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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 홍승은 폴리아모리 에세이
홍승은 지음 / 낮은산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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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이야기는 전부, 세상에 왕왕 있는 ‘사랑 없는 연애’의 경우를 제외하고 하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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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사랑은 완전히 다르다. 치명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다름을 잊어버리고, 그 탓에 연애는 완전히 망하고 사랑은 치명타를 입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연애를 잘 안다/한다고 말할 때, 그 알고 하는 영역에서만큼은 사랑과 연애는 한 몸이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사랑은 사랑이고 연애는 연애라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도 사랑에 대해 말할 수야 있지만 누가 형이상학적으로 사랑하고 연애할 수 있단 말인가. 연애와 사랑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관계와 그 관계에 투사되는 다양한 감정들은 모두 정치적/권력적/형이하학적이다. 그리고 정치적/권력적/형이하학적 공간에서 사랑은 연애라는 실천과 육체적으로 엮여 있다. 하여 이 공간에서 연애에 대한 앎은 사랑에 대한 앎이고, 연애에 대한 무지는 사랑에 대한 무지가 된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사랑은 개별적인 사랑이고, 개별적인 사랑이므로 장소, 시기, 대상, 기분, 건강, 취향, 가치관, 미적 감각 등등 무수히 많은 구성 요소들의 조합에 따라 그 모양이 결정되고 또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실천 중인 사랑에 대한 100%의 앎이란 100%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게 초 단위로 자신의 각도를 180도씩 바꿀 정도까지 대책 없이 변화무쌍한 존재는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예컨대 180도씩 두 번 돌면 360도라는 사실이 변화에 관한 일종의 바운더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어떤 관계든 그에 관한 유의미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리는 상대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어디며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상대의 분노를 녹이는 만능열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한 떡볶이보다 불족발이 더 효과가 크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다. 불완전한 지식이라도(어차피 모든 지식은 불완전하다) 유효하며, 감사하게도 충분하기까지 하다. 따라서 실천적으로 보면, 모든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연애(관계/대상)에 대한 앎은 사랑에 대한 앎과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모순이 우리의 사랑과 연애를 어렵게 만든다. 연애는 사랑과 완전히 다른데도 연애에 대한 앎이 사랑에 대한 앎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오작동한다. 사랑에 대한 관념에 차이가 큰 두 사람 사이에 연애/관계에 대한 지식(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쉽게 망한다. 그리고 그 망함을 통해 우리가 원망하거나 반성해야 하는 것은 연애,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실천적 노력의 부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사랑을 원망한다. 그래서 사람을 원망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더 어려운 길로 간다.
과연, 연애에 대해 모르고서 사랑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더 엄밀히 말해서, 내가 어떻게 연애하는 줄 모르고서, 내가 어떤 사랑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그리고 사랑이 망하면(이건 당연히 연애의 국면이다), 나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배우게 된다는 사실이 그 답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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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syo라는 놈은 자기 사랑(자기 연애, 그러므로 일부분 그냥 자기)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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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먹은 해, 첫 연애를 시작했다. 10월이었던가?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들을 처음 가르쳐준 사랑이었으니 실효적 첫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그 이후로 정말 내가 생각해도 희한할 정도로 꾸준히 연애를 해오고 있는데, 처음 연애를 시작하고 15년이 조금 더 되는 시간 가운데 만나는 사람이 없었던 기간은 다 더해야 반년이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연애를 오래, 혹은 많이 한 것은 하나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건 연애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잘하는 거라 쳐도 개별적인 그 연애를 잘하는 것일 뿐, 모든 연애에 확장해서 적용하기에 쓸만한 지혜가 생기지도 않는다. 언젠가 장기간 연애를 하던 내게 갓 연애를 시작한 친구 놈이 상담을 청해와서 무슨 깨우친 자라도 되는 양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지만, 실제로 그 친구의 연애에 도움이 된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옆에 앉은 다른 친구(당시 짧은 연애 후 2년째 애인구함 상태)의 지나가는 한마디(터무니없었는데!)였다. 그런 무용함은 내수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 연애를 통해 얻은 연애에 관한 앎은 뒷 연애를 풀어 나가는데 도움이 거의 되지 않거나, 도움이 되는 만큼 방해가 되는 바람에 결국은 제로섬이거나 했다. 그럼 그게 다 말짱 헛거란 말인가, 15년 동안 한 거라고는 연애밖에 없는 나는 그럼 한낱 이산화탄소제조기였단 말인가, 하며 고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연애가 실제로 연애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애 바깥 영역에서도. 연애를 통해 얻은 상대방에 대한 지식은 다음 연애를 위한 지식이 되지 않았지만 연애하는 나에 대한 지식은 다음 연애를 위한 지식이 되었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도 쓸만한 지식이 되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연애하는 모양새를 보며 나에 대해 배웠고, 철들고 나서부터는 거의 계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나를 배울 수 있었다. 길고 부드럽게 배웠기 때문에 아프지 않게 배웠다.
