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 지나고, 봄도 도망가는 날에 읽기에는 너무 구슬픈 책이다. 이백쪽이 채 안되는 짧은 이야기와 사십쪽에 달하는 자상한 해설이 묶여 있는 이 책을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이미 오십대의 말없는 그 사나이, 이선 프롬이다. 그에게 겨울은 기구한 인생 만큼이나 겹겹이 그를 둘러싼 세월의 감옥이다. 그의 연애 이야기를 비극적 사랑이라고 불러주고 싶지만 그 결말이 더없이 춥고 스산하다.
다행히 시인이었던 저자 이디스 워턴은 이 감옥에도 여기 저기 찬란하고, 하지만 냉담하고 잔인한 겨울의 이미지를 깔아 놓았다. 그덕에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이야기가 (드라마'사랑과 전쟁'이 생각났다면, 내가 너무 통속적인걸까?) 그나마 잔잔한 생기를 띠었다.
흥미롭게도 이 비극에서 탈선남 이선은 '죄의식'을 동반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애인과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혼자 남겨질 지나를 약간 걱정은 하지만 곧, 자기가 남을 챙겨줄 처지도 못된다는 것에 절망한다. 그에게는 기독교적인 죄의식은 아예 없다. 신이 자신을 어떻게 벌하실까 하는 것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교회'는 피크닉을 열거나 '댄스파티'(물론 건전한)의 장소로만 언급될 뿐이고, 이선은 그 행사들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밖에서 들여다 보기만 한다. 다행히 교회윤리는 그의 감옥이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것도 관심 밖이다. 그가 제일 저어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처 받는 일 뿐이다. 그의 자존심도 윤리적 명예가 아니라 경제적 궁핍함을 들켜 돌려 받게 될 동정어린 눈길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진짜 무서운 감옥은 연상의 마누라 지나다. 이 여자는 깊은 주름, 툭 불거진 광대뼈, 그리고 납작한 가슴으로 만들어진 할머니로 묘사된다. 눈보라가 일어서 도시의 활기와 격리되고, 금전적인 편리와도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이선에게 부인은 진짜 감옥이다.
이런 저런 감옥들 속에서, 젊은 이선은 이십대 후반임에도 더 용기내서 일을 '저지르지' 못한다. 서부행 운임 10불이 문제가 아니다. 매티와 이선이 서로의 갈등과 욕망 (이 단어는 이 소설에는 안 어울린다. 이선은 차라리 너무 선비 타입이다.)을 확인하는 순간, 절망적인 가난한 급속 연인들은 아, 차라리, 우리 죽자!로 결론을 내버린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선택도 이선이 아니라 매티가 내린 것이다.
인생은 너무 슬프다. 이렇게 어쩔줄 모르던 이선은 영감이 되어 버렸고, 그의 옆에는 두 가지 버전의 지나만 남는다. 그의 감옥은 벽이 더 높아지고 더 두터워 졌다.
철저하게 할머니(아마 이선은 마녀라고 부르고 싶었을거다) 취급을 당하고 자기의 온갖 병에 싸여 있던 지나도 결국 감옥 같은 시골의 칠년여의 결혼 생활을 푸념하고 있었다. 하지만,그녀는 그녀 대로의 결단을 내렸고 매티를 내 보낸다. 그리고 사고후, 용감하게 매티를 거두어 준다. 그녀가 복수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복수를 당하는 것일까. 한치의 애정도 없이 작가의 펜아래에서 냉혈인으로 그려지는 지나는 해설을 쓴 김욱동 교수 말을 빌자면 작가의 이해심없던 남편의 분신일 수도 있겠다.
김교수는 불행한 이선이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고 봤지만, 나는 차라리 이선의 사고를 이야기해주는 헤일부인이 작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깡촌 스탁필드에서, 그나마 교육받고, 그나마 좀 있게 사는 헤일부인은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나' 화자에게 이야기의 처음을 (그 비밀스러움에 대한 호기심), 또 결말을 (진짜 이야기를 확인시켜주는) 책임지고 있다. 헤일 부인은 "고색창연한 저택에 걸맞게 희미하게나마 어느 정도 세련함을 지키고 있었"(15)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연히 감수성이 좀더 섬세하다는 것과 교육을 좀더 많이 받았다는 사실"(16)로 마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이런 부인이 어떻게 매티와 허물없는 친구가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통념을 깨는 작가라 하더라도 이디스 워턴은 소설 속에서 이선이라는 촌부 속에, 혹은 그의 연인 매티 속에, 바로 동화되기는 싫었나보다. 좀 클래식한 감정의 묘사 (고양이를 통한 지나의 존재감이나, 사물을 통한 떨림을 전하는 식) 만큼이나 이런 안전장치가 19세기와 지금 나의 시간 차이를 느끼게 해준다. 요즘 작가들은 이런 점에선 더 용감하지 않은가. 그래서, 19세기의 여류 소설가, 이혼의 경력과 퓰리처상 수상 이라는 여러 수식어들이 이 소설을 읽는데에 크게 도움은 되지않았다.
말없고 돈없고 결단력 까지 없던 이선과 냉정하고 늙은 부인 지나, 또 너무나 발랄하고 대책없는 매티. 그들의 이 슬픈 사랑 이야기, 또 인생과 운명이야기는 그렇지만 참 낯익다. 어쩔 것인가. 어느 날, 삶에 치여 힘들 때, 가까이서 싱그러운 젊음의 웃음을 던져주는 그녀가 (혹은 그가) 다가 온다면. 내옆의 늙은 그 할망구(혹은 할아범)과는 너무나 다른 그 사람이 손을 내민다면, 나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하지만, 사는게 그렇게 쉬운게 아니라고, 이디스 워턴은 담담히 보여준다. 그 싱그러운 미소도 결국 나를 잡아 끄는 족쇄일 뿐이라고.
200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