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뒷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저 단단한 슬픔의 이빨.

 

어머니 북이나 쳤으면요.

내 마음의 얇은 함석 지붕을 두드리는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내가 밥빌어 먹고 사는 사무실의

낮은 회색 지붕이 뚫어져라 뚫어져라,

그래서 햇살이 칼날처럼

이 회색의 급소를 찌르도록

어머니 북이나 실컷 쳐 봤으면요.

 

 

 

-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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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29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이 두드려 울리는 북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두드려 울리게 하는 북이면 좋겠어요. 실컷 칠 수 있는 북이요.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북소리란 어휘때문에 더 절실해 보이고 시에서 소리가 나는 듯 하네요.

프레이야 2011-04-29 20:37   좋아요 0 | URL
그죠, 최승자님의 시는 뜨겁고 강렬하네요.
신산한 삶이라해도 신명나는 북소리로 훌훌 우리 날려봐요.^^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 정호승 <꽃을 보려면> 

 

--------  

'점자나라' 62호 표지에는 흑백의 벚꽃이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벙글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
칼을 버리면
인내하며 더 깊어진
꽃이 피어서 들어온다.   
보지 않으려 눈감았던 그것이 아프다아프다 피어있다.

요즘 '은교' 편집 중이며 라즈니쉬의 '숨은 조화'를 끝부분 녹음중이다. 
우리 집에도 있는 아주 오래된 누런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가 박인 책이다.
대구에 사는 회원의 신청 도서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 분은 전에 '피타고라스 강론'도 신청한 60대 남자분이라는데  
라즈니쉬에 심취한 분 같다.
전에 그 도서(1,2권)를 내가 녹음했었는데 이번에도 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해서 기뻤다.
시력을 잃기 전 오래전에 읽고 집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다시 귀로 읽고 싶어 신청을 한단다.
'숨은 조화'는 헤라클레이토스 강론이다.
대우주의 전체성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을 의미하는데
녹음 중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아주 많다.

"모든 불행은 그대가 상궤를 벗어나 어디론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존재한다.
즉시 돌아오라, 그대의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본질과 내면적인 존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더욱더 행복해진다.
본질의 소리를 잘 듣도록 하라.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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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28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바뀌려 하지 않고, 나는 마음을 열 준비조차 하지 않고...세상을 향해 삿대질을 할때가 있어요.
불행을 통해 강해지고, 불행을 통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을...행복해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어요~^^

sslmo 2011-04-28 09:42   좋아요 0 | URL
아참참,,,감기는 좀 나으셨어요?^^
서울은 쾌청이랍니다.

프레이야 2011-04-28 14:50   좋아요 0 | URL
감기는 다 나은 거 같아요. 고마워요.^^
오늘 말을 좀 많이 했더니 목이 좀..
요사와 법정의 책도 빌려오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이었어요.
양철댁님 오늘 햇살이 참 좋아요.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지요.
나 이외의 누구도 내가 변화시킬 수 없겠지요. 그것이 운명이고 그것이 진실일 거에요.

무스탕 2011-04-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음을 해 주실분을 신청도 하는군요. 그런 부탁을 받으면 힘들어도 안 하실수가 없겠어요 ^^;
라즈니쉬니 피타고라스니, 이런건 눈으로 읽으며 머리로 생각해도 참 막막한데 듣는것 만으로 정리를 해 나가시는 분들, 참 대단하세요!

프레이야 2011-04-29 09:11   좋아요 0 | URL
좀 딱딱한 책인데 피타고라스강론을 그 앞에 제가 한 걸 듣고
그 낭독자가 이번에도 해달라고 하셨다네요.^^ 좀더 잘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세상의 존재는 이어져있네요.
눈을 감고 들으면 오히려 듣는 것에 집중되어 내용이 쏙쏙 들어올 수 있어요.^^
 

아름다운 대화법 

 


말이 짧을수록
분쟁도 적어진다.
항상 신중한 태도로 말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서 말하라.
인생을 살다보면 한 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 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라.


- 발타자르 그라시안의《살아갈 날들을 위한 지혜>중에서 

 

------- 

며칠 감기로 몸도 마음도 좀 편안히 두라고 경고가 오더니 오늘아침엔 조금 나은 듯하다.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처럼 흐리고 습하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간다. 듣기 싫은 말,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하기 싫은 말...
해서는 안 되었을 말, 꼭 했어야 하는 말!! 