내가 동성을(그러니까 동성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연애였다. 그날 나는 평범한 데이트 중이었고, 그러니까 그날 그 “오빠는 나를 왜 사랑해?”하는 질문 역시 처음 듣는 것도 아닌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듣고 동공에 지진이 나면 일이 점점 커질 수 있다는 것이야 공지의 사실이므로, 나는 멋있어 보이기 위해 몇 개의 답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고 물을 때마다 다른 답을 해줄 수 있었다. 아마 그녀도 진심으로 궁금했다기보다 심심한데 이놈이 이번에는 무슨 번지르르한 말을 하는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에서 물어봤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건 일종의 유희였고 그날 대답 역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번지르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저 아이를 사랑할까? 누가 공대생 아니랄까봐, 저 아이의 특성 중 없어도 내가 사랑하는 데 문제가 없을 부차적인 요소들을 하나하나 사상해나가는 기법을 이용해서 그 방정식을 풀어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 아이가 여자라는 요소가 제외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다. 아, 나는 동성을 사랑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구나. 정확히 말하면 동성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쪽이 더 가깝겠다. 그래서 훗날에 내가 어떤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일에 놀라지 않는 자신이 놀랍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게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다르더라도 여자A를 사랑하는 것과 여자B를 사랑하는 것 사이의 다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던 것 같다. 처음 그 사람과 키스 했을 때 내가 한 생각은, ‘남자랑 하는 키스는 이렇구나’가 아니라 ‘얘는 혀보다는 입술 쪽이구나’였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생각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나는 개개의 사랑이 개별적인 사랑이라면 두 개 이상의 사랑이 동시에 전개될 수 없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아버지와 나에게 있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은 그 대상의 수와 무관하게 총량이 정해지지 않는데, 왜 연인에 대한 사랑은 그렇단 말일까? 연인에 대한 사랑이 육체관계가 개입된다는 특성이 있기에 독특성을 인정해야 한다면, 육체관계가 개입되지 않은 연애감정, 연애감정과 분리된 육체관계, 그리고 연애관계가 육체관계를 독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자를 향한 연애감정이 생길 수 ‘있는지’와는 무관한 윤리학적 논쟁이 된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폴리아모리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에 대한 증명도 당연히 연애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있고, 그 두개의 사랑은 엄연히 달랐다. 달랐으므로 나는 그게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하는 내가 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면서 이 사람과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최소한 내게 있어 유의미한 변화를 찾기는 어려웠다. 나는 언제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에는 다른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해야 할 일, 미뤄놓은 업무, 읽어야 할 책, 앓고 있는 부모님, 망해가는 내 앞날 등등의 모든 외부의 것들을 까먹어버리고 눈앞의 저 사람과 지금 여기 이 순간만을 볼 줄 아는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놈일 뿐이었다. 똑같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것이라는 인식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었을 때 내가 감당해야 했던 것은 물리적인 배분 이외에 딱히 없었다. 그와 만나는 만큼 나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다른 업무나, 행사, 인간관계로 인해 나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보통(?)의 관계였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추가적인 시간의 손실만큼 서운함이 들진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주 64시간 근무하는 여친을 만나면서 주 52시간 근무하는 다른 보통(?)