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그저께 내 부주의로 차사고가 나서 차도 없고 마음도 몸도 착 가라앉아 있던 터라 억지로 일으켜 세워야했다. 눅눅한 느낌 그대로 우산을 쓰고 멍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저녁 모임 장소로 향했다. 30분 일찍 도착한 나는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들어간 북적이는 식당의 방 한 칸에 앉아 계신 한 분을 보았다. 은발이 멋스러운 선생님이라 뒷모습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맑은 분이라 사제복 같은 옷을 입고 계신 그 분 앞에 앉으니 마치 고해성사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로 다 하지 못할 것들이 늘어가고 답답한 것들을 어떻게 풀어가야하나 혼란스러운 날들이다. 다친 마음도 쉽사리 낫지 않고 그저 마음은 또 길을 나선다. 수수한 분들과 식사와 반주 한 잔 나누고 몇 가지 결정사항들을 의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나 유쾌한 선생님 한 분의 유머로 우리는 허름한 시내의 식당가 골목을 빠져나오며 키득거렸다. 3초 내에 사과하기!  자신이 늘 말하는 것이라며 그러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ㅎㅎ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는 것, 맞지만 쉽지 않다. 사과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언니네 마당>이라고 발신인이 찍혀 있는데, 누구실까? 핸폰 번호까지 적혀 있는데 혹시 나를 아시는 분인가 궁금하다. 벌써 10회째의 잡지다. 재생용지를 썼고 매회 다른 한 가지 주제로 엮어냈다.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참신한 시각이 요소요소 보인다. 

 

어제 모임에 나가기 전 우연히 보게된 '어쩌다 어른'에서 김미경 강사의 아들 이야기에 눈시울 적셨다. 지하 10층으로 떨어진 아이 위에 서지말고 엄마는 지하 11층으로 내려가 받혀주어야 한다고. 태어나면서 누구나 갖고 있는 자존감과 천재성을 훼손하는 건 엄마의 말 한마디라고. 나는 그저께 차사고가 난 직후 엄마의 전화 한 마디로 그동안 엄마에서 품은 서러운 감정을 다 풀었다. "지금 못 오니? 방금 밥 앉혔는데.. 너 온다고 해서... 무슨 사고? 나랑 전화하다가가 그런 거 아니니? 다친 데는 없니?"  괜찮다고 하고 급하게 끊었지만 마음속에 눈물이 차올랐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배부르게 먹은 것 이상이었다.

 

존칭으로 '어르신'이라고 불러드렸다가 된통 혼났다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60대 중후반 분이었기에 그렇게 불러드렸는데 오히려 역정을 내시더란다.  '어른'이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이름이냐. 안팎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콩다래끼 난 눈이 꺼벅거리고, 창 밖에 바람이 으르릉거린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8-03-1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네 마당> 저도 한 번 사서 본적이 있는데
꽤 괜찮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잡지를 잘 안 보는 편이라 지금은 못 읽고 있네요.
이런 잡지는 정기구독 해도 좋을 텐데...ㅠ

이 존칭이란 게 좀 그렇긴 해요.
전 누구에게든 언니나 누나로 불리는 게 젤 좋던데
아무나 그렇게 불러달라고 할 수도 없고,
요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아주머니도 그렇고 죽갔습니다.ㅠ
그나마 교회에서 집사란 호칭이 젤 괜찮더군요.
이것도 불과 3, 4년전만 해도 정말 어색했습니다.ㅠ

프레이야 2018-03-16 19:55   좋아요 0 | URL
어머니 또는 어머님에 훅 무너지죠 ㅎㅎ 아주머니는 아주 죽갔습니다 진짜. 이쁜 이십대 간호사가 아버님이라 불러서 훅 꿈에서 깼다는 중년남자분도 있더라구요. 나름 동안이라 해도 그게 또 우리끼리 나누는 위안의 말, 하얀 거짓말 같은 거죠. 현실 인정 ㅎㅎ 그나저나 집사님은 깨나 괜찮은 걸요. 전 요즘 웬만하면 선생님 호칭을 자주 붙여 드려요. 언니네마당, 이미 사서 보신 적 있군요. 역시 스텔라님입니다.

