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외에도 걷고 앉고 말하고 웃고, 길에서 크게 소리쳐 부르고, 먹는 몸짓과 물건을 잡는 방식들이 유럽과 프랑스 시골을 바탕으로 둔 과거의 기억을 몸에서 몸으로 전했다. 개개인이 다르고, 착한 이들과 못된이들로 나뉘어도,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유산이 가족구성원들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모든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습관들, 벌판의 아이들과 작업실의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까마득히 오랜 옛날의 아이들이 선행했던 모든 몸짓들: - P33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줄에 있는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적합할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지난여름의 기억외에 다른 기억은 없는 게 아닐까. 그녀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육체, 남자의몸, 상(像)이 거의 없는 그 기억.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 P97

그녀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녀의 몸은 젊고, 그녀의 생각은 늙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이론이 만능열쇠라는 생각에 진저리가 나고", "다른 언어를 찾고 있으며", 원초적인 순수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적었으며그녀는 낯선 언어로 글쓰기를 꿈꾸고 있다. 그녀에게 단어란 밤이 드리워진 천의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일"이다. 권태에 반박하는 "나는 의지이고 욕망이다." 같은 문장도 있으나, 무엇에 관한 의지이고 욕망인지는 쓰여 있지 않다. - P112

20년 후의 여성은 상념이자 유령이다. 절대 그 나이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진 속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서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 광기라는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광기를 순간적으로나마 보존하기 위해 글쓰기만을 - 어쩌면 남자도 - 생각한다. 그녀는 과거, 현재의 장면들과 밤에 꾼 꿈들 그리고 미래의 상상이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인 "나" 안에서 교차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혀 «개성»이 없다고 확신한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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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Note

한 남자

2018년 요미우리문학상을 받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 구보타 마사타카 등이 출연하며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으로 주목받은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연출했다.
이혼하고 아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살던 리에(안도 사쿠라)는 다이스케(구보타 마사타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성실하고 착한 남편과 아이도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다이스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다이스케의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죽은 남편의 사진을 보며 이 사람은 내 동생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이 다이스케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리에는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남편이 누구였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내가 알던 사람이 한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뀔 때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한 남자>는 키도를 재일교포로 설정하면서 질문의 수위를 정치적인 문제로 확장한다. 키도는 사실에 접근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과도 대면한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욕망과 나를 나로 만드는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미스터리 속에 충실히 담아냈다.

BIFF 2022
프로그래머
남동철

리메이크/원작 있음
Japan 2022 123min

————
히라노 게이치로 책 몇 권도 보고픈 게 있네.
안도 사쿠라 연기를 좋아해서 다음에 봐야겠다.
일본에서는 11월 개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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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르네 마그리트 그림이 배경!ㅎㅎ 일본어 포스팅 문구가 영화 스포네요🙊

프레이야 2022-10-16 22:30   좋아요 1 | URL
네. 뒷통수 ㅎㅎ 속이기 어려운 이면.
일어 문맹인 저는 한자만 보이네요. 대충 짐작.
이 이야긴 사실 책보다 영화가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자주 다루어진 주제라.

희선 2022-10-17 0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알던 사람이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는 거 처음이 아닌 듯하기도 하네요 미야베 미유키 소설 《화차》 생각납니다 여기에서는 왜 그랬을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17 00:59   좋아요 1 | URL
미미 여사 화차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어요. 낭독녹음 했더랬죠. 이 책도 이유가 뭘까 왜 거짓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요. 희선 님도 포스터 글자 다 읽으시겠어요. ^^ 재일교포 3세라는 게 단초가 될 것 같긴 한데요
번역이 필요합니다. ㅎㅎ

희선 2022-10-18 01:12   좋아요 1 | URL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밑으로 쓰인 말은 <사랑했던 남편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거 알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왼쪽 밑에 큰 글자는 영화 제목이고 위쪽에 있는 작은 글자는 배우랑 여러 사람 이름이네요

밑에 로드쇼 옆에 있는 말은 “[사랑]과 [과거]를 둘러싼 주옥 같은(아름다운) 감동 휴먼 미스터리, 충격의 영화화.”예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18 01:11   좋아요 1 | URL
우와 희선님 고마워요
요정도는 궁금증 유발할 문구지요.
책소개에도 거의 다 나와 있어요^^
이야기 전개와 이면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제13장 가톨릭 금서, 레 망다랭(1950-1958)


