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알던 나치가 모두 잡혀간 것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에서 환영받은 것도 아니었다. 3년전까지만 해도 나치 이데올로기로 학생들을 교화시키던 선생들이 이제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민주주의의 축복에 대해 찬양했고, 매일같이 오스트리아를 해방시켜준 미국에 진정 어린 감사를 돌렸다. (23)

 

 

뇌스틀링거는 탐욕스럽게, 하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생필품 창고를 털었던 일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미군들이 묵는 학교 앞에서 "츄잉껌 플리즈, 츄잉껌"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끔씩 미군들은 아이들 속으로 껌을 딱 한 개 던졌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그 껌을 주우려고 몰려들었다. (25)

 

 

이번에는 남성을 위한 소박한 요리 모음집으로 <개 한 마리가 부엌에 왔다>라는 책이다. (45)

 

 

 

이웃한 헌책방에서 2.5실링을 내고 책을 한 권 샀다. 600쪽 짜리 책에서 200쪽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싼 거였다. <백작부인 빌레스코프스카의 일기>라는 책으로, 어린 시절의 두 해나 붙잡고 살았다. 그 이유는 먼저 이 책은 옛 활자로 쓰여 있어서 어린 그녀로서는 전부 다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 백작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이 수도원에서 난폭한 승려에게 폭행당할 위험에 빠졌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책장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거의 200쪽이나 떨어져 나간 다음에 백작부인은 어떤 파리 백작의 연인이 되어있었다. 어린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틈나는 대로 백작부인이 맞딱뜨렸을지도 모를 장면과 상황들을 상상해보았다. 이 책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책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떨어져 나가 사라진, 책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67-68)

 

 

어떤 아이가 학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그애는 학교 부적응아가 등장하는 책을 보지 않아요. 마법사가 등장하는 책을 즐겨 읽지요. (70)

 

 

독서 능력 저하는 상상력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해요. 읽은 단어가 정확하게 머릿속에서 연상되지 않는 거죠. 그림이 언어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거의 확실해요. 여가 생활에 수많은 그림들을, 특히 움직이는 화면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편리한 오락의 한 방식이에요. 그리고 자주, 오랫동안 이러한 오락에 젖어들면 텍스트를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 내는 능력은 녹이 슬지요. (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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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00.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우르줄라 피르커)

고백하자면, 우리집에 뒹굴던 <오이대왕>을 읽지도 않고, 표지 그림이 맘에 안들어, 라면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그리고 막내를 위해서 두어번 대출했던 프란츠 시리즈도 쉬운 책은 너 혼자 읽으렴, 하면서 나는 읽지도 않았다. 당연히 저자 이름은 외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락방님의 추천으로 읽게된 <깡통소년>의 저자 이름이 길고도 낯설었고, 독일어권 작가라는 설명만 읽고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반성.

 

뇌스틀링거는 1936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시절 나찌 독재와 소련군의 진군 등을 겪었고 주부로 아이 둘을 키우며 작가로 데뷔, 아직도 열심히 작품을 쓰고 있다. 그녀는 사회주의 정치성향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서 핏속까지 빨갛다고 (누구 피는 파란가?) 하면서 교훈적이고 획일적이며 갑갑한 세계 대신 자유롭고 익살스러운 세상을, 그것도 오스트리아의 독일어 사투리도 재미있게 사용하고 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오월의 2주 동안>과 <전성기의 후고>가 우리말로 나오길 기다린다. 그동안 <오이대왕>을 읽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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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5-01-19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명하다는 거 알고 오이대왕을 읽었었는데 깊이 읽고 사색하지 않은 탓인지 명성의 이유를 찾기 어려웠어요. 깡통소년도 꽂아만 두었네요. 작가의 삶을 알면 작품이 더 잘 보이겠지요?

유부만두 2015-01-19 08:50   좋아요 0 | URL
깡통소년은 뻔한 은유거나 교훈적 결말이 아니어서 맘에 들었고요. 뿡뿡유령은 좋은번역 덕에 재밌는 입말투로 아이랑 잘 읽었어요. 그러고나니 작가가 궁금하더라구요. 작가의 인생이나 신념이 기대이상이었어요. 그런데 책 명성은 독자마다 그 평가가 갈리는것 같아요.. 깡통소년, 그냥 읽어보세요. 그리고 뿡뿡유령 2학년쯤 아이들에게 읽어주시면 인기폭발이실거에요. ^^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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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나는 황정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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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1-2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읽으려구요.

