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는 가계에 대한 효율적인 세금이었다. 가계저축은 은행에서 취합된 후 국유기업으로 흘러갔다. 가계의 세금이 국유기업에 대한 효율적인 보조금이 되었고, 은행은 도관 역할을 한 것이었다. 왜 중국의 가계는 자신의 돈을 다른 금융자산에 운용하는 대신 은행에 맡겼을까? 가계가 자신의 저축을 보호할 수단이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외국 자산 매입은 극도로 적은 수의 부유한 계층에게만 선택 가능했다. 주식 소유가 가능한 사람 역시 제한적이었다. 평균적인 가계가 부를 저장하는 방법으로는 주택과 은행계좌 두 가지만있었다.
M 나바르M Nahar(2011)는 중국의 도시 가계저축과 실질 예금금리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은행이 가계저축을 보호하지 못하는데도 가계는 저축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늘렸다. 왜냐하면 교육이나 주택 매입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중국의 가계저축은 사회안전망 부족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책의 맥락에서중국 가계저축 증가의 중요한 요인은 은퇴 이후를 대비해 저축하는행태였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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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세계 속 위상을 형성한 역사의 3막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부상은 세 개의 사건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셋 중 첫째 단계는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라는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중국의 부상은 특히 1992년 둘째 단계에서 푸렷해졌다.
- P46

첫째 단계는 1978년에 시작되었다. 농업이 개혁되었고 사기업이 중국 경제에 재진입하도록 허용되었으며 외국인이 투자할 수 있는 특별경제구역 (우리가 곧 논의하는 주장삼각지 포함)이 설치되었다. 도시의 제조업에 대해서는 가격 통제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상당히 비효율적인 국유기업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둘째 단계는 국유기업의 민영화가 시작된 것이다. 중소기업은 물론 몇몇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폐쇄되거나 민간 부문에 매각되었다. 이시기에 민간 부문이 극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금융을 포함해 국가이익에 핵심적이라고 여겨진 분야에서는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독점을 유지했다.  - P47

둘째 단계의 성공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무역적자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극적으로 증가했지만, 규모가 확대된 때는 1980년대가 아니라 1990년대였다. 중국으로의 외국인 직접투자 FDI 또한 같은 양상을 보인다. 중국이 경제를 개방한 이후 10년 동안 FDI는 50억 달러가 안 되었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FDI는 500억 달러에 육박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몇 년 동안에만FDI가 감소했다.
1990년대 말 중국의 상황은 오늘날 중국이 서 있는 상황과 기도하게도 비슷하다. 지금처럼 그때도 중국의 개혁이 힘을 잃는 듯했다.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하락한 성장률조차 부풀려진 수준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국유기업들은 비효율적이었고 재고가 많이 쌓였다. 지금처럼 그때도 중국의 무역흑자 확대는 중국의 중상주의 정책의 증거라고 널리 여겨졌다. 또는 적어도 외국의 수출 시장에 접근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자국 시장에 접근하지는 못하게 하는 비대칭적인처우의 증거로 여겨졌다.
종합해 되짚어 보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중국을 개방하기시작했고, 1992년 이후의 둘째 단계가 중국을 세계 경제와 더욱 빠르게 통합시켰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개혁의 힘이 빠지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가 뚜렷해졌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방책을 추진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다.
중국의 WTO 가입에 앞서 미국은 2000년 중국에 대해 입법을 통해 영구정상무역관계PNTR: 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 지위를 부여 했다. - P48

 이는 미국의 최혜국대우 NIN에 해당하며, 중국의 WTO 가입을 보장하는 절차 중 하나였다. 중국은 1995년에 출범한 WTO 체제에 수년간의 긴 협상 끝에 2001년에 진입했다.
WID 회원국 자격 획득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사이의 시기에 중국은 경제•정치적으로 초강대국의 기반을 다졌다. 세계 경제의 힘과 ‘상품 슈퍼사이클‘ 및 신흥시장을 둘러싼 열띤 분위기, 세계화의 이익에 대한 칭송 등은 모두 정도는 달라도 이 시기 중국의 확장에서 파생된 현상이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자유화와 개방의 긴 조건을 전제로 승인되었다. 미국이 부과한 전제조건은 대부분 중국 시장에 대한 더 큰 접근 가능성과 중국 시장의 투명성이었다. 중국은 대략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효구받았다.
--수입관세를 5년 이내에 10% 아래로 인하하고 몇몇 농산물에 대해서는 0%에 가깝게 인하
--비관세장벽 완화 또는 철폐,
--통신과 은행을 포함한 몇몇 핵심 분야 
--개방세계 지적재산권 보호 

