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칼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억압에 대한 인식은 억압에 대한 반응(대항해서 싸우는)일 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개념을 전체적으로 재평가하고억압의 관점에서부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 전체를 재조직화하는 것이기도 하다나는 이것을 억압받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 억압의 과학이라고 부른다현실을 이해하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만 한다이것을 주체적인인식적인 실천이라고 부르자현실 층위 사이를 오가는 운동(억압의 개념적 현실과 물질적 현실은 둘 다 사회적 현실들이다)은 언어를 통해 완수된다.

모니크 위티그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72-73

 

syo는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제일 신기하다. 찰떡같이 말했을 때 개떡같이 알아듣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은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찰떡같이 말했더니 찰떡을, 개떡같이 말했더니 개떡을 내밀 때, 그때가 바로 놀라야 할 때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 완전히 같은 언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는 특정한 뜻이 없다. 마치 원자핵 주변에 있는 전자의 위치를 확률값의 구름으로만 짐작할 수 있듯, 모든 단어는 정해져 있지 않은 모호한 의미의 덩어리다. 단지 어떤 시간, 장소, 정황, 발화자의 감정, 청자의 상상력, 발화자와 청자 사이에 쌓여있는 역사,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회의 역사, 문화적 좌표 뭐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한 순간 특정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의미는 구름처럼 흩어져 버린다. 후려치면, 맥락에 따라 단어의 의미나 뉘앙스가 다를 수 있다- 수준에서 끝날 이야기같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모든 단어의 의미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조정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흐름만은 아니다. 내가 펩시콜라에 대해 코카콜라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것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면, 직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사용한다고 착각하면서) ‘펩시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내가 속한 언어의 장에서 펩시라는 단어의 위상이 조금은 변한다. 태평양 바다에 민물 한 스푼을 부어 넣는 수준이겠으나, 분명히 변한다. 촘촘히 쳐진 거미줄에 매인 이슬처럼, 단어는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모든 언어는 그렇다.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수프 같은 것이어서, 사용자들의 관념을, 태도를, 그리고 무의식을 반영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한다면 우리가 언어를 구조화할 때 무의식의 손을 빌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모든 단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단어의 의미는 사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총합에다가 사용자의 언어 권력을 곱한 가중평균값의 위치쯤에 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는다. ‘여성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고,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되어있지 못하고, 그리하여 이건 여성이고 저건 여성이 아니고- 와 같은 개인적 견해들의 뭉텅이에 그들의 사회 언어적 권력의 크기를 곱한 다음 사용자의 총수로 나눈 어느 자리에, ‘여성이라는 단어의 사회적 의미가 존재한다.

 

내가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단어는 내 개인적 견해의 산물이므로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단어와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앞서 산출한 여성이라는 단어의 사회적의미는 거대한 질량(권력)을 앞세워 개개인이 사용하는 작은 질량의 여성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위치로 맹렬하게 끌어당긴다. 지구의 중력이 사과를 끌어당기듯이. 아무 생각 없으면,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여성을 표현하는데 여성이라는 단어를 빌려 쓰는 이상, 우리는 여성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지는 의미의 거대한 수작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여성 신화여성 신화라고 표기하는 이상, 이것은 여성이라는 언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뒤집어쓴 여성 신화를 해체하고 그것을 여성의 바깥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모니크 위티그는 여성자체를 탈출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도리어 손쉬운 일이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이미 너무 오랜 세월 오물을 뒤집어 쓴 채 사용되어 왔고, 심지어 그 쓰레기 의미들은 자연적인 것으로까지 숭배받는다. 뒤집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일단 빠져나와서 싸우자는 것이다. 주체로. 주체로서. 여성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다. 계급으로서의 여성은 여전히 우리가 손에 쥐고 싸울만한 무기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는 유물론의 인식은, ‘여성이 자연적인 것도, 신화적인 것도 아니라 사회적, 정치경제적인 위치(계급)로부터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통찰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조력자이므로. 그러니까 위티그는, 왼손에 주체, 오른손에 계급을 들고 여성을 여성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성 범주 그 자체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자는 것이다.

 

유물론적 용어로 개별 주체를 정의하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유물론과 주체성은 언제나 상호 배타적이었기 때문에이 임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그런데도 이해를 포기하는 대신에 우리는 다수가 '여성신화(우리를 지탱하는 덫일 뿐인 여성이라는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주체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모두가 계급의 구성원으로서뿐 아니라 개인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실질적 필요성은 혁명 성취의 첫 번째 조건일 것이다그것이 없이는진짜 싸움 혹은 변화는 없다.