이 책 내내 흥미로운, 보부아르가 동시대 만난 사람들… 매력적인 사람들, 연관책에 영화에 … ^^


한쪽 유방 절제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하니 사르트르는 냉소주의로 대응했다고. 최악의 경우라 해도 12년은 더 살텐데 어차피 그때쯤이면 지구는 원자폭탄으로 멸망할 거라나. 보부아르는 수술 전날 보스트와 아름다운 수도원에서 보냈다고…
보부아르의 말대로 감정적 상호성은 결여되었지만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의 작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지적이든 정확한 피드백을 아낌없이 해준 걸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1952년 가을에 처음 원고를 보고 “훌륭한 구석이 많지만 아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완성되자 자기는 소설을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며 “ 자유, 불확실성, 애매성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시대의 문제를 나보다 훨씬 더 잘 탐구했다”고 말했다. (356) “나보다”라는 말이 거슬리지만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실패한 면이 있는 관계라 해도 서로에게 아주 필요했다. 레 망다랭,은 1954년 10월에 출간해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제목도 클로드 란즈만이 붙였다.


#
사르트르는 새로운 정치적 열의를 잡지에 반영하기 원했으므로 젊은 마르크스주의자 몇 명을 레 탕 모데른,의 필진으로 영입했다. 그 중에 사르트르의 비서와 친구 사이인 아주 명민한 젊은이가 있었다. 클로드 란즈만은 스물일곱 살이었고 유쾌한 성격에 파란 눈이 아주 예뻤다.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354)



이때 마흔넷의 보부아르는 성적 매력을 잃어간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 같다. 보부아르는 미국 소설가 올그런과 연애 중에도 그랬듯 란즈만에게도 편지를 열정적으로 보냈다. 두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설명을 듣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란즈만은 보부아르가 처음 집에 들인 애인이고 칠 년을 함께 살았고 유일하게 “tu”로 지칭한 연인이었다. 클로드 란즈만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우울증 혹은 절망에 가까운 실존적 불안”(358)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1958년 보부아르는 오십대로 접어들고 란즈만과는 이별 후 웆정을 잇는다. 란즈만은 유럽대표단으로 북한에 가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었고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여기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동안 보부아르는 “버지니아 울프를 나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한 해독제처럼 읽으면서” 자신의 생을 달리 “평가”(381)했다.

보부아르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클로드 란즈만은 560분짜리 걸출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네 명의 증언에 기대어 풍경과 말만으로 이어가고 음악도 배제하였다. 란즈만이 트라우마적 포로노라고 생각하는 잔인한 장면도 일절 넣지 않았다.


쇼아의 각본집이 나와 있다. 서문을 보부아르가 썼다. 그가 쇼아를 찍기 안팎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담은 40분짜리 다큐 ‘클로드 란즈만, 쇼아의 유령’도 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작.


https://v.daum.net/v/20180706022617407



알라딘 책소개 가져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서문 〈공포의 기억〉 중_
〈쇼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마법같은 힘이 있다. 그러나 마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난 뒤 우리는 게토와 절멸수용소에 관하여 셀 수도 없이 많은 증언을 읽어왔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오늘날 클로드 란츠만의 훌륭한 영화를 보며 사실은 그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지식이 무색할 만큼 당시의 끔찍한 경험은 우리와 동떨어져 있었다. 이제야 우리는 처음으로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 클로드 란츠만의 영상 편집은 각각의 사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실제로 일어난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이런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편집은 한 편의 시와 같은 구조를 띤다.

———

1925년생 클로드 란즈만은 2018년 세상을 떴다. 당연히 그전의 일이겠지만 보부아르에게서 받은 300여 통의 편지 중 112통을 선별해 예일대학에 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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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6 1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쇼아 영화를
학부 시절에 단체로 봤는데 (학교 내 극장에서 )
독일 출신 학생들이 더 활발하게
자신의 조상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날 선 비판을 하더 군요
반면
일본인 학생들은 영화 끝나자마자
유유히 사라졌어요 ,,,,,

프레이야 2022-10-16 18:55   좋아요 1 | URL
장장 9시간 넘는 영화 디비디가 착한 가격에 나와 있네요. 각본이랑 당장 구매. 학부 때 보셨군요 스캇님. 가해자들의 증언도 궁금합니다. 말과 풍경이 스산할 것 같아요.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겠지만 일본학생들 기숙사 방 비우면서 쓰레기 안 치우고 자기것만 챙기고 나가더라고 … 작은애가 독일에서 본 이야기네요.
 

아직 해설은 읽지 않았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잘 살고 있는 거니?
여러가지 찾아보고 가보고 싶은 곳 알아보고
또 추억도 뒤지며 멈칫멈칫, 휘리릭 읽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여운이 길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 여덟 편.

