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니 속의 계란


                                       최영숙




나는 아름다운 장기수
탈출을 꿈꾸지
결혼해 일년 반, 임신 육개월의 배를 끌어안고서
주위를 둘러싼 소리 없는 장막
저 찬란한 가을햇살을 찢고 달아나는 탈출을 꿈꾸지

 


꿈꾸는 성
꿈꾸는 태아
문지방에 기대앉아 대문 밖을 보노라면
나가자고, 자꾸만 머얼리 저어가자고
뱃속의 태아가 툭툭 발을 차네
소싯적 내 젊은 어머니, 가을 마당 햇빛 속에 물끄러미 서 계시네

 

 
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갈대방석 위에 양팔 벌리고 누워 두웅-둥
나 누더기 되어 난바다로 떠내려가네
파란 하늘 파아란 구름 힘껏 들이마시며
뱃속의 아이에게 들릴 만큼 놀랄 만큼
소리질러야지
“계란 사시오, 계란 사시오오-”

 


깨지는 건 순간이야
앞뒤 구멍 내서 날계란 후루룩 마실 때의
비릿한 뒷맛
손에서 미끄러지면 끝장인 껍질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미끈,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한꺼번에 계란프라이 해먹어도 좋을
잘 달구어진 가을햇살, 햇살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중

 

 

 


                                                                                             - 9월 가락, 김해평야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라고

                                                절명한 시인은 묻는다.   

                                              가을햇살 아래, '난바다'가

                                                         어지럽다

                                                      살아가야한다

 

                       (옆지기 사진, 내 단상 그리고 최영숙 시인의 가슴저린 싯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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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9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2: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쨍쨍한데 또 비가 온대요? 적당히 와야할 텐데요..
저 시인의 시들이 참 절절해요.
추석 다가오는데 이래저래 마음 바쁘시겠어요.
풍성하게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래요, 님^^

비로그인 2007-09-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이어도,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대지로 내려앉는 한낮의 오로라, 저 오로라.
그리고 날개없이 날아다니는 공룡도 보이네요.(웃음)

I can fly without wings~♬ I can fly without wings~♬ I can~ fly~~

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겨울 지나 봄이 와, 인간의 숫자 계란 한판이 되면 -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내가 있고 싶은 그 자리에 자신이 서 있는지.

프레이야 2007-09-19 16:55   좋아요 0 | URL
공룡박사 엘신님, 호호 공룡 찾으셨어요?
계란 한 판이면 내년 봄에 님, 스물네 살 맞지요? ㅎㅎ
파도를 밀고 나가자구요, 우리..

비로그인 2007-09-20 10:01   좋아요 0 | URL
오옷. 계란 한판의 새로운 정의로군요! +_+
흐흐흐흐흐흐...그거, 써먹어야겠습니다. (씨익)

가시장미 2007-09-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 정말 멋있네요.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_-;
사진도 눈에 쏘~옥 들어옵니다요! 살아가야하는데..살아가야하는데..잘 살고 있는건지..
매일 매일 생각해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가야죠.. ㅠ_ㅠ 으흐

프레이야 2007-09-19 16:58   좋아요 0 | URL
그죠? 확장성 심근증으로 43세에 유명을 달리한 시인인데 고정희시인의
제자였다고 해요. 싯구들이 절절하더군요. 좋아졌어요, 최영숙시인이요.
암요, 살아가야죠, 가시장미님^^

씩씩하니 2007-09-19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재미난 시인걸요...
이 곳은 오늘 정말,,후덥지근이에요..
멋부리느라 목티 입구 왔는데..이러다 목에 땀띠 나겠어요....흑..
글보다 더 멋진..사진...늘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7-09-19 16:59   좋아요 0 | URL
발상이 신선하지요? ^^
오늘 여기도 좀 더웠어요. 땀 나던걸요.
목티 입고 나갔으면 진자 땀띠 났을라 ㅋㅋ
사진은 김해평야에요^^

icaru 2007-09-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엇보다 사진..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아요..

프레이야 2007-09-19 17:30   좋아요 0 | URL
엉! icaru님 가을 잘 보내고 계시죠? 그곳은 비가 오는지요?
여긴 오늘낮에 좀 후텁지근했어요.^^
사진..고마워요^^

비로그인 2007-09-1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벗는 여인과 더불어 강렬한 시어네요.
오늘은 날이 이래선지 마음에 착 감깁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8:16   좋아요 0 | URL
허거덩, 님 왜 또 변신하시는거에용?
신비주의 벗어달라고 강력히 부탁드려욧!! ㅋㅋ(저한테만이라도)

민서 2007-09-1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비주의 아니랍니다.
잠깐 로그인 해봤을 뿐..

