐겁게 찾아온다면 정말 고맙겠지만, 유령이 무서워서 싫어한다면 어른의 눈으로 진짜 어른 스크루지를 다시 만나 보라.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없지만, 디킨스가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잊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주위에 스크루지 영감이 있다면 그들에게 끊임없는 손길을 내밀어 온정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 지 올해 170주년이 되었다. 소설 속 스크루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스크루지는 언제나 외롭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라 할지라도. 우리의 스크루지들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모두 즐거운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는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내 옆의 스크루지가 행복해야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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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크리스마스 캐럴이 출간된지 160주년이예요? 와아....
사이러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연말되셔요.

cyrus 2013-12-25 13:18   좋아요 0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마고님! :) 제가 숫자를 잘못 적었어요. 160주년이 아니라 170.. ^^;;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으시죠?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 책 읽고 나니 기분이 즐겁고 행복하네요.얼마 남지 않은 올해 연말 이 크리스마스의 행복이 쭉
이어지길 바랍니다 ^^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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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93] 위대한 개츠비

 

 

 

 

 

 Scene #1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을 만난 적이 있나요?

 

겨울밤이 깊어간다. 피츠제럴드를 읽는다. 아니 개츠비를 만난다. 그는 초록색 빛으로 반짝이는 별이 되어 밤하늘에 떠 있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먼 우주의 한 공간에서 빛이 되어 있을 개츠비는 오늘도 희망을 간직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누군가의 간절한 열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느 날 기적처럼 소원을 이루어주는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짙푸른 어스름이 깔리는 고즈넉한 저녁 무렵에 아무런 이유 없이 파란만장했던 개츠비를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 놓은듯한 별이 묻어 있는 밤하늘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유독 초록색 빛을 발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매복해 있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내 손목을 잡고 뉴욕 웨스트에그에 위치한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에 있는 푸른 정원으로 나를 데려가곤 한다. “내가 개츠비야.” 백만장자라고 믿기 어려운 젊은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Scene #2 사랑밖에 모르는 남자

 

『위대한 개츠비』는 한 남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이다. 톰은 데이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톰은 머틀을 사랑한다. 머틀은 톰을 사랑한다. 윌슨은 머틀을 사랑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다. 작중 화자인 닉은 베이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투성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개츠비와 같이 한 사람만을 일편단심 바라보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꿈꾸는 그런 낭만적인 사랑도 존재한다. 저 안개 너머로 비치는 녹색 불을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맹목적인 사랑이다. 그녀를 얻기 위한 일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동등한 위치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데이지는 순수함을 잃고 향락과 허영에 빠진 여자가 되어버린다. 데이지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개츠비와 달리, 데이지는 그의 수많은 영국산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로 변했다. 개츠비도 깨닫는다. 돈으로 충만한 그녀의 목소리를. 그럼에도 개츠비는 데이지를 열망한다. 설사 변해버렸다고 해도 그녀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랑이 순수함을 잃는 순간 사람은 병들어 간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톰처럼, 윌슨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머틀처럼 말이다. 톰은 데이지의 허영을 비웃고, 머틀은 윌슨의 무능력함을 비웃는다. 톰과 머틀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 또한 병든 사랑이다. 머틀은 톰의 거대한 부를 사랑하며, 톰은 그러한 부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병든 사랑의 끝은 언제나 아프다. 사랑의 상실은 광기로 번져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되고 만다. 개츠비의 사랑을 질투한 톰은 개츠비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일조했다. 사랑은 사람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톰은 데이지를 뺏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향락에 빠져있는 뉴욕, 그러나 그 불빛이 모두 꺼지고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다.

 

 

 

 Scene #3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의 삶의 동력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곧 '사랑'이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가혹함으로 가득한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뻔해진다. 좌절하든지 혹은 비관하든지. 혹은 소설에 등장하는 톰이나 데이지처럼 그냥 주어진 대로, 되는 대로 살 수도 있다.

 

개츠비의 인생 자체는 좌절하든지 비관하든지 혹은 그냥 방관하더라도 될 정도로 힘들고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을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위해 이용하고 변화시키며 감내한다. 그리고 그 ‘희망’이 되는 게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희망’과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줄 아는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가 상상하고 꿈꾼 세상에 그녀가 없다면 그것은 미완성에 그치고 만다. 즉흥적으로 제 감정을 좇을 뿐인 부박한 여자 데이지가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개츠비는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라고 생각하듯 일방적인 집착. 누군가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희망’이나 ‘사랑’이란 어찌 보면 추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추상적’이라는 평가로 끝내버릴 수 없는 말들이다. 겉으로 보면 톰과 데이지가 누리는 물질풍요의 삶이나 개츠비가 벌이는 호화파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톰과 데이지의 생활은 그 물질이란 것에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질적이기는 하나 진정한 삶은 아닌 것들’이 시대의 대세를 형성하고, 그걸 삶의 목표로 여기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는 사람들은 육체를 물질로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진정한 삶’으로 채워져야 할 영혼과 마음을 가진 존재다. 육체를 채우는 물질을 넘어, 사랑과 희망에 목말라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과 희망으로 채우고자 했던 개츠비는 위대하다. 그나마도 데이지를 비롯한 더없이 속물 그 자체로만 살아갔던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의 일생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잡을 수 없는 모래알갱이처럼 허망하게 살다가 스러져 갈 뿐이었다.

 

누구의 인생인들 모두 끝난 후에 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지향점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이후 그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지고 감내하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삶의 행위다.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Scene #4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대저택의 불은 꺼지고,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사랑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처럼 개츠비를 찾을 것이고, 어디선가 개츠비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풀이 자라고, 파도가 출렁이고, 높이 뜬 달이 바다를 비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흔히들 희망에 가득 차면 행복하고, 낙담하면 불행할 거로 생각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꿈을 꾸는 사람은 몰락을 두려워하고, 절망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 후자가 절망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위대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투철한 의지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개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허망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 그의 영혼은 생전에 두 팔을 뻗어 하염없이 바라보던 부두 맨 끝에 조그맣게 반짝이는 초록 불빛이 되었다.

 

이것은 허무로 가득한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청춘에 향하는 무언의 외침이기도 하다. 허무를 딛고 일어서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나는 삶 전체를 관통하고 견인해가는 각자의 ‘초록 불빛’이 있다고 믿는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저 멀리 자신만을 위해 반짝이고 있는 불빛은 삶의 울퉁불퉁함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한 번 달음질하게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안개 너머 비치는 희미한 녹색 불빛을 의지한 채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었던 믿음. 누구나 그 위대함을 가슴에 품을 자격이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치는 오늘 밤에도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이 빛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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