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집 님의 최근 페이퍼가 나에겐 또 한 가지 기억을 불러 준다.
인터넷서점이 생길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예닐곱 살 정도의 나이 때였다. 지금처럼 단행본으로 멋진 그림책이 없었던(못 보았으니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알뜰살뜰 생활비를 쪼개어서라도 책을 사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맏딸인 내게 안데르센그림책 전집을 사주셨다. (그때 본, 미운오리새끼가 아름다운 백조였더라는 내용과 그림이 꽤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출판사별로 전집이 성행했고 그걸 장기할부로 구매하는 방식이다. 신용카드도 없었던 시절이니 집집마다 할부로 전집을 사서 장식을 하기도 했다. 우리집은 당시 장식으로 전집을 사서 꽂아둘 공간은 아니었고 그저 어머니가 사주신 그 많은 그림책이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림책들을 마당에 내던지기 전까지는.
젊고 혈기왕성하고 완고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할부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방식이다. 상의도 없이 거금의 책을 할부로 사들인 아내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던 아버지가 야속하다는 생각을 어머니는 했을 것이다. 어렸던 나는 약간의 충격이었지만 대체로 무덤덤했고 패대기쳐진 그림책들이 아팠다. 그 나이에 어머니의 심중까지 헤아릴 만큼 속깊진 못했으니 울지도 않았고 엄마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냥 곤두박질친 그림책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주워서 마루로 올렸던 기억만 난다.
어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에야 전집을 다시 사는 모험을 했다. 그땐 이미 좀더 큰집으로 늘려서 이사를 했고 아버지가 생업으로 하신 일도 자리를 잡아 나름 집안 사정 상 전성기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아버지는 덜 완고해져서 전집 때문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단 세로줄의 하드커버, 무겁고 두꺼운 한국중단편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당시 책 속의 이야기들은 놀라운 세계였고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묵직한 전집 책들에 묻혀 은밀하게 성숙해가고 있었던 나는 날마다 비밀 하나씩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단 하나 있었던 동네서점을 기웃거린 것도 이런 중고등학생 때였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이었지만 그때 직접 눈으로 보고 골라서 샀던 몇 권의 책, 특히 '예언자'와 '어린왕자'의 의미를 잊을 수 있을까.
첫 아이를 낳고도 인터넷서점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첫 아이가 생후 2개월이 되었을 때 회사에서 알았던 동생이 어느 날 찾아왔다. 뜻밖에도 **출판사에 다니게 되었다며 애니메이션 동화전집을 권했다. 한눈에 봐도 그림도 조잡한 그 전집은 상당한 금액이었다. 당시는 단행본 그림책을 적극적으로 만나기 전이었던 나는 아이에게 일찍부터 이런 걸 사서 보여줘야 된다고 강권하는 그이를 뿌리칠 수 없었다. 생후 6개월 쯤인가는 모 유명 출판사의 창작동화전집을 샀다. 이건 자발적 의사였는데 그 그림책은 그나마 그림과 내용이 괜찮았고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몇 년 동안 그 책을 아주 좋아했다. 얼마나 여러번 읽었던지 어떤 건 책장이 다 떨어져 너덜거렸다. 그 후 또 한 번,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창작동화전집을 샀고 그게 마지막이다. 전집이든, 오프라인에서든.
