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랑
1
언젠가부터 1년에 한 번은 어떻게든 크게 아프다. 주로 이맘때쯤부터 해서 한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기간이 굉장히 위협적이다. 어떻게 피해 보려고 애써봐도 도리 없다. 네 명이 같이 치킨을 먹고 나 혼자 떡하니 장염에 걸리고 나면 운명이라는 것의 존재를 믿게 된다. 너는 기어이 아프다, 아플 것이다, 아프도록 하여라……. 빚졌는데 알고 보니 채권자가 하느님인 꼴이랄까. 이번에는 몸살이었나 본데, 대충 다 극복했다. 두통의 잔여물만이 썰물 물러간 갯벌에 뒹구는 라면 봉다리처럼 남았다. 고통의 꼭짓점에서는 와 내가 정말 혼자 살긴 혼자 사는구나 싶었다.
2
큰 사람은 크게 사랑한다. 그래서 그 사랑에 찾아오는 위기도 크다. 작은 위기는 인식과 동시에 자동으로 무찌르고 나아가는 게 큰 사람의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은 작게 사랑한다. 그래서 그 사랑에 찾아오는 위기도 작다. 큰 위기는 어떻게도 손댈 역량이 없어서 그대로 파국으로 가고 마는 것이 작은 사람의 작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도 스스로를 큰 사람이라고 오해해본 적이 없다. 큰 사람이 될 수 없어서 서글픈 적이 있고, 큰 사람이 되지 못해서 쓸쓸한 적이 있다. 나는 작은 사람이라 작게 사랑한다. 어리고 어리석다. 느리고 늦되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면 처음에는 내게 없는 모습을 가진 너에게 매혹되어 사랑이 달다. 시간이 조금 지나도 큰 탈이 나지는 않는다. 큰 사람은 자신의 큼으로 작은 사람의 작음을 양해하고,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의 큼 자체를 신봉하기 때문에 다툼이 있어도 큰 소리가 나지 않고 어찌저찌 봉합된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헤어진다면, 그들의 이별은 오랜 만남 후에 이루어진다. 왜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지 정확히 짚어내기도 어렵고, 이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딱히 없으며, 돌아서면 반드시 울고 말 것을 다 아는 상태에서 헤어진다. 오늘 헤어지지 않으면 오늘 같은 내일이 올 것을 알아서 헤어진다. 가능성의 밑바닥을 핥아본 혓바닥을 매만지며 돌아선다.
나만큼 작은 사람을 만나 작고 소소하게 사랑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내가 워낙 먼지처럼 작아서일까. 그러나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뭔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 티끌만 한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가 않는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사랑하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몸뚱이는 자꾸 늙어가고 시장 가치는 한없이 0으로 수렴하는 재고자산 주제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겠고, 뭐 안 되는 것만 자꾸 늘어간다. 아, 왕년의 사랑꾼은 죽었는가. 사랑쟁이 사랑둥이 사랑동자 사랑꾸러기 러브다이너마이트 뭐 이런 것들 다 요단강을 건넜는가 으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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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맑은 하늘이 펼쳐진 창가의 자리에서 한나는 영화 속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이 아니지, 그런 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국수를 먹기 시작하고, 영원처럼 정지한 듯한 풍경 위로 헐벗은 그림자가 침묵 속에서 간혹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_ 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_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3
가만히 있어도 골이 빠그라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도 나는 책을 이만큼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하면 아, 굉장히 멋있을 뻔도 했지만, syo도 그냥 사람이었어요. 아플 때는 쉬더라구요.
--- 읽은 ---
175.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서대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
시 속에 이야기가 잔뜩 있었다. 여기 왜 이야기가 들어있지? 라고 생각했다가, 대체 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살게 되었는가 생각했다. 시가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야기는 시인가? 글쎄, 그건 단정할 수 없는 명제지. 나는 그런 논리를 배운 적이 없었다. 배우지 못해 모르는 것들과 마주치면 엉뚱한 질문을 엉뚱한 줄도 모르고 하게 마련이다. 나는 묻고 있었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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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 김봉곤
칸트 평전 / 만프레트 가이어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7가지 / 장-다비드 나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