중국에 부과한 이 같은 전제조건은 전무후무하게 가혹했다. 이를 검토한 N. R 라디K. R. Lardy는 중국의 WTO 가입 전에 발표한 논문(2001)에서 왜 중국의 지도부가 WTO 가입을 추구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WTO에 받아들여진 이후 10년간 중국의 양적·질적 성장을 보면 외국 시장으로 더 접근하려 한 중국 지도부의 전략은 주효했다. - P49

WTO 가입 전 중국이 처한 상황을 더 살펴보자.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중국의 개혁이 힘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고공 행진하던 성장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 시기에 매년 하락했고, 재고는 걱정스러운 수준으로 쌓였으며, 국유기업의 비효율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었다. 1999년 4개 대형 자산운용회사 (결과적으로 배드뱅크)가 설립되었는데, 은행의 부실채권 중 큰 물량을 인수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국제결제은행BIS(2002)은 "4대 국유은행의 부실채권 총액은 3조 4,000억 위안(미화 4,100억 달러)으로 2001년 말 그들의 대출 총액의 42%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어 "이는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피크 부실채권 비율의 40~60%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그들 4대 은행이 은행 부문 대출 총액의 65%를 차지했다는사실을 중국의 은행 부문 전체에 적용하면, 중국 경제 전체의 부실채권은 5조 7,500억 위안으로 2001년 중국 GDP의 50%를 넘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다시 살펴보면, 왜 중국 지도부가 긴 전제조건 목록을 감수하고 WTO 가입을 추진했는지 명확해진다. 한편 자본 배분실패와 부실채권이라는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특징도 분명하다.
전제조건 목록을 일별하면 중국이 주요 관세장벽을 낮추고 외국기업들이 진입하도록 자국 시장을 개방한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 분야는 자국 기업의 역량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자국 기업의 역량이 강하거나 확보된 영역에서는 비관세장벽을 유지하고 대체로 외국 기업이 중국에서 성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미국은 중국에 PNTR 지위를 부여한 이후 새로운 시장 접근양허를 추가할 수 없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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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 회원국 중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다른 주요
산유국인 이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중동 지역의 지도를 가로지르는 주도권을 위한 다툼이다. 이 갈등은 또한 종교와 이념의 충돌,
국가의 이익과 이슬람 세계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충돌로 인해 빚어졌다. 그리고 석유 역시 이 씨움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에 전 세계는 두 나라의 다툼에 영향을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서로를 향해 내비치는 경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 P300

지역을 관통하는 깊은 갈등의 골들을 만들었다. 호메이니의 새로운 현법은 이란 혁명이 단지 이란뿐 아닌 ‘전 세계 단일 공동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충분할 정도로 분명히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호메이니 자신도 "이란 혁명은 그 출발 지점에 불과하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모든 폭압적인 범죄 정권을 깨부수는 것이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란이 반드시 "다른 국가들에게도 혁명정신을 전파하고 이란 안으로 들어오는 오염된 사상들을 거부해야만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P304

