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나무 아래에서 산하세계어린이 26
마리타 콘론 맥케너 지음, 이명연 옮김 / 산하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가위나무라고도 불리는 산사나무의 열매를 유럽에서는 크라테리스라고 하며 강심제로 쓰인다고 한다. 5월에 꽃을 피우므로 May Flower 라고도 하는 산사나무의 열매는 빨갛고 야문 인상을 주어 희망적인 인상이다. 작가가 산사나무를 상징으로 둔 이유도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에서 ‘산사나무’는 가슴 아픈 가족의 기억을 묻어야하는 곳이다. 굶주림으로 죽은 막내를 묻고 암담한 여정에 올라야하는 출발지이다. 그리고 혹독한 여정에서 잠시 위험을 피해 머무르며 쉬어갈 수 있는 곳도 산사나무 아래다. <산사나무 아래에서 Under the Hawthorn Tree>는 1990년 발표된 멕케너의 첫작품으로 1845년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에일리와 마이클 그리고 일곱 살 페기가 겪는 참담한 여정을 함께 밟아가면서 독자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울분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게 된다. 오로지 살기 위해 어린 그들이 겪어내는 온갖 위험과, 고비마다 놀라울 정도의 기지와 용기로 그것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굶주림에 허덕이는 살벌한 광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간다. 영국의 식민지로 소작농이 대부분인 마을에 감자역병이 돌고 먹을 것은 동이 났지만 영국인 지주들은 ‘게으른 아일랜드 가난뱅이들 때문에 우리의 지갑을 열 수 없다’며 이들을 도울 방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급기야 어린 생명이 죽자 엄마는 약간의 먹을 거리를 마련해두고 일거리를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찾아 나선다. 에일리는 꼬마엄마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살 길이 막막해진 에일리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쌍둥이 이모할머니를 찾아 멀고도 험한 길을 동생들과 함께 떠난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참혹하고도 전율적인 감동이 이 책의 이야기다.


작가가 독자에게 감동을 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멕케너는 리얼하고 절제된 대사와 상황으로 긴박하게 그것을 전한다. 그녀는 이 책에 이어 <들꽃소녀>와 <고향의 들녘>을 펴내 ‘어린이 기근 3부작’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년 전의 지구 끝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우리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아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6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단지 굶어죽지 않으려고, 지금의 아이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것을 먹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니세프에 대한 소개와 그 자료사진들을 보여주며 우리가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산사나무 아래에서>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일단 혈육을 찾았다는 점만으로도 세 남매의 처지가 조금은 나아 보인다. 기근으로 인해 가슴까지 말라버린 인정 없는 사람들 틈에서 이들 쌍둥이 이모할머니의 따뜻함은 이 책의 잊을 수 없는 미덕이다. 또한 불쌍한 세남매에게 통증을 이기는 약초와 상처를 낫게 하는 연고를 쥐어 보낸 메리 케이트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가슴 조이는 험난한 에피소드들 가운데에서도 웃음 한 번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게 하는 작가의 위트 또한 뛰어난 감각으로 보여 조금은 위안이 된다.

 

예를 들자면 처녀 이모할머니들의 웃지 못할 사연에 대한 것인데, 엄마에게 듣기만 했던 이들 할머니의 재미난 옛이야기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함께 살며 빵가게를 하는 할머니들을 찾아가는 동기와 세 남매에게 지금 필요한 절실한 것을 이들 할머니 두 분이 갖추고 있다. 책을 읽는 어린이들을 생각하여 가족의 사랑과 인내심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용기의 미덕을 말없이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들의 여정은 고달프기만 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장하다. 어린 페기가 어느 정원에 뛰어들어가 한 자루 가득 따온 라스베리, 구스베리 열매들이 이들의 미래일 거라 여긴다. 그런 미래는 또한 역경을 이겨낸 자들만의 영광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출발지, 고향은 돌아가야할 그리운 곳이다. 그곳에 있는 산사나무를 떠올려주면서 이야기는 맺는다. "작은 오두막집, 문밖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돌들, 아름다운 풀꽃들이 가득한 작은 뜰이 있는 집. 고향의 들판에는 지금도 산사나무 사이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176쪽)"  작가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면서도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같은 문체로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이 작가의 최근작으로 <블루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다고 하는데 읽고 싶어진다.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책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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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오늘 하루도 괜찮게 보냈나요? 또 하루가 저물어요^^
추천 고마워요.

해적오리 2007-01-0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제가 읽기엔 조금 무거운 이야기 같지만 보관함에 두었다 읽을 용기가 생기면 읽을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07-01-0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 좀 무겁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슬픈역사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전해주려는 작가의 시선이 괜찮아보여요.

씩씩하니 2007-01-03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아픈 이야기를 쓰면서도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같은 문체로 가슴을 어루만진다.........
책도 책이지만,,전 님의 리뷰에 감동을 받으니..어쩐대요..

프레이야 2007-01-0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아이들 책, 그래야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을 봐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어야겠죠. 아이들의 심성이란 것도 좋게만 그리는 건 왜곡이라고 생각돼요. 하지만 중요한 건 사실대로 그리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심성 같아요.

