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새벽에 공개된 영국 National Theatre 의 제인 에어 공연 영상 (2015). 한국에서도 개봉 되었지만 못 봤기에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한 무대 장치는 놀이터 정글짐을 닮았는데 이 무대로 제인 에어의 삼촌 네, 로우드 학교, 로체스터 저택, 샌존네 집 등을 모두 담아냈다. 열 명이 채 안되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음악도 연주하면서 여러 배역을 소화해 낸다. 턱수염 풍성한 배우가 제인 에어 아빠 였다가, 로우드 여학생 이었다가, 역마차 승객이었다가, 로체스터 나으리로 나와서 (조금 웃었다) HD 클로즈 업 영상의 폐해를 깨달았다. 세 시간 공연 시간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연극의 첫 대사와 마지막 대사가 의미 심장하다. It's a GIRL! 



왼쪽 두번째 사진 속 누워 있는 배우는 개 Pilot를 연기 중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짖으며 뛰어 다니는데 그는 로우드 학교 교장 역할도 했다. 바뀌는 역할 마다 전혀 다른 발성과 몸짓으로 인물을, 동물을 전달한다. 


책을 3년 전에 읽었고 연극을 봤으니 영화를 빼놓지 말자. 주인공의 젊음은 더 강조되는 만큼 로체스터의 (적어도) 마흔 넘은 얼굴과 능글맞은 접근이 (여기서도 대사는 은근 시적인, 혹은 연극적인 느낌) 싫었다. 마흔 넘은 남자가 열 다섯 이상 나이 차이 나는 어린 여자에게 바라는 건 "다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젊을 적 '실수'한 것은 (잘못이 아니래, 실수래) 아버지 탓이었고 이제 자신이 선택하고 새롭게 순수하게 시작하고 싶다고. 배우 소ㅈ섭 말고 로체스터 이야기. 부인을 가둬두고도 로맨티스트를 자처하는 놈 역할은 배우 패스밴더, 전 여친을 폭행한 남자가 맡았고. (한숨) 제인 에어 역의 미야 와시코브스카가 낯 익어서 검색하니 보바리 부인 영화도 찍었구나. 어쩐지 19세기 유럽 여인의 인상일까. 





같은 배우 때문에 영화를 혼동했던 적이 예전에도 있다. 오프라 윈프리와 대니 글러버 출연의 두 영화가 그렇다. 둘 다 흑인 여성의 고난사를 다루는 데 인종차별 더하기 흑인 '가족' 남자의 폭력이다. 첩첩산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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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 장벽을 향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는 두 청소년, 하이메와 안헬라의이야기다. 친한 언니의 번역서라 선물 받았는데 이제서야 읽는다. 아껴둔 마음이랄까.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이기고도 고향땅으로 돌아오기 까지 십 년이 걸렸다. 천하의 명장이 '집'인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라지만 모험과 승리의 연장이고 그의 교만에 대한 징벌이다. 반면 열두살 하이메와 열다섯 안헬라는 집을 떠나야 한다. 과테말라 소도시에서 복닥거리며 가족과 친척들과 지낸 집을 갱들을 피해 그저 살아남기 위해 떠나야한다. 멀리 미국에 일하러 간 친형, 7년 정도 못 만난 토마스 형아를 찾아 아이 둘이 간다. 어른도 없이, 정식 서류나 여권도 없이 바지춤에 이천 달라를 꼬매 숨긴채, 낯선 브로커 아저씨를 만나고 타국에 밀입국해서 낯선 도시의 수용소들을 찾아 가야 한다. 단 둘이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타말레와 또띠야, 망고를 비닐에 넣어 들고 배낭엔 옷 두어 장, 반질고리와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담아 떠난다. 


마약과 갱단의 폭력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치는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는 작년 출간된 American Dirt라는 소설로 나와있다. 오프라 북클럽에서 선정할 정도로 많이 읽힌 이 책에서는 돈을 벌 욕심 보다는 그저 생명을 유지할 '단 하나의 길'을 따라 집과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을 막으려 미국은 거대한 벽을 쌓는다. 책이 호평을 받아도 테러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고. 갱단과 마약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미래소설로 만든 <전갈의 아이>도 생각났다. 갱단과 마약, 그 폭력이 장벽을 세우면 넘어오지 않는건가. 그 장벽 너머에 갇히는 사람들은 어째야 하는가. 