프레이야 2007-09-19 18:58   좋아요 0 | URL
그 서재 그대로 있네요. 기억속으로/이은미, 다시 보고 왔어요.
님이랑 저랑 좋아하는 노래도 비슷해요^^

비로그인 2007-09-19 23:10   좋아요 0 | URL
기억속으로,제가 끔찍하게 좋아했던 노래지요.
저 한 열 곡 정도는 노래방에서 불러제낄 수 있는데 언제 한번 가서 같이 흔들며 불러요.

프레이야 2007-09-19 23:15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좋아라해요. 듣는 사람은 별로겠지만..ㅋㅋ
진짜로 한 번 가요, 우리^^
님, 왠지 노래 무지 잘 할 것 같아요..

2007-09-19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뻘 / 함민복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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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엽다 ㅎㅎ

말랑말랑 말랑말랑

체셔냥이는 몰캉몰캉몰캉몰캉한데...^^

프레이야 2007-09-19 16:50   좋아요 1 | URL
몰캉몰캉, 이거 경상도 할머니들 잘 쓰시는 말인데..ㅋㅋ
전 그럼 말캉말캉 할래요..

바람결 2007-09-19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저도 함민복 시인 팬이에요~^^
그의 시를 볼 때마다, 정말이지 이건,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구체 속에서 펄펄하게 살아뛰는, 땀냄새 그득한 말이지 싶습니다.

'말랑말랑한 힘'......, 너무 좋습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7:57   좋아요 0 | URL
역시 좋은 시인은, 그랬군요.^^
강화도 어느 바닷가에서 산다고 하지요. 바다냄새 펄펄 나는
생활의 구체어들, 이제부터 만나보려구요. 전 이제 팬이 될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07-09-1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뇌가,아픔이,슬픔이 강펀치를 날려도 말랑말랑 받아들이는 힘이 흙의 힘이고 삶의 힘인것 같네요.

프레이야 2007-09-19 16:53   좋아요 0 | URL
정말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힘인데 말이에요.
다른사람에게도 그리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왜 이리 어려운지..

비로그인 2007-09-19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이란 말을 계속하다 보면,
혀가 꼬여요.
그래도 기분 좋아요.

프레이야 2007-09-19 16:53   좋아요 0 | URL
그죠? 혀도 마음도 부드러워져요, 민서님..
피아노 연습 많이 하고 오셨어요. 다음에 꼭 공개해주세요.^^
 

 

옷 벗는 여인


                                     최영숙


 

 

오래전 일이다

그날 
온몸으로 악쓰는 소리 지나간 후

한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가
길바닥으로 흘러내렸을 때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 한 장

먹잇감을 포획한 거미처럼
서서히 죄어드는 시선 속에서 여인은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숨죽인
저 알몸의 저항
내 일찍이 부끄러워했던
벼랑 끝 말없는 절규, 그렇구나

저게 내 몸인걸, 어느날 목욕탕 뿌연 거울 앞에서
깊고 검은 음부와
물기 없는 유방과
아이를 낳은 칼자국이 선명한 주름진 뱃살의 중년여인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줌마가 저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 알몸으로 선 내게 돌을 던져라
기꺼이 그 돌을 맞으리니
모든 여자의 이름은 쓸쓸하고 가없이 슬픈 몸이라서
천지간에 바람 어지러울 때면
마구 소리치고 싶다 옷 벗고 싶다 하니 그것이 욕되다면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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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

멋지군요.

프레이야 2007-09-19 17:02   좋아요 0 | URL
다른 시들을 봐도 상처입은 자들에 내미는 손이 정말 뜨겁더군요.
뭉클한 싯구들이 많더군요. 천천히 읽으려구요^^

뽀송이 2007-09-1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년의 여자란...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아줌마!!
자기가 없는 가족을 위한 보조기구처럼...
요즘은 자기개발에 열심인 젊은 엄마들이 많아졌고,
이들이 중년이 되었을 땐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중년을 사는 여자들이 모두 행복해 지기를 바래보는 마음입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7:05   좋아요 0 | URL
중년의 여자, 우리가 그런 여자들인가요.
갈수록 몸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어요. 몸, 지극히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보금자리가 아닌지요. 우리 영혼이 담긴..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밥이 되어주는..
30초중반의 엄마들만 해도 삶의 방식이 다소 다르더군요.
나름 현명하다 할 수 있지요.^^

비로그인 2007-09-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적인 단어들만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느낌을 만들어낸 시였어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7:06   좋아요 0 | URL
그죠 민서님? 뭉클!
 