사소한 말 한 마디로도 공기를 따뜻하게 흔들고 그윽한 만족감을 주는 사람의 말은 은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지만 그런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천국의 문이 열리는 듯 마음이 밝아지는 건,
말 한 마디에 집착하고 살랑거리는, 미성숙한 마음자리 때문일거다.
그렇다 해도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상대를 끄는 힘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나부터 그래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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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2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는 비가 내려요~~~~~~ 한문 공부 갈까 말까 갈등중!
빗소리와 어울리는 좋은 글 마음에 담아요!

감기는 좋아졌다니 다행이네요~~
우리 몸관리 마음관리 잘하고 지내자고요.^^

프레이야 2011-04-26 16:37   좋아요 0 | URL
여긴 아침부터 흐리더니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네요.
간당간당한 마음처럼요.
식은땀 흘리며 좀 잤더니 훨씬 나아요.
언니 고마워요.

hnine 2011-04-2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반가와서 무조건, 일단 와락~ ^^
저도 말 많이 하여 실수를 낳기 보다 차라리 말 없는 사람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말 없는 남편과 결혼해서 십년 넘게 살다보니 (그렇다고 말실수가 없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언제부턴가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전 지금 서울에 왔는데 비가 보슬보슬 옵니다. 감기가 좀 나으셨다니 다행인데 조심하세요. 저도 한 2주쯤 전에 감기 인줄 알고 시작해서 소화기내과, 신경과까지 다 돌고 왔답니다. 몸이 제 나이를 말해주는 것 같아 슬펐답니다. 잊고 살려고 했더니 말이어요.

프레이야 2011-04-26 16:39   좋아요 0 | URL
나인님 와락^^
네, 말 적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그 말에 매달리지 말자 하면서도 그 한 마디가 마음을 흔들어대죠.
그런 점에서 전 말을 참 못해요.ㅠ
나이는.. 우리 잊고 살아요...그래도 불쑥 몸에서 나타나죠. ㅠ

blanca 2011-04-2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도 그러셨군요. 저도 감기와 치통으로 정말 세상이 다 잿빛으로 보이는 요즘입니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고 다 서운하네요--;; 따뜻한 격려의 말 하나가 참 절실한 요즘입니다.

프레이야 2011-04-26 16:41   좋아요 0 | URL
에고 블랑카님도 몸이 안 좋으시군요.
계절이 바뀔 때면 더 그러는 거 같아요.
토닥토닥 힘내요 우리^^
말 되어지지 않은 것에 더 많은 말이 있을지도 몰라요^^

섬사이 2011-04-2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픈 사람들이 많아요.
애들도 그렇고, 어른들도요.
저에게도 말은 너무 넘쳐서 탈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마음에 담아둡니다.

프레이야 2011-04-26 18:18   좋아요 0 | URL
섬사이님 말이 넘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바람직한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진심'을 담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겠죠.
인용문장과는 반대로 중요한 말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는 경우도 별로겠죠.^^

마녀고양이 2011-04-2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라

언니, 너무 좋은 말이예요. 나풀거리는 제 입에 반성 좀 시키구요.
그렇죠, 그렇게 사소한 말도 진심을 담아 따스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어요.
프야 언니, 감기 심하셨네요.. 이긍. 이젠 봄볕 쐬고 면역력 가득 키우셔염~

프레이야 2011-04-26 22:01   좋아요 0 | URL
많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흑~
내일은 녹음도 할 수 있겠어요.
면역력, 이거 좀 마음에도 키워야겠어요. ㅎㅎ

세실 2011-04-2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욱하고 한번 질렀는데... 이 글을 읽었더라면 좀 정화가 되었을텐데 아쉬워요.
제가 싫어하는 사람중 한 부류가 무조건 기선제압부터하고 떠넘기려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양...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 말입니다.

