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소설 중의 한 권이다. 자신의 추리소설 애독자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오십 년간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단순한 서사에 인물의 심리에 집중해 생과 사랑과 관계의 지리멸렬한 진실과 포장의 간극을 서늘하게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인용해 로드니가 이 책의 주인공이자 아내 조앤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장면(독자로서 예감했지만, 조앤이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한 진심)이라든가 로드니가 자신이 그리는 천국을 묘사한 구절 그리고 결말의 마지막 문장에서 로드니가 조앤에게 속으로 하는 말에서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사는 일은 이토록 어렵고 냉혹한 것이구나. 사랑이란 그 사람의 생을 다시 한번 사는 것이라는 말,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흔한 말에 동의하는 한 말이다.
나 또한 조앤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뒤통수가 뻐근하다.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조앤, 내가 바라는 천국은 말이야. 무슨 공상 같지만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해. 출근하려고 하이 스트리트를 내려 가다가 좁은 골목에서 벨 워크로 꺾어 들어가는데 어느날 눈앞에 계곡이 있는 거야. 초록 풀밭과 양 옆으로 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들도 보여. 그 계곡은 죽 거기 있었어. 마을 한가운데에 비밀스럽게. 복잡한 하이 스트리트에서 그 계곡으로 들어간 나는 어리둥절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하겠지. 그 때 사람들이 다가와 아주 가만히 말해 주는 거야. 당신은 죽었다고‥‥‥"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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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8-26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 마음을 알고 쓴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같이 아프고,같이 상처나고,같이 외면하고 그렇게 여자(女,者)아닌 여성 (如,性)이 되는 과정.. 결혼 하고 아이낳고 저 정도 되면 여인은 다른 또하나의 성을 갖는 듯! 싶어요. 슬프고도 대견한, ㅡ말 안되는 말 장난 같기도 하고. 죄송^^ ㅡ 참 우물이 깊은 소설예요!

프레이야 2015-08-26 19:28   좋아요 0 | URL
긴 댓글 고맙습니다. 우물,이라고 하시니 또 요즘 잡고있는 키워드라 단상들이 떠오릅니다. 정리해야하는데요. 우물 깊은 소설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페크pek0501 2015-08-2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 멋집니다.
조곤조곤 말해 주시고 한 문단 뽑아 주시고.
만약 제가 이런 스타일로 페이퍼 쓴다면 프레이야 님한테서 배운 것이야요.

프레이야 2015-08-27 19:03   좋아요 0 | URL
ㅎㅎ조곤조곤 했나요? 그리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주인공 여자가 딱 우리나이대에요. 페크님보다는 좀 연하일지도요~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
‥‥‥
그것 봐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방편이라면 먹고 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맞추어갈 것이 뻔하지 않겠나?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내지는 순서가 다른 것의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 할 수 있지.
‥‥‥
그러니 말일세. 말하자면 의식주에 곤란을 겪지 않는 사람이 흥미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진실되게 일을 할 수 없는 거지.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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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은 싫어요. 남자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툭하면 논쟁을 벌이더군요. 아무런 결론도 없는 얘기를 어쩜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주고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모님의 말은 약간 매서웠다. 하지만 어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모님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인정받고 거기서 자부심을 느낄 만큼 현대적인 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았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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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마음앓이 하는 십대 딸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관심과 애정을 쏟을 대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여러해 전, 친구는 업둥이로 아기고양이를 데려왔다. 사실 데려왔다기보다 어느 집 담벼락 아래 길냥이 어미 고양이가 낳은 여섯 마리 냥이들 중 한 마리를 훔쳐온 거다. 그때 어미냥이와 친구는 눈빛을 교환하였고 냥이는 덤벼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눈빛을 생각하면 무섭기도 죄스럽기도 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 그 친구는 지금 그 어린 냥이와 썩 잘 어울리는 동거를 하고 있다. 오늘이라고 이름 지어주고 딸아이보다 친구가 더 가까워져서 이젠 오늘이 없는 날은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친구딸은 데려온 냥이한테 관심도 안 보여서 목욕이니 뭐니 친구가 돌보아야 하는 몫이 하나 더 늘어났던 거다. 화분이며 소파며 다 흩어놓고 뜯어놓고 정신없다고 투덜대던 말은 언제부턴가 냥이를 자랑하는 말로 바뀌었다. 사진 찍어서 한번 보여줘봐라 했더니 길냥이는 대체로 이쁜데 이 애는 안 이쁜 편이라고 친구 특유의 한발 빼기를 하더니 사진을 연거푸 보여줬다. 고양이들의 특성과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말할 때, 눈이 반짝이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언제 왔는지 발치에서 간질거리고 있다고, 안으면 얼마나 폭신한지, 애절하게 쳐다보는 눈빛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알러지 있는 남편이 안방에서 밀려나긴 했다지만.
아직 마음이 낫지 않은 친구딸도 오늘이한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열차 안이다.
매거진에 묘연으로 유명한 고양이시인 이용한과 마당고양이들에 대한 기사가 있어 반갑다.