씩씩하니님/ ^^ 문체가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워요.

2007-01-0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을 맞다(천양희,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오려나 거우누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 멜기세덱님 서재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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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들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할까 표현이 너무 멋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6-12-3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을 뒤흔드는 소리는 정말 마왕을 듣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저만 느끼는게 아니었네요.
좋은 시 잘 읽었어요.

프레이야 2006-12-3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승연님/ 신년시로 생각할래요^^

2006-12-30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3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ㅂ님/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새해엔 어여 서재로 돌아오시길 빌어요^^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까칠한’이라는 낱말이 유행어가 된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시작은 연예인의 입에서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 낱말에 공감을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내면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든지, 타인들의 얄미운 속내를 꼭 집어내어 주는 말로 여겨서인가 싶다. 사람을 대상으로 ‘까칠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때면 내면의 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꼬여있어서 모든 대상을 사팔뜨기의 시선으로 보며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논쟁을 즐기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온화한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숨기고 있던 까칠한 일면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변인과 분쟁을 일삼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까칠한 ‘무엇’을 대패질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과레스키 가족의 까칠함은 보다 냉소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이다. 게다가 따뜻한 인간애를 깔고 있으니 적대적 감정이 일지 않는다. 원어(corrierino)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번역제목으로서는 반어적인 효과까지 노려 성공적인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때가 50년대이며 제 2차 세계대전 후 산재한 혼란을 겪었던 작가의 고국을 생각하면, 특수한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까칠한 가족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세기가 흘러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삶의 본질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작가가 내세운 이야기의 매개물이 ‘가족’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도 있다.


하지만 과레스키를 비롯한 네 명의 평범한 가족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리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과분한 일들은 알고 보면 사소하고, 따져보면 그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고 단순한 종류로 치부되어 지나치기 십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분명 남다르다. 민감하고 독특한 촉각을 지닌 듯, 그들이 일상의 사건들을 프리즘으로 하여 인식하는 부부, 자녀, 세대, 종교, 교육, 복지, 국가, 이념, 전쟁, 그리고 일상의 권태로움과 희망을 포함한 삶과 죽음의 보편적 밑그림은 섬세함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상황으로 바로 진입하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고밀도 대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속속들이 묻어놓은 작가의 농익은 사유와 그것을 흥미롭게 표현해내는 대화술이 위트 있다. 은근슬쩍 치고 나오면서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신랄하고 때로는 관대하기도 하여, 그들이 톡톡 튀기며 나누는 까칠한 대화에 빨려든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과레스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른 가족들의 내면세계다. ‘에드가 앨런 포’의 꿈을 꾸며 상속놀이를 즐기는 아내 마르게리타, 아버지의 이마에 빨간 딱지를 붙이며(과레스키의 은밀하다할 수 있는 정치적 색깔로 보인다) 소유물로 낙인찍는 어린 딸 파시오나리아,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해서도 최근 만화 ‘도널드 덕’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버지의 교육적 욕구는 무시하고 교과서에서 본 사진에만 충실하려는 아들 알베르티노. 각각의 인물 설정이 모두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50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니 묘하다.


이들 중에서도 파시오나리아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과레스키의 딸이 이런 성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녀의 까칠함은 전혀 미워할 수 없는 발칙함이다. 어느 날, 유산을 선불로 받겠다고, 개인적 파시오나리아가 아니라 파시오나리아와 알베르티노의 '대표' 자격으로 과레스키 앞에 등장한 파시오나리아와 아버지와의 승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사람에게 선불을 주지 않아.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불행에 처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겠어.” 라고 논리적 반박을 하는 과레스키 앞에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맹랑한 아가씨 파시오나리아는 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은 두 미장이 보조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면...” 과레스키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나는 그들을 도와주었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칙은 유지되었다.(p316) - 이쯤 되면 누구의 승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부녀간의 설전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진지하게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터지는 반전과 예상치 못하는 대화의 흐름만으로도 유쾌한 책이다.


마지막 에피소드, <특급열차 136호>는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까칠한 가족들 틈에서 조금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변주는 <춤추는 두 사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레스키 자신을 빗대어 등장시킨 특급열차 136호의 기관사는 권태로운 일상을 떠밀려 살고 있으면서도 탈선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자아와 그에 대한 집착, 자가당착의 갈등으로 심각해 하는 모습은 <치촐라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에피소드 전체가 하나의 은유로 쓰이는데 마지막 글귀는 그 화강암 덩어리 같은 치촐라타(돼지고기 부스러기를 굳혀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의 일종)를 깨부수는 영웅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맺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 특유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을 텐가.