첫 아이가 대여섯살 즈음 우연한 기회에 알라딘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인터넷서점으로 한눈 팔지 않았던 건 모험심이 부족하고 귀차니즘이 자주 발동하는 내 성정 탓일 뿐, 당시만 해도 알라딘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을 리 없다. 나는 그즈음 대학 평교원에서 그림책 공부와 독서지도사 공부를 시작했고 한 달에 2-30만원씩 멋진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사들였다. 내가 먼저 보고 느껴야 된다고 여겨서다. 한 박스씩 집에 도착하면 무거운 박스를 뜯어서 책을 꺼내며 너무나 기뻤다. 어린이책 리뷰로 이곳에 글을 쓰면서 둥지가 마련되고 애정은 그때부터 시나브로 생겼다. 존 버닝햄, 모리스 샌닥, 그 외에도 다 부를 수 없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름들은 내게도 아이에게도 완벽한 신세계였다. 어느 해 겨울, 몇 년만에 눈 내린 베란다 밖 하얀 풍경을 바라보며 뜨듯한 거실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함께 그림책을 보던 시간이 기억속에 빛난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수많은 단행본들을 샀고 아이는 즐거운 책읽기의 세상에서 놀았다. 할인가로 집에 앉아서 많은 도서를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서점이 나로선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책을 한꺼번에 많이 들면 무게가 꽤 된다. 한 손을 아이에게 붙들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며 버스를 타고 다니기엔 역부족이다. 간혹 나들이 삼아 어린이책서점을 데리고 가서 한두 권 정도 직접 고르게 한 경우가 있었는데 아이도 무척 즐거워했다. 하지만 지금도 도서 구매 방식은 마찬가지다. 오프 서점에서 책표지나 활자 등 책을 훑어보고는 온라인서점에서 사는 일이 많다. 도서정가제를 한다고 해도 나는 온라인 구매를 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도서정가제는 누구를 위한 일일까. 입장에 따라 밥그릇 싸움이 되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쪽은 어느 쪽일지 내겐 불확실하다. 여러 가지 이견들을 두루 읽어본 건 아니고, 그저 환기된 기억의 한 귀퉁이가 나쁘지 않다. 책이 좋고, 책 읽기가 좋고, 책 사는 일이 즐거운 한 사람으로서.
덧)
어린 딸내미 그림책을 마당에 집어던졌던 아버지, 단 한 번도 표나게 기억되는 선물 하나 사 주신 적이 없는 아버지가
나이 들어서 내게 주신 선물이 하나 있다. 바로바로 책이다!! 그것도 무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2 !!
한 5,6년 된 것 같다. 적잖이 놀라운 순간이었다.
"*경아, 이거 지나가다가 육교 위에서 팔아서 샀어. 아주 싸게 샀어. 너 읽어."
늙고 가난하지만 속깊고 성실하고 꼼꼼하고 건강하신 아버지가 내게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건넨 책 두 권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것처럼, 꿈결처럼 들렸던 목소리. 코앞에서 들었는데도... 육교에서 싸게 사셨다니 아마 해적판이었던 거지.
아버지도 책을 손수 사며 즐겁지 않으셨을까. 그것도 무려 두 권에 천원이나 줬으니.^^
어제는 장바구니랑 보관함 정리 좀 했다.
오늘 도착한 <레 미제라블> 5권, 펭귄클래식. 중학생 작은딸도 좋아라한다.
내가 그랬듯 다이제스트를 읽다가 너무 재미있다며 완역본을 사달라고 해서 장바구니에 있던 것을 당장 어제 구매했다.
방학 내내 여태 책 한 권 제대로 안 읽고 컴 앞에 앉아 있더니 개학 다 되어가니까... 에효, 진작에 권할 걸 그랬다.
1부 팡띤느/1편 의인/ 1. 미리엘 씨
첫 문장
1815년, 샤를르-프랑수와-비앵브뉘-미리엘 씨는 디뉴 지역 주교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장편소설 <프라하의 묘지> 1,2 , 열린책들, 도 함께 구매했다.
무지노트가 권마다 하나 딸려있네. 열린책들 특유의 느낌, 표지도 근사하다.
첫 문장이 상당히 길다. 그 뒤로도 계속 거의 한 단락이 한 문장이다.
19세기 말 당시 신문기사체를 본 따 일부러 이런 문체를 썼다고 하는 움베르토 에코.
읽기에 난감하긴 하다. 내가 본 가장 긴 첫 문장이 될 것 같다.^^
어느 행인이 있어 1897년 3월의 그 우중충한 아침나절에 위험을 각오하고 모베르 광장, 또는 무뢰한들이 라 모브라고 부르는
곳(중세에는 비쿠스 스트라미네우스, 즉 푸아르 거리의 파리 대학 학예 학부 학생들이 자주 모이던 대학 생활의 중심이었고,
나중에는 에티엔 돌레 같은 자유사상의 사도들이 사형을 당했던 곳)을 건너갔다면, 그 행인은 악취 나는 골목들이 얼키설키한 동네의 한복판에서,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 사업 때 드물게 허물리지 않은 장소 한 곳을 마주하게 되었을 터인즉, 이 동네는 비에브르 천을 경계로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오래전에 복개되어 파리의 내장 속에 갇혀 버린 비에브르 천은 이 동네에서 다시 빠져나와 열에 들 뜬 채 신음과 독소를 뿜어내면서 센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더라.