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
1
비가 대차게 온다고 했다. 비어 있을 집이 걱정되어 죽을 뻔했는데, 매미가 울고 새들이 지저귀고 심지어 야구도 한다.
三은 오송이라는 곳으로 내려갔다. 주말에 가끔 온다고 한다.
그동안 '남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이 시간부터는 'syo 혼자 산다'가 방영됩니다.
2
모처럼 편히 쉬는 주말이라 찬찬히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써놓은 글이 있다는 것은 이럴 때 유용하다. 작년의 syo와 재작년의 나와 그 이전의 기록된 모든 syo는 지금보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줄 아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팔 할이 자조였지만 어쨌든 웃을 땐 진짜 웃었고 웃거나 웃기거나 웃게 만들거나 웃기게 만들면서 뭔가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었던 어떤 허방이나 그늘 같은 미끄럽고 어두운 것들을 요리조리 회피하며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내는 모습이었다. 2020의 syo가 2019의 syo를 부러워할 줄을 2019의 syo는 전혀 알지 못했다. 2019의 syo는 자기가 최악의 syo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재가 최악의 지점인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판정할 수 없는 문제였던 듯하다. 아무래도 슬픔이나 우울 같은 것들을 버텨낼 수 있는 마음의 힘 같은 것이 줄어든 모양이다. 그러니까 불행 체감의 수식 같은 게 있다면, 분자는 줄어들었지만, 분모가 더 크게 줄어드는 바람에 결국 더욱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2020의 syo는 도통, 웃는 글을 쓰지 않는다. 쓰지 못한다.
무수한 과거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사라져간다. 다만 그 안 어딘가에 다이아몬드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파편들이 존재할 뿐이다.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수집한다면 우리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_ 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3
그렇게 한다면 물론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의 뒤꿈치에 슬픔이 붙어올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오랫동안 슬픔만이 있을 것이다.
--- 읽은 ---
93. 타인은 놀랄 만큼 당신에게 관심 없다
이종훈 지음 / JUNO 그림 / 성안당 / 2020
재기가 넘친다. 그런데 고르지 않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늘 고민하게 된다. 성게는 뾰족한 데가 있어 놀라게 하지만, 굴려보면 공처럼 잘 굴러가지는 않는다. 누구든 한번 찔리면 나를 확 느끼게 만드는 뾰족함과, 읽는 이를 멀리까지 굴러가게 만드는 둥긂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걸까.
--- 읽는 ---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에티카를 읽는다 / 스티븐 내들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 캐슬린 배리
논어를 읽다 / 양자오
스토너 / 존 윌리엄스
혼밥생활자의 책장 / 김다은
스피노자 매뉴얼 /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산소리 /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제야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 안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