나는 노트북을 켜고 할아버지의 녹취 원고 파일을 열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왔다.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20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 P235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 P242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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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6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6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_ 이토록 평범한 미래, 첫문장



여덟 편 중 두 편 읽었는데 벌써 참 좋다. 작가가 더 담담하고 단단하면서도 넉넉해진 느낌이다. 책날개 띠지 QR코드로 들어가면 김연수라디오로 연결된다. 각 단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들려준다. DJ를 하고팠다는 연수 작가 귀여우심. ^^
아직 다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두 편 모두 내 기억을 부르는 무엇도 있어 그렇게 우리는 시간속에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위안받는다. 1999년 나를 떠올려 보았다. 작은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나서도, 잘놀고 잘먹는데, 밤잠을 안 잤다. 만 세 살이 될 때까지 밤마다 포대기에 업고 식탁에 서서 책 읽거나 뜨개질했다.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고속도로 위 자동차 불빛이 아스라히 꺼져가면 아이는 잠이 들었다. 나는 45킬로그램까지 살이 빠졌다.


어느 누구의 삶도 같지 않으면서 비슷한 전환점들이 있다.


김연수 작가는 2018년 세종시 강연에서 시간을 사는 또다른 방식에 대해 나직이 말했다.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과거나 현재에서 보는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미래의 괜찮은 나, 그 눈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의 나는 훨씬 허용 가능한 인간이고 지금을 사는 마음 또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주 잊어먹고 지냈다. 우리, 있을 것 같다고 생각지도 않은 미래의 구체적 평범한 하루에서 특별했던 과거의 첫날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하루, 그 관점으로 사는 삶은 세 번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겐 그 방식이 유효하진 않을 것도 같고. “이토록 평범한 하루”는 세계에 지지 않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지혜와 긍정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 “난주의 바다 앞에서”도 비슷한 위안과 용기를 불러준다. 세컨드 윈드! 폭풍우 치는 난바다 앞에서 지지 않는 사람들. 슬프고도 강하고 따뜻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대 쪽으로.”
이 글을 읽고 추자도에 가보고 싶어졌다. 당장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일기가 조금만 나빠 보여도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추자도는 정말 바람이 거센 곳이구나. 아기 황경한과 눈물의 십자가 길! 그곳은 하추자도에 있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다 보려면 섬에서 일박 하는 걸로 계획하는 게 좋겠다. 제주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여러해 전에 가봤다. 빗방울 떨어지는 어스름 저녁이었고 나 말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어미이자 아내,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한 인간의 삶을 떠올려보며 든 그때의 먹먹함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어둑신 내려앉는 스산한 그곳에서 나약하나 강인한 한 인간상을 떠올렸다. 김연수 작가는 이런 걸 새삼스레 말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한 걸음 물러나 순진한 신념이 몰고온 생의 난파를 바라보고 “새 바람”을 건넬 뿐.



책을 에코백에 넣어 마산으로 잠시 나왔다. 세컨드 윈드는커녕 소소한 바람이나 쐬러 갈 일이었다. 동행자가 위에 인용한 첫문장을 떠올려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워낙 아무말이나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약간 긴장되었다. 한 고비였던 십 년 전에도 이제 끝났을 거라고 돌파구가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고 했다. 나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듯 십 년 단위로 생을 정비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또 나아가보자고 뭐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인지 좀 울컥해져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가을 햇살이 따가워 맞춤이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구산마을에 당도했다. 평범한 하루가 오후 세 시 나른한 포구 마을에도 흐르고 있었다. 겉으론 모두 고요하다. 오늘은 고요한 것만 보리라. 할머니 세 분이 홍합을 까서 판다. 한 봉지 샀다. 홍합 손질해 보면 알지만, 이렇게 많이 만 원이면 거저다. 미역국 끓여야지. 캠핑카들이 제법 보인다. 양말 널어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다. 조금 걷고 차로 한 바퀴 돌아 나와 구복마을을 통과했다. 저도로 들어가는 연육교, 시뻘건 다리, 콰이강의 다리란다. (그옛날 대학교정에 있던 일명 콰이강의 다리는 운치가 있었다) 동행자가 사진 담으러 간 동안 그 아래 카페 콰이,에서 그림자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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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0-13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 신작소설, 앞부분에 사인이 있군요.
제 책에도 있는지 한 번 봐야겠어요.
프레이야님, 일교차 큰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2-10-13 21:23   좋아요 2 | URL
설마 저만 있는 거 아니겠죠~^^
날씨가 많이 싸늘해졌어요. 감기조심하시고요

거리의화가 2022-10-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감상 정말 좋아요^^ 역시 더 세심하게 읽고 나눠주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보다 좋으시다니 다행이구요^^ 이 책 읽고 여러 모로 시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더랍니다^^*

프레이야 2022-10-13 23:43   좋아요 1 | URL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문제이네요 화가 님 ^^ 연수 작가님 더 노련해진 것 같아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셋 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미미 2022-10-13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글도 사진도 에세이 펼쳐보는 느낌들어요! 카페 사진 분위기가 잘 꾸며진 가정집처럼 아늑하네요? 프레이야님 미역국 향이 참 좋겠습니다ㅋㅋ