그렇지만 미국을 페르시아만으로 끌어들인 건 이란 혁명뿐만이 아니었다. 1979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 지역 공산당 지도자가 비밀리에 미국과 접촉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져 저지른 실수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의 영역을 넘어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 행동을 벌였다는 것에 워싱턴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 후 페르시아만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란은 더 이상소비에트 연방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의 경찰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페르시아만으로 전진해 중동 지역 석유를 장악하려는 계획의 첫 단계가 될 수도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입장에서 아프카니스탄 침송은 처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드는 부담스러운 작전이었고 결국 훗날 벌어지는 연방 붕괴 과정의 단초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이 침공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성전 사상이 시작되었으며 그 영향역은 전 세계에 퍼진 데 이어 급기야는 아랍 세계의 중심부까지 이어져 관련 지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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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관료들은 과거 세 곳의 오스만 제국 동쪽 행정 지역, 즉 빌라예트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자신들의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영국이 원래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던 이 지역은 이제 이라크가 되었고 북쪽 지역과 모술에는 쿠르드족이, 서쪽 지역과 이라크 중심부 및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종파 중 수니파가, 그리고 남쪽 지역과 바스라에는 시아파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이 세 지역에 공통된 정체성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스라는 페르시아만과 남쪽으론 인도를 향하고 있었고, 바그다드는 동쪽으로 페르시아와 이어져 있었으며, 모술은 서쪽의 터키와 시리아를 마주보고 있었다. 차이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구나 종교적 구성만 보더라도 쿠르드족, 터키 쪽에서 흘러들어왔으며 네스토리우스(Nestorian)파라고도 불리는 아시리아 기독교인 (AssyrianChristian), 바그다드에서 제일 비중이 큰 단일 민족인 유대인, 신자르산맥(Mount Sinjar)에 모여 살고 있는 야지디(Yazidi)족, 거기에 투르크멘(Turkoman), 아르메니아(Aremenian), 칼데아(Chaldean), 사비아(Salbean) 및 페르시아인들까지 더해져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 민족이었지만 그들 역시 종교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와 소수인 수니파로 갈라져 있었다.
영국은 이라크로 통일된 이 나라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왕을 내세우는 것이라 생각했고, ‘메카의 수호자‘의 아들이자 지난 전쟁에서 아랍 봉기를 이끌었던 파이살 왕자를 후보로 염두에 두었다. 시리아의 왕으로 잠시 옹립되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쫓겨난 상태였던 파이살 왕자는 당시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라크의 왕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찬성표가 무려 96퍼센트를 차지했다. 더 놀라운 건 투표에 참여한 국민들 대다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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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여름, 한 편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직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의 조직원 하나가 영상에 등장해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어느 모래밭 위에서 발을 굴렀다. 남자의 뒤에는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채 버려진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 무렵까지 두 국가 사이의 국경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던 곳들이었다. 다시 발을 구르며 이 조직원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만들었던 ‘사이크스 피코(Sykes-Picot)‘ 협정은 이제 이라크와시리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의 발아래 사라졌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마침내 끝났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국경선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선언을 강조라도 하듯 국경 초소가 폭파되는 장면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국경선들을 지워나갈 것이다."
- P282

 사이크스와 피코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915년 12월 런던,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한 젊은 영국인이 비밀리에 매일 프랑스 대사관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었다. 남자는 이제 곧 사라질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제작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들도 곧 적당한 때에 주권에 대한 현대식 정의와 함께 새로운 민족 국가로 탄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보수당 의원이자 기행문 작가였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는 런던 최고의 중동 지역 전문가로 영국 정부에 영입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 이후부터...... - P284

......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 지역을 돌았고 그렇게 여행을 하며 여러 권의 기행문도 출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발표했던 기행문은 『칼리프의 마지막 유산(The Caltiph‘s Last lertage) 이었다. 이슬람교의 율법학자를 흔히 ‘물라(Mullth)‘라 일컫는데, 사이크스의 모습을 본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물라(Mad Mullah)‘라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사이크스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간의 경력 덕에 중동 지역 정책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며 급기야 이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사이크스는 우선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서 비밀리에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 -Picot)를 만났다. 피코는 프랑스의 고위직외교관으로 어렸을 때부터 늘 나이보다 조숙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한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피코 본인도 레바논 지역 총영사 출신이었다. 각기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사이크스와 피코는 5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신하에 서로 힘을 합친다.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에 중동 지역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당시에는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들만 있었을 뿐 그 안에는 어떤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있었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제국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및러시아 제국 연합에 대항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의 표현처럼 오스만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려"하고 있었다. - P285

물론 그 제안이라는 건 전쟁 이후 중동 지역의 모래밭 위에 열강들이 멋대로 선을 긋고‘ 역시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새로운 국가들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수상 관저에서 회의가 있고 나서 얼마 뒤 사이크스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 대사관을 비밀리에 드나들며 피코와 만남을 가졌다.
1916년 1월 3일, 두 사람은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모래밭 위에 그어진 선‘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하이파(Haifa) 근처에서 시작되어페르시아 국경 근처인 키르쿠크(Kirkuk)까지 이어지며 선의 북쪽은 고랑스의 보호령, 남쪽은 영국령이 된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에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프랑스는 파란색 지역‘, 영국은 ‘붉은색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사이크스와 피코가 격렬히 충돌한 한 가지 쟁점은 바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성지(聖地, the Holy Land)의 관리 문제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영국이 하이파와 아크레(Acre) 두 항구를 차지하며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철도 주변 영토도 가져가는 데 합의했다. 팔레스타인의나머지 땅은 일단 그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공동 관리 구역이 될 것이었다.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북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사이크스와 피코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크게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그저 텅 빈 종이 위에 마음대로 지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둘의 작업은 기존 지도들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였는데, 이 제국의 행정 구역인 빌라예트(villayet)를 상세히 표시한 지도가 완성된 건 18년의 일이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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