  그러나 반대 역시 진짜다계급과 계급의식 없이는진짜 주체는 없다소외된 개인들만이 있을 뿐이다여성이 유물론적 용어로 개별 주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레즈비언들과 페미니스트들이 한 것처럼 '주체적인', '개별적인', '사적인문제가 실제로는 사회적인 문제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섹슈얼리티는 여성 개인이나 주체의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일단 소위 모든 사적인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더라도우리에게는 여전히 개별 여성 주체의 문제가 남는다신화가 아니라 우리 각자이 지점에서 인류를 위한 새롭고 개인적이며 주체적인 정의가 성 범주(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 보자그리고 개별적인 주체의 등장은 성 범주를 파괴하는 것성 범주의 사용을 중지하고그 범주를 그들의 토대로 사용하는 모든 과학(실질적으로 모든 사회과학)을 거부하는 것부터 요청한다.

같은 책, 73-74


그래서 이것은 인식의 싸움인 동시에 언어의 싸움이다. 그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역사상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강자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늘 그것을 이용해 왔다. 언어를 통해 관념을 조작하고, 관념을 통해 언어를 바꾸면서.


 

 

--- 읽은 ---



91.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

 

봉곤이의 문장이 개인적으로 더 좋았지만, 사람은 어쩐지 상영이다(귀엽잖아). 봉곤이는 잃었지만, 제발 상영이만큼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영원히 내 옆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92. 라이프니츠가 들려주는 모나드 이야기

김익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08

 

아직까지도 syo는 모나드가 제일 어렵다. 왜 이렇게 개소리 같은지 모르겠다. 내가 기묘하기가 세상에 짝이 없다는 양자역학도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부드럽게 쓱 받아들인 사람인데, 모나드 이것만큼은 진짜 뭔가 싶다.

 

 


--- 읽는 ---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타인은 놀랄 만큼 당신에게 관심 없다 / 이종훈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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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 잡고 제대로 쓰신 글인듯 합니다...^^

syo 2020-07-26 10:1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마감(?)에 치여서 후다닥 쓰고 말았습니다...^-^

다락방 2020-07-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데요?

syo 2020-07-26 10: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이제 100쪽 읽음...

라로 2020-07-26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상영 작가의 책을 미리보기로 읽었는데,,,토비 님의 글을 읽는 듯한? 근데 토비 님 글보다 약간 모자르는 느낌? (진심) 그래도 재밌네요.^^

syo 2020-07-26 10:19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 상영이 얼마나 잘 쓰는데요.... ㅎㅎㅎㅎ

2020-07-26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7-26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빨간 책 사면 뒷면에 해제-하고서 붙어 있는 글이군요. 짝짝짝짝

syo 2020-07-26 10:2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다음 챕터를 읽었더니, 제가 완전 딴소리를 하고 있던 것이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0-07-26 10: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아무렴 어때. 이 글은 책 표지 감춰도 그 자체로 읽는 맛+유익함 잔뜩이었습니다.

단발머리 2020-07-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데요. 엄지척! 척척척!!!

syo 2020-07-26 10:20   좋아요 0 | URL
바로 다음챕터에서 혼 남....

수연 2020-07-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언니가 더 좋아지는 글입니다. 실로 감탄. 아침부터 뇌가 즐거워지는.

syo 2020-07-26 10:21   좋아요 0 | URL
밤에 쓴 편지 같다, 아침에 읽어보니까 저렇게까지 단정적으로 깝칠 일이었나 싶네요....

비연 2020-07-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뤠잇!

syo 2020-07-26 10:21   좋아요 0 | URL
왜 다들 여기서 출첵을 하죠? ㅋㅋㅋㅋㅋㅋ

AgalmA 2020-07-2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작가에 관심을 더 가지려는 시기에 나타난 봉곤과 상영 제게서 다 안타깝게 점수를 잃어서 저는 맘 편한 해외 작가로 다시 ㅜㅜgogo
그런데 코카콜라와 펩시 맛을 구분 못 한다는 게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김 빠진 상태라면 몰라도 펩시는 코카콜라보다 좀 싱거운 게 분명 느껴지는데...

syo 2020-07-26 14: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상영이 봉곤이를 다 잃으셨군요. 슬픔.....
콜라사랑 27년차로 접어드네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맛은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김 빠진 상태에서조차 그 두 콜라는 맛 자체가 다른데요.

공쟝쟝 2020-07-28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봉곤찡.... 왜그랫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