2018-03-1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3-1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에서는 밤에서 아침까지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은 날이었어요.
차사고 때문에 많이 놀라지는 않으셨는지요.
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 차가운 것 같은 날이었어요.
요즘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요즘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다른 이름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쓸 수 있고요.
그렇지만 자기 이름의 책을 출간하신 위의 두 분께는 작가님이라고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8-03-17 00:33   좋아요 1 | URL
늘 따스한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란 호칭 무난하고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 들어요 저도. 특히 연상인 분에게요. 인생길 먼저 걸어가신 분이니 적절한 것 같지요^^ 오늘 바람이 몹시 찼어요 이곳은. 꽃샘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지만 때론 부담감이 드는 이름이지요. 부담감 드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

2018-03-1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7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8-03-1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괜찮으셔요? 사고라니...에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운 60대. 좋은 현상이지요?
저도 어르신보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려요.
편안한 주말 되세요^^

프레이야 2018-03-17 15:00   좋아요 0 | URL
네. 괜찮아요. 잠시 멍했지만 ㅎ 오늘 차 찾아요. 요즘 다들 젊어 보이고 실제로도 젊으니 좋은 거죠^^ 봄날 맞이 잘 하기에요.

서니데이 2018-03-21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 뉴스를 보는데, 부산에 바람이 많이 불어서 꽃샘강풍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눈도 내렸다고 들었어요. 여긴 저녁에 눈이 왔는데, 날씨가 꽤 춥습니다.^^
프레이야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18-03-21 22:48   좋아요 1 | URL
네. 어제도 그제도 대단했어요 특히 바닷가 동네는 더했구요. 날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 우산도 못쓰겠더라구요. 3월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이 생각나네요.
감기조심 하자구요.

2018-03-23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한엄마 2018-03-23 15:29   좋아요 0 | URL
즐거운 마음에 댓글 먼저 달았네요.차사고라니-괜찮으신지 모르겠어요.
저도 요즘 사고를 낼 것 같아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요.
갑자기 추워져 몸이 오슬오슬 한기가 들어섭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책으로 만나요.^^*

프레이야 2018-03-23 12:3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차는 수리했고 이제 괜찮아요. 며칠 겨울이 다시 왔나 싶더니 오늘은 아주 봄날이에요. 마음 화사하게 또 우리 책으로 만나요^^

水巖 2018-03-24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 사고라니, 다치진 않았나요?
며칠전 예전 경춘선 기찻길 공원을 걸어 가는데 책 카페가 눈에 띄어 한번 들러 봤네요.젊은이들이 책들을 보고 있었고 장소는 넓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하데요. 커피 한 잔 시키고 뽑아 온 책 좀 들쳐 보다가 중고 책 한 권 사가지고 돈을 지불하는데 어르신 차 값이라고 천원을 덜 받더군요. 노인네라고 챙겨주는데 좀 민망도 스럽고...

프레이야 2018-03-24 10:33   좋아요 0 | URL
네. 괜찮아요. 봄맞이 새해 액땜으로 생각하라더군요. 어르신 차 값 할인 좋은데요 ^^ 수암 님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순오기 2018-04-0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사고 소식에 깜놀~ 괜찮다기에 다행이다 싶어 쓸어내렸네요.ㅠ
엄마의 따신 밥 한그릇에 무한 사랑이 읽혀요!♥
선생님이란 호칭이 무난하다 싶어요.^^

프레이야 2018-04-01 17:32   좋아요 0 | URL
네. 무난한 것 겉고 적절한 것 같기도요. 차는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또 다짐해요^^
 

                                                날씨 참 좋지요

 

 

일주일 넘어 몸살감기로 칩거 중이다. 그사이 연분홍 벚꽃잎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꽃잔치도 하기 전인데 연일 오락가락하는 비바람 탓이다. 호된 비바람을 감내하며 떨어진 것은 떨어진 대로 날아간 것은 날아간 대로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들은 또 그렇게, 제 몫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꽃잎들을 망연히 바라보다 들어왔다

