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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서 제비가 높게 날았다. 흐린 가운데 대기가 투명해 멀리 앉은 산이 진한 녹색이었다. 그 녹색을 에두르며 솟아오른 아파트들은 지나치게 하얗고 날카로와 마치 지구의 뼛조각 같아 보였다. 구름이 달리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옥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어서 바람 안에서 숨 쉴 때마다 위태로움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숲이 몸을 흔든다. 옆집 빨래건조대가 뒹군다. 앞집 옥상에 늘 있던 성격 나쁜 강아지는 어디론가 치워졌다. 시끄러우니까 없어졌으면, 하고 나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맑은 날이었다. 사람은 맑은 날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흐리고, 곧 다시 비가 올 것만 같고, 옥상에 올라오는 계단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보라색 나팔꽃들이 분분히 흩어져 있다. 어제를 견디지 못하고 옆집 옥상으로부터 날아든 모양이다. 내다보니 아직 꽤 많은 꽃이 잘 매달려 있다. 위태롭되 싱싱하다. 늘 그렇다. 바람이 크게 일면, 줄기를 부여잡는 힘이 약한 녀석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바람은 한 번도 꽃잎에 친절한 적이 없다. 꽃잎도 바람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바람에 몸을 맡긴다-고 이르기보다는 바람에 멱살을 잡혀 내동댕이쳐진다-고 표현하는 게 낫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줄기는 알게 된다. 꼭 닮은 무수한 꽃 가운데 어느 놈이 줄기에 더 적합한 놈인지를. 꽃도 알게 된다. 나는 줄기와 하나가 아니었구나, 그저 줄기에 얹혀 있던 것이었구나, 이 모든 게 바람이 크게 불면 들통날 짧은 거짓말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러니 이제는 더 높은 곳으로, 그러니 이제라도 더 먼 곳으로,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다시 한 번 더…….
--- 읽은 ---
90. 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
관능의 기억으로만 남는 사랑이 있을까. 관념과 섞이지 않은 관능은 섹시하지 않고 기억 속에서 오래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안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안았을 때, 그 두 가지를 서로 구분할 수 없었을 때, 그때 그 순간 말고 그 순간을 둘러싼 많은 일들과 그 일들을 둘러싼 많은 감정들과 그 감정들을 둘러싼 많은 제약 조건들과 그 조건들로 둘러싸인 중에서도 늘 펄떡펄떡 뛰놀았던 감정들, 사건들, 그런 것들이 다 함께 녹아있는 안에서 지나간 관능들은 섹시하다. 나는 아직도 내 치골을 오래 강하게 찍어누르는 어떤 꼬리뼈의 감각이라든지 내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줄지어 떨어지던 땀방울의 온도 같은 것들을 종종 떠올리는데, 그것은 그 관능의 장면이 관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능의 뒤에, 관능과 관능의 사이에, 그것은 있다. 스포츠처럼, 여가처럼,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 더 아름답게 해 주는.
91.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
여리다는 것. 결국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내 안에다 벽을 들여놓고 내 안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