<장벽 너머 단 하나의 길> 이 짧지 않은 이야기 내내 아이들은 고생길을 달린다. 잠시라도 맘을 놓을 수가 없었다. 덩달아 나도 함께 달리고 숨고 숨죽이고 (먹던 과자랑 커피가 미안해서 내려놓으면서) 읽었다. 청소년 소설이라서 비극이 없을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첫 챕터부터 미구엘이 그리 된 다음엔 어떤 어른도,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친절해 보이는 사람도 위험하다고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안들리는 거 알지만, 얘들아 그 농장의 구유에 있던 물은 정말 지지야! 그거 마시면 죽어!) 그 몇 주, 어쩌면 몇 달, 아이들이 멕시코를 거쳐 미국까지 천천히 강도를 높여가면서 위험한 길을 달릴 동안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기를, 갱단에 목숨을 잃거나 악용 당하지 않기를, 버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각자의 한계를 안타까워하면서 손을 내밀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곁에는 오뒷세우스의 아르고스 못잖게 의리있는 개 '비다 (생명)'이 함께였다. 


실제론 더한 고생이겠지. 살아남기 보다 기차나 갱들에게 먹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거야. 하비나 호아킨이 어찌 되었을까. 이제 장벽 이쪽에서 다시 저 너머 단 하나의 길을 되짚어 본다. 아이들은 잊지 않고 그 고생을 (하이메의 솜씨 좋은) 그림으로, 행동으로 사람들과 나눌 차례다. 운이 좋았지, 너희들은. 정말 다행이야. 미구엘이 보살펴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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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 도착한 책상자. 

트로이에서 빠져나간 아이네아스가 로마를 세우는 이야기를 이어서 읽으려고 한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의 행방을 묻는 남자. 늙은 아버지를 어부바하고 피란중인데 적군에게 대답 다 해주는 친절한 사람이었지. 아마 어머니가 비너스/아프로디테. 하지만 늙은 인간 연인은 아들이 챙겨야 한다. 이제 이렇게 읽어가다보면 로마의 그 대단한 시리즈를 접할 수도 있겠네.


씨네21은 25주년 특집호에 중전 마마 표지라 선택했다.

화전가. 이제야 알았네, 박삼식의 화전가. 민음사 유투브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희곡. 

두 편집자들의 귀여운 만담을 보노라면 어느새 책을 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은근하게 낚는다.
https://youtu.be/ZsrE70Em3J4



그리고, 작년의 부커상 공동 수상작. 
마가렛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급하게 원서도 사놓고 지금은 번역서 읽기 시작했는데 (페넬로피아드 읽고 마음이 다시 벅차올랐지) 하지만 금세 이성을 되찾고 치워두었음. 그러는 사이 며칠 전 주문한 Girl, Woman, Other 가 왔다. "열두 명의 여성 화자"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데 (아...바르도의 링컨의 악몽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우아하게 하드커버.

그나저나, 오늘이 올해의 백일째 날이다. 1사분기 지났다고 놀랐는데 백일도 채웠어. 
난 그동안 밥밥밥 그리고 책책책. 


역병돌아 갑갑증을   떡볶이로 풀고지고 
도서관도 닫는차에   룸싸롱이 왠말이냐 
흐드러진 벚꽃나무   봄비오면 다 지겄지
코로나야 코로나야   이제 그만 훠이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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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0-04-09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밥밥책책책 살이 찌고 몸이 아파요....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유부만두 2020-04-09 16:01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ㅜ ㅜ

hnine 2020-04-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운율의 시가 탄생했네요!

유부만두 2020-04-09 16:01   좋아요 0 | URL
비통함을 담은 시랍니다. 울고 있어요. ㅜ ㅜ

라로 2020-04-0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 님!! 못하시는 게 뭐에요??응?? 단추 다는 거 그거 뿐이신 듯...멋져요!!!