프레이야 2011-04-27 17:11   좋아요 0 | URL
세실님 밖에서 부딪히는 사람들 스트레스가 되는 부류들 많지요.
좋은일 하시면서 말에요.ㅠ
화날 땐 화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에요^^

꿈꾸는섬 2011-04-2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들어와 글만 보고 갔어지요.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정말 그렇게 해야겠어요.^^

프레이야 2011-04-29 08:36   좋아요 0 | URL
네 그래야되는데 저도 실천을 잘 못하고 있어요.^^
중요한 말도 사소한 것처럼 거꾸로 해버리는 경우도 있구요.
헛된 소리는 듣지도 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눈먼자들의 도시 - Blindn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두고 안 읽은 원작을 읽어야겠다. <더 로드>가 생각나는 종말적 극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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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22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로드도 그렇지만, 전 주제 사라마구 중에선 눈먼자들의 도시가 시작이었고 그래서였는지 참 좋았었습니다.
전 감히 영화보다 원작의 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프레이야 2011-04-22 18:04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저도 원작을 어서 읽어야겠어요.
백색공포, 끔찍한 상황에서 인간의 선과 악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4-23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좋았어요, 그런데 거꾸로 영화를 못 봤어요.
아하하, 영화는 별 세개네요?

프레이야 2011-04-23 21:33   좋아요 0 | URL
그죠?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야겠어요. 집에 두곤 아직...
별셋은, 원작의 깊은 주제를 표현하기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어요.
혹은,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답답한 마음에 갇혀서 봐서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거 같아요.
너무 환해서 눈앞이 흐려지는, 어쩌면 환한 어둠, 빛의 암흑, 진실을 가장한 거짓 같은.

무스탕 2011-04-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을 먼저 읽었는데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 소설인데도 이렇게 겁이나니 만약 세상이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어쩔것인가.. 오싹오싹 했다니까요.
영화보단 책이 좋았어요. 책의 공포를 영화에선 잘 살려주질 못했었죠.

프레이야 2011-04-29 08:37   좋아요 0 | URL
영화가 부족했단 평가가 많으네요.
어서 책을 봐야겠어요.ㅎㅎ

꿈꾸는섬 2011-04-2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먼저 읽었는데 영화보단 책이 좋아요. 무한한 상상력이 더한 공포를 심어 주잖아요.
그리고 세 여자가 베란다에서 빗물에 목욕하는 장면, 책으로 읽었을때 정말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요.

프레이야 2011-04-29 08:38   좋아요 0 | URL
상상이 공포를 더 자극하죠.
세 여자가 탈출하여 빗물에 목욕하는 장면, 영화에서도 후반에 나와요.
책을 봐야겠어요.^^
 

지난 주, 고등학교 졸업반을 함께한 친구 두명과 꽃구경을 했다.
대학도 같이 다녔는데 결혼하고 아이낳고 이러저러 나이를 먹어가며
새록새록 또다른 면이 보인다.
아침에 갑자기 벚꽃이 한창 너무 이쁘던데 가자는 연락이 오고 우리는 무조건 뭉쳤다.
시내의 약간 변두리 동네인데 벚꽃터널이 새파란 하늘 아래 눈부셨다.
우리는 그길을 걸었다. 그늘에 앉아 잠시 커피를 마셨다.
꽃이 예쁘다는 걸 예전엔 몰랐단 말에 난 애잔한 거지, 질 것을 알고 있으니,라고 웅얼거렸다.
여린 쑥이 지천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쑥국 한 번 끓여먹으라며 둘이서 내 몫을 뜯어줬다.
난 그냥 앉아서 작은아이랑 갈등한 이야기를 했고
'넌 아직 젊었나보다, 쑥도 안 뜯고'란 그럴싸한 말을 들었다.
그놈의 열정은 언제 죽을건지,라는 말을 들은 건 얼마전 전화통화에서다.

봄햇살을 맞으며 그냥 걸었고 그냥 좋았다.
징글징글하게도 가슴속 그리움 한뼘은 아무렇게나 자란 여린 쑥처럼 자라고 있었지만.

박범신 갈망 3부작의 마지막 '은교'를 녹음하고 지금 1차 편집 한가운데쯤에 있다.
사실 박범신의 소설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는데 편견이었던지, 이 작품은 뭉클하고 뜨겁다.
특이한 구성으로 들려주는 고백의 언사들을 엿보며
말 되어지지 않은 것들 속에서 진실은 얼마나 고독할까 싶었다.
옮겨놓고 싶은 문장도 아주 많다.
이 소설의 단어는 '관능' 혹은 '죽음의 욕망'이라 말하고 싶다.
아니 '사랑하는 자, 즉 비애를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존재의 슬픔'이라 말해야될지. 
시인은 죽어서도 살아남는 자, 이어야 했던 주인공 이적요의 예술가적 욕망이 노인의 그것과 병치되어 더 뜨겁다. 