 

미열에 들뜬 몸으로 따끈한 국화차 한 잔을 들고 앉았다. 낯선 땅에서 동숙한 선생님 얼굴이 노란 찻물 위로 떠오른다. 열다섯 살 연상의 그분은 최상의 배려심으로 나를 대해주셨다. 긴장하고 있는 맹물이란 걸 간파하신 듯 먼저 말문을 열고 다가와 좀 편하게 자신을 풀어놓고 살라고 무언의 말씀을 하셨다. 송구하고 감사했다. 마음을 열면 또 한없이 풀어놓고 싶은 나는 큰언니처럼 기대고픈 마음에 내 이야기도 하고 남의 흉도 같이 보고 손수 까서 입에 넣어주시는 오렌지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소중한 날들의 이국풍경이 파노라마를 그린다. 비에 젖은 티타늄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 시간을 거슬러간 중세도시 똘레도의 빗방울 구르던 골목골목, 매혹적인 메스키타 사원을 나와 우산을 같이 쓰고 걸은 유대인 거리. 열이틀 중 하루를 빼놓고선 종일은 아니어도 날마다 얄궂은 봄비가 내려 나그네의 마음을 적셔 주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이렇게 쓴다.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사이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라는 이름의 우울해 보이는 열두 살 난 소년이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꿈은 루앙을 떠나 이집트로 가서 낙타를 모는 사람이 되어, 하렘에서 코밑에 솜털 자국이 있는 올리브빛 피부의 여자에게 동정을 잃는 것이었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앙코르에서도 나는 이곳에서 갈망하나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저곳에서 찾고 있었다. 낡고 허물어져가는, 영락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원들! 해를 등지고 선 높은 사원 한 귀퉁이, 한 뼘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며 한줄기 미풍에 가슴이 뻥 뚫렸던 순간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해맑게 웃어주던 커다란 눈망울, 그 안에 비치던 내 얼굴도 시간과 함께 서서히 희미해져간다. 어느 것 하나 붙잡아둘 수는 없는 법. 갈망하나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이란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바로 그 이 아닐까.

 

앓던 중, 노 수필가 한 분의 부고를 들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비바람 맞은 벚꽃잎처럼 초췌한 행색 그대로 택시를 타고 갔다. 만우절 거짓말처럼 4월의 첫 새벽에 숨을 놓으셨다 한다.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재를 피우고 고개를 숙였다. 살아서 최선을 다해 대해 드리지 못한 게 또 후회로 남았다. 미루어서는 안 될 일들이 늘어간다. 글로 남아 있는 그분은 먼 길 가셨고, 온몸에 열이 돋고 코를 훌쩍이며 연신 쿨럭거리는 나는 여기 있구나. 이 확실한 증거만 안고 황망하게 깊은 밤 비바람 속을 후두둑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곤 다시 끙끙 앓았다.

 

플로베르는 인간의 지식체계와 편견들을 풍자적으로 분류해놓은 <통상관념사전>에서 날씨를 대화의 영원한 주제, 질병의 보편적인 원인'이라고 정의했다. 꽃이 제대로 피려면, 봄이 제대로 오려면 아직 멀었다. 왔다 싶으면 어느새 가고 없을 테니 잘 보아야할 것이다.

 

날씨 탓이라 할 봄앓이도 이제는 좋아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날씨 참 좋지요, 하며 너스레를 떨 날이 꽃잎처럼 수두룩하다면야.

----------------------------------------------------------------------------------

 

몇 해 전 썼던 글인데 오늘따라 생각이 나 포스팅해둔다.

지금 나의 심정, 나의 상황이랑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4월은 어김없이 또 올 것이기에.

분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에 거듭 가슴 조이는 날들, 모두가 너무 아프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서 제자리를 찾아가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8-03-0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서재 동무님들은 이리 글을 잘 쓰신다요?