유부만두 2015-01-24 16:03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되실 거에요~
 

59/400.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6년전 '일곱시 삽십이분 코끼리열차'로 만난 황정은 작가는, (내게는) 희한한 소재로 묘하게 이야기를 엮어내는 젊은이였다. 그저 쉽게 읽을 수 없는 난해한 글들이라 굳이 찾아 읽진 않았는데, 작년에 읽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는 쾅, 하고 내 마음을 두드렸다. 계속 나오는 욕설이나, 생뚱맞은 소년의 이야기나, 지저분한 옷차림의 앨리스씨...모두 차마 내 모자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더 좋다. 이 불쌍하고, 대책없이 우울한 자매, 그리고 그 옆집(아니면 한집) 소년이 너무 안쓰러운데, 그들이 마냥 저 아래 바닥에 있어서 쯧쯧, 거리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바로 내 옆에 있고 그들이 내뿜는 아주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 까지 다 던져버리고 깨부수는 게 아니라 (창비 팟캐스트 80회 방송에서, 황작가는 "실패를 기록하는 것은 너무 쉽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묵묵히 천천히 걸어가는 소라, 나나, 나기, 그리고 순자 아줌마가 고마웠고, 이들을 한 책에 담아내서 세상에 내놓아준 황정은 작가가 이뻤다. 그리고 끝까지 덤덤해서 더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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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1-18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백의 그림자>좋았어요. 근데 <앨리스> 는 영 안받아들여지더라구요....

유부만두 2015-01-18 19:55   좋아요 0 | URL
《백의 그림자》를 많이들 추천하더라구요. .. 앨리스는 과격한 이야기인데도 묘하게 좋았어요.. 이번 작품은 정말 최고에요.
 

 

 

 

 

 

 

 

 

 

 

 

 

 

 

58/400. 그 개가 온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가 "개"가 등장하는 책을 좋아해서, 덮어놓고 "개"책이라 추천부터 하고보니, 그 친구가 주문까지 했단다. 재미없으면 어쩔까, 싶어서 늦게나마 이 "개"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흠....풍자로 보자니 뭔가 빠진듯하고, 할머니 작가가 매일매일 출근해서 열쪽씩 쓴 느낌의 성실하지만 맛이 없, 아니,  '개'재미는 아닌 그냥...."개"가 주인공인 책이었다.

아니, 다시 수정해야겠다. 이 책은 인간과 인간의, 아니 한 생명과 한 생명의(?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니까) 믿음과 예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다. 주제가 도박이건, 예술, 혹은 교육이나 정치라도 결국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의 친구인가를 계속 생각하는 개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 그 개가 부인의 죽음 후, 죽기전 더 넓은 세상에서 이로운 존재가 되려고 길을 떠단다는 설정이 꽤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교훈을 강요하지 않아서 편안하다. (작가의 인터뷰집을 보니 그 이면의 세계가 조금은 보이는듯하다. 그래서 내 무지한 몇줄을 고치고 싶어졌다)

주인공 "개"가 - 이름도 없이, 그냥 개라고 함. 정체가 개인데, 이름도 개 - 학교에 가서 어찌어찌 선생님 행세를 하는 부분은 이런저런, 그러니까 교육에 대한 생각을 하게도 만들었다. 이 개는 어느 상대건 선입견 없이, 예의를 가지고 대한다. 그래서 "개"멋짐.

 

개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 이름은 개라고 해요."
"저는 안나예요."
첫줄에 앉은 소녀가 말했다.
"반갑구나."(73)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말해 볼 테니까 여러분이 직접 어떤 것을 배울지 골라보겠어요?"
이제는 모든 아이들이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개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내가 여러분한테서 뭘 배우는 게 더 나을까?"
개는 그렇게 물으며 교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의견을 말하는 아이가 없었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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