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정여울 님께서 알라딘으로 보내주신 3월의 좋은 어린이 책, <아르베>의 추천글입니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아픔을 간직하는 법"
어린 시절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특히 죽음이었다. 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까. 어른들은 죽음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알려주었다. 아이가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죽음에 대한 달콤한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머나먼 나라로 이민을 갔다든지,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지켜보신다든지,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든지,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신다든지. 에르베 부샤르의 <아르베>는 이러한 친절하지만 상투적인 충격완화법을 쓰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이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는 과정을 흑백 필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그려낸다. 이 동화의 아름다운 삽화는 단지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빈곳을 메우고 이야기의 울림을 증폭시키며 페이지마다 살뜰하게 사건에 개입한다.
아르베는 동생 깡땡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아 늘 동생 옷을 물려입을 지경이지만, 보기와는 달리 이미 세상을 향한 성숙한 '입장'을 지니고 있다. 아르베는 이미 엄마의 육아 스트레스와 신경질적인 태도를 날카롭게 해부하기도 하고, 엄마의 봄과 아빠의 봄과 자신의 봄이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묘사할 줄도 안다. 엄마의 눈에 비친 봄은 "온 세상이 돼지우리 같은 시절"이고, 아버지의 봄이란 "풀과 나뭇잎으로 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드는 때"이지만, 아르베에게 봄이란 "진흙으로 무거워진 장화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지는 계절"이라고. 바로 이 봄날,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온동네 사람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실은 앰뷸런스를 목격하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아르베는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미처 돌볼 겨를도 없이, 충격에 쓰러져 울먹이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목격하고야 만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싱글맘이 된 엄마들은 씩씩하기 그지없지만, 아르베의 엄마는 너무도 솔직하고 나약해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제 어떡해? 어떡하지?" 대꾸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하며 괴로워하는 엄마를 보고서야 아르베는 깨닫는다. 아빠가 안 계시는 이 막막한 세상에서, 이제 내가 엄마와 동생을 돌봐야 하는구나.
죽음은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다시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 새로운 의미로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가중시킨다. 아빠의 장례식은 아르베에게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한 남자가 죽자, 장례식은 추모의 인파로 물결친다. 사람들은 관에 누운 아빠의 모습을 보고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한다. 돌아가신 아빠의 얼굴을 보고 짓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저 수많은 표정 속에서 내가 지을 표정이 없다니. 이렇게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데, 내가 보고 싶은 딱 한 사람의 얼굴이 없다니. 아이는 그제야 자신이 견뎌야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겪어야 할 충격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깨닫는다. 너무 슬퍼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 싶다. 너무 아파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곧 내가 없어지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아이는 관속에 누운 아버지의 얼굴을 먼발치서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산산이 해체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는 이렇게 해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마음 속의 영웅을 모방하는 데서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사실 아르베가 점점 작아져서 보이지 않게 된 데는 '롤 모델'의 역할이 있었다. 아르베는 점점 작아져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된 한 사나이, 스콧 캐리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커다란 고통에 직면했을 때 '기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르베는 '잭과 콩나무'나 '신데렐라'나 '피터팬'이 아닌, 별로 유명할 것 없는 평범한 사나이 스콧 캐리를 롤 모델로 삼은 것 같다. 스콧 캐리는 멋진 남자였지만 점점 작아지는 마법에 걸려 딸이 갖고 놀던 인형의 집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아내의 손가방 안에도 들어가 보고, 고양이에게 쫓기기도 하고, 거미와 싸워 영웅적인 승리를 일궈내기도 한다. 스콧 캐리는 마침내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아질 때까지, 끝내 멋졌다. 아이는 수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세상의 고통을 잊어버린 스콧의 이야기에서 슬픔을 이겨낼 소중한 열쇠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아르베>는 아빠가 멀리 돈 벌러 출장 갔다고 변명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지켜보고 계신다고 미화하지도 않고, 어떤 충격 완화 장치도 없이 그 슬픔의 중심 속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그리하여 어떤 수식어도 조미료도 없이 슬픔 자체를 절절히 이해하게 만든다. 아르베는 슬픔이 너무 커서 자신이 저절로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을,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깨닫게 된 것이다. <아르베>는 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물샐 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번역의 묘미 또한 읽는 즐거움을 더 해 준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견디는 법, 그것은 슬픔 자체에 차라리 푹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고통에서 도망치거나 애도의 의식을 장황하게 치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그렇게 슬픔 속으로 깊숙이 헤엄쳐 들어감으로써 슬픔을 견딜 것이다. 아픔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껴안음으로써 아이는 슬픔 또한 우리가 보듬어 안고 끝내 지켜야 할 그 무엇임을 깨닫지 않을까. - 정여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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