작가는 시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소설을 잇는 맥을 시로 구성하고 있다.
그 시들은 주인공 이적요 시인의 내밀한 감정과 내적갈등을 적재적소에서 비춰준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될 듯, 아름답고 처절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언제 밟을지도 모르는 낮은 땅 위로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여린 쑥처럼, 
이적요 시인의 집뜰 소나무 짙은 등걸처럼,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은교, 139쪽)
존재의 욕망과 생명의 갈망은 그렇게 무섭도록 서글프고 애틋하다. 
순간순간 죽음을 앞당기고 그것을 꿈꾸고 있듯이.

<은교>에 나오는 시들을 몇 적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쉴새없이 입속에서 달콤한 럼주를 씹는다
나의 추억은 눈썹과 함께 우거져갔다
그리고 허무 - 털이 숭숭한 악마의 손톱이 
 
나의 목덜미를 잡아 젖혀
등을 휘어잡는 것을 느낀다.

- K. 크롤로 [럼주병을 가진 자화상] 전문  


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 J. 프레베르 [늙는다]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에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고상한가 

- Shakespeare, [햄릿]에서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 C.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밤에 사랑의 추가
항시와 전무 사이를 흔들 때에
너의 언어는 가슴의 달에 부딪히고
소낙비 올 듯한 너의 푸른 눈은
지상의 천국을 주었다

- P. 첼란 [밤에] 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며 이 두 손에 생각이 미치면
발을 알고 허리를 알고
그리고 모양 없는 성기를 똑똑히 안다면
이것이 육체인 것이다 잠을 욕심내고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될 육체
그것은 지칠 대로 지쳐서 어제에서 내일로
끌려다니며 '언제'와 '어디' 사이에 끼여있는 베개를 쥐어 뜯으며
떨면서 그는 묻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형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 H.E. 홀투젠 [시간과 죽음에 관한 여덟개의 바리아시옹]에서 

 

사람과 사람을 서로 물어뜯게 하는 곡예사가
무대 위에 올려놓으려고 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살해는 언제나 무대 위에서 행해진다
나락을 지나서 묘지에 매장된다
그러나 나를 죽인 사나이는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있다

- 요시모토 류메이, [사랑노래] 에서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 문덕수, [침묵]에서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램프의 아름다운 불빛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

- R.M.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는
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분노가 있다. 

- P. 엘뤼아르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야 했을 것이었다
내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울든가 어쨌어야 했을 것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 박남수 [손]에서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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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1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은교를 읽으면서 나이 드는 게 참 서러웠었어요.
그리고 이 찬란하고 눈물겨운 봄이 아닌 겨울에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시를 추리니 한권의 시집 같아요.
박남수의 '손' 한구절 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밤입니다~^^

프레이야 2011-04-19 08:21   좋아요 0 | URL
겨울에 읽으셨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더 서글펐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네요.
전 이 책을 어쩌자고 2월 말에 시작해서 봄이 한창인 지금 다시 읽고 있을까요.^^
저 위의 시 외에도 참 좋더군요. 뜨거운 문장들이 많았어요.

하늘바람 2011-04-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늙었나봐요 쑥과 냉이 뜯어서 된장찌개 끓여먹었어요.
은교 읽고 싶단 생각 별로 안했는데 시들을 보니 넘 읽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16   좋아요 0 | URL
ㅎㅎ 전 바지락조개 넣고 쑥국 끓여먹었어요.
은교, 생각보다 아주 좋았어요.

blanca 2011-04-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놀이 가셨군요. 저는 요새 아파트 초입에 벚꽃나무들이 우거져 아치를 만든 걸 보며 매일 '빨간 머리 앤'의 그 앤이 처음 초록지붕에 마차타고 오던 풍경을 상상해요^^;; 쑥국 저도 한 대접 끓여 혼자 다 먹었어요. 아이가 아직 어려 그런지 한 번 먹고는 안 먹겠다 하더라구요. 은교. 시들을 다시 읽으니 참 좋네요. 프레이야님 목소리로 녹음된 <은교>의 색깔은 어떨까요?

