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벗는 여인


                                     최영숙


 

 

오래전 일이다

그날 
온몸으로 악쓰는 소리 지나간 후

한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가
길바닥으로 흘러내렸을 때
까만 브래지어와 팬티 한 장

먹잇감을 포획한 거미처럼
서서히 죄어드는 시선 속에서 여인은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숨죽인
저 알몸의 저항
내 일찍이 부끄러워했던
벼랑 끝 말없는 절규, 그렇구나

저게 내 몸인걸, 어느날 목욕탕 뿌연 거울 앞에서
깊고 검은 음부와
물기 없는 유방과
아이를 낳은 칼자국이 선명한 주름진 뱃살의 중년여인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줌마가 저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 알몸으로 선 내게 돌을 던져라
기꺼이 그 돌을 맞으리니
모든 여자의 이름은 쓸쓸하고 가없이 슬픈 몸이라서
천지간에 바람 어지러울 때면
마구 소리치고 싶다 옷 벗고 싶다 하니 그것이 욕되다면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창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9-1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로 쳐라, 네 상처 위에 내 간을 포개놓으마 "

멋지군요.

프레이야 2007-09-19 17:02   좋아요 0 | URL
다른 시들을 봐도 상처입은 자들에 내미는 손이 정말 뜨겁더군요.
뭉클한 싯구들이 많더군요. 천천히 읽으려구요^^

뽀송이 2007-09-1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년의 여자란...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아줌마!!
자기가 없는 가족을 위한 보조기구처럼...
요즘은 자기개발에 열심인 젊은 엄마들이 많아졌고,
이들이 중년이 되었을 땐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중년을 사는 여자들이 모두 행복해 지기를 바래보는 마음입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7:05   좋아요 0 | URL
중년의 여자, 우리가 그런 여자들인가요.
갈수록 몸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어요. 몸, 지극히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보금자리가 아닌지요. 우리 영혼이 담긴..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밥이 되어주는..
30초중반의 엄마들만 해도 삶의 방식이 다소 다르더군요.
나름 현명하다 할 수 있지요.^^

비로그인 2007-09-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적인 단어들만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느낌을 만들어낸 시였어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7:06   좋아요 0 | URL
그죠 민서님? 뭉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