 

-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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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쓰려고 앉았는데요 와 님 정말 잘쓰셨네요. 확 쓰지말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겠죠? 정공법은 안되겠고...귀염성에 호소하는 리뷰를...^^

프레이야 2007-01-0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셋째날 아침이에요. 여전히 복 많이 받으시는 한 해 되시기 바래요. 만두님 벤트엔 참가할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ㅜㅜ(뜬금없이...)
님의 리뷰는 비교될 수 없는 경지에요^^
과레스키 못지않은 웃음을 줄 님의 리뷰, 기대되어요.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절판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직 사는 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로 난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필사적으로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심연 속의 영원함에 매력을 느껴요. 때로는 몸을 내밀고 영원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절벽 가장자리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지. '몸을 내밀면 위험합니다.'-16쪽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개혁과 새로운 것, 혁명적인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법석을 떨지요? 결국에는 자연의 법칙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말이에요. 혹시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오늘 당신이 떨어진 것처럼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가요?-25쪽

우리가 나폴리를 향하고 있지만, 지금 내려가지 않고 올라간다고 해서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니오. 물론 북쪽은 위에 있고, 남쪽은 아래에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쪽으로 가면 오르막길이 없고, 북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이 없는 것은 아니오.-27쪽

어느 순간 아버지는 집 안에 이방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새로운 눈으로 아버지를 관찰하는 아들이다. 아들이 자신의 적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결국 아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더 강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동맹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코 자기 자신에게 위선적이지 않아야 한다.-78쪽

선물을 살 때 사람들은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정복이라고나 할까.-88쪽

파시오나리아, 나는 네 손을 놓아야 하고, 너는 벽 사이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야 해. 그러니까 파시오나리아, 너도 안녕. 너는 나의 삶에서 떠나 국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저들은 너에게 국가의 위선을 가르치겠지. 이제 더 이상 네 생각도 네 것이 아니게 될 테고, 너는 교육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지. -113쪽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만들고, 밤이면 도시들을 환한 불빛으로 비춰준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까지 규제하고, 법률과 규정의 풀어헤칠 수 없는 실타래 속에 우리를 더욱더 옭아매고, 우리를 더욱더 하찮은 톱니바퀴로, 피를 빨아먹으면서 헛되이 돌아가는 무서운 기계의 톱니바퀴로 만든다.-114쪽

완전히 나만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내가 완전히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그래요. 나는 그 신비로운 세계, 그림자들과 욕망들, 두려움들이 가득한 그 세계의 포로이고 절망적으로 혼자예요. 나는 고통스러운 발을 이끌고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어요.

힘들겠군, 마르게리타. 혹시 자전거라도 한 대 살 가능성은 없소? 노고를 상당히 덜어 줄 텐데.-141쪽

나는 단지 선생님을 위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뱉는 독약은, 국가의 태만함과 관료제의 귀머거리연한 무관심 때문에 공동체의 선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힘겹게 살아온 삶의 마지막 날들을 슬프게 보낸 그 모든 사람들과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165쪽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230쪽

마르게리타, 어제는 당신이 '추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오늘은 '신랄하다'고 말하는군. 당신 생각을 표현하는 데 평범한 낱말들로는 충분하지가 않소? 당신도 이제 애매한 지성주의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아뇨. 단지 낱말들의 꽃밭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떤 이국적인 꽃을 하나 꺾어 낡은 생각을 새로운 꽃으로 치장해 보는 것이 좋아요.-316쪽

과거는 맥주 한 잔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모욕을 주는 사람은 그 모욕을 모래 위에 쓰지만, 모욕을 받은 사람은 청동에 새겨 두는 법이에요.-319쪽

조반니노,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저건 악마 같은 전략이에요. 만약 열다섯 사람이 누군가에게 덤벼든다면 그것은 공격이에요. 하지만 이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격분한 군중의 납득할 만한 반응'으로 소개될 수 있어요. 법은 군중을 처벌할 수 없어요. 군중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지요.-323쪽

나는 지금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기계들이 있는 치과에 가는 것이 아니야. 옛날식 치과에 갈 거야. 어렸을 때 우리를 아프게 했던 치과에 말이야. 그런 고통을 포기하면 내 젊음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 세대는 엘리베이터와 비행기를 불신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지는 않아!-339쪽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세대란 메스가 자신의 생살을 찢는 것을 확고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고 울지도 않는 세대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너무나도 존중해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심지어 자신의 살이 외과 의사의 칼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340쪽

햄릿, 기술의 발전이 단순한 사람들을 매혹시키듯 너 또한 매혹시키는구나. 너는 거기에 혹하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기술 발전을 문명과 혼동하게 될 것이고, 또 네 근본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없을지라도 너는 개다움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348쪽

나는 근무를 할 때마다, 또 치명적인 커브 지점에 도착할 때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생각하지. '다음번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내릴 거야.' 권태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마르게리타. 그리고 더욱더 내 일을 힘들고 어렵고 불쾌하게 만들지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싶고, 바로 몇 년 전부터 창가에 있는 아가씨의 미소 속에서 내가 읽어 내는 초대에 응하고 싶어. 그런데 매번 뒤로 미루지. 바로 특급열차 136호 기관사의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야.-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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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빈집의 약속 -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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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근소근님/ 긴 이야기, 아픈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랬군요. 살다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는 것 같아요. 표면적인 것으로만 봐서도 안 되구요. 속내를 들여다보면 누구든 그만한 사정과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요. 힘든 부분 있더라도 잘 해내시리라 믿고 싶어요. 그러고 계신 것 같지만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6-12-19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30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30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3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선한님/ 그렇군요. 몸과 마음 푹 쉬고 돌아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