유부만두 2020-04-10 15:11   좋아요 0 | URL
전 주사 맞는 걸 못 봅니다. 겁이 많아요. 근데 좀비 드라마 킹덤은 재밌게 봤고요.
단추는 못 달아요. ㅋㅋㅋㅋ 너무 꽉 조여서 달거나 헐겁게 해서 불편하지요.
칭찬 감사합니다.

psyche 2020-04-0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음에 콕 와닿는 시조(?)!!
집에만 있는데, 하루 걸음이 300보도 안되는데 왜 이리 소화는 잘되고 입맛도 좋은지 ㅜㅜ

유부만두 2020-04-10 15: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비슷해요. 집안에만 있는데 때 맞춰 밥 먹는 건 습관같기도 하고요.
책 읽기 시작했어요. 매 챕터 조마조마 .... 강아지 나와서 루이 생가도 나고요.
언니 정말 멋짐. ^^
 

영어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표현을 봤다.
Don’t let her snow you.

부모가 모두 떠난 후 계모에게도 쫒겨난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한다. 누나는 동생에게 늘 자기는 괜찮다며 지병의 악화도 숨긴다. 누나의 병실에 뒤늦게 달려온 동생에게 의사가 말한다.
Don’t let her snow you. 누나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snow 동사. 감언이설로 혹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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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08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to cover 이런 뜻으로도 쓰여요~.^^
예전에 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종류의 마약을 하냐고 물어보면
슬랭으로 snow를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때 snow는 코케인이나 헤로인을 가리켜요. ㅋ

유부만두 2020-04-08 12:18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뜻도 있군요.
쉬운 단어의 여러 의미를 배우면서 정말 언어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걸 매번 생각해요.
 

최고! 힘 빼고 ‘훗’ 하면서 오뒷세이아를 다시 써버린 애트우드님.


신화의 상징과 의미를 벗기고 살해된 시녀(?!!) 열둘과 함께 이 거대 서사의 다른 의미를 던져준다, 그것도 현대 독자에게 직접. 이제 무엇이 “시대착오”일까, 응?!


페넬로피아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몰라서 가만 있었겠어?” 






https://www.bing.com/news/search?q=site%3anews.khan.co.kr&FORM=NWBC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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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0-04-08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진짜 좋더라구요. 애트우드 책이 다 훌륭하지만 이 책은 사랑스럽달까요?^^

유부만두 2020-04-08 08:31   좋아요 0 | URL
그쵸?!!! 힘 빼고 유머러스하게,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를 비틀면서요.
역시 대작가님이구나 싶었어요.
오뒷세이아 다음에 바로 이어 읽었더니 더 생생하고 재미있었어요.

선생님, 이클라스 너무 헷갈리는데요;;;;

그렇게혜윰 2020-04-09 03:33   좋아요 1 | URL
초등은 뭐 출석에 의의를 두면서도 결석을 안 만들려는 샘들의 여러 가지 머리 굴리기....

잠자냥 2020-04-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디세이아에서 페넬로페 캐릭터 정말 고구마 100만개 먹은 거 같아서 이 이야기 싫어하는데요, 애드우드가 어떻게 변형했는지 읽어봐야겠어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유부만두 2020-04-08 12:20   좋아요 1 | URL
이 책은 현대에 저승에 있는 페넬로페가 자기 ‘변명‘과 함께 그간 이야기를 하는 구성이에요. 챕터 사이사이엔 여러 형식으로 (고대극, 연극, 법정 장면, 강의, 노래, 시) 시녀 열둘이 속을 털어놓고요. 신화 분석부터 코메디까지 작가가 맘껏 오뒷세이아를 농락한다는 기분이 들어요. 한편으론 여성 캐릭터 끼리의 알력이랄까 긴장감이 많아서 의아하다가, 남성 캐릭터들이 끼어들 자리를 주지 않아서 그건 그것대로 재미고요.
힘 빼고 쓴 작품이라는 점이 제일 좋았어요. 오뒷세이아, 풋, 그런 느낌요.
잠자냥님의 얹힌 고구마를 시원하게 내려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