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구판절판


그랬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나자신의 감정이 이 정도로 성숙하고 의젓해졌다는 사실에 그저 스스로 대견해하며 그날의 충격을 견뎌냈다. 어린이날이었다.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란다. 좀 쉬었다 하지? 격려의 편지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투지와 열정의 팀 나의 삼미는 도대체 쉬거나 멈추는 법이 없었다. 노히트 노런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그해 16연패의 찬란한 위업을 달성하더니, 나아가 그 다음 해에는 인류 공영에 길이 이바지할 18연패의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려 버렸다. 불멸의 기록이었다.-106쪽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다러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126쪽

6월 항쟁의 '우리'와 대통령 선거일의 '우리'는 같은 '우리'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을-나는 낡았지만 최근에 청소를 한 내 방의 창틀 너머로 계속해서 던져 보았다. 어둠은 대답이 없었고, '우리'는 모두 잘 자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당키 힘든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했고 다시는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138-139쪽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 거야. 다들! 다들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어.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건 돈과의 교미가 아닌가 싶어.이미 마신 이상은......그 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지..... 그래, 분명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걸 먹였어. 우리가 마셔온 물에, 우리가 먹어온 밥에, 우리가 읽는 책에, 우리가 받는 교육에, 우리가 보는 방송에,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경기에, 우리의 부모에게, 이웃에게,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게...... 놈은 차곡차곡 그 약을 타온 거야. 너도 명심해.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몰라......-182쪽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었지. 물론 처음엔 <섹스>와 <프로>를 함께 수입하라는 조언을 들었겠지? 물론 <섹스>는 양념이니까. 즉 <프로>를 더 잘 배양하기 위한 - 유산균 발효유로 치자면 올리고당과 같은 존재였지. -244쪽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251쪽

프로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놈들이 바라는 이 세계의 여건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세계의 여건?
물론이지. 우리는 미국의 프랜차이즈니까. 언제나 이 점을 잊어선 안 돼.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얼마나 큰 보증금이 걸려 있는가는 IMF를 통해 이미 눈치 챘잖아.-253쪽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264쪽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279쪽

뭐랄까. 자세한 기분은 알 수 없지만 - 나는 그 두근두근한 뱃속의 생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의 공, 나의 야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프로의 세계에서 - 이제는 사라진 그 마지막 야구를. 그리고 나의 2세가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언제라도 회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아버지의 야구를.-298쪽

플레이 볼.
조성훈이 소려쳤다.
재구성된 지구의 맑고 푸른 하늘을 지나
공이 날아왔다.
만삭의 아내가 손을 흔들었다.
저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나는
저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

플레이 볼이다.-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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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플레이 볼." 이던가요? 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을 가장 좋아했어요. 플레이 볼. 지금 네꼬 씨는 플레이 볼, 상태예요. 혜경님, (뜬금없이) 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9-12 19:46   좋아요 0 | URL
어머, 네꼬님, 두 칸 더 추가했어요. "플레이 볼이다." !!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이요.^^(어쩜 이런 깜찍한 표현은 네꼬님만 할 수 있는 표현이에요) 전 야구를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최하위 야구팀에 빗댄 인생철학에 감복했어요. 이렇게 살아가야하는거에요. 그죠? 이 책은 정말 신선하더군요. 박민규의 최고작 같아요. 플레이 볼!, 상태면,, 네꼬님 좋은 상태 맞나요?^^. 두근두근 자신감 있게 시작하시기 바래요, 뭐든요.^^
참, 벤트 페이퍼 봤는데 갑자기 뜨악했어요. 제가 가장 기억하고픈 한 가지가 뭐지? 잘 모르겠는 거 있죠. 이럴수가요!!
귀여운 네꼬님, 앙앙~

사마천 2007-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화로는 보았는데 이렇게 철학적 구절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가르쳐 주신 혜경님 감사합니다. 계속 일깨워주세요 ^^

프레이야 2007-09-13 08:3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 이범수가 나온 수퍼스타 감사용, 말씀이시죠?
저도 그 영화 봤는데 이 책보다는 너무 못 미치더군요.
이 책과의 공통점이라면 삼미수퍼스타즈가 소재가 되었다는 것밖에요.. ^^ 물론 그 영화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건 아닐거에요. 고요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