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개
1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를 꺼내 조리대에 올려두고, 팬에 기름을 두른다. 읽기란, 쓰기 후라이를 위해 마음에 기름을 두르는 일일까? 달걀을 예쁘게 깨뜨리는 일은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금방 늘지 않는다. 껍데기를 어떻게 깨든 흰자와 노른자는 꺼낼 수 있고 나는 후라이를 먹게 되겠지만, 손에 흰자를 묻히지도 않고, 팬에 껍데기 조각을 떨어뜨리지도 않으며, 노른자가 팬 모서리에 찍혀 으깨지지도 않게 깨고 싶다. 문장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일 수도 있다. 뉘앙스에 집중하고, 의미를 뾰족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를 골라 사전을 뒤지고, 그래서 만족할 만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일을 생각하면서 달걀을 뒤집는다. 가장자리가 타지도 않고 노른자가 지나치게 익지도 않은 만족할 만한 후라이가 먹고 싶다. 소금, 후추, 바질, 치즈, 어휘, 리듬, 비유, 스타일. 쓰기란, 읽기 후라이를 위해 레시피를 조합해보는 일일까?
읽기와 쓰기는 가깝다. 그래서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도 가깝다. 하지만 읽기 위해 쓰는 사람과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은 가까운 듯 가깝지 않다. 읽으면서 쓰는, 쓰면서 읽는 모든 이들은 때가 오면 내가 읽기 위해 쓰는지 쓰기 위해 읽는지를 명확히 정하거나 인정해야 하고, 그 때는 여름과 가을을 잇는 바람처럼 갑자기 온다. 달걀 후라이를 만들다가도 온다.
2
창밖의 연휴는 끝이 났지만, syo의 연휴는 이어지는 중이다. 걔는 다시 백수의 길로 들어섰다. 실은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다. 그만두려 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형/오빠/syo씨/주임님, 다른 방법은 없어요? 라는 말을 정확히 47명에게 들었는데, 그만두고 나서 형/오빠/syo씨/주임님, 부러워요, 진짜 때려치고 싶다, 라는 말을 23명에게 들었다. 23/47과, 같은 마음임에도 단지 입을 다물었을 뿐인 ??/47 들을 위해 나는 잘 살아야겠다. 공무원이든 나발이든, 아닌 건 아닌 거고 안 맞는 건 안 맞는 것. 언제나처럼 syo는 겁이 없고 대책이 없다. 그래서 나는 얘가 멋있고 또 귀여울 때가 많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syo로 태어나 syo답게 살아가는 이번 생이 썩 마음에 든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구나 싶어 그간 말하지 않았다.
--- 읽은 ---
167.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
문유석, 정재민, 박주영 선생님은 전 현직 판사, 김웅 선생님은 전직 검사, 남궁인 선생님은 의사. 소위 전문직 에세이가 금값이다. 그 직업에서 나오는 소재가 에세이의 독창성을 이끌어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런데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그야말로 전문적 에세이스트들이 보기에 빡칠 수도 있는 게, 저 바쁜 냥반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쓰는지도 놀랄 노릇인데, 심지어 잘 읽고 잘 쓰기까지 하니 분통이 터질 것 같다. 아니 나는 전문적 에세이스튼데 전문직 에세이스트가 저렇게 해먹으면 책으로 밥벌이하는 내 배는 영원히 고프지, 라고 생각하실 것 같…… 아니실까? 내 알 바 아니긴 하다 ㅎ
그게 벌써 언제적 이야기냐. 변하지 않는 트렌드는 트렌드가 휙휙 변한다는 트렌드 뿐이고, 이제 평범한(?) 전문직 에세이의 시대는 갔다. 저기 멀리서 특별한(??) 전문직 에세이의 물결이 밀려든다. 그 이름부터 특수한 ‘특수’청소업. 제목부터 비범한 ‘죽은 자의 집 청소’. 슬프고, 역겹고, 슬프고, 역겹다가, 뭐가 슬퍼야 하고 뭐가 역겨워야 하는 건지 내가 도통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무서운 책이 여기에 왔다.
168. 칸트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6
어제 엄마한테 전화해서 책을 좀 부쳐달라고 했다. 엄마는 책장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냈고, 나는 그걸 보며 왼쪽 첫 번째 칸 오른쪽에서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세 권- 하는 식으로 지시를 내렸다. 책 제목을 재확인하며 지시에 따라 책을 뽑아내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신이 난 듯 들렸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던 책 선정과정은 밑에서 두 번째 칸 왼쪽에서 첫 네 권에 이르자 갑자기 고착상태에 빠졌다. 거기는 백종현 선생님 역,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1>, <순수이성비판 2>, <실천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꽂혀있는 자리였다. 내가 이제, 칸트와 직거래를 터도 될까? 판단이 어려웠다. 뽑아, 말아? 엄마가 보챘다.
칸트 입문서의 커리큘럼이 그려지고 있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커리큘럼은 일종의 계단이고, 계단이라는 건 디딤판이 여러 개 있어야 계단이다. 1층과 2층 사에 디딤판이 하나뿐이라면, 우리는 그걸 계단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벽이라고 부르지. (우리 글) 철학 입문서의 세계에는, 벽을 친 철학자들이 무수히 많다. 쉽게 읽는 OOO은 너무 후려쳤고 바로 그다음 읽을 게 연구자의 논문집밖에 없는 그런 슬픈 철학자들. 마르크스는 벌써 에스컬레이터 수준이건만…….
칸트의 경우는 이제 정말 ‘계단’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충분한 개수의 디딤판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책은 그 디딤판들 가운데 어느 한 칸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2006년 출간으로, 그때부터도 좋은 책이었지만 이전까지는 이 책에 도달하는 더 아래쪽 디딤판이 없어서 문제였다. 그래서 밑바닥에서 바로 이 책까지 한 번에 올라서려면 철학에 다리가 좀 긴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칸트인가?>도 있고,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도 있어서, 평범한 다리를 가진 사람도 그 책들을 먼저 밟고 올라선 다음 이 책까지 다리 찢기 없이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만세.
아, 쓰고 보니 또 <왜 칸트인가?> 칭송이네…….
169.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 김한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시라는 게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운과 율이 있어서, 번역을 해 놓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맛의 절반도 살리기가 어렵다. 시 번역하는 분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그 고충 가운데는, 와, 이거 진짜 포르투갈어로 읽으면 진짜 대박인데, 말맛입맛 장난 아닌데, 와, 근데 이걸 사람들한테 전달을 못 하네, 와 돌겠다, 진짜 좋은데, 와……. 이런 것도 있을 것이다. 특히 페소아의 위상을 생각하면, 역자인 김한민 선생님의 아쉬운 한탄이 여기 성남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오, 지금도 들렸다…… 아닌가?
소설은 좀 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는 시가 처음 태어난 언어를 가지고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맛이 또 그런 데 있지 않을까? 다른 나라의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 근데 생각해보면, 우리말로 쓰인 시도 너무 어렵다. 소설은 좀 덜할 수 있다. 그런데 시는 진짜 좀 읽을 줄 알아야 읽는다. 시를 배우는 맛이 또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시를 모르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알아도 그 나라의 시를 읽기 어렵다는 것.
무슨 감상이야, 이게……. 하여튼 페소아는 좋고, 의미나 표현법만 놓고 봐도 틀림없이 좋다고 적으며 급마무리 해 본다.
--- 읽는 ---
소설가의 공부 / 루이스 라무르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그 고전적 전통 /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 조르주 페렉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 서대경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
작가의 뜰 / 전상국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