프레이야 2011-04-20 09:18   좋아요 0 | URL
아, 하늘하늘 산뜻한 기분이 들어요. 상상만으로도요.
어릴 땐 향이 강한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먹어지는 것들.
여긴 이제 벚꽃은 다 졌어요. 아파트화단에 철쭉이 아기자기 한창이에요.^^

꿈꾸는섬 2011-04-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어요.^

프레이야님 잘 지내고 계시죠? 친구분들과 꽃놀이도 다녀오시고 정말 좋으셨겠어요.
전 쑥, 냉이 잘 캐는데 가까운 곳은 중금속 오염됐을 것 같아 못 캐겠어요.ㅎㅎ
된장국 끓여도 맛있고, 냉이는 무쳐서 나물로 먹어도 좋잖아요.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1-04-20 09:19   좋아요 0 | URL
잘 캐시는구낭ㅎㅎ
중금속오염에 방사선 비에 그런 거 걱정해야되죠.ㅠ
소금물에 30분 정도 담가뒀다 씻었어요. 친구가 가르쳐줬어요.ㅎ
냉이무침 상큼하게 해먹고 싶어요 문득.

순오기 2011-04-2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o님이 보내준 책인데 아직 못 읽었네요.
4월 11일부터 독서마라톤이 시작되어서 좀 더 열심히 읽게 되네요.
이 책도 곧 만날건데 봄에 읽으면 안 될까요?^^
박남수 시가 마음에 담기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21   좋아요 0 | URL
독서마라톤 시작했군요.
봄에 읽으면 더더 아플 수도 있어요.ㅎㅎ
전 어머니 독서동아리 시작해서 첫 책으로 '연을 쫒는 아이'를 사서샘이 골랐어요.
전 다른 걸 찜했지만 그건 차츰 다음에 읽기로 선정해뒀어요.
근데 기대했던 것보다 활동이 원활하게 잘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ㅠ

2011-04-2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4-21 01:06   좋아요 0 | URL
우와~ 그랬군요.^^ 왕성한 활동 늘 에너지 넘치는 언니^^
연을 쫒는 아이,는 전 영화만 봤어요.
책이 더 감동적이란 말은 들었는데 아마 이 책이 도서관에 여럿 구비되어 있어
부담없을 거 같아 사서샘이 이걸 추천한 거 같아요.
쑥으로 만든 떡케잌 맛나겠어용

마녀고양이 2011-04-2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쑥이 언니네 텃밭에서 날아왔어요. 같이 노지 냉이도, 망초대도 날아왔어요.
그전에는 도라지가 날아와서 껍질 벗기느라 혼났어요.
봄나물들은 어쩜 그리 향이 좋을까요? 씹을수록 더욱 향긋한게, 삶도 향기로와지라고 그러는걸까요?

예전에는 분홍 나비같은 시들만 좋아했는데,
이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마음에 들어오는걸 보면, 나이 먹었나봐요. 아하하.

프레이야 2011-04-23 21:30   좋아요 0 | URL
어릴 땐 쓴 맛 쓴 향의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그런 게 먹히고 그런 게 당기는 건 왜일까요? ^^
언니네 텃밭 소식이 향기롭고 푸짐하네요.
도라지 껍질 벗기는 건 싫지만..ㅎㅎ
난 며칠 목 붓고 열나고 머리 어지러워요.ㅠ

세실 2011-04-24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은교에 나온 시만 이렇게 옮겨놓으니 색다르네요. 맞아요 시적이었던 소설....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저도 어제 꽃놀이 다녀왔습니다. 다양한 색의 목련이 참 예쁘더라구요.

프레이야 2011-04-24 11:4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여기 아파트 공원엔 빨강 보라 철쭉이 만개해서 알록달록 눈이 환해요.
꽃놀이 잘 다녀오셨어요? ^^ 백목련은 여기 거의 졌고 자목련이^^
은교,는 노인의 스러져가는 생명 안의 생명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작가에 대한 적절한 글귀들도 마음에 남았어요.
따로 밑줄긋기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