프레이야 2018-03-10 2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뒤에 실린 추모 산문 세 편부터 읽으면 정미경 작가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떠 있던 달을 기억하며. 2016년 정미경의 마지막 단편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표제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들목에 닿자 어둑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짱뚱어다리 위에 서서 한순간에 잠기는 해를 바라보았다. 왠지 목이 잠겼다. 붉은 해를 삼킨 검푸른 바다가 빨아 당길 듯 넌출거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 바다는 소리 없이 잠겨들었다.

 

외로운 섬끼리 섬을 찾아갔다. 섬에 가서도 우리는 익숙하게 거리를 두고 떠 있는 섬처럼 편안하기도 적적하기도 했다. 깊은 고요 속에 뒤척이다 여명이 밝아오자, 아무도 밟지 않은 너른 바다로 걸어 나갔다. 엎드려 있던 하얀 파도가 리듬을 타며 들고 일어났다. 파도가 일으켜 세워주는 마음을 수평선까지 뻗었다. 기지개를 켜듯 그렇게.

 

뜨끈한 매생이국으로 속을 달래고 숙소를 빠져나온 우리는 겨울햇살이 포근히 내리쬐는 섬을 천천히 돌았다. 마음이 붙들리는 곳이면 어디든 차를 세워두고 느리게 거닐었다. 섬은 그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풍경이었다. 마음이 더없이 수굿해졌다. 세상의 소음을 삼킨 그 섬에서 우리는 어떤 풍경이었을까.

 

풍경 속에 소금밭이 자리했다. 살짝 얼어 있는 그 위를 조심스레 디뎌 보았다. 소금밭 앞 쪽으로 길게 이어진 갯둑에는 나무로 지은 집들이 간격을 두고 도열해 있었다. 쨍한 하늘을 받들고 선 몸에 풍화의 흔적이 위엄마저 풍겼다. 함석판이 덮인 지붕이 부조화를 연출했지만 시커먼 나무판 사이사이 밴 냄새가 묘한 감정을 불러왔다. 소금꽃을 품었던 공기와 바람과 햇살의 냄새였다. 이제는 할 일을 못하는 이 집들은 속엣 것을 다 내놓은 빈 집, 세상의 어미들처럼 낡아가는 껍데기였다. 모진 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버텨 서 있는 육신이 삭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래된 시간이 켜켜이 쌓였을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소설 한 편이 그해 겨울을 불러준다. 정미경 작가의 유작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에는 증도에서 만났던 그 집이 등장한다. 강렬한 기억 속, 바람과 파도와 그 둘의 시간을 모두 품고 있는 소금집이다.

 

부고는 늘 거짓말 같다. 그이의 소설을 흠모하는 독자로서 믿기지 않았다. 동반자 김병종 화가는 일 년 전 아내가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하고 세상을 뜬 후, 반지하 집필실을 정리하다 원고뭉치를 발견했다. 완벽주의자가 그냥 둔 원고라면 미완일 게 분명하지만 미완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 믿고 발간을 결심했다. 자신의 강요 아닌 강요로 탄생한 소설, 당신 때문에 내 몸이 삭아져 내린다고 투정한 아내를 향한 미안한 마음에 집에 오면 방에 들어가 울음을 토하며 애도의 나날을 보내온 남자. 최초의 독자이자 최후의 비평가였던 그는 아내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면서도 잘 몰랐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처럼 서로 조금은 먼 섬이었을지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내는 쓸쓸한 사람풍경과 인물의 내면을 신랄하게 파고드는 정미경 소설의 문장들 뒤에는 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고픈열망이 담겨 있다. 그이가 얼마나 생을 사랑한 사람이었는가를 남은 사람들의 추모 산문과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남편의 발문에서 알게 되었다. 일상에도 문장에도 빈틈없이 성실하고 온전했던 그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하였던 걸까.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훈훈한 기운이 스미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매만지기 이전의 글이라 그이의 민낯과 속마음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읽다보면 아릿한 풍경과 연민이 이는 사람들 속으로 어느새 걸어 들어가 있다. 상실과 이별, 각자의 상처를 어쩌지 못해 차오르는 눈물로 짜디짠 소금꽃을 피우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섬에 모이고 섬에서 나아간다. 슬픔도 바람에 날리면 바람이 되고 눈물도 바다에 녹이면 바다가 된다. 섬은 그대로 치유의 다른 이름이 된다. 이러저러 맺어진 관계의 중심에는 버려진 소금집을 도서관으로 만들려는 남자가 있다.