의 연인을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 생기는 감정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어떤 조건일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이 만들어준다는 그 오르가즘을 나는 만들어주지 못하던 동안 질투심과 열등감 같은 것을 느끼긴 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가부장제의 영향 아래에서 자란 내가 ‘남자란 말이지~’로 시작하는 근본 없는 성관념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나하고만 섹스했더라도 내 퍼포먼스가 부족했다면 나는 비슷한 수준의 열등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가 나와 섹스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나 아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걸 못 들은 척하던 나는 실제로 ‘와, 겁나 민망하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오래 전, 다른 섹스 중에 복부가 압박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뀐 여친의 방귀소리를 못 들은 척할 때 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내 자신이 폴리아모리스트라고 생각했고, 이웃님의 서재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이 책은 내게 실용서가 되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니까, 서울에 올라와 친구 三과 둘이 살기 전에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던 것처럼, 이미 폴리아모리의 마인드는 확인한 내가 추후 다자연애를 하게 된다면 갖춰야 할 태도랄지 취해야 할 행동 양식이랄지, 뭐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저렇게까지 지나치게 나를 잘 아는 나도 모르는 나는 언제나 있다.
이 ‘현재진행형 폴리아모리 에세이’ 속 모든 페이지에는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관계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노력이 묻어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었던 도전과 위기들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고, 그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그들이 느꼈던 고통이나 희열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새어 나온다.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일들이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내가 폴리아모리스트라는 생각에 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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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시에 두 명을 사랑해본 적은 있지만, 동시에 두 명과 연애해본 적은 없다. 하나의 사랑은 연애의 국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건 내가 바라지 않으면서 바라기도 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만약 그때 두 번째 사랑을 연애로 전환하려 시도했다면, 반드시 첫 번째 연애는 박살났을 것이고 사랑도 끝났을 것이다.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두 개의 연애를 하는 것은 다르다. 관계에는 반드시 정치적/윤리적 지평이 들어서야만 하고, 어느 윤리가 옳다고 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나에 대한 상대의 사랑을 볼모로 잡아 내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연애관이나 윤리를 상대에게 설득시켜 그것에 참여하게 할 의지도 역량도 자신감도 없는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두 번째 사랑의 연애화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모노아모리 연애 중 다른 사람에게 흔들렸을 뿐인 사람과 나 자신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한 연애를 숨기고 다른 연애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걸 폴리아모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을 향한 마음이 진실이라고 하면, 그렇게 불러도 되는 것일까? 사실 폴리아모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어떤 윤리적 면책특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명사일 뿐이다. 하지만 명징한 관계와 그 관계를 위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어떤 이름만큼은 획득하겠다는 시도는 종종 그 관계를 정당화(자기 내부에서만이라도)하려는 욕망에서 태어난다. 나는 한 연애를 숨기고 다른 연애를 해나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윤리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중들이 떠올리는 어떤 문란한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하는 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연애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건 그들의 일일 뿐이고, 그 자체로 내가 응원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최소한 나에 대한 나의 개념은, 내가 관계에 대한 노력의 경험도 없이,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다양한 국면들에 대한 이해도 없이, 아픔도 희열도 없이 그저 상상만으로,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내 자신을 폴리아모리스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정도로 명확해졌다.
그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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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없는 사랑은 상상이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관계는 관계라기보다 관계의 이데아에 가깝다.