프레이야 2022-10-13 23:44   좋아요 0 | URL
내일 미역국 끓여 먹어야죵 ^^
햇살이 어찌 잘 드는지 나른하니 노곤했어요
미미 님 굿나잇 ~

희선 2022-10-14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사진 어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곳이네요 사진으로 보니 좋네요 그곳에 사는 사람도 좋을지... 별 생각을 다합니다 나름대로 괜찮겠지요 소설에 나온 곳에도 가고 싶으시군요 언젠가 가 보시겠네요 콰이강의 다리는 다른 나라에 있는 거 아닌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14 01: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다른나라에. ^^ 교정에 있던 건 우리들이 그렇게 이름 지어 불렀어요. 나름 운치있었지요. 지금은 없어졌을 겁니다. 교정도 많이 변했을거고. 어촌마을 참 평화로웠어요 오늘. 추자도는 내년이나 가보려나 싶어요. 배편 다 알아보고 그랬네요.

책읽는나무 2022-10-14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김연수, 프연수님의 글과 사진이네요ㅋㅋㅋ
이뻐요^^
콰이의 다리!! 그래서 카페 콰이!!
인상적입니다.
1999년 저도 떠올려 보니 직장생활 하면서 속 끓인다고, 저도 몸무게가 43키로 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2000년 결혼하고, 임신하고, 아이 낳고...몸무게 원상복구 되었는데 프레이야님은 육아가 고단하셨군요?
연예인 몸무게?...^^;;;
지나고 보면 나름의 고충도 추억이 되는 듯 합니다.

프레이야 2022-10-14 09:34   좋아요 1 | URL
지난 시간 되돌아보면 꿈만 같아요. 육아 … 다들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장합니다. 님은 셋이나. 콰이강의 다리, 영화 오래전에 보았는데 말이죠. 갔다와서 보니 저기가 나름 핫플인가 봐요. 야경이 멋질 것 같긴 해요. 가까우니 다음에 야경 보러 한번 가볼까요. 연육교인데 낮엔 시뻘건 흉물이었어요 ^^

2022-10-1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우 2022-10-14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45킬로그램이라니~~ 너무 힘드셨겠어요. ㅠㅠ. 저도 비슷한 시기에 애 낳고 키웠었는데. 시간이 어찌 갔나 싶네요.

프레이야 2022-10-14 13:28   좋아요 3 | URL
호우 님 우리 모두 그런 때를 지나왔군요. ^^ 지금은 엄청 불어났어요. 아 옛날이여~
이번 김연수 소설집 참 좋네요. 생의 연륜이 쌓였다는 느낌도 들고 겹겹의 생각이 드는 이야기라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오늘도 좋은 가을하루 보내세요 ~

scott 2022-10-15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수옹 겨울 눈 가득 일때 이 책 제주도에서 완성 했다고 합니다! 프레이야님은 가을 마산에서 연수옹 열독! ㅎㅎ프레이야님의 주말은 이토록 평범하지 않게 멋지게 ^^

프레이야 2022-10-15 13:23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주 이야기가 제법 있었군요. 바람의 정원도 가보고 싶어졌어요.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중산간 돌아다닐 때 거긴 못 봤어요. 가게 되면 연수 작가의 그 단편을 떠올리겠죠. ^^ 아픈 이야기였어요.

라로 2022-10-15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자 멋져요!! 음료수 색도 그렇고요,, 어떤 맛일지 마셔보고 싶어요!!
홍합으로 미역국 만들어 드셨어요?? 저 그런 거 엄청 좋아하는데... 맛있겠어요!!
아무튼 사진이랑 올려주신 글이랑,, 무슨 영화같습니다. 제목은 ˝하루˝ 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 문장과 올려주신 그림자 사진들이 너무 잘 어울려요.
˝나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듯 십 년 단위로 생을 정비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또 나아가보자고 뭐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프레이야 2022-10-15 16:24   좋아요 0 | URL
옆에 코발트 색 액체 작은 잔에 든 거 그게 꽃추출물이라네요. 무슨 꽃인지 들었는데 까먹었다능 ㅎㅎ 그걸 부어서 마셨어요. 시원하게 상큼한 샷! 콰이에이드.
햇살이 좋아 그림자도 멋지게 보였네요.
홍합 양이 많았어요. 미역국 맛나게 끓여 먹었고 내일은 볶아서 다른 거랑 고명으로 얹어 잔치국수 할까 해요. 홍합 부추전도 한 장 부치고요. 집밥 스타일 좋아하는 라로 님 알죠^^
제목은 그냥 하루, 할까요. ㅎㅎ
애꿎은 여성호르몬 때문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요하기도 북적대기도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