 

해풍이 불어드는 도서관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멋지지 않은가.  나란히 서 있는 소금집의 칸칸을 다른 종류의 책들로 정리하고 한 칸 정도는 카페로, 작가를 대신한 그 남자가 이루어낸다. 세상의 이익에는 무관심하게, 뚝심 있게 해내는 일이다.

 

남자는 바람이 집채를 들어올려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 해도 다시 데리고 오면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을 하는 담담하고 덤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부드러움 속에 신념이 밴 그런 목소리에 나는 빠져든다.

 

언젠가 김병종 화가는 아내에게 좀 몽롱하게 써보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정 작가는 당시 똑 부러지는 말로 퉁을 주었지만 그 말을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이 소설의 끝은 다소 몽롱朦朧하다.

강풍이 불어와 집을 날려버리는 순간, 눈앞에서 세계는 잠시 탈색되었다. 우주의 뿌리처럼 빛이 바다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211p)'고 쓴 문장에서 세상을 탐미하는 작가의 형형한 눈빛이 반사되어 내 눈이 다 부시는 것 같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병에 걸렸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도서관이라면 우리도 하나의 책, 하나의 작은 세계, 곰팡내 나고 빛바랜 시간의 퇴적물이다. 영원한 동시에 덧없는 우주의 먼지, 바람에 날아올라 공중에서 빛을 발하는 하나의 집일 것이다.

 

스러져가는 소금집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 누구에게든 맞춤한 일이 운명처럼 주어진다. 그 운명을 사랑할 때 나의 집은 어디서든 참된 빛을 발할 것이다. 지독하게 사랑한 운명 안으로 훌쩍 날아간 그이, 문학의 제단 앞에서 영육靈肉을 사리지 않은 작가의 마지막 문장 앞에서 살포시 눈을 감는다.

 

 

 

 

- 바람소리가 바깥에 있을 때보다 더 세차게 들린다. 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거친 목관악기처럼 울어댔다. 불협화음은 불안한대로 아름다웠다. (중략)

누군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검은  구름을 토해내는 것 같다. 그 틈 사이로 붉은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이파리가 휙휙 날아왔다. 창고 지붕들이 들썩거렸다. 갯벌의 풀들이 바닥을 쓸 듯 엎드렸다가 가볍게 일어나곤 했다. 바람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갯둑에 서 있는데 몸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입고 있는 옷이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바다가 하얗게 일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야.  

  (210p)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2-19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9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8-02-20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본 곳이라 글을 읽으며 눈앞에 풍경을 데려다 놓게 되네요. 이 책 기증받았만 아직 순위가 밀려있어요~ 정미경 작가님 마지막 작품이라 안타가워요.ㅠ

프레이야 2018-02-20 12:46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안타깝지요. 좋은 작품을 더 볼 수 없다는 것도 생이 꿑난 것도요. 날이 따뜻해지면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요.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강요하여 쓰게 된 이 소설. 아내의 마지막 소설. 어떤 면에선 미완이지만 완결직조 전의 어쩌면 훨씬 아내다운 소설. 아내의 몸이 삭아내리고 두 달을 칩거하며 자괴감에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이 시가 위로가 되었다고 남편 김병종 화백은 쓴다. 담담한 듯 써내려가다가 마지막에 이 시와 함께 토해내는 극명한 슬픔이 아프다.
늘 지나고나야 알 수밖에 없는 것들.
나의 동반자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기록할까.



...진실로 정미경의 멈춰버린 문학을 견딜 수 없다. 멈춰버린 내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딜 수 없다. 아프고 아파 견딜 수 없다.
- 당신의 아주 먼 섬, 발문 중 / 정미경, 서늘한 매혹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02-15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18-02-18 20:3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