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복잡한데 뭐랄까, 좋은데? 했던 앨리스 스미스의 '데어 벗 포 더'를 읽고 나서 여름이 저물고 아, 이제 가을이 오는구나 할 때 챙겨둔 책 <가을>을 입동 다음 날 읽었다. 아침 온도 4도, 첫눈이 내렸다. 


제목이 주는 '가을'의 인상은 소설 속에서 풍성하게 수확을 하지도 않고 회한에 차 있지도 않다. 소설 내내 오가는 삼십 년, 혹은 육십 년의 시간과 세대 차이 동안,독자는 '누가' 말하고 '누가' 보는가에 집중해야만 고꾸라져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여기 혹은 저기, 지금 아니면 그때, 아마도 봄 혹은 여름의 화요일 아니면 수요일에 영국의 소도시에서 삼십대 혹은 열한 살 엘리자베스는 엽집 할아버지와 (그만이 듣고 이해해 주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 책의 첫 챕터는 '데어 벗 포 더' 처럼 급작스럽다. 뺨과 뒷통수를 맞는 기분도 들었다. 해변의 시신, 혹은 정신은 몸/물질의 안에서 또 밖에서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 해변의 모래알, 햇볕, 주변의 인간들, 너, 나, 독자의 시선에 사인을 보낸다. 자, 잘 봐. 정신 잘 차리라고. 


대니얼 할아버지는 엘리자베스의 열한 살 때 이미 팔십 대의 노인이었다. 작곡도 하고 책과 미술품을 즐기고 (공부하고) 옆집 꼬마에게 건네는 인사는 늘 "잘 있었니? 뭘 읽고 있니?". 뭔가를 읽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추억하고 (싸우며) 해석하고 잊기 위해 (싸우며) 지내는 할아버지, 그런데 그 할아버지도 백하고도 한 살 잡숩고 요양원에 누워계신다. 그를 매주 찾아가 귀에 대고 (읽는 중인 책 이야기도 하고) 가망 없는 미술사 강사직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어디 갈 계획도 없지만 여권 갱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진짜 아이덴디티'를 증명하려 공무원들과 싸우고) 평생 합이 맞지 않았던 엄마와 일상사의 수다를 나눈다. 잠깐만, 빠지면 섭하니까, 부재하는 아버지와 그에 대한 꿈도 넣어줍시다!? 오케이. 


소설 전체는 오해, 혹은 말장난과 확대되는 중의적 이야기의 밀페유mille feuilles를 쌓는다. 지금 2016년의 브렉시트로 불안하게 분열되고 이민자 혐오를 터뜨리는 영국, 1960년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여성 팝아티스트 (이미지의 이미지로 작업했던) 폴린 포티, 그녀의 타자성, 혹은 박제된 여성성, 2차대전 중 단편적인 프랑스에서의 (아마도 유대인 이송) 기억, 너무 똑똑했던 다섯 살 아래 누이,  더해 엮여서 연극이나 독서로 등장하는 오비드의 '변신', '멋진 신세계', '나귀가죽', '템페스트' 의 제국주의와 인간의 징글 징글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멋들어지게 보인다. 뽐내봅시다, 우리의 독서 경력! 프루스트도 빠지지 않긔.


그러다 독자가 책 제목 '가을'을 잊을 무렵, 툭 튀어나오는 여름 오빠와 가을 누이 노래의 슈퍼마켓 광고영상. 소설 후반부에 급발진하는 주인공의 엄마(의 진짜 모습) 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아, 내가 읽은 건 뭘까, 어지럽고 갸우뚱하면서 입맛을 정리하는 박하맛 쵸콜릿을 먹는다. 그래도 <데어 벗 포 더>의 인물 유형들이 재결합하는 것 같기도 해서 조심스레 정리를 해보는데 스스로 골방/나무/늙은 몸/관에 들어가 눈을 감고 회상에 몰입하는 다니앨 옹 부터 열한 살 여자아이와 삼십 대 여성이 이인삼각조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공식이다. 하지만 두 소설이 확연히 다른 것은 두 소설이 출구로 뚫어 놓은 창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 그리고 독자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요, 고백할게요. 

잘 모르겠어요. 이 소설은 어려운데, 은근 읽히고, 또 좋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열한 살 (조숙하고 반항적인) 아이가 옆집 팔순 할배와 노닥거리는 건 (토 나올 것 같은 온갖 CSI 영상이 떠올라) 싫었어도, 매 챕터에 나오는 여러 책들, 그림 이야기들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말장난과 툭 툭 튀어 나오는 인생의 격언들이 가슴을 치더라고요. 


나, 앨리스 스미스 좋아요. 이제 겨울 읽을라구요. 아마도 입춘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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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1-10 20: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이 <가을>을 읽어야 할 텐데, 그냥 <겨울>부터 읽을까봐요…;

유부만두 2021-11-10 20:50   좋아요 2 | URL
겨울은 또 얼마나 비슷하게 또 다르게 이야기를 플어놓을까요? 전 이번 책으로 앨리스 스미스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말장난과 역사 이야기도 좋았어요.

Falstaff 2021-11-10 20:55   좋아요 3 | URL
제가 소싯적부터 자주 쓴 구절 가운데 이런 게 있습지요.
아무리 추워도 11월까지는 가을이라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라고...
ㅋㅋㅋㅋ

Falstaff 2021-11-10 20: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오, 며칠 있다가 읽을 책입니다. ㅎㅎㅎ
앨리 스미스는 <데어 벗 포 더> 미끼로 잠자냥 님의 낚시에 제대로 걸려 계속 읽고 있는데, 아이고, 진짜 괜찮아요!!!

유부만두 2021-11-10 20:48   좋아요 3 | URL
전 ‘데어 벗 포 더’가 더 나았어요. 그래도 앨리스 스미스, 이젠 제 작가입니다. (도장 꽝) 책에 ‘월튼네 사람들’ 이야기도 나오는데 … 팔스타프님, 아시죠? 그 느낌?!

Falstaff 2021-11-10 20:50   좋아요 3 | URL
아이고, <월튼네 사람들> 그게 은제쩍 드라마예요. ㅋㅋㅋㅋ
우짰든 이 앨리 스미스라는 스칸디나비아 혈통으로 보이는 스코틀랜드 레즈 언니의 글은 정말, 정말 마음에 들어요!!

붕붕툐툐 2021-11-10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려운데 은근 읽히고 또 좋은 책 너무 궁금해요! 이 가을의 끝을 잡고 읽어보고 싶네용~~

유부만두 2021-11-11 08:26   좋아요 2 | URL
선생님, 가을 다 갔어요~~~ 담주에 수능이에요!

이 책은 좀 어지러운 편이고요 <데어 벗 포 더>가 더 정리된 느낌이에요. 두 소설 다 좋았어요.

붕붕툐툐 2021-11-11 21:59   좋아요 1 | URL
아... 가을 보내줄게요..ㅋㅋㅋㅋㅋㅋㅋ

라로 2021-11-11 0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부만두님께 넘 약하니까…😳

유부만두 2021-11-11 23:01   좋아요 2 | URL
훗, 낚이셨군요, 라로님.

psyche 2021-11-14 1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더 안 사려고 했는데 <데어 벗 포 더>를 꼭 사야할 것 같은 느낌이...

유부만두 2021-11-17 07:17   좋아요 0 | URL
데어 벗 포 더, 추천합니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확실한 기쁨‘을 안고 가시는 거에요. 근데 언니야, ‘밀크맨‘도 꼭 챙기셔야해요! ^^

2021-11-18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8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