[어쩌다 보니 고양이작가라 불리게 됐지만 그 역시 이전엔 고양이를 몰랐다. 알게 되니 사랑하게 됐고 사랑하다 보니 슬픈 일도 불편한 일도 많아졌다. 마당 고양이가 열 마리가 넘으니 연출하지 않아도 순간순간이 마당극이다. ]
- 매거진 기사 중에서

슬프고 불편한 일을 감내하기 싫다는 건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는 나도 읽은 책이고 나머지 두 권은 읽지 않았지만 한 권은 가지고 있고. 고양이 사진과 담백한 이야기에 눈꼬리가 흐물흐물해지는 책. 무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아니면 더위를 즐기며, 이것도 저것도 선택인데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 자체도 감사할 일 아닐까 싶다. 삶에는 선택이 불가한 경우들이 어쩌면 더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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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동물농장’에서 파이프에 낀 새끼고양이 사연이 나온 걸 봤어요. 파이프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새끼고양이의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프레이야 2015-08-02 12:30   좋아요 0 | URL
에구 불쌍해라. 동물이 제대로 보호 받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하더군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8-0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은 대단하시네요.
전 한겨울 애기 고양이의 눈빛을 외면했단 이유로 종종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도저히 길냥이들을 데려다 키울 생각은 들지 않네요.
스스로 모질고 못된 여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정 주고 마음 주고 노력과 시간까지 줄 수는 없다고 다짐해 봅니다.(ㅎㅎ)
혹여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뭔가 제게도 아주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네요.
더운데 건강히 잘 지내세요~^^

프레이야 2015-08-03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사진으로 보는 정도만 좋지요 그 이상은 못할 것 같아요. 자신도없구요. 고양이한테 두려움을 느꼈던 구체적 경험이 있어서 더 그렇구요. 그런데 더 본질적인 건 그만한 책임을 지기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게 아닐까 해요. 감당하길 거부하는‥ 더위랑 적절한 거리 두시고 잘 지내세요^^
 

카잔차키스 전집을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똘레도와 부르고스, 그외 스페인 곳곳을 일찌기 여행하며 사유한 기록인데 문장에도 통찰에도 격이 있다. 오늘날의 여행기 트랜드에 비교하자면 클라식한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날렵하다.

그는 스페인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슬픈 얼굴의 기사라는 돈키호테의 열정적이면서도 긴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자인 산초의 멍청한 얼굴이라고. 특히 부르고스와 똘레도에 관한 문장을 따라 기억을 훑는다.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여행의 진폭이 달라진다는 건 진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흔히 창작은 가장 정확하고 고상하게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과 고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그것은 새로운 땅과 바다들, 새로운 사람들과 사상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껏 음미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시간이 그것들을 고운 체로 걸러서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수로 정제시킬 때까지, 내 안에서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결정화가 일어나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 이런 마음의 연금술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프롤로그 중)



똘레도의 은세공사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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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27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 저는 지금 영국기행 읽고 있어요~ 쉽지 않은데 곱씹게하는 그런 맛이 있어요~
팬이 될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5-07-27 21:34   좋아요 0 | URL
그쵸그춍. 지중해, 러시아, 일본 중국 기행 등등‥ 그옛날에 이분은 참 ! 책날개에 전집목록 보니 안정효 번역도 제법 있어요

지금행복하자 2015-07-27 21:42   좋아요 0 | URL
까뮈도 전집 지르고 싶은데.. 이 분까지 왜 이러실까요 ~~ 이럴땐 은행이라도 털고 싶어요 ㅎㅎ
애들 학원을 끊어서 라도 사야하는지...심각하게 고민해야겠어요 ㅎㅎ

프레이야 2015-07-27 22:15   좋아요 1 | URL
ㅎㅎ 까뮈 전집은 작년에 질렀어요

북다이제스터 2015-07-27 2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창작과 여행의 공통점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둘 모두 과연 대상에 직접 들어 가는 것일까 아님 한 걸음 비켜 관조하는 것일까 란 것에 궁금하더라구요. ^^

AgalmA 2015-07-27 23:47   좋아요 3 | URL
경험하되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안팎을 모두 살피는 것, 둘 다겠죠^^
우리가 우주로 나아가듯이, 삶에서 삶으로 나아가듯이.

책읽는나무 2015-07-27 23:28   좋아요 2 | URL
댓글들도 멋지네요
한 걸음 비켜 관조하다!
경험하되 안주하지 않고 안팎을 모두 살핀다!
삶에서 삶을 살핀다!
음~~이밤 곱씹게 되는 문장들입니다^^

프레이야 2015-07-27 23:29   좋아요 1 | URL
그쵸그쵸 이래서 알라딘이지요^^

세실 2015-07-27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연금술...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를때 기억해야겠어요.
카잔자키스 전집이라....저도 고민하렵니다^^

프레이야 2015-07-27 23:10   좋아요 0 | URL
연금술도 세공기술도 필요한 거 같아요. 세실님은 센스쟁이 연금술사에 세공사에요^^

책읽는나무 2015-07-2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잔차키스 참 좋더라구요!
전집 저도 구입하고 문장들을 곱씹고 싶네요^^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15-07-27 23:52   좋아요 0 | URL
책나무님도 좋은꿈 꾸시는 굿밤요^^

transient-guest 2015-07-30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전집을 한 권씩 사들여 읽고 있지요.

프레이야 2015-07-30 07:25   좋아요 0 | URL
역시! 그렇군요 트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