박원의 <노력>이라는 노래에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은 틀렸는데, 그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은 노래의 시작 전에 이미 끝나있기 때문이다. 끝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끝난 사랑은 그냥 끝난 사랑이다. 사랑은 당연히 노력을 수반한다. 사랑이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개념은 사랑의 발생이나 사랑이 파생하는 어떤 감정들(끊임없이 퍼주고 싶은 마음들)에 대해서는 일견 진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과정이고 그 과정은 관계라는 기반시설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동안 끊임없이 그 관계를 유지보수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야, 내가 밖에서도 관계 때문에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하는데, 딱 하나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까지 그래야겠냐. 그 사람한테만큼은 기대면 안 되냐.” 라는 말을 했던 친구는 결혼을 했다.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얼마만큼이냐 하면, 노력하지 않은 만큼은 사랑이라 말하지 않더라도 그 남은 사랑이 크고 충분할 만큼. 그건 내가 폴리아모리스트인지 아닌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폴리아모리나 모노아모리나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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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폴리아모리스트와 모노아모리스트는 획득한 역량에 차이가 있을 것도 같다.
일대일의 인간관계와 일대다, 혹은 다대다의 인간관계는 유지보수비용이 다르다. 한 사람과 대응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알면 되지만, 내 앞에 A, B 두 사람이 서면 나는 A와 B를 각각 알아야 함은 물론 A와 B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 그 관계란 더 복잡하게는 쪼개면 A가 생각하는 B와 B가 생각하는 A로 쪼개지고, 심지어는 ‘A가 B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같은 몇 겹의 주름들까지 고려해야 할 일도 종종 생긴다. 그래서 일대다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일대일의 관계만 가지는 사람에 비해 양적으로 월등한 경험치를 쌓는다.
또한 같은 일대일의 관계라 해도, 예컨대 연인관계와 친구, 부모, 직장동료, 이웃을 대하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다. 그 가운데 아마도 가장 복잡한 사고를 요구하는 관계는 연인일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놓고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 사람은 연인뿐이다. 즉, 같은 일대일 관계라는 가정에서,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다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 비해 질적으로 독보적인 경험치를 쌓는다.
그 양적, 질적 레벨업이 동시에 일어나는 관계가 어쩌면 저 폴리아모리스트의 관계가 아닐까. 나는 이 책 속 세 사람이 자신들의 삶을 ‘사랑과 관계에 대한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하는 것에 조금의 불만도 없다(그렇게 정의했던가?). 물론 그들이 자기의 삶을 걸고 어떤 실험에 돌입하려는 의지로 관계를 시작한 것은 당연히 아닐 테고, 그냥 사랑했고, 사랑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무겁고 불안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불투명한 여행길에서 그들이 획득한 가장 값진 것은 폴리아모리적 연애라는 어떤 ‘형식’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을 지나 그다음에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관계들을 발견하고 열어젖히기 위한 ‘체력’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연애 밖에서도, 오히려 연애 밖에서 더 다양한 관계들을 만들고 또 부수며 살아간다. 시대와 환경은 틈만 나면 우리에게 새로운 형식, 새로운 내용의 관계를 만들라고 요구하고 기존의 관계 틀을 갱신하라고 성화다. 때로는 그 요청들을 감당하기 버겁고 따라가기 지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이미 세상은 멈춤과 뒤쳐짐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작동하는 러닝머신이고, 설령 우리가 달려가길 멈추더라도, 멈춘 자리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또 살게 하는 것 역시 관계다. 그러니까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잘 마무리하고, 또 아예 새로운 관계틀을 형성할 수도 있는 그런 역량들은 우리 삶의 기초체력이 된다. 그 체력, 나는 그걸 가지고 싶고, 그걸 훔치지 않고 합의된 관계 속에서 많은 것들을 통과하며 직접 길러내는 경험 영역 아래에서만 폴리아모리스트가 되면 좋겠다. 지금 내가 아는 나는 그런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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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향한 실험은 늘 필요하고, 늘 일어났다. 비록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졌을지라도, 실험이 없었던 시기는 없다. 실패는 다른 실험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결국 실험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실패하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실패가 무서울 수도 있고 실험이 무서워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종종 무섭다. 하지만 실험이 무섭더라도, 그 무서운 실험을 하는 사람들까지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