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채 한 해가 지나지 않은 일이다. 이게 무슨 고릿적 영어사전 씹어 먹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의 가짓수는 언제나 일정하기 마련이고, 그나마도 환경 혹은 취향에 따라 내뱉는 말은 대부분 상위 몇 퍼센트의 단어들에 한정되어 있으니. 만날 같은 말만 하는 앵무새가 되어 가는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외국어를 배울까 생각했다.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도 한 번 불러보고,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시를 직접 그 나라의 언어로 읽는다면, 매일 바보 같은, 같은 단어들을 늘어놓기를 그만두고 나 역시 무언가 근사한 말을 내뱉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보 같은, 그런 기대로.
그래서 집에 쌓여있는 스페인어 책이 몇 권, 기웃거린 프랑스어 책 또한 몇 권,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 발견한, 족히 15년은 되었을 일본어 책이 또 한 권… 아, 그렇구나. 나란 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 이 생활(生活: 1. 정해진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게으름(할 일을 제때에 안 하고 늑장을 부리거나 움직이기 싫어 미루는 짓) 속에서 살아왔구나, 라고 그제야 깨닫고. 그렇다고 ‘Que sera, sera’ 할 수는 또 없어서 나는 사전을 읽기로 했다는 지루한 이야기.
그래도 나름대로 대학생활을 ‘국어국문학’에 투신(?)한 사람으로, 조금 그럴듯한 사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아니 한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나눠주는 그런 국어사전 말고, 폼 나는 <국어大사전> 같은 것을. 하지만 지갑이 너무 얇았다.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을 틈날 때마다 항목별로 읽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단어검색 외에 사전수록 단어들을 그냥 차례대로 보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고. 결국 다시, 전형적인 생활과 게으름의 압박에 국어 따위 잊어버릴까! 하는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사전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보리 국어사전>.
처음 이 사전을 본 것은 1년 6개월 정도 어린이 책을 팔고, 인문 분야로 담당을 옮기려 하던 그즈음이었다. 처음에는 놀랐고(“앗 이런 사전이?”), 다음에는 안심하고(‘좋은 사전인 것 같긴 한데, 잘 팔릴까? 에이 새 어린이 담당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마지막으로는 탐이 났다. 처음 보는 순간, 내가 읽어야 할 사전이구나 생각이 들었단 말이다. ‘남녘과 북녘의 초․중등 학생들이 함께 보는’이란 부제가 ‘너는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왕년에 초등학교(조금 에누리 써서 국민학교까지) 안 다녀 본 사람이 또 어디 있어? 하는 조금 뻔뻔한 마음으로.
하지만 이미 내 것이 아닌 분야. 결국 사전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새 어린이 담당자님이 이 사전을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파시는 것을 손가락 빨며 지켜볼 수밖에. 그래서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진다. 어쨌든 이 사전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나름대로 합당한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 듯한 이 시점에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이렇게 기나긴 서두를 쓰고 있는데, 사실 사전에 대해선 ‘반갑다’란 말밖에 할 말이 없어서 조금 미안하다. ‘초․중등 학생들이 함께 보는 사전’이 무에 그리 반갑냐고? 마침내 손에 쥐고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고, 그동안 기다렸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서 반갑다. 그렇게, 반갑다.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국어대사전’이라고 해보았자 담배냄새 술냄새 찌든 학과방에서 언제 펴냈는지 모를 낡은 사전 껍데기만 보았던 게 전부인 나에게 ‘국어대사전’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대학시절 내내 선후배동기를 막론하고 그 사전을 펼치는 걸 본 기억도 없는데. 결국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 대부분은 숙달된 문학 독자이거나 인문 독자이거나 영어사전 독자일지는 몰라도, 국어사전 독자로 치면 초보일 뿐이 아닌가.
그래도 굳이 따져보자면, 일단 글씨가 일반 단행본 정도로 크다. 굳이 눈을 쨍그리지 않아도 수월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어 좋다. 보리출판사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밀화가 적지 않게 있어 ‘돌단풍’이니 ‘세스랑게’니 이름만 들어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즐겁다. 예문으로 쓰인 글들이 하나같이 정겹다. ‘진작’의 예문은 “숙제부터 진작 해 놓을걸”이고, ‘이를테면’의 예문은 “들에 피는 꽃, 이를테면 코스모스 같은 것이 좋아요”이니까. 북녘 어린이들이 쓰는 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가닿다’라는 말을 종종 쓰면서도 그것이 북한말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사전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오똘대다’라는 말을 듣기나 했을까.
너무 칭찬일색인 걸까.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린이들도 알아야 할 것 같은 단어들 몇 개가 빠져있다. 이를테면, 누구나 처음 사전을 손에 쥐던 날 숨죽이며 찾아보았을 그 단어(영어사전으로 치면 sex, 국어사전으로 치면 ‘성교’ 정도?) 같은 것.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 단어가 꼭 빠져야만 했을까. 아니면 역시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너무나 많이 쓰이는 ‘막장’같은 단어. 그러니까 그 본래의 뜻을 담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건 그냥 잡아보는 트집이지만.
누구나 일평생을 언어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도 그 감옥을 탈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감옥의 크기는 다 다르지 않을까. 어린시절부터 이런 사전을 읽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아마도 자신 안의 언어를, 다시 그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언어 자체를 감옥이라고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부럽다. 하지만 또 마냥 부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나도 언젠가 꽤나 숙달된 국어사전 독자가 되기 위해, 좀 더 넓은 언어 속에서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일단은 <보리 국어사전>을 마저 읽어야겠다. -
금정연(알라딘 인문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