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까칠한’이라는 낱말이 유행어가 된 이유를 더듬어보았다. 시작은 연예인의 입에서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 낱말에 공감을 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내면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든지, 타인들의 얄미운 속내를 꼭 집어내어 주는 말로 여겨서인가 싶다. 사람을 대상으로 ‘까칠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때면 내면의 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꼬여있어서 모든 대상을 사팔뜨기의 시선으로 보며 호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논쟁을 즐기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온화한 인상을 주지만 때로는 숨기고 있던 까칠한 일면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변인과 분쟁을 일삼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까칠한 ‘무엇’을 대패질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과레스키 가족의 까칠함은 보다 냉소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이다. 게다가 따뜻한 인간애를 깔고 있으니 적대적 감정이 일지 않는다. 원어(corrierino)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번역제목으로서는 반어적인 효과까지 노려 성공적인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때가 50년대이며 제 2차 세계대전 후 산재한 혼란을 겪었던 작가의 고국을 생각하면, 특수한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까칠한 가족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세기가 흘러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 삶의 본질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작가가 내세운 이야기의 매개물이 ‘가족’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도 있다.


하지만 과레스키를 비롯한 네 명의 평범한 가족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그리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과분한 일들은 알고 보면 사소하고, 따져보면 그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고 단순한 종류로 치부되어 지나치기 십상인 일들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분명 남다르다. 민감하고 독특한 촉각을 지닌 듯, 그들이 일상의 사건들을 프리즘으로 하여 인식하는 부부, 자녀, 세대, 종교, 교육, 복지, 국가, 이념, 전쟁, 그리고 일상의 권태로움과 희망을 포함한 삶과 죽음의 보편적 밑그림은 섬세함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상황으로 바로 진입하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고밀도 대화를 따라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속속들이 묻어놓은 작가의 농익은 사유와 그것을 흥미롭게 표현해내는 대화술이 위트 있다. 은근슬쩍 치고 나오면서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신랄하고 때로는 관대하기도 하여, 그들이 톡톡 튀기며 나누는 까칠한 대화에 빨려든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과레스키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른 가족들의 내면세계다. ‘에드가 앨런 포’의 꿈을 꾸며 상속놀이를 즐기는 아내 마르게리타, 아버지의 이마에 빨간 딱지를 붙이며(과레스키의 은밀하다할 수 있는 정치적 색깔로 보인다) 소유물로 낙인찍는 어린 딸 파시오나리아,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해서도 최근 만화 ‘도널드 덕’ 시리즈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아버지의 교육적 욕구는 무시하고 교과서에서 본 사진에만 충실하려는 아들 알베르티노. 각각의 인물 설정이 모두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50년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니 묘하다.


이들 중에서도 파시오나리아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과레스키의 딸이 이런 성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녀의 까칠함은 전혀 미워할 수 없는 발칙함이다. 어느 날, 유산을 선불로 받겠다고, 개인적 파시오나리아가 아니라 파시오나리아와 알베르티노의 '대표' 자격으로 과레스키 앞에 등장한 파시오나리아와 아버지와의 승부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사람에게 선불을 주지 않아.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불행에 처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겠어.” 라고 논리적 반박을 하는 과레스키 앞에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맹랑한 아가씨 파시오나리아는 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은 두 미장이 보조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면...” 과레스키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 나는 그들을 도와주었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칙은 유지되었다.(p316) - 이쯤 되면 누구의 승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부녀간의 설전을 통해 실업자 문제를 진지하게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터지는 반전과 예상치 못하는 대화의 흐름만으로도 유쾌한 책이다.


마지막 에피소드, <특급열차 136호>는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까칠한 가족들 틈에서 조금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변주는 <춤추는 두 사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레스키 자신을 빗대어 등장시킨 특급열차 136호의 기관사는 권태로운 일상을 떠밀려 살고 있으면서도 탈선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자아와 그에 대한 집착, 자가당착의 갈등으로 심각해 하는 모습은 <치촐라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에피소드 전체가 하나의 은유로 쓰이는데 마지막 글귀는 그 화강암 덩어리 같은 치촐라타(돼지고기 부스러기를 굳혀서 만든 이탈리아 음식의 일종)를 깨부수는 영웅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맺는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 특유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이 글 쓰는 사람에게만 있을 텐가.

 

-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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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쓰려고 앉았는데요 와 님 정말 잘쓰셨네요. 확 쓰지말까 싶지만 그래도 써야겠죠? 정공법은 안되겠고...귀염성에 호소하는 리뷰를...^^

프레이야 2007-01-0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셋째날 아침이에요. 여전히 복 많이 받으시는 한 해 되시기 바래요. 만두님 벤트엔 참가할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ㅜㅜ(뜬금없이...)
님의 리뷰는 비교될 수 없는 경지에요^^
과레스키 못지않은 웃음을 줄 님의 리뷰, 기대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