 

고장난 라디오




- 전명숙



   이 머리통 또 여기 들어가 있군 잠시만 한눈을 팔면 어느새 전자레인지에
들앉아 있는, 반죽기계 속 빵처럼 부풀었군 마그마처럼 지글지글 끓고 있군.
이건 장말 제가 터져 버리길 기다리는 걸까 이걸 그냥 버려야 되나 어쩌나.
저 혼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타기 직전 집어내어 찬물에 담그면 금방 쭈그러
들어 의기소침해지는, 치켜세웠던 머리카락 안테나들 찌릿찌릿 감전되는,
하는 수 없어 목에 얹고 다니는, 정말 저기 들어가기 싫어!  한 마디 뱉고 행
복한 방송을 찾아 채널을 돌리는. 지지지직 잡음을 통과하고 쿨쩍거리는 울

음소리 뚝!  이제 좀 얌전히 굴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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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구판절판


그랬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나자신의 감정이 이 정도로 성숙하고 의젓해졌다는 사실에 그저 스스로 대견해하며 그날의 충격을 견뎌냈다. 어린이날이었다.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란다. 좀 쉬었다 하지? 격려의 편지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투지와 열정의 팀 나의 삼미는 도대체 쉬거나 멈추는 법이 없었다. 노히트 노런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그해 16연패의 찬란한 위업을 달성하더니, 나아가 그 다음 해에는 인류 공영에 길이 이바지할 18연패의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려 버렸다. 불멸의 기록이었다.-106쪽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다러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126쪽

6월 항쟁의 '우리'와 대통령 선거일의 '우리'는 같은 '우리'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을-나는 낡았지만 최근에 청소를 한 내 방의 창틀 너머로 계속해서 던져 보았다. 어둠은 대답이 없었고, '우리'는 모두 잘 자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당키 힘든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했고 다시는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138-139쪽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 거야. 다들! 다들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어.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건 돈과의 교미가 아닌가 싶어.이미 마신 이상은......그 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지..... 그래, 분명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걸 먹였어. 우리가 마셔온 물에, 우리가 먹어온 밥에, 우리가 읽는 책에, 우리가 받는 교육에, 우리가 보는 방송에,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경기에, 우리의 부모에게, 이웃에게,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게...... 놈은 차곡차곡 그 약을 타온 거야. 너도 명심해.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몰라......-182쪽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었지. 물론 처음엔 <섹스>와 <프로>를 함께 수입하라는 조언을 들었겠지? 물론 <섹스>는 양념이니까. 즉 <프로>를 더 잘 배양하기 위한 - 유산균 발효유로 치자면 올리고당과 같은 존재였지. -244쪽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251쪽

프로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놈들이 바라는 이 세계의 여건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세계의 여건?
물론이지. 우리는 미국의 프랜차이즈니까. 언제나 이 점을 잊어선 안 돼.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얼마나 큰 보증금이 걸려 있는가는 IMF를 통해 이미 눈치 챘잖아.-253쪽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264쪽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279쪽

뭐랄까. 자세한 기분은 알 수 없지만 - 나는 그 두근두근한 뱃속의 생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의 공, 나의 야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프로의 세계에서 - 이제는 사라진 그 마지막 야구를. 그리고 나의 2세가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언제라도 회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아버지의 야구를.-298쪽

플레이 볼.
조성훈이 소려쳤다.
재구성된 지구의 맑고 푸른 하늘을 지나
공이 날아왔다.
만삭의 아내가 손을 흔들었다.
저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나는
저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

플레이 볼이다.-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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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플레이 볼." 이던가요? 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을 가장 좋아했어요. 플레이 볼. 지금 네꼬 씨는 플레이 볼, 상태예요. 혜경님, (뜬금없이) 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9-12 19:46   좋아요 0 | URL
어머, 네꼬님, 두 칸 더 추가했어요. "플레이 볼이다." !!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이요.^^(어쩜 이런 깜찍한 표현은 네꼬님만 할 수 있는 표현이에요) 전 야구를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최하위 야구팀에 빗댄 인생철학에 감복했어요. 이렇게 살아가야하는거에요. 그죠? 이 책은 정말 신선하더군요. 박민규의 최고작 같아요. 플레이 볼!, 상태면,, 네꼬님 좋은 상태 맞나요?^^. 두근두근 자신감 있게 시작하시기 바래요, 뭐든요.^^
참, 벤트 페이퍼 봤는데 갑자기 뜨악했어요. 제가 가장 기억하고픈 한 가지가 뭐지? 잘 모르겠는 거 있죠. 이럴수가요!!
귀여운 네꼬님, 앙앙~

사마천 2007-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화로는 보았는데 이렇게 철학적 구절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가르쳐 주신 혜경님 감사합니다. 계속 일깨워주세요 ^^

프레이야 2007-09-13 08:3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 이범수가 나온 수퍼스타 감사용, 말씀이시죠?
저도 그 영화 봤는데 이 책보다는 너무 못 미치더군요.
이 책과의 공통점이라면 삼미수퍼스타즈가 소재가 되었다는 것밖에요.. ^^ 물론 그 영화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건 아닐거에요. 고요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